‘마약 구속수사’ 검찰 딜레마, 왜?

몸통 남기고 가지만 싹둑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윤석열정부가 꾸린 마약범죄특별수사본부가 마약사범 잡기에 사활을 걸었다. 초범이라도 상습적으로 투약하거나 혐의를 부인하면 구속수사하는 방안을 밀어붙일 계획이다. 수사기관 외에도 관세청과 국방부, 국가정보원, 해양경찰이 합류해 인력도 대거 늘었다. 그러나 ‘플리바게닝’이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검찰은 수사 과정서 협상의 일종인 ‘플리바게닝’을 피의자에게 제안하기도 한다. 이미 검거한 마약사범을 통해 상위 공급책을 잡으려 활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마약범죄특별수사본부(특수본)의 ‘마약 혐의 피의자 구속수사’ 의지가 시작부터 삐걱거릴 수 있다는 지적이다. 실제 검찰 안팎서도 ‘플리바게닝 제도화’를 두고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마약과의 전쟁
강공 드라이브

윤석열정부는 지난 4월 특수본을 꾸렸다. 지난해 선포한 ‘마약과의 전쟁’을 이어가겠다는 의지로 해석된다. 특수본은 지난 14일 대검찰청서 2차 회의를 열고 마약범의 경우 초범이라도 상습적으로 투약하고 혐의를 부인하거나 마약류의 유통 경로를 감추면 구속수사 또는 정식 재판에 넘기는 등의 방안을 정했다고 밝혔다.

특수본은 지난 1월부터 4월까지 적발된 마약사범이 총 5587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4307명) 대비 29.7% 늘었다는 통계를 공개했다. 이 중 36.4%가 10대와 20대였다. 특수본은 “마약범죄 근절을 위해선 공급 차단과 수요 억제가 함께 이뤄져야 하는데 투약사범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이 약화되고 있다”고 밝혔다.

특수본이 최근 3년간 마약 투약 및 단순 소지 사범 146명의 형량을 분석한 결과 2년 이상 징역형을 선고받은 경우는 전체의 4.1%에 불과했다. 또 전체의 51%는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8종 이상의 마약류를 투약한 혐의를 받는 배우 유아인(본명 엄홍식·37)의 경우 법원서 “동종 범행 전력이 없다”는 이유로 지난달 24일 구속영장이 기각됐다.


검찰은 투약사범에 대해 중형을 구형하고 적극적으로 항소할 방침이다. 또 투약사범에게 집행유예형이 선고될 경우 치료명령과 보호관찰을 부과하도록 재판부에 의견서를 제출하겠다고 밝혔다.

특수본에는 국방부와 국정원, 해경 등 직원 총 134명이 추가 합류해 수사 인력이 840명에서 974명으로 늘었다. 지역별 수사실무협의체에도 군검찰단과 군사경찰, 해병대가 추가됐다. 박재억 특수본 공동본부장(대검 마약·조직범죄부장)은 “마약 척결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앞으로 기관 간 긴밀한 협력이 이뤄지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고구마 줄기 캐듯’ 마약 수사 스톱?
현행법 없는 ‘플리바게닝’ 없어지나

이외에도 특수본은 대법원 양형위원회에 마약류관리법 등을 위반한 피고인에 대한 양형을 강화하는 안건의 상정을 촉구해왔다. 사법부가 마약범죄에 관해 관대한 판단을 반복해왔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특수본도 “마약범죄는 해악에도 구속영장이 기각되거나 집행유예의 경미한 형이 선고돼 재범에 이르는 등 마약 투약·유통이 근절되지 못하는 악순환 반복되고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실제 대법원이 발간한 사법연감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마약류관리법 위반 혐의에 관한 1심 판결 5438건 가운데 실형 선고는 2624건(48.1%)에 그쳤다. 실형 선고 비율은 2020년 53.7%, 2021년 50.6%와 비교해도 감소 추세가 뚜렷하다. 반면 집행유예 비율은 같은 기간 36.3%→38.1%→39.8%로 증가 추이를 보이고 있다.

2011년 개정된 마약범죄 양형기준은 2015년과 2020년 두 차례 수정됐으나 대량범에 대한 형량 기준이 일부 강화되기만 했다. 투약이나 소지 등에 대해서는 10여년 전 양형기준을 적용해온 셈이다. 그 사이 마약범죄는 단순 투약 등에서 벗어나 다양한 강력범죄와 결합해 우리 사회 곳곳에 침투했다.

김영란 전 대법원 양형위원장도 이 같은 범죄 환경 변화를 의식한 듯 지난해 대법원 국정감사에서 “마약범죄 양형기준을 전반적으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정부의 강력한 의지 때문인지 양형위는 마약범죄의 양형기준을 다듬고, 양형기준이 없었던 스토킹 범죄와 동물 학대 범죄는 새롭게 기준을 가다듬기로 했다.


지난 13일 대법원에 따르면 양형위는 전날 오후 제125차 전체회의를 열고 향후 2년간 추진할 업무를 논의했다. 양형위는 기술 유출 범죄의 양형기준을 강화해달라는 관계기관 요구가 많은 만큼 우선으로 2024년 4월까지 양형기준을 수정할 예정이다.

“혐의 확실시
초범도 영장”

마약범죄의 양형기준은 체계화한다. 양형위는 “마약범죄에 관한 국민적 관심이 커지면서 양형기준 수정에 대한 사회 및 실무 요구가 모두 높다”며 “유형 분류와 권고 형량 범위 변경 등을 다각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기존에 양형기준이 없던 범죄는 사회적 변화를 반영해 기준을 신설한다.

대법원이 특수본의 의견을 반영해 내년까지 양형기준을 강화하기로 했으나 해결 과제는 산적하다. 검찰 안팎에서는 초범이라도 구속수사를 하게 되면 마약 수사 과정서 상위 공급책 검거에 어려움이 뒤따를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대검찰청 관계자는 “지금껏 수사기관이 마약 수사를 하면서 ‘플리바게닝’을 활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부러 상황을 지켜보고 그림이 그려지면 잡는 전략적 수사가 필요한데 무조건적인 구속수사 방침은 상황에 따라 달리 적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플리바게닝은 피고인이 유죄를 인정하거나 공범에 대해 증언하는 조건으로 검찰이 구형량을 낮춰주거나 불기소 처분하는 것을 일컫는다. 검찰이 일부 부패사건을 수사할 때마다 자주 언급되는 용어기도 하다.

검찰은 지난 10년간 플리바게닝 제도화를 추진했지만, 오·남용을 우려하는 목소리에 막혀 추진하지 못했다. 추적이 어렵고, 증거 확보가 어려운 범죄가 늘고 있어 플리바게닝 공식 제도화 논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는 여전하다.

검찰은 최근 이원석 총장의 “플리바게닝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는 발언 이후 4년 만에 열린 형사법 아카데미서 플리바게닝을 주제로 다루며 관련 논의를 시작한 것으로 파악됐다.

검찰은 플리바게닝 도입 이유로 ‘형사사법의 경제성과 효율성’을 내세운다. 명백한 물증을 확보하기 어려운 사건에 대해선 범죄 가담자에게 사법 협조를 끌어낼 유인을 제공해 수사 효율성을 추구하자는 것이다.

양형 기준
엎어도 문제

프랑스가 대표적이다. ‘너무 느린 사법제도’를 향한 불만을 불식하기 위한 제도의 일환으로 유죄협상제와 사법 협조자 형벌감면제도를 도입했다. 프랑스식 유죄협상제는 상대적으로 죄가 가벼운 사건서 피의자가 자백하면 검사가 감경된 형을 제안하고, 법원 추인을 통해 재판 없이 사건을 종결할 수 있다.

공범 검거에 기여한 가담자에게 형을 감면해줄 수 있도록 한 프랑스식 사법 협조자 형벌감면제도는 도입 당시 테러범죄 등에 국한됐다가 법 개정을 통해 일반범죄로 확대돼 활용되고 있다. 플리바게닝은 미국, 일본 등에서도 활용되고 있다.


법조계에서는 이미 검찰이 플리바게닝을 활용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수사 협조자에게 구형량을 낮춰주거나, 재판 진행 과정서 최대한 피고인 측의 요구를 반영해주는 식이다. 플리바게닝은 유독 거물급 정치인이 연루된 부패사건서 활용됐다는 지적이 거셌다.

대장동 개발 비리 의혹 수사와 ‘이정근 녹취록’서 수사 단서가 잡힌 더불어민주당 2021년 전당대회 돈봉투 의혹 수사가 대표적이다. 유동규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기획본부장과 남욱 변호사 등 대장동 일당은 재판에 넘겨진 후 1년 가까이 침묵하다 돌연 태도를 바꿔 이 대표에게 불리한 진술을 쏟아내면서 플리바게닝 적용 의혹이 제기됐다.

사업가로부터 10억원의 금품을 수수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이정근 전 민주당 사무부총장은 1심서 검찰이 구형한 징역 3년보다 무거운 징역 4년6개월을 선고받으면서 플리바게닝 의혹이 일었다.

다크웹서 일어나는 마약·성범죄 사건은 추적이 어려워 조직원을 검거해도 ‘머리’를 잡으려면 전략적 수사가 필요하다.

상위책 잡으려 ‘형량 거래’ 걸림돌
“바뀐 방침 무조건? 상황에 맞게 적용”

중앙지검 한 검사는 <일요시사>와의 전화 통화서 “텔레그램 마약·성범죄 수사에는 이미 플리바게닝이 활용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라며 “혐의를 입증할 확실한 정황과 증거를 확보해도 수사 종결 이전까지는 수사에 협조하는 피의자를 통해 사실관계를 확인 및 파악을 하는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이는 곧 특수본의 ‘마약 혐의 피의자 구속 수사’ 방침이 모든 피의자에게 적용되긴 힘들다는 분석으로 해석된다.

부장검사 출신 한 변호사도 “혐의가 확실하다고 해도 초범부터 구속해버리면 윗선을 파악하기 힘들다”며 “해당 원칙을 모든 혐의에 적용하면 ‘제2의 범죄’를 막기 어려울 것”이라며 “마약과 텔레그램 성범죄가 그렇다. ‘초범이라도 구속수사’가 모든 피의자에게 적용되지는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검찰은 플리바게닝 활용 방안 외에도 ‘중요 참고인 출석 의무 제도’를 추진하려 한 바 있다. 2011년 형사소송법 개정 당시 법무부는 ‘내부증언자 소추면제 제도’를 마련했다. 본인이 죄를 인정하면 기소나 형을 감면하는 미국식 플리바게닝과 크게 다르진 않지만 조직·마약·뇌물 범죄서 타인 범죄 규명에 도움을 주면 기소를 면해주거나 형을 감면해주는 내용이다.

이에 법원과 학계는 수사권과 기소권을 가진 검찰이 범죄자 처벌까지 결정하는 것이라며 반발했다. ‘범죄자와의 타협’이라는 점도 국민 법 감정에 배치되면서 이 개정안은 여론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7년 이상 징역형에 해당하는 중범죄의 수사 관련 내용을 알고 있는 참고인이 검사의 출석 요구에 불응할 경우 영장을 통해 강제로 구인할 수 있도록 하는 ‘중요참고인 출석 의무제도’가 이때 언급됐던 법안이다.

수년간
군불만

결국 개정안은 국무회의까지 통과했지만 소관 상임위인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서 정식 논의조차 되지 않은 채 18대 국회 임기만료로 폐기됐다.

그러나 대검 중앙수사부 폐지 이후 기업비리 수사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검찰은 비공식적으로 이 제도의 도입을 지금까지 언급하고 있다. 수사기법서 과거에 비해 검찰의 손발이 묶인 반면, 피의자들은 갈수록 지능화하는 게 큰 이유다. 

<hounder@ilyosisa.co.kr>

 



배너

관련기사

16건의 관련기사 더보기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