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회원 2만명 ‘K’ 마약 채팅방 추적

  • 김성민 기자 smk1@ilyosisa.co.kr
  • 등록 2024.09.09 10:38:37
  • 호수 1496호
  • 댓글 1개

무서운 조직력 ‘코리안 카르텔’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 = 회원 수 2만여명을 보유한 텔레그램 마약 유통 채팅방이 활개치고 있다. 마약 구매, 운반책 모집 등에 이용된 이곳은 국내 마약 산업의 심각성을 보여준다. 지난 5월 <일요시사>가 최초 보도한 보이스피싱 총책 ‘김미영 팀장’ 탈옥 사건의 제보자 A씨는 “필리핀 범죄자들이 한국으로 마약을 수출하는 데 이용하는 곳”이라며 ‘K’ 마약 채팅방을 소개했다. 

K방은 마약 판매를 위한 광고 행위를 넘어 ‘마약 카르텔’의 조직력을 자랑했다. 지난 8월 익명의 K방 운영자는 한 20대 남성의 주민등록증 사진과 신상정보, 부모의 연락처를 공개했다. 마약 운반 중 도주하는 등의 불이익을 안긴 조직원을 찾아내 보복하기 위한 공개수배라고 볼 수 있다. 최근엔 ‘K방을 사칭하면 이렇게 된다’는 글과 함께 안면이 심하게 다친 남성의 사진을 올리기도 했다. 

독이 된
보안성

보안성을 강조하는 텔레그램은 각국 수사기관을 비롯한 공권력이 미치지 않는 치외법권 지대다. 지난 2013년 8월 출시된 이후 검·경이 성착취물 유포, 마약·자금 세탁 등의 범죄 수사 과정서 여러 차례 협조를 요청하고, 국제공조를 활용한 압수수색을 시도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지난 2020년 ‘N번방 사건’ 수사 때도 경찰은 신원 확인 등을 위해 텔레그램에 지속적인 수사 협조를 요청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어떤 추적에도 뚫리지 않는 보안성과 암호화를 앞세운 텔레그램이 온라인 마약 산업의 확대를 부추기는 모양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지난 2022년 12월 설립된 K방은 텔레그램 마약 유통 채팅방 중 구독자가 1~3만명으로 가장 많다. 하루에도 4000명 이상이 들여다보는 이곳은 필로폰, 대마초, 케타민, 엑스터시 등 사실상 모든 종류의 마약을 판매하고 있다. 상세한 가격 표기는 물론, 투약 후기까지 올라온다.

단순 판매 광고를 넘어 마약 운반책을 뜻하는 이른바 ‘지게꾼’도 모집하는데, “평생 가족처럼 일할 지게꾼 모집. 월 1000만원 이상 수익을 보장한다”고 유혹한다. 직업이 불분명한 청소년이라면 쉽게 관심 갈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지게꾼은 마약 판매자가 지정한 장소에 마약을 운반하고 구매자가 수거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이다. K방 운영진은 잠복 경찰이 지원할 가능성을 대비해 지게꾼 지원자에게 신분증 사진과 부모형제의 연락처 등 신상정보를 요구한다. 지게꾼이 마약을 운반하는 과정서 직접 투약하거나, 훔치고 잠적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K방에서 지게꾼으로 일하다가 달아난 것으로 추정되는 20대 남성 B씨가 공개 수배된 사례도 있다. 지난달 초 K방에는 B씨의 실명과 이름, 부모의 연락처와 함께 “인천에 사는 OOO, 천안으로 도주”라는 게시글이 올라왔다. 

치외법권 텔레그램 악용 지능범죄 
배신자 색출···지명수배 내리기도

취재진이 “마약 채팅방에 B씨의 신분증 사진과 연락처, 부모의 연락처까지 올라왔다. 불상사를 당할 수 있지 않겠냐”고 신고했지만, 경찰은 “영문도 모른 채 B씨에게 연락해 신변을 보호해줄 수는 없다”고 답했다.

K방에서 지게꾼으로 일하다 경찰에 붙잡힌 사례도 있다. 필리핀 현지 구치소서 ‘김미영 팀장’ 박모씨와 탈옥한 송씨의 필로폰 판매도 K방에서 이뤄졌다. 지난 2022년 1월25일 송씨가 K방을 통해 고용한 운반책 김모씨는 당시 수원시 장안구 영화동의 한 모텔서 필로폰을 소지하다가 붙잡혔다.


이날 오전 8시경 수원중부경찰서는 마약류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30대 남성 김씨를 긴급체포했다. ‘한 남성이 모텔서 마약을 소지하고 있다’는 신고를 받아 현장으로 출동한 경찰은 모텔서 필로폰이 포장된 비닐백 30개를 발견하고 이를 압수 조치했다.

또 김씨를 상대로 진행한 마약 간이 검사서 양성반응을 확인했다.

경찰 조사에서 김씨는 투약 혐의를 인정하면서도, 텔레그램으로 필로폰 거래를 지시한 ‘orjinal8282’가 송씨라는 사실을 숨기려고 거짓으로 진술했다.

경찰에 따르면, orjinal8282이라는 아이디를 가진 자가 김씨에게 “수원으로 가서 모텔을 잡고 기다려라”며 “사탕(엑스터시) 50, 어름(필로폰) 50 좀 있다가 드랍해서 갖고 있어”라고 지시했다.

그러면서 송씨와 비쿠탄 교도소서 함께 지냈던 제보자 A씨는 “orjinal8282는 송씨의 아이디”라며 “김씨가 붙잡혔다는 소식을 들었던 채팅방 구독자들은 송씨가 김씨의 고용주(상선)이었다고 적었다”며 텔레그램 채팅방 사진을 건넸다.

김씨가 체포됐다는 점, 송씨의 지시를 받아 움직였다는 사실, 김씨의 사진과 신원은 채팅방에 모두 공개됐다. 이를 통해 송씨가 김씨의 상선이었다는 사실은 마약 업계에 퍼졌다. A씨는 <일요시사>와 인터뷰서 “어떤 연예인이 누구한테 마약을 구매했는지도 금방 소문이 난다”고 말했다.

범죄자
놀이터

결과적으로 K 채팅방은 마약의 모든 유통구조를 총괄하는 셈이다. 2년 가까이 수사망을 피해 건재함을 유지하기 때문인지 K방을 모방한 채팅방도 생겨나고 있다. 다수의 마약 유통 채팅방들은 서로 ‘진짜 K방’이라며 광고했다.

그러다 지난달 24일 K방엔 ‘K 사칭범 사기꾼 검거 완료. 이상한 헛소리하면 죽여버린다’는 글과 함께 안면에 심각한 폭행을 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남성의 사진이 올라왔다. 해당 남성의 옆에는 신원 불상의 K방 관계자가 피해 남성의 얼굴을 손으로 받치고 있었다.

다음 날 게시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며, 피해 남성을 폭행한 이유를 묻자 아무런 답변도 받을 수 없었다. 지난달 19일 필리핀서 국내로 50억원 상당의 마약을 밀반입해 판매하다 붙잡힌 총책 등 54명도 K방을 포함한 텔레그램 채널을 악용했다.

대전경찰청 마약범죄수사대는 마약류 관리법 위반 혐의, 범죄단체 조직, 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 등을 받는 총책 C씨 등 조직 간부 9명을 구속하고 나머지 일당 45명을 불구속 송치했다고 이날 밝혔다.

C씨는 지난 2020년부터 필리핀서 암호와 메신저 텔레그램을 통해 마약 판매 채널을 만들고 8kg에 달하는 마약을 국내로 밀반입해 약 50억원 상당에 판매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 중 필로폰은 무려 6㎏ 상당에 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필로폰 1회 투약량이 0.03g인 점을 고려하면 C씨가 판매한 필로폰은 20만명이 동시에 투약할 수 있는 양이다. 특히 조직원들은 지난 2022년 1월부터 지난달까지 범행에 가담한 중간 판매책과 유통책 등을 담당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C씨는 자금관리, 광고팀, 상담팀, 마약 던지기 운반책 등 체계적인 조직을 만들고 국내에 있는 판매 조직원들을 관리하기 위해 ‘하선 기본 수칙’을 정해 놓기도 했다. 이 수칙 중에는 상선 유무 및 관계 등을 일절 언급하지 않도록 하거나 SNS 광고를 꾸준히 하지 않을 경우, 추방하고 일정 매출이 나올 수 있도록 기준치를 정해 독려하기도 했다.

학생도
손쉽게

경찰은 텔레그램을 이용한 마약 거래를 차단하기 위해 수사를 벌이던 중 지난 2022년 1월 마약 거래에 이용된 자금 흐름 분석 등을 통해 C씨를 특정했다. 필리핀서 은밀하게 숨어 있던 C씨를 검거하기 위해 경찰은 올해 초 경찰청서 마약공조수사계를 신설하고 필리핀 내 소재 단서를 종합, 필리핀 당국과 긴밀히 공조했다.

필리핀 당국에 집중 추적을 의뢰했으며 지난 6월 ‘인터폴 국외도피사범 검거 작전회의’ 참여를 계기로 한국과 필리핀 양국 사이 실무 회담을 진행했다. 검거 계획 수립 후 노력한 끝에 필리핀 법 집행기관과 코리안 데스크가 C씨를 검거했으며 주필리핀 한국대사관을 통해 검거 2주 후인 지난달 2일 C씨를 송환했다.

경찰은 범죄수익금 약 20억원에 관한 기소 전 추징을 실시했고 공범 D씨를 추적 중이며 추가적인 범행에 관해서도 확인하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오는 11월까지 4개월 동안 마약류 범죄를 집중 단속하고 있으며 인터넷 마약류 및 조직적 유통 사범 등에 대해서도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며 “마약류 범죄는 투약자 개인 몸과 정신을 황폐하게 할 뿐 아니라 2차 범죄로 사회 안전까지 위협하는 중대 범죄에 해당해 목격 시 적극적으로 경찰에 신고해 달라”고 말했다.

최근 검·경은 마약과 성범죄 등의 온상인 텔레그램을 본격적으로 수사에 돌입했다. 지난달 28일 프랑스 정부는 텔레그램 창업자 겸 CEO인 파벨 두로프를 온라인 성범죄, 마약 유통 등 각종 범죄를 방조 및 공모한 혐의로 예비 기소한 바 있다.

보안성을 앞세워 수사에 비협조적인 텔레그램에 수사 기관들도 강력히 대응하기 시작한 것. 

지난 2일 한국 경찰도 텔레그램 법인에 관해 딥페이크 성범죄 방조 혐의를 적용해 입건 전 조사(내사)에 착수했다. 일명 ‘마약 동아리 사건’을 수사한 검찰도 마약 범죄와 관련된 텔레그램 단체채팅방 회원들을 겨냥한 수사 확대에 나섰다.

유통·광고·모집 한 방에 
필리핀 한인 범죄의 메카

서울남부지방검찰청은 대검찰청과 공조해 카이스트 출신의 마약 동아리 회장 염모씨가 이용한 채팅방 운영자를 추적 중이다. 운영자뿐 아니라 다수의 회원도 수사망에 걸릴 수 있다는 의미다.

검찰은 인공지능(AI)이 탑재된 내부 시스템을 통해 이런 채팅방을 다수 파악했다. 이 가운데 최대 규모이자 이번 마약 동아리 사건에 등장한 채팅방을 겨누고 있다. 수도권 13곳 대학 출신 14명이 적발된 것을 계기로 수사 확대를 통해 전국적으로 퍼진 마약사범들을 일망타진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이 과정서 검찰은 마약 수사 대비 방법을 알려주는 텔레그램 채널에 대학생 등 약 9000명이 가입한 것을 확인했다. 텔레그램 채널 운영자에 대해 대검찰청 인터넷 마약 범죄 모니터링 시스템 등을 통해 대검과 공조해 추적 수사 중이다. 

피의자들은 텔레그램 채널에 가입해 ‘휴대전화 저장 자료 영구 삭제 등 포렌식 대비, 모발 탈·염색, 사설기관 모발검사, 피의자 신문조사 모의 답변’ 등 채널서 파악한 대비 방법을 범죄에 활용했다. 검찰은 피의자들의 범죄집단 조직 및 활동 혐의에 대해서도 철저히 수사할 예정이다.

검찰은 마약 범죄를 적발하는 등 시스템의 효과도 봤다. 앞서 마약상들의 거래 수법이 고도로 지능화되고 검경 수사권 조정 국면을 맞아 시스템을 개발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 올해 초 4억원의 예산을 투입해 AI를 탑재하며 시스템 강화에 나섰다.

이를 통해 텔레그램 채널을 파악했고, ‘마약 동아리 사건’ 속 피고인들의 가입 채널과 같은 곳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동아리 마약 사건의 관계자 14명 외의 추가 기소 가능성도 제기됐다. 앞서 서울남부지검은 동아리를 만든 염씨 등을 포함한 6명을 마약류관리법 위반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긴 상황이다. 단순 마약 투약 혐의를 받는 대학생 8명은 조건부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다.

이처럼 과거 연락 수단에 그쳤던 텔레그램은 수년 전부터 마약 판매업자들의 광고 플랫폼이자 밀수부터 구매까지 거래의 모든 과정이 이뤄지는 마약 유통 플랫폼으로 활용되고 있다.

당황하는
수사 당국

검찰 관계자는 “마약 수사의 목표는 유통망 차단인데, 마약 유통책이나 딜러들은 텔레그램 네트워크 뒤에 숨어 있어 공급 라인을 차단하는 것이 어려운 실정”이라며 “수백개의 마약 채팅방서 마약 광고를 하거나 구인·구직도 이뤄지지만, 수사 과정서 한계를 느끼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smk1@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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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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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페이스북에 사과 입장을 밝혔다. 국민의힘 원내 지도부도 기자회견을 열고 고개를 숙였다. 사과는 짧았지만,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비난은 길었다. 사과 의견을 통해 확인되는 국면 전환 노림수는 ‘한동훈을 제외한 빅텐트’인 걸까? 국민의힘 공보실은 지난 2일 오후 10시54분 출입기자들에게 지난 3일 지도부 일정을 공지했다. 공보실에 따르면, 지도부의 일정은 ‘통상 일정’이었다.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의미다. 지난 3일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1주년이었다. 통상의 의미는? 지도부의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것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의 비상계엄 관련 공개 사과 및 기자회견 일정이 없었단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장 대표는 지난 3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사과 의견을 밝혔다. 장 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계엄이었다”는 등 “정당화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소지가 있는 주장부터 제시했다. 윤 전 대통령 파면에 대해서도 “한국 정치의 연속된 비극을 낳았고, 국민과 당원들께 실망과 혼란을 드렸다”는 등 ‘탄핵 반대’ 의견을 유지했다. 장 대표에 따르면, 국민의힘의 잘못은 하나로 뭉쳐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는 부분이었다. 자신에 대해서도 “당 대표로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강조했다. “장 대표가 사과하지 않을 것”이란 예상은 같은 날 오전 4시50분경 이정재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국민의힘 추경호 의원의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확실시됐다. 장 대표는 페이스북 게시글에서도 “추 의원 구속영장 기각은 어둠의 1년이 지나고 두터운 장막이 걷히고, 새로운 희망의 길이 열리는 신호탄”이라면서 대정부 투쟁에 의미를 부여했다. 장 대표는 “이재명정권의 대한민국 해체 시도를 국민과 함께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대표가 사과 불가는 지난달 28일 대구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장외집회에서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었다. 당시 그는 “비상계엄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우리가 흩어지고 분열한 결과, 이재명정권이 탄생했단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이재명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연설 대부분을 채웠다. 5일 간격으로 같은 얘기를 반복한 것이었다. 당시 장 대표가 주장한 민주당에 대한 비난의 핵심 내용은 ▲의회 폭거·국정 방해 ▲무모한 적폐 몰이에 따른 공무원 사찰 위협 ▲폭거로 인한 민생 파탄·국가 시스템 붕괴 ▲내란 몰이 등이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국민의힘의 비상계엄 관련 사과는 ▲송언석 원내대표 ▲유상범·김은혜 원내부대표 ▲최수진·최은석 원내대변인 등 원내 지도부 차원에서 나왔다. 송 원내대표 등은 지난 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께 큰 충격을 드린 비상계엄 발생을 막지 못한 데 대해 국민의힘 국회의원 모두는 무거운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며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군인·공직자·의료인·자영업자 등 비상계엄 선포 피해자들에게 “깊은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고개 숙였다. 하지만 이후의 메시지는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 등 장 대표의 주장과 크게 차이가 없는 내용이었다. 송 원내대표는 “국민의힘 의원들은 패배의 아픔을 딛고 분열과 혼란의 과거를 넘어서 다시 거듭나겠다”며 “소수당이지만 처절하게 다수 여당과 정권에 맞서 싸우겠다”고 강조했다. 이전까지 국민의힘에서 장 대표에게 공개적으로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정치인은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용태·김재섭·권영진·엄태영·이성권·조은희 의원 등이었다. 국민의힘 양향자 최고위원은 지난달 29일 대전에서 진행된 장외집회 중 “국민의힘은 불법 계엄을 방치했으니,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일부 지지자들의 강한 항의를 받았다. 김재섭 의원은 지난달 28일 YTN 라디오 <더 인터뷰>에 출연해 “당 지도부의 사과가 없으면 제 나름의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며 “같이 메시지를 낼 국민의힘 의원들이 약 20명은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연판장을 돌리거나 기자회견을 할 수도 있다”는 압박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었다. 오 시장도 같은 날 채널A <김진의 돌직구 쇼>에 출연해 “중도층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도 당 차원의 사과가 필요하다”며 “공당이라면 반성문을 쓰는 게 도리”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들은 당과 무관하게 대국민 사과를 했다. 오 시장은 지난 3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의힘 소속 중진 정치인이자, 서울시민의 일상을 책임지는 시장으로서 그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그날의 충격과 실망을 기억하는 모든 국민께 거듭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국민의힘 의원 25명은 지난 3일 국회에서 “비상계엄 선포 당시 집권여당의 일원으로서 비상계엄을 미리 막지 못하고 국민께 커다란 고통과 혼란을 드린 점에 대해 거듭 국민 앞에 고개 숙여 사죄드린다”면서 ▲헌법재판소의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 존중 ▲윤 전 대통령과의 정치적 단절 ▲국민의힘 체질 개선·재창당 수준의 혁신 등을 약속했다. 이어지는 각자 플레이 장 대표에게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후 자체적으로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한 국민의힘 정치인들은 대체로 수도권에 기반을 둔 소장파다. 이들 중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정당으로 자리매김하면 가장 큰 손해를 볼 정치인으로는 오 시장과 김재섭·김용태 의원이 거론된다. 오 시장은 높은 개인 인기를 바탕으로 민주당의 서울시장 탈환 공세에 맞서고 있다. 김재섭 의원의 지역구 서울 도봉갑은 원래 민주당 텃밭이었다. 김 의원은 지난해 총선 당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1094표 앞서 어렵게 이겼다. 지난해 12월7일 국민의힘의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 표결 집단 이탈에 동참했을 때도 지역구에서 규탄 집회가 개최되는 등 홍역을 치렀다. 김용태 의원도 경기 가평·포천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박윤국 한국도자재단 이사장에 2774표 앞서 어렵게 금배지를 다는 데 성공했다. 국민의힘에 대해선 “강경 보수화가 진행된다”는 지적이 각계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 우려는 장 대표가 지난달 16일 유튜브 채널 ‘이영풍 TV’에 출연해 ▲자유통일당 ▲우리공화당 ▲자유민주당 ▲자유와혁신 등 원외 강경 보수 4당과의 지방선거 연대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깊어졌다. 장 대표는 지난달 28일 개혁신당과의 연대 가능성에 대해선 “지금은 연대를 논의할 때가 아니”라면서 선을 그었다. 최근 국민의힘에선 “한동훈 전 대표를 축출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만한 밑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다. 국민의힘 여상원 윤리위원장은 지난달 17일 사의를 표명했다. 여 위원장은 “당에서 ‘물러나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며 “굳이 능욕당하면서 자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돼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답했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윤리위원회가 ‘계파 갈등 조장’을 이유로 윤리위에 넘겨진 국민의힘 김종혁 전 최고위원에 대해 주의 조치만 내린 것 때문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국민의힘 우재준 청년 최고위원은 지난달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원하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고 윤리위원장을 사퇴시키는 게 정당한 일이냐”며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드는 민주당과 뭐가 다르냐”고 정면 비판했다. 이어 국민의힘 당무감사위원회는 지난달 28일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한 조사 절차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당원 게시판 의혹은 “국민의힘 당원 게시판에 올라온 윤 전 대통령 부부 비방글 작성에 한 전 대표 가족이 연루된 게 아니냐”는 의혹이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밝혀 당원에게 알릴 것”이라는 방침을 밝혔던 바 있다. 윤 전 대통령 부부는 정치적으로 몰락해 서울구치소에 갇혔고,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국민의힘이 당원 게시판 의혹을 밝혀낸 후 거둘 수 있는 실익으로는 “한 전 대표를 국민의힘에서 쫓아내고, 친한(친 한동훈)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거론된다. 구 친윤(친 윤석열)계가 거둘 수 있는 이익이다. 한 전 대표에 대해선 보수 성향 유권자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명확하게 나뉜다. 하지만 한 전 대표는 윤 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갈등하면서 비상계엄 해제에 동참했던 이력이 있다. 이 때문에 한 전 대표는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일색이 되는 걸 막는 방파제·상징”이란 분석이 오랫동안 있어왔다. 친한계로 거론되는 국민의힘 의원 중 상당수는 수도권에 지역구를 둔 소장파라는 분석이 나온다. 윤리위원장 쫓아낸 이유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선 “윤 전 대통령이 정치에서 폭력을 동원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몰랐던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정치의 본질은 대화·토론·협상이다. 영국 하원에선 20세기 초까지 의원이 총칼을 이용해 결투·난투를 했다. 물리적 폭력이 아닌 ‘언어폭력’ 선에서 공방을 이어가는 정치 문화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정착됐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전 세계에 줬던 충격은 민주주의가 충분히 성숙했다고 믿었던 대한민국에서 군을 동원해 정적을 제거하려던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는 사과 메시지를 먼저 짧게 발표하면서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은 길게 이어가는 형식의 사과 의견을 밝혔다. 사과엔 ▲직접적인 반성 ▲분명한 잘못 인정 ▲재발 방지 약속 ▲보상 약속 등 4개의 원칙이 제기됐는데 “상대방 비판에 더 중점을 둔 사과는 역설적으로 ‘반성을 하는 게 맞느냐’는 비판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당시 대국민 사과를 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 2016년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후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 전 대통령은 “모든 것이 제 불찰이고, 국민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후속 조치 중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미흡했고, 우려를 덜어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국정을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라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면서 “국민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은 당시 크게 불거졌던 각종 우려를 ‘괴담’으로 규정지었다. 이 때문에 촛불 시위 세력이 제시한 재협상 시한과 맞물린 시점에서 사과가 나온 점을 감안할 때 국면 전환을 위한 명분 쌓기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이미 각종 의혹이 광범위하게 제기돼 근거 자료들까지 제시되는 시점에서 “취임 후 일정 기간 일부 자료들에 대해 최순실씨의 의견을 들은 적은 있지만, 청와대 보좌 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뒀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의 해명은 신뢰를 잃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두 전직 대통령의 사과처럼 자신의 주장을 뒤에 배치한 후 더 큰 비중을 부여하는 형식을 유지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이런 사과 형식은 국면 전환·지지층 결집 목적을 가진 이들이 활용한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고대 로마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있었던 마르쿠스 브루투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설이 꼽힌다. 카이사르 살해를 주동한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 대한 내 사랑은 카이사르를 사랑하는 다른 분보다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한다”고 선언한 후 “로마를 더 사랑해서 카이사르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이어 “나라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죽였다”고 강조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존경할 만한 분들”이라고 선언한 후 카이사르를 찬양하면서 그의 유언장을 공개했다. 유언의 핵심 내용은 “내 재산을 로마 시민에게 기증한다”는 것이었다. 또 카이사르가 살해당할 당시 입었던 칼자국과 피로 얼룩진 옷도 공개했다. 흥분한 로마 시민은 암살자들의 집을 습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토니우스·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정국을 장악했다. 불리한 내용을 먼저 짧게 거론한 후 유리한 내용을 장황하게 거론하는 형식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즐겨 이용된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가 짧은 사과 의견을 밝힌 후 이재명정부·민주당을 비중 있게 비판한 것도 강경 보수 세력에겐 강한 인상을 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장 대표는 비상계엄의 원인을 ‘의회 폭거’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윤 전 대통령은 카이사르가 된다. 비상계엄 해제에 찬성해 사실상 윤 전 대통령 몰락에 가담한 한 전 대표와 친한계는 브루투스 일당이 되는 구도가 그려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강경 보수 세력은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해 어떤 의견을 제시할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공나형 전남대 학술연구교수는 지난 2022년 발표한 논문 <대통령의 공적 사과 담화에서 드러나는 ‘개입’ 양상>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1993년 쌀 시장 개방을 수용하면서 밝힌 대국민 사과와 박 전 대통령의 최순실 게이트 관련 대국민 사과를 분석했다. 공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선의로 행한 행위가 어쩔 수 없는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고 강조하면서 결과의 부정성에 관여하는 자신의 의도의 비중을 제거했다”고 분석했다. 박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자기 고백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그 고백의 원인이 되는 행위에 대해선 소극적”이라고 분석했다. 12월3일 조용히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어쩔 수 없었다”는 항변과 상대방 비판을 내용으로 채웠다. 그러면서 민주당 심판·보수 재건·대여 투쟁을 강조했다. 결국 두 사람의 답은 ‘한 전 대표를 제외한 빅텐트’ 방침 재확인으로 보인다. 국민의힘의 12월3일은 이렇게 조용히 지나갔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