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국민 떨게 한 ‘노란 봉투’ 정체

어느 날 배달된 ‘수상한 소포’

[일요시사 취재1팀] 옥지훈 기자 = 울산의 한 장애인 복지시설에 신원미상의 노란 소포가 도착했다. 대만서 발송된 이 소포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시설 직원 3명이 소포를 뜯자 안에 가득 차 있던 기체가 뿜어져 나왔다. 기체를 들이마신 직원들은 호흡곤란과 마비 증세를 호소했다. 국립과학수사대는 해당 기체를 정밀 검사했지만, 화학물질에 관련한 특이점은 없었다고 보고했다. 

전국적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해외 우편물이 발송되면서 위험 물질에 관한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이번에 논란이 된 ‘정체불명 소포’는 중국서 대만을 거쳐 국내로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대만 우정 당국은 화물 우편의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중국 선전발 환적용 우편물의 접수를 중단한다고 밝혔다. 

대만 당국은 의심 우편물들이 중국 선전서 최초 발송돼 대만을 거쳐 한국으로 보내졌다고 밝혔다. 대만 부총리 격인 정원찬 행정원 부원장은 “대만 수사 당국이 한국의 소포 사건과 관련해 전담팀을 구성해 조사하고 있다”며 “해당 소포는 중국 선전서 ‘경유 우편’으로 대만에 보내졌고, 대만을 거쳐 한국으로 발송됐다”고 밝혔다. 이어 “끝까지 추적 조사를 진행해 어떠한 부분을 강화해야 하는지 모든 상황을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혹시 마약?
아님 폭탄?

경찰청은 정체불명 소포와 관련한 신고 건수가 지난 26일 오후 5시까지 3428건 접수됐다고 밝혔다. 우편물 개봉 후 가스나 독극물 등이 들어 있다는 신고가 접수됐지만 피해사례는 없었다. 3428건 중 2265건은 정상 소포로 확인됐다. 전체 신고 건수 중 절반 이상은 오인 신고였던 것이다. 전날 오후 5시 기준 3021건보다 407건 늘어난 수치다.

서울 명동 중앙우체국서 유해 물질이 담긴 것으로 의심되는 소포가 발견돼 1700여명이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서울 서초우체국과 송파우체국에도 수상한 소포가 확인됐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충남 천안의 한 가정집에 배송된 국제우편물에서는 가스가 검출됐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경찰 조사 결과 문제가 된 국제우편물은 노란색이나 검은색 우편 봉투에 ‘CHUNGHWA POST(중화우정)’, 발신지로 ‘PO Box 100561-003777, Taipei Taiwan(대만 타이베이)’ 등이 적힌 것들이다. 경찰 조사 결과 해당 우편물 안에는 완충제만 들어있거나 비어 있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국방과학연구소와 경찰 등이 정밀 분석한 결과 별다른 유해 물질은 없었으며 지금까지 폭발물이나 유해 물질이 확인된 사례는 아직 없다. 그러나 미확인 국제우편물이 전국 각지서 대거 발견된 만큼 관계 당국은 사실관계 파악에 힘을 쏟고 있다.

소포에는 립밤 같은 물건이 들어 있거나 충전재만 담겨 있는 등 비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경찰청은 “울산서 해외 배송된 노란색 우편물을 개봉한 사람이 어지럼증 등을 호소한 사건 이후 전국서 해외 우편물 배송 사례가 확인되고 있다”며 “이와 유사한 우편물을 수취하신 분은 우편물을 개봉하지 말고, 즉시 가까운 경찰서로 신고해 주시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정체불명 소포에 관한 우려는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10월 제주서 해외 우편물을 받았다는 주민 신고가 접수돼 화학물질 검사를 진행한 결과 신종 마약 성분인 LSD가 검출됐다. LSD는 환각 효과가 필로폰의 수백배에 달하는 합성마약이다.

시키지 않았는데 불쑥 외국서 발송
개봉 전 의심부터…육안 구별 불가

사건 당시 50대 남성은 탄저균 테러 소포를 연상시키는 우편물이 배달됐다며 제주시 조천읍 함덕파출소에 신고했다. 해외서 발송한 우편물에는 은박지에 스티커와 소크라테스 명언이 영어로 적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화학물질 검사 결과 스티커서 LSD가 검출됐다.


탄저균 테러 소포 사건은 2001년 미국서 처음 벌어졌다. 미 상원의원 및 언론 매체 관계자들에게 탄저균이 묻은 우편물이 배달돼 5명이 사망하고 17명이 감염됐다. 일부 소포의 발신지는 2020년 7월 미국서 발생한 정체불명 씨앗 사건 당시 발신지와 같다고 전해진다. 해당 문구는 실제 발신자 주소가 아니라 대만 우체국 사서함 번호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당시 미국서 흙이나 씨앗 등이 담긴 중국발 정체불명 우편물이 발견돼 논란이 일었다. 당시 미국과 중국이 크게 갈등을 빚는 시기인 데다 코로나19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하던 시기와 겹쳐 생화학 테러가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미국 당국은 씨앗을 검사한 결과 겨자 등 일반 씨앗인 것으로 밝혀져 ‘브러싱 스캠’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브러싱 스캠은 온라인 거래 사기 수법 중 하나로 주문하지 않은 물건을 아무에게나 발송하고 수신자로 가장해 상품 리뷰를 올려 온라인서 판매실적을 부풀리는 행위를 말한다.

당시 미 농무부 관계자는 “정체불명 씨앗 소포들이 브러싱 스캠 수법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니라는 증거도 없다”며 “그러나 여전히 위험할 수 있어 씨앗을 받으면 즉시 신고하고 안전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브러싱 스캠이 이어지면서 안전불감증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생화학 테러
위험물 공포

경찰은 이번 대규모 정체불명 소포 사건을 두고 브러싱 스캠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통상 알리바바나 아마존 같은 전자상거래 사이트에 입점한 중국 업체가 판매실적을 높이려고 가짜 고객을 동원하는 수법이다. 가짜 고객들은 브로커에게 돈을 받고 온라인서 무작위로 이름과 주소를 찾아 주문을 넣는다.

주문 이후 실제 물건보다 값이 저렴한 씨앗이나 가벼운 물건 등을 보낸다. 아울러 배송이 완료되면 가짜 고객이 업체에 후기를 좋게 써주는 방식이다.

알리바바 등 중국 내 유력 전자상거래 업체들은 브러싱을 막기 위한 자체 프로그램을 보유하고 있고, 중국 당국까지 나서 브러싱 업자들에게 벌금을 부과하는 등 강경정책을 이어가고 있지만 위법 행위는 여전하다.

미국 연방거래위원회는 브러싱 스캠이 금전 피해를 일으키지는 않지만 개인정보가 악용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주문하지 않은 중국발 소포를 받을 경우 전자상거래에 쓰는 비밀번호를 변경하라고 권고하기도 했다. 지난해 1월 뉴욕 소비자보호부(DCP)서도 “(사기꾼들이)불법으로 당신의 개인정보를 침해한다”며 위험성을 경고했다.

이번 정체불명 소포는 대만을 단순 경유한 우편물로 발신자 추적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배송 기록이 남지 않는 ‘통상 우편’을 사용해 발신자 추적에 난항을 겪고 있다.

대만의 우정 당국인 중화우정은 중국 등에서 들어오는 화물을 영내에 반입하지 않고 X선 검사 등 간단한 안전 검사만 거쳐 제3국으로 발송하는 화전우 시스템을 활용하고 있다. 경유 항공편이 많고 항공권 가격도 저렴해 이 중개 서비스를 이용하면 배송비와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알리 익스프레스 등 해외 배송이 많은 중국발 물류가 주 고객인 것으로 전해졌다.


대만 <연합보> 보도에 따르면 과거 중국 전자상거래 업체가 한국과 일본 등에 제품을 자체 배송할 경우 평균 7일 정도 소요됐으나 대만의 화전우 시스템을 이용하면서 배송 시간을 3~5일로 단축했다.

우리나라 우정 당국도 대만의 화전우처럼 국가 간 중개 환적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브러싱 스캠에 악용될 소지는 없다. 우리나라를 거쳐 제3국으로 발송되는 우편 환적 서비스는 화전우 시스템과 달리 추적 조회가 가능한 EMS와 ‘K-패킷’ 두 종류로 구성돼있다. 

우편 탐지
전국 6곳뿐

해외 우편물의 검사시스템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관세청은 마약 탐지 장비는 보유하고 있지만 화학·방사성 물질 탐지기는 보유하지 않은 실정이다.  

우편물에 든 내용물의 위해성 여부를 배송 전에 확인하는 절차는 관세청이 공항·항구 등에서 통관하면서 1차적으로 담당한다. 이후 배송 단계로 넘어오면 우정사업본부가 국제우편물류센터와 전국 주요 우체국, 우편집중국서 폭발물이나 유해 물질 포함 여부를 탐지한다.

우정사업본부 당국이 대규모의 브러싱 스캠 의심 우편물 접수 사태를 파악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우정사업본부와 관세청이 지난 5월 ‘마약 등 불법 물품 반입 차단과 국제우편 서비스 향상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국제우편을 통한 마약밀수가 급증하는 가운데 마약 반입 차단을 위해 긴밀한 협력이 필요하다는 조치다.

이번 대규모 정체불명 소포 신고가 전국적으로 이뤄지는 것을 두고 마약 범죄에 대한 불안감이 급증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관세청에 따르면 국제우편을 통한 마약밀수 적발 건수는 2020년 292건서 2022년 461건으로 증가했다. 적발된 마약의 양은 38.2㎏서 361.2㎏으로 9.5배 늘었다.

배송 전 국제우편물에 대한 화학·방사성 탐지를 맡고 있는 우정사업본부의 부담도 줄어들 전망이다. 인천 영종도 소재 국제우편물류센터 내 세관검사를 위한 별도의 독립된 전용 장소인 ‘국제우편 세관검사장’을 신축하기로 했다.

브러싱 스캠, 바이오 테러 변질 가능성
“해외 우편물 검사시스템 강화” 지적도 

올해 하반기 내로 라만분광기와 이온스캐너 등 고성능 마약 탐지 장비 도입을 확대하고, ‘마약 분석 포렌식센터’를 인천국제공항에 구축한다. 라만분광기는 레이저를 이용해 최대 1만2000종의 물질을 실시간으로 화학반응을 분석·판별할 수 있는 장비다. 

우정당국은 ‘우편물 사전정보’ 등 국제우편물에 대한 정보공유를 확대해 국제우편을 통한 마약 반입을 차단하기 위한 단속체계를 강화하기로 했다. 우편물 사전정보란 ‘만국우편협약’에 따라 세관신고 등을 위해 우편물을 보내는 국가가 받는 국가에 해당 우편물이 도착하기 전에 제공하는 우편물 정보를 말한다.

국제우편 세관검사장이 신축되면서 국제우편을 통한 생화학 테러 위험과 마약 밀반입 차단을 위한 단속체계가 더 강화될 전망이다.

손승현 우정사업본부장은 “국제우편을 통한 마약류 반입 등 불법 반입물 차단에 관세청과 함께 노력하겠다”면서 “관세청과의 협력을 바탕으로 국민이 불편함 없이 우편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윤태식 관세청장도 “국제우편물의 국내 반입을 책임지고 있는 기관들이 긴밀하게 협력해야 하는 매우 중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최근 마약범죄가 늘면서 일차적으로 공항이나 항구서 고성능 마약 탐지 장비 도입이 확대됨에 따라 유해 물질이나 폭발물 포함 여부도 탐지가 가능하게 된다. 아직 화학 및 방사능 물질 탐지기가 갖춰진 우편시설은 국제우편물류센터 등 전국 6곳에 그치고 있다. 

미국은 2001년 우편물을 이용한 탄저균 테러로 5명이 숨진 후 편지·소포 등에 대한 대응 요령이 정비돼있다. 중국도 2019년 브러싱 스캠을 금지하는 법안까지 마련했을 정도로 해당 수법이 이미 퍼져 있는 상황이다.

의심 물건
대응 요령

미 우편공사 검사국은 내용물이 의심되는 소포를 받았을 때 접촉했을 경우 온수와 비누로 손을 세척한 후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고 우편물을 즉시 격리하고 대피해야 한다고 전했다. 브러싱 스캠 의심 건이 발생하면 개인정보 유출을 막기 위해 주기적으로 해당 온라인 쇼핑몰 비밀번호를 변경하고 업체에 즉시 연락하라고 권고한다. 미국 주요 전자상거래 플랫폼 업체들은 자사 홈페이지에 브러싱 스캠 대처 방법을 소개하고 피해 사례를 접수하고 있다.

한국소비자원 관계자는 “주문하지 않은 택배를 받으면 향후 분쟁 소지를 막기 위해 미개봉 상태로 두거나 버리지 않는 게 좋다”며 “발신자가 명확할 경우 해당 업체에 알리는 등 객관적 증빙자료를 확보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해외 개인정보 유출이 의심될 경우 의심되는 사이트의 정보를 수집해 한국인터넷진흥원 118에 민원을 접수할 수 있다. 

<ojh34522@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떠오르는 ‘탄저균 소포’ 악몽

9·11테러 직후인 2001년 10월 미국에서는 탄저균을 이용한 소포 테러가 발생했다.

이 테러로 모두 5명이 숨지고 17명이 다쳤다.

당시 하얀 가루가 들어 있는 소포는 미국 방송사들과 의회로 발송됐다.

소포를 개봉한 사람들은 탄저병에 걸렸는데, 하얀 가루에는 탄저균이 섞여 있었다. 

당시 미국 정부와 언론들은 9·11 테러 직후 벌어진 사건 배경을 지적했다.

탄저균 테러의 배후로 세계적인 테러조직 알카에다를 이끈 오사마 빈 라덴을 지목했다. 

그러나 이후 미국 정부의 생물방어 집단서 일하는 고위 과학자인 세균 전문가 브루스 아이빈스가 저지른 것으로 봤다.

사건을 수사받던 아이빈스는 기소를 앞두고 자살을 택했다.

사건의 진상이 정확히 밝혀지기도 전에 수사는 일단락됐다. 

당시 전 세계는 탄저균 테러에 대한 공포감에 소포를 확인할 때마다 불안에 떨었다.

국내에서는 아직 우편 테러가 발생한 적은 없으나 대규모 정체불명 소포로 불안감은 지속될 전망이다. <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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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2024년 12월3일 오후 10시27분,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국가 최고 통수권자의 선택은 정치권을 넘어 대한민국 전역을 강타했다. 내란의 밤이 지나고 탄핵의 강을 건너 마침내 대선 정국까지 넘었다.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여의도 곳곳에 계엄의 여파가 남아 있다. 그날 오후 10시 무렵 윤석열 전 대통령이 예산안 관련 긴급 발표를 진행할 예정이라는 정보지가 돌았다. 얼마 뒤 정장 복장으로 대통령실 브리핑룸 카메라 앞에 나타난 윤 전 대통령은 다소 격양된 어투로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강하게 비판했다. 스스로 걸어간 자멸의 길 민주당이 주요 예산을 전액 삭감해 국가 기능을 훼손하고 대한민국을 공황 상태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더니 돌연 야당을 반국가 세력으로 몰아세웠다. 윤 전 대통령은 “북한 공산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 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밝혔다. 1979년 이후 45년 만에 내려진 비상계엄이었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국회가 봉쇄됐고 헬기를 타고 도착한 무장 군인들이 안으로 들이닥쳤다. 국회 밖에서는 시민이, 안에서는 야당 보좌진들이 군인과 대치하면서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 이어졌다. 먼저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가 입장을 냈다. 한 전 대표는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잘못된 것”이라며 “국민과 함께 막겠다”고 밝혔다. 이후 한 전 대표는 탄핵을 찬성한다는 의미의 ‘찬탄파’로 찍혀 친윤(친 윤석열)계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민주당 당시 이재명 대표는 실시간 방송을 통해 “대통령의 불법적인 비상계엄 선포는 무효”라며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인 국회를 지키기 위해 신속히 국회로 와달라는 말을 남겼다. 내란 사태가 지나고 난 뒤 이 대통령은 이날을 회상하며 “이 상황을 최대한 빨리 많은 시민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실시간 방송을 시작했다”고 전했다. 뒤이어 국민의힘 추경호 전 원내대표가 비상 의총을 소집했다. 추 전 원내대표는 국회 예결위 회의장으로 의총을 소집했다가 10분 뒤 장소를 여의도 당사로 옮겼다. 그리고 약 20분 뒤 다시 국회 예결위장으로 바꿨다. 이는 현재 추 전 원내대표가 받는 ‘비상계엄 해제 표결 방해 의혹’과 연결된다. 다음 날 새벽인 4일 오전 1시 비상계엄 해제 요구안이 국회에 상정됐다. 국회경비대가 국회 출입을 통제하자 담을 넘어서 국회로 진입한 우원식 국회의장은 결의안 상정에 앞서 “(윤 전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면 국회에 지체 없이 통보해야 한다는 의무조항이 있으나 통보가 없었고, 이는 대통령의 귀책사유”라며 “우리는 그와 관계없이 (비상계엄 해제 의결을 위한) 절차를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결의안은 여야 의원 190명이 참석한 가운데 190명 전원이 찬성해 가결됐다. 국회 본청에 투입됐던 계엄군은 철수했고 이로써 윤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약 세 시간 만에 무효가 됐다. 비상계엄의 끝은 탄핵 정국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민주당을 비롯한 ▲조국혁신당 ▲개혁신당 ▲진보당 ▲기본소득당 ▲사회민주당 등 야6당은 계엄이 해제된 당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들은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을 ‘내란’으로 규정하고 “하야하지 않으면 탄핵소추를 진행할 것”이라고 압박했다. 국민의힘은 탄핵 반대를 당론으로 추인했다.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는 과정을 겪으며 당이 벼랑 끝까지 몰렸던 점 등을 의식했다는 해석에 힘이 실렸다. 대통령에서 내란수괴 피의자로 썩은줄 알면서도 못 놓는 윤 동아줄 이날을 기점으로 국민의힘에서는 분열의 조짐이 보였다. 탄핵을 반대하는 ‘반탄파’의 친윤계와 찬탄파 친한(친 한동훈)계로 당원들이 갈라서면서 내부 총질이 시작된 것이다. 당초 한 전 대표 역시 탄핵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비상계엄 당시 자신을 포함한 주요 정치인을 체포하려고 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입장을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부터 시작된 두 계파의 갈등 또한 현재진행형이다. 비상계엄이 선포된 나흘 뒤인 7일,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정족수 미달로 국회에서 부결돼 자동 폐기됐다. 재적 의원 300명 중 195명이 참석한 가운데 탄핵이 상정됐지만 국민의힘 의원 대다수가 불참하면서 투표가 불성립된 것이다. 이날 표결에 참여한 국민의힘 의원은 김예지, 김상욱, 안철수 의원뿐이었다. 민주당 박찬대 의원은 표결에 참여하지 않은 의원 105명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호명하며 본회의장으로 와줄 것을 요구했다. 두 번째 탄핵소추안은 일주일 뒤인 14일 국회에 상정됐다. 당시 국민의힘은 “표결 참석을 제안한다”면서도 탄핵 반대 당론을 유지했다. 결국 300명 가운데 ▲찬성 204표 ▲반대 85표 ▲기권 3표 ▲무표 8표로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 11일 만에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공은 헌법재판소(이하 헌재)로 넘어갔고 긴 진통 끝에 지난 4월4일 헌법재판관의 만장일치로 윤 전 대통령이 파면됐다. 현직 대통령의 파면에 따라 조기 대선이 치러졌고 민주당에서는 이변 없이 이재명 대표가 대선주자로 나섰다. 국민의힘에서는 여전히 찬탄파와 반탄파가 대립했고 어느 날 늦은 밤을 틈타 ‘대선후보 날치기’를 시도하는 등 웃지 못할 촌극도 벌어졌다. 민주당은 ‘내란 세력 청산’을 앞세웠다. 이 후보는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비상 경제 대응 태스크포스(TF) 구성을 약속하는 등 경제 성장을 강조하면서도 “내란 세력의 죄는 단호하게 벌하겠다”고 강조했다. 민주당 역시 “이번 선거는 내란 정권에 대한 준엄한 심판”임을 강조하며 윤 전 대통령과 국민의힘 심판론을 부각시켰다. 두 번의 선거 강경파만 남았다 6·3 조기 대선 투표 결과 이재명 후보가 49.42%를 득표하면서 21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41.15%로 이 후보가 8.27%p 차이로 앞섰다. 계엄 극복과 내란 청산을 외친 민주당이 국민의 선택을 받은 것이다. 국민의힘이 윤 전 대통령과 완전히 절연하지 못한 점 또한 보수가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원인으로 꼽힌다. 탄핵 정국 당시 앞장서서 윤 전 대통령을 엄호한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 불참’에 따른 역풍을 우려하던 당 의원에게 자신이 박 전 대통령 탄핵에 앞장서서 반대한 점을 언급하며 “나는 끝까지 갔다. 그때 욕 많이 먹었다. 그런데 1년 후에는 ‘윤상현 의리 있어 좋아’(라고 하면서) 무소속으로 나와도 다 찍어줬다”고 말했다. 김문수 후보 역시 대선 투표 직전까지 윤 전 대통령에게 단호히 탈당을 요구하지 못했다. 김 후보는 “대통령 탈당(여부)은 본인 뜻”이라며 “자기가(국민의힘이) 뽑은 대통령을 탈당시키는 방식으로 책임이 면책될 수 없고, 도리도 아니”라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은 대선에서 패배했지만 아직도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친윤계를 비롯한 중진 의원의 지역구가 보수의 심장인 TK(대구·경북)임을 고려했을 때, 윤 전 대통령과 결별하는 것은 핵심 지지층을 놓는 것과 같다는 우려에서다. 지난 8월 국민의힘 전당대회서도 반탄파인 장동혁 후보가 김문수 당 대표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장 후보는 탄핵 정국 당시 극우 색채가 짙은 탄핵 반대 집회를 찾아가 강성 지지층에게 표심을 구애하는가 하면 찬탄파들을 향해 “내부 총질 세력과는 같이 갈 수 없다”는 발언도 서슴치 않았다. 당선 직후에는 “우파 시민들과 연대해 이재명정부를 끌어내리는 데 모든 것을 바치겠다”며 강경 노선을 예고하기도 했다. 그의 말처럼 장 대표는 지난 9월 장외투쟁을 통해 이정부와 본격적으로 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국민의힘이 장외투쟁에 나선 것은 ‘조국 사태’ 이후 6년 만이다. 당 지도부는 대구를 시작으로 전역을 돌며 여론전을 통해 반격에 나설 기회를 보고 있다. 민주당은 “내란 옹호 대선 불복 세력의 장외‘투정’”이라고 비꽜다. 마찬가지로 지난 8월 강성 지지층의 지지를 받아 대표로 당선된 정청래 대표는 “윤어게인 내란 잔당의 역사 반동을 국민과 함께 청산하겠다”며 국민의힘 청산을 강조했다. 강경파인 정 대표와 장 대표가 당권을 잡으면서 국회는 점차 극한으로 치달았다. 정면충돌 치킨 게임 계엄 1년을 앞두고는 민주당의 ‘내란 세력 척결’에 국민의힘이 ‘내란 팔이’라고 맞불을 놓는 지경에 이르렀다. 국민의힘 강경파 의원들의 입은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고, 민주당은 그때마다 계엄 카드를 꺼내며 “내란 옹호 세력과 협치할 수 없다”고 반격했다. 내란 팔이라는 단어는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의 메시지로 시작됐다. 나 의원은 자신의 SNS를 통해 “특검 연장은 오로지 내란 정국을 연장하려는 민주당의 정략일 뿐”이라며 “내란팔이 없이는 국민의 마음을 얻을 자신도, 국정을 책임질 정책 능력도 없으니 이 지경”이라고 몰아세웠다. 민주당 주도로 ‘더 센 특검법’이 통과하자 이를 지적한 것이다. 나 의원은 “에라잇, 맨날 내란, 내란하다 보면 국민들도 결국 지쳐버릴 것”이라며 “소위 내란 약발도 곧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 여권 관계자는 “계엄 1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사과나 해명도 없이 여전히 민주당 뒷다리만 잡는 게 국민의힘”이라며 “내란팔이라는 말을 하기 전에 그동안 국민의힘이 보여준 태도를 돌아보시라. 윤 전 대통령을 면회하기 위해 구치소로 뛰어간 것이며 극우 집회에서 마이크를 든 것까지, 사과의 기미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벌써부터 ‘지겹다’는 경솔한 표현은 국민께 비판받을 일”이라고 지적했다. 오는 3일 계엄 1년 메시지를 통해 양당의 향배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가운데 민주당은 정당해산 심판을 꺼내든 반면, 국민의힘은 메시지 톤을 놓고 여전히 갈팡질팡하면서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는 지난달 26일 “내일(27일) 국회 본회의에서 추경호 전 원내대표 체포동의안 표결이 이뤄진다. 추 전 원내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불법 계엄 당시 의원총회(이하 의총) 장소를 여러번 변경하며 국회의 계엄 해제 표결을 의도적으로 방해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며 “총을 든 계엄군이 국회 창문을 깨고 진입하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의총 장소를 국회 밖으로 공지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처사”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이고 적극적인 계엄 해제 방해로밖에 볼 수 없는, 충분히 의심되는 상황”이라며 거듭 위헌정당 해산심판 청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강경파만 살아남은 포스트 탄핵 여의도 계엄 1년 메시지, 여야 모두 주목 국민의힘 내에서는 메시지의 세기를 놓고 충돌 조짐이 보인다. 강성 지지층을 의식한 지도부는 강경 메시지를 주장한 반면, 원내지도부를 비롯한 일부 초선 의원들 사이에서는 사과를 포함한 톤다운된 메시지를 요구하는 등 온도 차가 생긴 것이다. 초선인 국민의힘 김용태 의원은 한 라디오를 통해 “지난해 극한 여야 대립 속에 다수 야당(민주당)의 입법 전횡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계엄으로 군대를 동원해서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건 국가 발전이나 국민통합, 보수 정치에 있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불법적이고 무모하고 과격한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그간 1년 동안 국민의힘이 비상계엄을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 등에 대한 규명이 필요하다. 그것이 규명되면 사과와 반성은 당연한 일”이라며 “단순히 사과와 반성으로만 끝나서도 안 된다. 앞으로 국민의힘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에 대한 메시지까지 내놔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상계엄이 지난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현재 여야가 보이는 양상은 박 전 대통령 탄핵 이후와 비슷하다는 평이다. 탄핵 이후 조기 대선에서 당선된 문재인 전 대통령은 해결 과제로 적폐 청산을 내걸었고, 이 대통령은 ‘내란 청산’을 주장했다. 사면초가인 국민의힘 상황 역시 10년 전 탄핵 후폭풍을 직면하고 분열한 새누리당과 닮아있다. 이듬해 6월 지방선거가 예정된 점까지, 지금의 여야가 과거를 그대로 답습할지 이목이 쏠린다. 당시 새누리당은 자유한국당으로 간판까지 교체했지만 2018년 지방선거에 참패하면서 국회 바닥에 무릎을 꿇고 국민에게 사죄했다. 지금 국민의힘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내년 지방선거의 운명이 달라질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이와 관련해 국민의힘 김재원 최고위원은 CBS 라디오에서 ‘중도층 등 외연 확장을 위해 계엄에 대한 사과가 필요하지 않느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투표율을 55%에서 60% 정도로 봤을 때 중도층은 투표를 하지 않는 계층일 경우가 많다. 오히려 진영에 속한 사람들이 투표한다”고 분석했다. 김 최고위원은 “정치 고관여층보다는 정치 무관심층을 따라가야 한다고 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건가. 보수는 아직도 분열돼있고 내부 싸움도 있는 상황에서 지금 당장 이동해 갔을 때 벌어질 손실도 굉장히 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발언은 선거에 직면하면 중도층 포섭을 위한 전략을 세워야 하지만, 아직 당이 불안정한 만큼 중심이 되는 지지층을 단단히 잡아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10년 전 데자뷔? 비상계엄 사과 메시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배출한 대통령이 탄핵당한 것이 우리 숙명인데 그분들이 탈당했다고 해서 벗어나 지겠느냐”며 “자꾸 절연, 절연하는데 인연이 끊기겠느냐. 없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일회성 사과로 과거 잘못을 끊어내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며 “역사적 공과를 안고 가면서 우리가 어떤 정치를 할 것인가를 보다 고민하는 그런 모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쉽게 사과하고 끝날 문제가 아니”라며 “사과하는 모습보다는 우리가 앞으로 이런 정치를 해나가고 국민에게 믿음을 드리겠다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했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