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이 든 성배’ 교도소 담장 걷는 재개발조합장의 그늘

줄줄이 빨간줄…삽만 꽂으면 복마전

[일요시사 취재1팀] 김태일 기자 = 10년간 수도권에서 형사처분을 받은 ‘재개발·재건축조합장과 임원이 50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유경준 국민의힘 의원실이 국토교통부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른 결과다. 대상을 전국으로 확대할 경우 수백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재개발·재건축조합장은 교도소 담장 위를 걷는 자리’라는 말은 우스갯소리로 넘기기 어렵게 됐다.

국민의힘 유경준 의원실이 국토교통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수도권에서 각종 비리로 형사처분을 받은 재개발·재건축조합장과 임원이 50명에 달했다. 수도권 외 5대 광역시에서 추진 중인 재개발·재건축 사업장이 600여곳에 달하는 것을 고려할 때 전국 단위로 집계할 경우, 형사처분을 받은 조합 임원 수는 수백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형사처분 수백명
다양한 비리 유형

재개발·재건축 사업은 조합원들의 재산을 담보로 진행되는 사업이다. 세금을 투입해 공공 영역에서 진행되는 사업은 아니지만 조합 임원은 공무원 수준의 지위를 갖는다. 관련 법과 대법원 판례 등에 따르면 조합장과 임원은 선량한 관리자로서의 주의의무를 다해야 하고 공무원에게 적용하는 형법상 뇌물죄가 적용된다. 

비리 유형은 다양했다. 지난 9월 창원지방법원은 지역주택조합 조합장 A씨와 업무대행사 대표 B씨에게 각각 징역 5년, 7년을 선고했다. B씨는 조합 업무를 대행하며 사업 예정지 땅을 100억원에 사들인 후 해당 조합에 255억원에 되판 것으로 드러났다.

재판부는 B씨와 그의 가족이 제세공과금 57억원을 제외하고도 100억원 상당의 이익을 얻었고 조합에 그만큼의 손해를 끼쳤다고 판단했다. 또 A씨와 B씨는 허위 조합원을 모집한 후 모 은행을 속여 20억원가량의 중도금 대출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 과정에서 B씨는 A씨에게 뇌물을 건넨 것으로 확인됐다.


서울 성동구의 한 재개발조합장은 총회 의결 없이 자금을 차입한 혐의로 법원에서 300만원의 벌금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2018년 조합장이 된 C씨는 세 차례에 걸쳐 5000만원을 차입했다.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도정법)에 따르면 재개발조합의 자금 차입과 방법, 이자율, 상환 방법은 총회의 의결을 거쳐야 한다.

수도권서 10년간 12명 구속, 38명 벌금형
벌금형 중 84%는 100만원 미만 솜방망이

C씨는 조합원들이 요청한 용역계약자료 열람·복사도 거부했다.

2020년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 재개발 조합장 D씨는 정비업체를 선정하면서 담합을 저질러 공정한 입찰을 방해했다. D씨는 법원에서 징역 10개월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 보석으로 풀려난 후 항소했지만 기각돼 재구속됐다.

2018년 수원의 한 재개발조합장은 업체에서 뇌물을 받은 혐의로 징역 3년6개월을 선고받았다. 같은 해 서울 강서구·동대문구의 개발조합장 역시 뇌물수수 혐의로 각각 구속됐다.

지난해에는 서울 강남구의 한 재개발조합장이 총회 의결을 거치지 않고 밀실 용역계약을 맺었다가 벌금형에 처해졌다. 지난 3월에는 경기도 안양시의 한 지역주택조합장이 사기 혐의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2심이 진행 중이다.

전국 재개발·재건축 현장에 비리가 만연해있지만 ‘솜방망이’ 처벌에 그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확인됐다. 지역주택조합을 제외하고 지난 10년간 형사처분을 받은 수도권 재개발·재건축조합 임원 40명 중 징역형은 12명에 불과했다.


비리의 온상
“양형 높여야…”

일각에선 “민간영역에서 벌어지는 사업이라는 이유로 사안의 중대성에 비해 처벌 강도가 너무 낮다”며 “양형기준을 높일 필요가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일례로 서울 강남구의 한 재건축 조합장은 총회 의결 없이 한 업체와 정비시설 공사를 맺은 혐의로 재판을 받았지만 벌금형(100만원)에 그쳤다. 도정법에 따르면 총회 의결 없이 조합원에게 부담이 되는 계약을 맺을 경우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게 돼있다. 

또 조합 임원이 도정법을 위반해 벌금 100만원 이상을 선고받을 시 퇴임 사유가 된다. 하지만 지난 10년간 수도권에서 벌금형을 선고받은 재개발·재건축조합 임원 31명 중 26명은 100만원 미만의 벌금형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유 의원은 “재개발·재건축조합장과 임원들의 투명한 선출 절차가 필요하고 내 집 마련의 꿈에 부푼 서민들을 등에 업고 사익을 편취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철저한 조사와 일벌백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재개발·재건축 비리와 관련된 논란은 국회 국정감사장에까지 올랐다.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간사 더불어민주당 최인호 이원은 지난달 6일 국토교통부 국정감사에서 “지난 6년간 서울에서만 도정법 위반행위가 608건에 달하는 등 재개발·재건축 비리가 심각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국감에도 올랐다
도정법 한계 지적

최 의원은 부산 사하구 괴장5구역 재개발 사업을 예로 들었다. 그는 “부산 사하구 괴정5구역 재개발 사업의 경우 해임된 전 조합장이 예상 매출의 0.5%인 100억원을 성과급으로 챙기려다 조합원들의 반대로 무산된 경우가 있고 전 조합장은 건설사와 공모해 중도금 신설을 변칙 처리하는 과정에서 3000억원에 따른 이자 400억원을 조합원들에게 추가 부담시키려 했다는 의혹이 있다”며 “도정법 처벌 강화와 국토부가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최 의원이 국토부와 서울시로부터 받은 재개발·재건축 합동 실태점검 자료에 따르면 양 기관은 2016년 이후 서울에 위치한 31개 재개발·재건축 사업장을 조회해 603건의 위반행위를 적발했다. 최 의원은 “이 중 2% 정도만 기소가 되고 있어 처벌이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에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지방에서도 재개발 등 일부 정비사업이 비리 온상이 되고 주택공급 질서를 해치는 사회악이 되고 있다”면서 “전수조사 수준의 조사를 통해 적극 대처하겠다”고 답했다.

원 장관은 이 같은 문제를 반영한 도정법 개정안이 추진되면 적극 협조하겠냐는 질의에 “그렇게 하겠다”며 “비리 종합선물세트 같은 세력을 일대 정리해야 선량하고 전문성 있는 정비사업이 주민 신뢰를 얻고 순탄하게 진행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낮은 처벌강도 ‘현행 도시정비법’ 한계
국토부 “주택공급 질서 해치는 사회악”


건설업계는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그동안 국토부와 서울시가 벌여온 합동 실태점검이 제대로 된 적발이 아닌 ‘성과 보여주기식’으로 진행됐기 때문에 실제 처벌로 이어지기 힘들었고 마치 정비사업조합이 비리로 얼룩져있다는 왜곡된 인식을 심어줬다는 것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실제 실태점검은 조합의 해명이나 설명은 듣지 않고 서류만 확인하고 조합 의견 없이 결과를 발표하면서 조합 비리의 심각성을 부풀렸다”며 “조합은 합동점검에서 적발된 사례들이 이미 과거에 지적받아 조치한 사항임에도 또 다시 포함했고 수사 의뢰한 사례 중 경찰조사에서 무혐의로 결론난 것도 있다”고 지적했다.

점검 대상이 된 한 재건축조합장은 “5년 전 지적받아 바로잡았던 건을 또다시 포함시켜 행정지도를 내렸다”며 “실태점검의 성과를 위해 전후사정을 확인하지 않거나 조합에 소명 기회도 주지 않고 오직 서류로 판단하며 조합 비리가 심각한 것처럼 왜곡해 조합만 오해를 사고 있다”고 주장했다.

점검 대상의 한 조합 관계자는 “어느 조합이나 현실과 맞지 않은 법을 그대로 지키면 조합원들에게 불이익이 생기기 때문에 사전에 변호사의 법리 검토 후 각 조합별 특성에 맞게 운영하고 있다”면서 “총회를 개최하는 데 많게는 수억원 이상의 비용과 한 달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다양한 변수가 많은 정비사업이 돈과 시간과의 싸움인 만큼 어느 조합이든 총회비용을 줄이기 위해 대의원회 위임과 사후 추인을 받는 게 현실이지만 점검팀은 법 규정대로만 지적했다”고 말했다. 

“실적 부풀리기”
업계 “억울하다”


아울러 “실태점검은 법리적 판단이 필요한 사항이 다수 있는데 정비사업과 관련 없는 외부 전문가가 (실태점검을)주도해 실적을 부풀렸다”며 “수사 의뢰 결과 전후사정을 살펴보면서 불가피한 상황임을 인정받아 대부분 불기소 혹은 무혐의 처분을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ktikti@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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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