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1조4000억원’ 세운5구역 재개발 복마전

소문난 잔치에 떨어진 떡고물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재건축·재개발사업은 다양한 이해관계로 얽힌 집단이 수익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리는 일종의 ‘팀플레이’다. 천문학적인 자금이 사업에 투입되다 보니 이권 다툼을 넘어 법정 공방으로 이어지는 일도 자주 일어난다. <일요시사>가 세운5구역 도시정비형 재개발사업에서 일어나고 있는 ‘복마전’을 포착했다.

세운재정비촉진지구 5-1구역, 5-3구역 도시정비형 재개발사업(이하 세운5구역 재개발사업)은 서울 중구 산림동 190-3번지 일원 7672㎡ 부지에 지상 37층 규모의 업무복합시설을 개발하는 프로젝트다. ㈜이지스자산운용이 주주로 참여 중인 세운5구역 피에프브이(PFV)가 시행, GS건설이 시공을 맡고 있다.

겉으로만
순항 중?

2023년 기준 세운5구역 PFV의 주주는 이지스자산운용(16.46%), 교보자산신탁(10%), 이지스제454호일반사모부동산투자신탁(31.05%), 이지스네오밸류블라인드일반사모부동산투자신탁제1호(13.95%), 이지스일반사모부동산투자신탁제462호(12.34%) 등으로 구성됐다.

태영건설이 시공권과 지분(16.2%)을 가지고 있었으나 워크아웃에 돌입한 이후 GS건설이 인수했다.

대신자산운용이 업무시설에 대한 선매매 계약을 체결하면서 사업에 힘이 붙었다. 선매입 가격은 3.3㎡당 3500만원가량으로, 대신자산운용은 계약금으로만 700억원을 낸 것으로 전해졌다. 사업비 조달에 숨통이 트이게 된 것이다. 예정대로 2030년 개발이 끝나면 연면적 13만㎡가 넘는 최상급 오피스가 들어서게 된다.


이주 상황도 순조롭다. 세운5구역 PFV는 중구청 주도로 산림동 상공인회와 체결한 3자간 상생 협약을 통해 강제적인 명도와 퇴거 없는 이주를 진행 중이다. 이주와 건축물 철거로 일어날 수 있는 인권 침해, 사회적 갈등을 사전에 최소화하려는 취지로 맺은 협약이다.

지난 3월에는 지역 상인 174명 가운데 172명이 상생 협약에 합의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문제는 표면상으론 순항하는 듯한 사업의 이면이다. <일요시사> 취재 결과 세운5구역 재개발사업과 관련해 최소 3건의 소송이 진행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앞서 세운5구역 PFV가 설립될 당시 대표이사와 이사로 참여했던 이들을 비롯해 공동사업 약정을 맺었던 관계자들, 이지스자산운용에서 세운5구역 재개발사업을 총괄하는 책임자 등이 송사에 휘말려 있다.

구체적으로 ▲손해배상청구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횡령) ▲이사회 결의 부존재 또는 무효 확인 소송 등이다. 세운5구역 토지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매입가를 둘러싼 갈등은 경찰과 검찰 고발로 시작해 수년간 조사가 이뤄졌다. 일부 고소·고발 건은 결론이 났지만 몇몇 사건은 현재진행형이다.

한때 같은 목표를 가지고 함께 일했던 이들이 법정까지 가게 된 시발점은 ‘돈’이다. 이지스자산운용에서 시행사 지분을 매입하고 사업권을 확보하는 데 들인 비용, 세운5구역 PFV가 지분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쓴 비용 등을 합하면 약 480억원에 가까운 돈을 둘러싼 복마전이 펼쳐지고 있는 셈이다.

‘사건의 실체를 알고 싶으면 자금의 흐름을 쫓으라’는 수사의 금언처럼 전체적인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2018년까지 거슬러 가야 한다.

2018년 8월 부동산 매매, 분양 등을 하는 업체 대표 염모씨와 부동산 개발관리 등을 하는 업체 공동대표 오모씨, 권모씨 등은 세운5구역(5-1구역, 5-3구역) 토지를 매수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공동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문제는 토지 매입 자금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이 과정에서 이지스자산운용이 사업에 뛰어들었다.


자금 조달 역할로 이지스자산운용 참여
480억원으로 시행 관련 지분 모두 인수

2019년 1월 염씨가 대표로 있던 연합와이앤제이(이하 연합) 등과 이지스자산운용은 공동사업 약정을 맺었다. 연합 등은 토지 매매 계약을 체결하고 이미 체결된 계약을 추후 설립될 특수목적법인(SPC)으로 승계하는 역할 등을 맡았다. 이지스자산운용은 사업을 위한 자금 조달 등의 역할을 하기로 했다.

2019년 6월 연합, 이지스자산운용, 국민은행(이지스펀드의 신탁사), 생보부동산신탁(현 교보자산신탁) 등은 세운5구역 재개발사업 시행을 위한 법인을 설립하기 위해 주주협약서를 작성했다. 그 결과 ㈜세운5구역 PFV가 설립됐다. 당시 지분 구조는 연합 47.1%, 이지스자산운용 17.2%, 이지스펀드 29.9%, 생보부동산신탁 5.8% 등이다.

연합과 이지스자산운용 측이 소유한 지분 비율은 47.1%로 같다. 세운5구역 PFV의 대표이사는 염씨가 맡기로 했다.

눈여겨볼 만한 대목은 세운5구역 PFV가 설립되기 전인 2019년 1월 연합 등이 오씨, 권씨, 최모씨, 박모씨 등과 공동사업 약정을 체결했다는 점이다. 공동사업 약정서에 따르면 연합 등(공동사업자1)은 사업의 총괄 대표 지위를 갖고 대외 활동 업무 등을 담당하기로 했다. 4명(공동사업자2)은 토지 및 건축물 매입 등 사업부지를 확보하는 제반 업무 등을 담당했다.

지분 구조는 연합 50%, 오씨 30%, 권씨 10%, 최씨 7%, 박씨 3% 등으로 나눴다. 4명 가운데 박씨는 세운5구역 PFV 이사로도 참여했다. 다시 말해 공동사업 약정을 맺은 사업자 가운데 연합 대표인 염씨와 공동사업자2의 박씨만 세운5구역 PFV에 이사로 합류했고 오씨와 권씨, 최씨 등 3명은 연합 등과 약정을 체결한 것이다.

2020년 12월 연합과 이지스자산운용, 국민은행(이지스펀드 신탁사), 생보부동산신탁 등은 주주계약서를 다시 작성했다. 연합 45%, 이지스자산운용 16.46%, 이지스펀드 28.54%, 생보부동산신탁 10% 등으로 지분 비율이 조정됐다. 연합과 이지스자산운용 측은 여전히 50대 50 비율을 유지했다.

실제 세운5구역 PFV는 염씨와 박씨 등 연합 측 인사 2명과 이지스자산운용에서 파견 나온 2명으로 이사진을 구성했다. 당시 주주협약서에 기재된 합의 사항에도 ‘세운5-1구역, 5-3구역 개발사업으로 인해 발생한 사업 이익은 연합과 이지스자산운용·이지스펀드가 50 대 50 비율로 수취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고 명시돼있다.

법정 공방
검경 수사

주주협약과 공동사업 약정 등으로 틀을 유지하고 있던 구도가 무너지기 시작한 시점은 2021년 1월 경이다. 연합 등은 공동사업 약정으로 묶여 있던 오씨·권씨·최씨·박씨에게 해지를 통보하는 내용증명을 보냈다. 공동사업 약정에 기재된 의무를 이행하지 않아 공동사업자에 손해를 끼쳤고 이 과정에서 신뢰관계가 완전히 깨졌다는 주장이다.

박씨를 제외한 오씨와 권씨, 최씨는 연합 등의 해지 통보에 반발해 “귀사의 이 사건 해지 통보가 여러모로 부당하고 그 의미조차 불명하므로 ‘조합의 해산을 청구한다’는 것인지 ‘귀사들이 조합에서 탈퇴하겠다는 것인지’ 여부를 밝혀주시고 기간 내에 명확히 밝히지 않는다면 탈퇴 의사로 간주해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고 맞섰다,

연합은 더 나아가 공동사업 약정 해지 통보 9개월 뒤인 2021년 10월 이지스자산운용과 주식매매 예약 계약을 맺기에 이른다. 연합이 소유한 세운5구역 PFV 지분 전량을 이지스자산운용에 200억원에 매도한다는 내용이다. 이지스자산운용은 증거금 명목으로 30억원, 이후 2022년 1월 138억원, 32억원 등을 연합에 지급해 세운5구역 재개발사업 시행권을 완벽하게 확보했다.


문제는 연합으로부터 주식을 매입하는 과정에서 들어간 200억원 외에 사업권 확보를 명목으로 들어간 자금에 몇 가지 의문부호가 붙는다는 점이다. 실제 주식 매매대금 외에도 연합 측은 주식 유상감자 대금 명목으로 18억5000만원, 정산금 28억2000여만원, 세운5구역 재개발 사업 PM계약 해지 합의금으로 132억6600만원 등 약 179억원을 받았다.

이지스자산운용과 세운5구역 PFV에서 연합으로 들어간 돈이 379억원에 이른 것이다. 여기에 이지스자산운용이 오씨와 권씨, 최씨 등 연합 등과 공동사업 약정을 맺고 토지 매매 업무 등을 담당해 온 3명에게 100억원에 가까운 돈을 준 사실이 드러났다. 이 과정에서 돈이 지급된 배경과 이유 등이 석연치 않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2021년 12월 이지스자산운용은 오씨와 권씨, 최씨에게 각각 60억원, 30억원, 14억원 등 총 94억원을 송금했다. 세운5구역 재개발사업에 관한 공동사업권을 양수·양도한다는 계약을 체결하고서다. 연합의 세운5구역 PFV 지분을 모두 사들인다는 매매계약을 체결한 지 2개월 만이다.

공교롭게도 3명이 받은 돈은 지분 비율(30%:10%: 7%)에 비례했다.

이전까지 오씨 등 3명은 이지스자산운용, 세운5구역 PFV 등과 어떠한 계약도 맺지 않았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오씨 등 3명이 염씨와 박씨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 1심 판결문에 따르면 세운5구역 재개발 사업과 관련한 대다수의 약정이 연합 명의로 체결됐다. 유일한 예외가 이지스자산운용과 오씨 등 3명이 맺은 세운5구역 재개발사업 공동사업권 양수도 계약이다.


땅값 뻥튀기
쌍방 무혐의

이지스자산운용 관계자도 <일요시사>와의 미팅에서 비슷한 맥락의 말을 했다. 관계자는 “공동사업 약정서를 보면 연합이 모든 것을 대표해 사업을 진행하는 걸로 돼있다. 저희(이지스자산운용)는 이 법인(연합)이랑 한 거지, 이 개인들(오씨 등 3명)과 한 게 아니다. 그들 문제는 내부 사정”이라고 했다. 그런데도 100억원에 가까운 돈이 나간 것이다.

당시 세운5구역 PFV 내부 사정에 밝았던 한 관계자는 “염 대표가 이지스자산운용에 지분을 넘기고 돈을 받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오씨 등이 시행사, 이지스자산운용, 총괄 책임자 등에 가처분소송을 제기하는 등 문제를 일으킨 것으로 알고 있다. 법원이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가압류까지 진행됐다. 94억원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돈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지스자산운용 관계자는 연합에 추가로 지급된 179억원, 오씨 등에 준 94억원 등은 “사업을 온전히 가져오기 위한 자금이었다”며 “사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이들이 한 역할에 대한 대가로 지급한 돈”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면서 “사업이 원만하게 진행되면 여기(오씨 등 3명)는 아무것도 아닌 게 돼버리니까 내게도 배임 등 혐의로 소송을 걸었다. 그만큼 사업을 중단시키기 위해 노력했다”며 “우리는 그쪽과 완전히 연을 끊고 싶었고 지분이 (그쪽에)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걸 전혀 원하지 않았다. 그걸 위한 대가였던 것”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이지스자산운용의 해명대로라면 박씨의 지분 3%는 그대로 남은 상태다. 공동사업자 가운데 연합을 제외하고 오씨 등 3명의 지분 47%에 대한 값은 치렀으면서 박씨는 제외한 것이다.

이지스자산운용 관계자는 “박씨는 사업 초반에 세운5구역 PFV 이사로 있다가 얼마 안 지나서 사임해서 나갔다”며 “협의 대상자도 아니었고, 협의 과정에서 한번도 나타난 적 없다. 역할도 없었다”고 답했다.

<일요시사> 취재에 따르면 오씨 등 3명은 세운5구역 PFV는 물론 이지스자산운용에 양도할 사업권 자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업무에 대한 보상이나 수익 배분 등은 연합과 맺은 공동사업 약정에 따라야 한다. 실제 오씨 등이 염씨 등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이 이 공동사업 약정에 기반하고 있다.

이지스자산운용에서 오씨 등에게 돈을 준 근거가 빈약하다는 것이다.

이지스자산운용 관계자도 “공동사업자2는 연합에서 챙겨줬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질문에 “맞다. 하지만 연합에서 줄 리가 만무하지 않나. 그러면 언제까지나 우리가 소송 당사자로 남아 있어야 한다. 그럴 바엔 ‘너희도 역할을 했고 우리가 돈을 줄 테니까 끝내자’로 합의한 것”이라고 말했다.

계약과 관계없던 이들에게 94억, 왜?
“원활한 사업 진행을 위해 돈 줬다”

박씨의 역할이 없었다는 점에서도 반박이 제기됐다. 세운5구역 PFV와 이지스자산운용은 세운5구역 재개발사업이 진행되는 과정에 이사회 결의라는 ‘적법한 절차’가 있었기에 문젯거리가 될 게 없다는 태도다. 토지 매입 과정에서 불거진 ‘땅값 부풀리기’ 의혹에 대한 경찰, 검찰 조사에서 불송치, 무혐의 처분이 나온 것에도 이사회 결의가 있었다는 주장이 영향을 미쳤다.

세운5구역 토지를 매입하는 과정에서 땅값을 부풀렸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쌍방 고소·고발전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드러난 사실이다. 당시 염씨가 오씨를 고소한 사건이 증거불충분으로 최종 무혐의 처분됐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검찰의 불기소 결정서에 따르면 오씨와 염씨 등은 친인척, 지인 등을 동원해 원주민의 땅을 사들인 다음 연합이 다시 매입하는 방식을 사용해 토지를 확보했다. 이때 원주민에게 매입한 토지가는 시세와 큰 차이가 없었지만, 연합이 토지를 재매입할 때는 최초 매입가의 2배가량 높게 사들였다.

원래 연합이 원주민의 토지를 매입해야 했는데 그사이에 이른바 ‘특수관계인’이 개입해 이득을 본 것이다. 염씨가 오씨 등을 상대로 공동사업 약정을 해지 통보할 때도 이 ‘땅값 부풀리기’ 의혹을 신뢰 파탄의 근거로 들었다.

하지만 검찰은 토지 확보가 어려워 부득이하게 이 같은 방법을 사용한 것, 감정가와 크게 차이 없는 가격에 토지를 매입한 점, 이사회 결의로 ‘정당성’을 확보한 점 등을 들어 기소하지 않았다. 재개발사업 과정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로 세운5구역 PFV에 실질적인 손해를 끼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후 연합이 매입한 토지의 매수인 지위 등은 세운5구역 PFV로 승계됐다. 문제는 이때 의사회 결의가 있었는지다. 연합과 이지스자산운용 등이 2019년 1월에 맺은 공동사업 약정에 따르면 ‘토지매입용역계약 체결 및 매매 계약의 매수인 지위 승계’는 이사회 특별 결의 사항이다. 이사 전체의 동의가 필요한 부분이었다는 뜻이다.

이지스자산운용 관계자는 “땅값은 사실 정해져 있는 게 아니지 않나. 재개발사업에서는 토지 확보가 중요하기 때문에 협의에 따라 하는 것이지 정확한 시세가 있는 것도 아니다. 만약 너무 비싸게 샀다면 의사결정 과정을 통과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의사회 결의는 무조건 다 있었고 더 큰 의사결정은 주주총회를 통해 진행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박씨는 16번에 이르는 이사회가 열리는 동안 단 한 번도 자신이 참석한 적 없다고 주장했다. 이사회 무효 소송도 그 배경에서 진행 중이다. 실제 이사회가 열렸다고 서류에 기재된 일시에 전혀 다른 곳에 있던 적도 있다고 근거를 들었다. 카드 사용 명세를 통해 확인한 내용이다.

해명마다
모순 나와

이지스자산운용의 주장과 완벽하게 배치되는 지점이다. <일요시사>가 만난 한 관계자는 “이지스자산운용이 세운5구역 재개발사업을 진행하는 과정에 이사회 결의가 있었다고 주장하고 싶다면 박씨가 ‘아무 역할도 하지 않았다’는 총괄 책임자의 말을 뒤집어야 한다”며 “국내 최고의 자산운용사가 이렇게 허술하게 해명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jsjang@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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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2024년 12월3일 오후 10시27분,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국가 최고 통수권자의 선택은 정치권을 넘어 대한민국 전역을 강타했다. 내란의 밤이 지나고 탄핵의 강을 건너 마침내 대선 정국까지 넘었다.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여의도 곳곳에 계엄의 여파가 남아 있다. 그날 오후 10시 무렵 윤석열 전 대통령이 예산안 관련 긴급 발표를 진행할 예정이라는 정보지가 돌았다. 얼마 뒤 정장 복장으로 대통령실 브리핑룸 카메라 앞에 나타난 윤 전 대통령은 다소 격양된 어투로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강하게 비판했다. 스스로 걸어간 자멸의 길 민주당이 주요 예산을 전액 삭감해 국가 기능을 훼손하고 대한민국을 공황 상태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더니 돌연 야당을 반국가 세력으로 몰아세웠다. 윤 전 대통령은 “북한 공산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 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밝혔다. 1979년 이후 45년 만에 내려진 비상계엄이었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국회가 봉쇄됐고 헬기를 타고 도착한 무장 군인들이 안으로 들이닥쳤다. 국회 밖에서는 시민이, 안에서는 야당 보좌진들이 군인과 대치하면서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 이어졌다. 먼저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가 입장을 냈다. 한 전 대표는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잘못된 것”이라며 “국민과 함께 막겠다”고 밝혔다. 이후 한 전 대표는 탄핵을 찬성한다는 의미의 ‘찬탄파’로 찍혀 친윤(친 윤석열)계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민주당 당시 이재명 대표는 실시간 방송을 통해 “대통령의 불법적인 비상계엄 선포는 무효”라며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인 국회를 지키기 위해 신속히 국회로 와달라는 말을 남겼다. 내란 사태가 지나고 난 뒤 이 대통령은 이날을 회상하며 “이 상황을 최대한 빨리 많은 시민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실시간 방송을 시작했다”고 전했다. 뒤이어 국민의힘 추경호 전 원내대표가 비상 의총을 소집했다. 추 전 원내대표는 국회 예결위 회의장으로 의총을 소집했다가 10분 뒤 장소를 여의도 당사로 옮겼다. 그리고 약 20분 뒤 다시 국회 예결위장으로 바꿨다. 이는 현재 추 전 원내대표가 받는 ‘비상계엄 해제 표결 방해 의혹’과 연결된다. 다음 날 새벽인 4일 오전 1시 비상계엄 해제 요구안이 국회에 상정됐다. 국회경비대가 국회 출입을 통제하자 담을 넘어서 국회로 진입한 우원식 국회의장은 결의안 상정에 앞서 “(윤 전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면 국회에 지체 없이 통보해야 한다는 의무조항이 있으나 통보가 없었고, 이는 대통령의 귀책사유”라며 “우리는 그와 관계없이 (비상계엄 해제 의결을 위한) 절차를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결의안은 여야 의원 190명이 참석한 가운데 190명 전원이 찬성해 가결됐다. 국회 본청에 투입됐던 계엄군은 철수했고 이로써 윤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약 세 시간 만에 무효가 됐다. 비상계엄의 끝은 탄핵 정국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민주당을 비롯한 ▲조국혁신당 ▲개혁신당 ▲진보당 ▲기본소득당 ▲사회민주당 등 야6당은 계엄이 해제된 당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들은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을 ‘내란’으로 규정하고 “하야하지 않으면 탄핵소추를 진행할 것”이라고 압박했다. 국민의힘은 탄핵 반대를 당론으로 추인했다.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는 과정을 겪으며 당이 벼랑 끝까지 몰렸던 점 등을 의식했다는 해석에 힘이 실렸다. 대통령에서 내란수괴 피의자로 썩은줄 알면서도 못 놓는 윤 동아줄 이날을 기점으로 국민의힘에서는 분열의 조짐이 보였다. 탄핵을 반대하는 ‘반탄파’의 친윤계와 찬탄파 친한(친 한동훈)계로 당원들이 갈라서면서 내부 총질이 시작된 것이다. 당초 한 전 대표 역시 탄핵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비상계엄 당시 자신을 포함한 주요 정치인을 체포하려고 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입장을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부터 시작된 두 계파의 갈등 또한 현재진행형이다. 비상계엄이 선포된 나흘 뒤인 7일,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정족수 미달로 국회에서 부결돼 자동 폐기됐다. 재적 의원 300명 중 195명이 참석한 가운데 탄핵이 상정됐지만 국민의힘 의원 대다수가 불참하면서 투표가 불성립된 것이다. 이날 표결에 참여한 국민의힘 의원은 김예지, 김상욱, 안철수 의원뿐이었다. 민주당 박찬대 의원은 표결에 참여하지 않은 의원 105명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호명하며 본회의장으로 와줄 것을 요구했다. 두 번째 탄핵소추안은 일주일 뒤인 14일 국회에 상정됐다. 당시 국민의힘은 “표결 참석을 제안한다”면서도 탄핵 반대 당론을 유지했다. 결국 300명 가운데 ▲찬성 204표 ▲반대 85표 ▲기권 3표 ▲무표 8표로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 11일 만에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공은 헌법재판소(이하 헌재)로 넘어갔고 긴 진통 끝에 지난 4월4일 헌법재판관의 만장일치로 윤 전 대통령이 파면됐다. 현직 대통령의 파면에 따라 조기 대선이 치러졌고 민주당에서는 이변 없이 이재명 대표가 대선주자로 나섰다. 국민의힘에서는 여전히 찬탄파와 반탄파가 대립했고 어느 날 늦은 밤을 틈타 ‘대선후보 날치기’를 시도하는 등 웃지 못할 촌극도 벌어졌다. 민주당은 ‘내란 세력 청산’을 앞세웠다. 이 후보는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비상 경제 대응 태스크포스(TF) 구성을 약속하는 등 경제 성장을 강조하면서도 “내란 세력의 죄는 단호하게 벌하겠다”고 강조했다. 민주당 역시 “이번 선거는 내란 정권에 대한 준엄한 심판”임을 강조하며 윤 전 대통령과 국민의힘 심판론을 부각시켰다. 두 번의 선거 강경파만 남았다 6·3 조기 대선 투표 결과 이재명 후보가 49.42%를 득표하면서 21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41.15%로 이 후보가 8.27%p 차이로 앞섰다. 계엄 극복과 내란 청산을 외친 민주당이 국민의 선택을 받은 것이다. 국민의힘이 윤 전 대통령과 완전히 절연하지 못한 점 또한 보수가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원인으로 꼽힌다. 탄핵 정국 당시 앞장서서 윤 전 대통령을 엄호한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 불참’에 따른 역풍을 우려하던 당 의원에게 자신이 박 전 대통령 탄핵에 앞장서서 반대한 점을 언급하며 “나는 끝까지 갔다. 그때 욕 많이 먹었다. 그런데 1년 후에는 ‘윤상현 의리 있어 좋아’(라고 하면서) 무소속으로 나와도 다 찍어줬다”고 말했다. 김문수 후보 역시 대선 투표 직전까지 윤 전 대통령에게 단호히 탈당을 요구하지 못했다. 김 후보는 “대통령 탈당(여부)은 본인 뜻”이라며 “자기가(국민의힘이) 뽑은 대통령을 탈당시키는 방식으로 책임이 면책될 수 없고, 도리도 아니”라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은 대선에서 패배했지만 아직도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친윤계를 비롯한 중진 의원의 지역구가 보수의 심장인 TK(대구·경북)임을 고려했을 때, 윤 전 대통령과 결별하는 것은 핵심 지지층을 놓는 것과 같다는 우려에서다. 지난 8월 국민의힘 전당대회서도 반탄파인 장동혁 후보가 김문수 당 대표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장 후보는 탄핵 정국 당시 극우 색채가 짙은 탄핵 반대 집회를 찾아가 강성 지지층에게 표심을 구애하는가 하면 찬탄파들을 향해 “내부 총질 세력과는 같이 갈 수 없다”는 발언도 서슴치 않았다. 당선 직후에는 “우파 시민들과 연대해 이재명정부를 끌어내리는 데 모든 것을 바치겠다”며 강경 노선을 예고하기도 했다. 그의 말처럼 장 대표는 지난 9월 장외투쟁을 통해 이정부와 본격적으로 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국민의힘이 장외투쟁에 나선 것은 ‘조국 사태’ 이후 6년 만이다. 당 지도부는 대구를 시작으로 전역을 돌며 여론전을 통해 반격에 나설 기회를 보고 있다. 민주당은 “내란 옹호 대선 불복 세력의 장외‘투정’”이라고 비꽜다. 마찬가지로 지난 8월 강성 지지층의 지지를 받아 대표로 당선된 정청래 대표는 “윤어게인 내란 잔당의 역사 반동을 국민과 함께 청산하겠다”며 국민의힘 청산을 강조했다. 강경파인 정 대표와 장 대표가 당권을 잡으면서 국회는 점차 극한으로 치달았다. 정면충돌 치킨 게임 계엄 1년을 앞두고는 민주당의 ‘내란 세력 척결’에 국민의힘이 ‘내란 팔이’라고 맞불을 놓는 지경에 이르렀다. 국민의힘 강경파 의원들의 입은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고, 민주당은 그때마다 계엄 카드를 꺼내며 “내란 옹호 세력과 협치할 수 없다”고 반격했다. 내란 팔이라는 단어는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의 메시지로 시작됐다. 나 의원은 자신의 SNS를 통해 “특검 연장은 오로지 내란 정국을 연장하려는 민주당의 정략일 뿐”이라며 “내란팔이 없이는 국민의 마음을 얻을 자신도, 국정을 책임질 정책 능력도 없으니 이 지경”이라고 몰아세웠다. 민주당 주도로 ‘더 센 특검법’이 통과하자 이를 지적한 것이다. 나 의원은 “에라잇, 맨날 내란, 내란하다 보면 국민들도 결국 지쳐버릴 것”이라며 “소위 내란 약발도 곧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 여권 관계자는 “계엄 1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사과나 해명도 없이 여전히 민주당 뒷다리만 잡는 게 국민의힘”이라며 “내란팔이라는 말을 하기 전에 그동안 국민의힘이 보여준 태도를 돌아보시라. 윤 전 대통령을 면회하기 위해 구치소로 뛰어간 것이며 극우 집회에서 마이크를 든 것까지, 사과의 기미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벌써부터 ‘지겹다’는 경솔한 표현은 국민께 비판받을 일”이라고 지적했다. 오는 3일 계엄 1년 메시지를 통해 양당의 향배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가운데 민주당은 정당해산 심판을 꺼내든 반면, 국민의힘은 메시지 톤을 놓고 여전히 갈팡질팡하면서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는 지난달 26일 “내일(27일) 국회 본회의에서 추경호 전 원내대표 체포동의안 표결이 이뤄진다. 추 전 원내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불법 계엄 당시 의원총회(이하 의총) 장소를 여러번 변경하며 국회의 계엄 해제 표결을 의도적으로 방해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며 “총을 든 계엄군이 국회 창문을 깨고 진입하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의총 장소를 국회 밖으로 공지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처사”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이고 적극적인 계엄 해제 방해로밖에 볼 수 없는, 충분히 의심되는 상황”이라며 거듭 위헌정당 해산심판 청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강경파만 살아남은 포스트 탄핵 여의도 계엄 1년 메시지, 여야 모두 주목 국민의힘 내에서는 메시지의 세기를 놓고 충돌 조짐이 보인다. 강성 지지층을 의식한 지도부는 강경 메시지를 주장한 반면, 원내지도부를 비롯한 일부 초선 의원들 사이에서는 사과를 포함한 톤다운된 메시지를 요구하는 등 온도 차가 생긴 것이다. 초선인 국민의힘 김용태 의원은 한 라디오를 통해 “지난해 극한 여야 대립 속에 다수 야당(민주당)의 입법 전횡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계엄으로 군대를 동원해서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건 국가 발전이나 국민통합, 보수 정치에 있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불법적이고 무모하고 과격한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그간 1년 동안 국민의힘이 비상계엄을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 등에 대한 규명이 필요하다. 그것이 규명되면 사과와 반성은 당연한 일”이라며 “단순히 사과와 반성으로만 끝나서도 안 된다. 앞으로 국민의힘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에 대한 메시지까지 내놔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상계엄이 지난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현재 여야가 보이는 양상은 박 전 대통령 탄핵 이후와 비슷하다는 평이다. 탄핵 이후 조기 대선에서 당선된 문재인 전 대통령은 해결 과제로 적폐 청산을 내걸었고, 이 대통령은 ‘내란 청산’을 주장했다. 사면초가인 국민의힘 상황 역시 10년 전 탄핵 후폭풍을 직면하고 분열한 새누리당과 닮아있다. 이듬해 6월 지방선거가 예정된 점까지, 지금의 여야가 과거를 그대로 답습할지 이목이 쏠린다. 당시 새누리당은 자유한국당으로 간판까지 교체했지만 2018년 지방선거에 참패하면서 국회 바닥에 무릎을 꿇고 국민에게 사죄했다. 지금 국민의힘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내년 지방선거의 운명이 달라질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이와 관련해 국민의힘 김재원 최고위원은 CBS 라디오에서 ‘중도층 등 외연 확장을 위해 계엄에 대한 사과가 필요하지 않느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투표율을 55%에서 60% 정도로 봤을 때 중도층은 투표를 하지 않는 계층일 경우가 많다. 오히려 진영에 속한 사람들이 투표한다”고 분석했다. 김 최고위원은 “정치 고관여층보다는 정치 무관심층을 따라가야 한다고 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건가. 보수는 아직도 분열돼있고 내부 싸움도 있는 상황에서 지금 당장 이동해 갔을 때 벌어질 손실도 굉장히 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발언은 선거에 직면하면 중도층 포섭을 위한 전략을 세워야 하지만, 아직 당이 불안정한 만큼 중심이 되는 지지층을 단단히 잡아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10년 전 데자뷔? 비상계엄 사과 메시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배출한 대통령이 탄핵당한 것이 우리 숙명인데 그분들이 탈당했다고 해서 벗어나 지겠느냐”며 “자꾸 절연, 절연하는데 인연이 끊기겠느냐. 없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일회성 사과로 과거 잘못을 끊어내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며 “역사적 공과를 안고 가면서 우리가 어떤 정치를 할 것인가를 보다 고민하는 그런 모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쉽게 사과하고 끝날 문제가 아니”라며 “사과하는 모습보다는 우리가 앞으로 이런 정치를 해나가고 국민에게 믿음을 드리겠다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했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