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계엄 후폭풍> 17번 공포의 기억들

  • 김성민 기자 smk1@ilyosisa.co.kr
  • 등록 2024.12.09 15:46:48
  • 호수 150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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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년 만에 꺼내 6시간 만에 껐다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 =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3일 선포했던 비상계엄이 6시간 만에 해제됐다. 이로써 총 17번 선포된 대한민국 계엄령의 역사가 회자되고 있다. 계엄은 대통령이 전시·사변 등의 국가 위기 상황에 군사력을 동원해 공공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비상조치로 대한민국 헌법 제 77조에 규정돼있다. 일각에선 박근혜정부 당시 불발된 계엄령이 뒤늦게 터졌다는 분석도 있다.

계엄법에 따르면 계엄은 비상계엄과 경비계엄으로 나뉘는데, 윤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적과 교전 상태에 있거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됐을 경우에 발령할 수 있다. 경비계엄은 그보다 낮은 수위로 경찰 등 일반 행정기관만으로는 치안을 확보할 수 없을 경우 선포할 수 있다.

총 12번
비상계엄

비상계엄이 선포됐을 경우 대통령이 임명한 계엄사령관은 계엄 지역의 행정권과 사법권을 모두 갖게 되며,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도 제한된다. 작전상 부득이한 경우라고 판단하면 국민 재산을 파괴하거나 소각하는 권리도 갖게 된다.

윤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령을 포함해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서 계엄령은 총 17번 선포됐다. 이 중 비상계엄은 12번에 달한다. 헌정사상 첫 계엄령은 이승만정부 시절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을 계기로 발동됐다.

국군 제14연대가 이승만정부가 내린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면서 무력 충돌이 일어났고, 이승만 전 대통령은 여수·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두 번째 계엄은 같은 해 11월 ‘4·3 사건’ 당시 제주 지역에 선포됐다. 당시는 아직 계엄법이 제정되기 전이었으므로 일제강점기의 계엄법에 해당하는 ‘합위지경’을 적용했다. 정작 계엄법이 제정된 것은 1949년 11월24일이다. 


이후 6·25 전쟁으로 첫 전국 단위 계엄령이 선포된다. ‘4·19 혁명’ 당시에는 학생 시위를 막는 데 악용되기도 했다. 이는 다음 정부서도 이어져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듬해 12월6일 이를 해제했다.

비상계엄 12일에 경비계엄 558일로 한국 역사상 지속 기간이 가장 길었던 계엄으로 기록됐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6·3 항쟁’에 대응한다며 계엄령과 휴교령을 발령했다. 이후에도 대통령 간선제를 골자로 하는 10월 유신, 부마항쟁 때도 계엄령을 발동했다.

마지막 비상계엄은 1979년 10월26일 박 전 대통령이 시해된 다음 날 발령됐다. 이 계엄령은 1979년 ‘12·12 쿠데타’로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에 의해 1980년 5월17일을 기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로 인해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부마항쟁으로 인해 1979년  10월18일 부산 지역에 선포된 계엄령은 이후 계속 확대되면서 1981년 1월24일 해제될 때까지 456일 동안 유지됐다. 이에 저항하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계엄군을 투입한 무력 진압을 실시해 국민적 공분을 사기도 했다.

민주화 항쟁 뒤 1987년 개정된 현행 헌법에서는 대통령 의사만으로 계엄을 즉각 선포할 수 없도록 국무회의 심의 절차를 규정하고, 재적 국회의원 과반 찬성으로 해제가 가능하도록 국회의 사후 통제를 강화하는 등의 조치가 이뤄졌다.

이후 40년이 넘도록 대한민국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적은 없었다. 물론 실행으로 옮기지 않았으나 검토한 증거가 남아있다. 1987년 1월 고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6·10 민주항쟁’ 당시 전두환정권은 계엄령을 통한 무력 진압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실 주요 인사도 몰랐던 발표
국회 점거 실패로 6시간 만에 해제


다만 국민적 저항과 더불어 미국이 계엄 조치가 적절치 않다고 압박하면서 결국 전정권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수용했다. 박근혜정부 당시에도 계엄령 검토설이 불거졌다. 처음에는 낭설에 불과하다는 취급을 받았으나 실제 국군기무사령부(방첩사령부)의 세부 문건이 공개되면서 사실로 확인됐다.

윤 대통령이 계엄사령관으로 합동참모의장이 아닌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던 것을 두고 해당 문건을 참조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 1968년생인 박안수 사령관은 육군사관학교 46기 출신이다. 지난해 제75주년 국군의날 행사 기획단장을 역임한 뒤 지난해 10월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됐다. 이에 앞서 8군단장, 39보병사단장, 지상작전사령부 작전계획처장 등을 지냈다.

계엄사령관은 현역 장성급 장교 중에서 국방부 장관이 추천한 사람을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 대통령이 임명한다. 비상계엄 선포와 동시에 계엄사령관은 계엄 지역의 모든 행정사무와 사법사무를 관장한다. 계엄 지역의 행정기관 및 사법기관은 지체 없이 계엄사령관의 지휘·감독을 받아야 한다.

계엄사령관은 군사상 필요할 때에는 체포·구금·압수·수색·거주·이전·언론·출판·집회·결사 또는 단체행동에 대해 특별한 조치를 할 수 있다. 또 법률서 정하는 바에 따라 동원 또는 징발을 할 수 있으며, 부득이한 경우에는 국민의 재산을 파괴 또는 소각할 권한도 주어진다.

계엄사령관은 계엄 시행에 관해 국방부 장관의 지휘·감독을 받게 돼있다. 다만 전국을 계엄 지역으로 하는 경우와 대통령이 직접 지휘·감독을 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는 대통령의 지휘·감독을 받는다.

계엄령이 선포되면 통상 합참의장이 계엄사령관을 맡을 것으로 여겨졌다. 합참이 계엄과 관련된 업무를 관장하고 합참 조직에 계엄과가 있기 때문이다.

5·18 이후
없었는데···

하지만 윤 대통령은 지난 3일 계엄사령관에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박근혜정부 때인 2017년 2월 국군기무사령부(현 국군방첩사령부)가 비밀리에 만든 계엄 문건을 참고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관측하고 있다. 

해당 문건에는 “계엄사령관은 군사대비태세 유지 업무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현행 작전 임무가 없는 각 군을 지휘하는 지휘관으로 임명해야 한다”며 “육군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건의한다”고 적시했다. 

군 내부엔 김명수 합참의장이 해군 출신으로 지상 병력인 계엄군 지휘에 한계가 있고, 김용현 국방부 장관이 같은 육군 출신인 박 총장과 더 편하게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윤 대통령의 심야 비상계엄 선포는 대통령실 여러 참모도 발표 직전까지 그 내용을 모를 정도로 기습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대통령실 안팎의 상황은 지난 3일 오후 9시를 넘으며 급변했다. 대통령실 참모들은 윤 대통령이 담화를 발표할 것이라는 사실을 애초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오후 9시30분쯤 ‘윤 대통령이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의 감사원장·검사 탄핵, 예산 감액안 단독 처리 등에 대해 직접 입장을 밝힐 수 있다’는 설이 돌기 시작하며 기류가 급반전했다. 일부 참모는 저녁 식사 중 윤 대통령의 긴급한 호출을 받고 급히 대통령실로 복귀했지만, 계엄 선포는 물론 긴급 담화가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일단 이동했다고 한다.


특히 윤 대통령 지지율이 폭락하고 탄핵 요구가 높아지는 가운데 준비된 두 계엄령이 비슷하다는 의미로 ‘평행이론’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다른 점은 계엄 관련 여론의 고려 여부다.

박근혜정부 기무사는 ‘탄핵 판결 직후 청와대 및 일부 지역 치안 위협’ 단계서 위수령을, ‘일부 서울·경기 지역 일대 폭력 시위로 치안 마비’ 때 경비계엄을, ‘전국적인 폭력 시위 확산으로 정부 기능 마비’ 상황서 비상계엄을 단계적으로 내리도록 계획했다.

박정부 때 
문건 보니…

반면 윤 대통령은 국민들의 인식이나 반발은 거의 고민하지 않은 채 곧바로 비상계엄 선포로 직진했다.

박정부 계엄 문건은 청와대, 헌법재판소, 정부서울청사, 국방부 등 서울 핵심시설 4곳에 3개 여단(약 3600명)을 투입하도록 계획했다. 이번엔 국회에 육군특수전사령부(특전사) 병력 280명 정도를 투입한 것도 차이가 있다. 실행되지 않은 박근혜 계엄 문건에 비해 윤 대통령의 계엄이 훨씬 준비 없이 시행된 셈이다.

기무사 계엄 문건서 가장 논란이 된 부분은 ‘국회의 계엄 해제 시도 시 조치사항’이었다. 지난 2017년 당시에도 여소야대 정국으로 계엄 해제가 가능했기 때문에 여당 의원들이 계엄 해제 의결에 참여하지 않도록 하고 국회의장의 직권상정을 차단하는 한편, 불법시위 등에 참여하는 국회의원을 현행범으로 사법처리해 의결정족수에 미달하도록 유도한다는 실행 방안까지 수립된 바 있다.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뒤 국회의원 체포·구금은 없었지만, 계엄군이 국회에 강제로 진입하는 상황은 벌어졌다. 지난 4일 오전 12시30분께 소총을 든 계엄군이 국회 본관 창문을 깨고 건물 안으로 강제 진입했다.

조승래 민주당 수석대변인은 이날 “계엄군이 국회에 난입했을 때 수도방위사령부 특수임무대가 이재명 대표를 체포·구금하려 했던 시도가 폐쇄회로(CCTV)로 확인됐다”며 “확인해보니 이 대표와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 우원식 국회의장을 체포하려는 체포대가 만들어져서 각기 움직였다”고 주장했다.

또 계엄사령과의 특별조치권을 발동해 체포와 구금, 압수, 수색, 거주, 이전, 언론, 출판, 집회, 결사에 한해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검토 의견도 달렸다. 실제로 실행됐다면 집회와 시위 금지, 통행금지 등은 물론 광범한 기본권 제한 조치가 예상되는 내용이다. 

박근혜 기무사 문건 재조명
예고된 경계, 보수정권 악습

박근혜 기무사의 ‘치밀한’ 계엄 계획은 실현되지 않은 채 폐기됐다. 대규모 수사가 이뤄졌지만 내란음모 혐의가 아닌, 몇몇 관계자들이 허위 공문서 작성 등으로 가벼운 처벌을 받는 데 그쳤다. 

일각에선 예고된 사태라는 의견도 있다. 앞서 야권이 언급한 계엄 준비 의혹도 재조명됐다. 민주당 김민석 최고위원은 지난 8월 “계엄령 빌드업 불장난을 포기하라”고 촉구한 바 있다. 이에 여당은 “무책임한 선동”이라고 일축했다. 결과적으로 윤 대통령이 지난 3일 비상계엄을 선언하면서 김 최고위원의 예언은 적중한 셈이 됐다.

민주당서 계엄 주장이 나오기 시작한 건 지난 8월, 전당대회 무렵이었다. 당시 최고위원 후보였던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출신 민주당 김병주 의원이 당시 김용현 대통령경호처장을 국방부 장관 후보로 지명한 데 대해 “탄핵과 계엄 대비용”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는 최고위원에 선출된 직후 첫 최고위원회의서도 “이러다가 탄핵 정국에 접어들면, 박근혜 전 대통령처럼 무너지지 않고 군을 동원해 계엄령을 선포하는 것은 아닌지 많은 국민이 걱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후 ‘총대’를 멘 건 김 최고위원이었다.

그는 전당대회 후 최고위원회의서 “최근 정권 흐름은 차지철 스타일의 야당 입틀막 국방부 장관의 갑작스러운 교체와 대통령의 뜬금없는 반국가 세력 발언으로 이어지고 있다”며 “국지전과 북풍 조성을 염두에 둔 계엄령 준비작전이라는 것이 저의 근거 있는 확신”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저는 박근혜 탄핵 국면서 계엄령준비서 정보를 입수, 추미애 당시 대표에게 제보했던 사람 중 하나”라며 ‘정보’에 근거한 의혹 제기라고 강조했다.

지난 9월에는 윤 대통령 또는 비서실장·안보실장을 향해 계엄령 준비 의혹과 관련해 공개토론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후엔 김 최고위원 등과 함께 국방위 소속 민주당 의원들이 정부가 계엄을 선포할 때 국회 동의를 받도록 하는 내용의 계엄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역사적인
평행이론

민주당 이재명 대표도 지난 9월 여야 대표회담 모두발언서 ‘계엄 준비설’을 언급하면서 실현 가능성을 놓고 논란이 된 적이 있지만, 당시 여당은 이를 괴담으로 치부한 바 있다.

이 대표는 지난 9월1일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와의 회담서 “최근 계엄 이야기가 자꾸 나온다”며 계엄령 선포설을 언급한 바 있다. 그는 “종전에 만들어졌던 계엄안을 보면 계엄 해제를 국회가 요구하는 것을 막기 위해, 국회의원을 계엄 선포와 동시에 체포·구금하겠다는 계획을 꾸몄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주장했다. 

<smk1@ilyosisa.co.kr>

 

<12·3 계엄 후폭풍> 외신 반응 보니···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와 철회가 국제적인 이슈로 번져 낯 뜨거운 장면을 연출했다.

미국의 외교 전문지 <포린폴리시>는 지난 3일(현지시각) 윤 대통령의 조치를 두고 “궁지에 몰린 윤 대통령이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꺼내든 특별한 카드였지만, 한국 국회가 만장일치로 이를 거부하며 굴욕적인 실패로 끝났다”며 “대통령직을 정의할 치명적인 오점”이라고 평가했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윤 대통령의 계엄령은 한국 민주주의의 힘을 시험했으며 그의 미래를 더욱 불확실하게 만들었다”고 분석했다. 이어 “윤 대통령의 행동은 1960~1970년대 군부 독재자 박정희의 전술을 떠올리게 한다”며 그가 정치적 양극화를 악화시키는 자충수를 뒀다고 지적했다.

중국 신화통신 계열의 소셜미디어 계정 ‘뉴탄친’은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전 세계를 적으로 돌리는 일이 현실서도 벌어졌다”며 김건희 여사를 이번 사건의 주요 배경으로 언급했다.

뉴탄친은 계엄령 발령이 김 여사 특검법 재표결을 앞둔 시점서 이뤄졌다는 점에 주목하며 “윤 대통령의 극단적 선택은 오히려 자신의 정치적 몰락을 자초했다”고 분석했다.

일본 주요 언론들 또한 “한국 민주주의의 후퇴를 상징하는 사건”이라며 관련 내용을 비중 있게 다뤘다. 윤 대통령이 국회에 군 투입을 지시한 점과 미국과의 외교적 긴장 상황 등을 상세히 전하며 “정치적 도박이자 한국 정치의 불안정성을 보여준 사례”로 평가했다.

한편, 다른 나라의 주요 계엄령 사례로는 1949~1987년 대만을 꼽을 수 있으며, 대만 국민당 정부와 중국 공산당과의 갈등으로 계엄령을 선포해 약 38년 동안 유지됐다.

이 기간 동안 정치적 반대 세력 억압 및 표현의 자유 제한이 이뤄졌다.

필리핀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도 1972~1981년 계엄령을 통해 독재를 강화했다. 이를 통해 정치적 반대자들을 체포하고 언론의 자유를 제한했으며, 헌법을 개정해 권력을 공고히 했다.

1981~2012년 이집트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의 암살 이후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이 계엄령을 장기적으로 유지하며 정치적 반대 세력을 억압하고 기본권을 제한하기도 했다.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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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덮치는 문재인 그림자

이재명 덮치는 문재인 그림자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대통령선거는 전 정부의 공과를 통째로 평가받는 시험이다. 여당 후보는 전 정부의 공이 크면 후광을 입고, 반대로 과가 많으면 핸디캡을 안고 시험장에 들어서는 셈이다. 이번 대선 정국은 대통령 탄핵으로부터 시작됐다. 야당은 5년 만에 정권을 교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정권 창출에 성공한 대통령은 집권 1~2년 차에 가장 강한 힘을 발휘한다. 3~4년 차에 이르면 정부 안팎서 누수가 발생한다. 빠르면 이 시기에 레임덕이 시작된다. 임기 마지막 해에는 정권 재창출을 위해 몸을 사려야 한다. 지지율에 따라 차기 대선에 끼치는 입김도 달라진다. 5년 단임제 이후 대체로 나타나던 대통령의 모습이다. 주기설 깬 집값 폭등 국회의원 선거나 지방선거가 중간 평가의 성격을 띤다면 대선은 최종 시험에 가깝다. 모든 정당의 목표가 정권 창출인 만큼 대선의 무게감은 남다르다. 행정부 수장을 넘어 국가원수로서 대통령이 갖는 권한이 그만큼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결과로 대통령직선제가 도입됐다. 국민 모두에게 투표권을 부여하고 대통령을 ‘직접’ 뽑을 수 있도록 헌법이 개정된 것이다. 대통령직선제가 정착된 이후 정권교체는 10년 주기로 이뤄졌다. 보수 진영의 노태우·김영삼정부에 이어 진보 진영의 김대중·노무현정부가 들어섰다. 이후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의 당선으로 보수 진영이 다시 정권을 잡았다. 박 전 대통령이 탄핵으로 물러난 뒤 진보 진영의 문재인 전 대통령이 재수 끝에 청와대에 입성했다. 그대로 이어지는 듯했던 ‘10년 주기설’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등장으로 깨졌다. 5년 만의 정권교체가 진보 진영에 안긴 충격은 컸다. 문 전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은 퇴임 전까지 40% 안팎을 오르내렸다. 지지율 10~20%대를 오가며 레임덕에 시달렸던 과거 대통령 때와는 다른 양상이었다. 그럼에도 진보 진영은 정권 재창출에 실패했다. 득표율 차이는 1%도 되지 않았다. 지난 대선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후보는 윤 전 대통령에게 0.73%p 차이로 졌다. 대선 전 여러 여론조사에서 보여준 윤 전 대통령이 이 후보를 넉넉하게 앞선다는 결과와 비교해서는 선전이었지만 문 전 대통령의 지지율을 고려하면 충격적인 패배였다. 게다가 당시 윤 전 대통령은 선출직 출마 경험이 단 한 번도 없는 ‘초보 정치인’이었다. 대선 패배, 서울이 결정적 역할 부동산 가격이 낙선에 영향 줘 민주당에서는 대선 패배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분출했다. 이 과정서 레이더망에 걸려든 게 ‘부동산’ 문제였다. 정확하게는 문재인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도마 위에 올랐다. 문정부에서는 20번이 넘는 부동산 대책이 쏟아졌다. 정부 발표가 나올 때마다 부동산시장은 널뛰었다. 실제 윤 전 대통령 승리의 쐐기를 박은 서울 표심이 부동산 정책에 영향을 받았다는 분석이 개표 직후 제기됐다. 지난 대선은 말 그대로 양 진영을 ‘쥐어짠’ 선거였다. 국민의힘과 민주당의 ‘텃밭’인 영남과 호남 지역서 총결집했다. 당락을 가른 건 서울서의 격차였다. 윤 전 대통령은 서울서 31만여표를 앞섰다. 전체 표 차이인 24만표보다 많다. 윤 전 대통령은 마포·용산·성동 등 이른바 ‘마용성’으로 불리는 지역과 광진·강동·양천 등 아파트가 밀집돼있으면서 상대적으로 소득 수준이 높은 지역서 이겼다. 구별로 따지면 25개 구 중 14곳에서 윤 전 대통령에게 더 많은 표를 몰아줬다. 21대 총선 때 민주당이 4곳을 빼고 21개 구를 이긴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선방이었다. 노원·도봉·강북 등 ‘노도강’으로 불리는 지역서도 윤 전 대통령은 선전했다. 이 지역은 민주당 지지세가 강한 곳이다. 재건축·재개발 아파트가 밀집돼있다. 승부 자체는 이 후보가 이겼지만 표 차가 근소했다. 총선 때 20% 가까이 차이 났던 게 대선에서는 1% 안팎으로 줄었다. 부동산 문제에 따른 민심이반이 뚜렷하게 드러났다는 분석이다. 완전한 실패 최악의 실정 같은 해 8월 국회입법조사처에서 발간한 <제20대 대통령선거 분석> 자료에도 부동산이 가른 표심이 언급돼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대선에서 유권자가 관심을 가진 의제는 경제 회복과 주거 안정 등 부동산 정책이었다. 대선 전 여론조사 전문기관 한국갤럽서 조사한 대선 주요 의제 관련 설문서도 경제 회복(32%), 부동산 문제 해결(32%)이 첫손에 꼽혔다. 40~50대보다 30대서 부동산 문제에 관한 관심이 컸다. 그러면서 이 후보가 과거 민주당 후보에 비해 수도권 득표가 낮았다며 부동산 가격 상승과 관련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민주화 이후 모든 대선서 민주당 계열 후보가 국민의힘 계열 후보에게 서울서 패한 적은 2007년밖에 없었다”며 “수도권은 인구가 집중된 탓에 득표율 차이가 작더라도 득표 차는 매우 크게 나타난다. 그만큼 선거 승패에 수도권 표심의 영향이 컸다”고 설명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부동산 이슈와 득표율의 상관관계를 보기 위해 동 단위로 서울 지역의 아파트 가격을 살폈다. 아파트 가격 변동에 따른 득표율을 본 것이다. 분석 결과 2021년 아파트 가격과 2020~2021년 가격 변동이 윤 전 대통령, 이 후보의 득표율과 상관성이 높았다. 가격 변동보다는 가격 자체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타났다. 보고서에 따르면 2021년 아파트 평(3.3㎡)당 평균 가격이 높은 지역일수록, 아파트 가격 증가폭이 큰 지역일수록 윤 전 대통령의 득표율이 이 후보보다 높았다. 또 재산세 부담이 증가한 지역서 윤 전 대통령에 대한 지지가 많았다. 재산세가 늘었다는 건 그만큼 부동산 가격이 올랐다는 뜻이다. 지지율도 무용지물 민주당서 지목한 패배 원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민주당은 대선 패배 1년 뒤인 2023년 8월 녹서(Green Paper, 정책을 제안하고 다양한 의견 수렴 과정을 담은 대화록) <민주당 재집권 전략 보고서>를 발간했다. 민주당 을지키는민생실천위원회(을지로위원회) 출범 10주년을 맞아 발표한 일종의 대선 패배 ‘반성문’이었다. 민주당은 해당 보고서에서 “오락가락하는 정책으로 집값 상승을 잡지 못했다”고 짚었다. 문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보수와 진보 양 진영서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며 그 원인을 일관성 부족에서 찾은 것이다. 그러면서 “노무현정부 부동산 정책도 부족한 것이 많았지만 선거 대패와 당내 비난에도 철학과 원칙을 버리지 않은 점은 높게 평가된다”며 “문정부는 세제 개편 이후에도 집값이 계속 상승하면서 비판에 직면하자 전반적인 세제를 완화하는 정반대 조치를 취했다”고 지적했다. 문정부는 부동산, 즉 집이 투자가 아닌 거주의 대상이라는 점을 시장에 각인시키는 데 정책 방향을 맞췄다. 당연히 투기 수요를 때려잡는 데 모든 역량이 집중됐다. 부동산으로 재산을 불리려는 세력이 많아지면서 집값이 왜곡되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른바 ‘부동산 투기와의 전쟁’이 벌어졌다. 문정부는 세금 부과, 대출 규제 등으로 돈줄을 조였다. 2017년 다주택자 양도소득세 중과, 대출 규제 강화 등의 정책이 시행됐고 2018년에는 주택을 보유한 사람이 규제 지역서 새집을 사려 할 경우 주택담보대출을 받지 못하도록 했다. 서울 25개 구, 분당·과천·하남·세종 등이 규제 지역으로 묶였다. 규제가 심해질수록 집값은 천정부지로 뛰었다. 부동산이 ‘우상향 안전자산’이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시중에 풀린 돈이 몰리고 또 몰렸다. 저가의 낡은 집 여러 채보다 고가의 좋은 집 한 채를 사자는 ‘똘똘한 한 채’ 이론도 생겨났다. ‘자고 일어나면 집값이 오른다’는 말이 돌면서 부동산 심리를 크게 자극한 것이다. 당시 ‘영끌족’ 지금은 곡소리 통계 조작으로 검찰 수사까지 부동산을 움직이는 건 ‘심리’라는 말이 있듯 너도나도 집을 사는 데 혈안이 되면서 집값이 요동쳤다. 집값이 오르는데도 수요가 있으니 계속 상승하는 구조였다. 이 과정서 ‘벼락 거지’ 등의 말이 생겨났다. 부동산 등 자산 가치가 급격하게 오르면서 상대적으로 가난해진 상황을 일컫는 표현이다. 동시에 상대적 박탈감을 호소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어느 정부든 출범하자마자 제일 먼저 손대는 게 부동산 정책일 정도로 우리나라 국민의 ‘집’ 사랑은 남다른 데가 있다. 문정부 역시 임기 내내 ‘집값 잡기’에 몰두했다. 하지만 끝내 실패했다. 몇몇 전문가는 문정부의 가장 큰 패착으로 부동산 정책을 꼽을 정도다. 그 여파가 대선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후폭풍이다. 문정부 당시 ‘갭투자(전세 끼고 매수)’ 방식으로 집을 마련한 이들이 현재 파산 지경에 이르고 있다. 폭탄 돌리기를 하다가 더 버티지 못하고 폭발한 것이다. ‘영끌족’의 몰락이다. 영혼까지 끌어모아 집을 산 사람은 높아진 금리를 견디지 못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문정부가 부동산 정책을 펴면서 통계를 조작했다는 의혹이 제기돼 수사가 진행 중이다. 당시 정책을 주도했던 대통령 비서실장, 국토교통부 장관 등은 감사원의 의뢰로 전부 수사 대상에 올라 있다. 이들은 정부 정책을 뒷받침하는 통계를 만들어내라고 통계청, 한국부동산원 등을 압박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감사원에 따르면 문정부가 통계를 조작한 횟수는 102회에 달한다. 2018년 1월부터 2021년 10월까지 일어난 일이다. 청와대와 국토교통부는 한국부동산원에 주택 가격 변동률을 하향 조정하도록 하거나 부동산 대책이 효과가 있는 것처럼 통계 수치 조정을 지시했다. 민주당은 ‘전 정권에 대한 탄압’이라면서 반발 중이다. 이번에도 이슈 될까? 이 후보와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재건축·재개발을 활성화해 공급을 확대하겠다는 공약을 내놨다.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의 공약도 비슷하다. 후보별로 차이가 미미해 이번 대선에서는 부동산 이슈가 생각보다 대망론에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하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문정부의 정책 후폭풍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는 만큼 또다시 문정부에 이 후보가 발목을 잡히는 형국이 반복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