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발톱 세운 공수처 사냥감은?

윤 털릴 때까지 검찰만 팬다?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의 칼끝이 한 점에 집중되고 있다. 바로 검찰이다. 당초 문재인정부 검찰개혁의 일환으로 설립된 만큼 취지에 걸맞은 행보를 보이고 있는 셈이다. 대선이 9개월 앞으로 다가온 상황에서 공수처의 행보가 어떤 나비효과를 일으킬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이하 공수처)는 ‘공수처는 고위공직자 및 그 가족이 범한 직권남용, 수뢰, 허위공문서 작성 및 정치자금 부정수수 등의 특정범죄를 척결하고, 공직사회의 특혜와 비리를 근절해 국가의 투명성과 공직사회의 신뢰성을 높임으로서, 국민 모두에게 균등한 기회가 보장되는 정의롭고 공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설치됐습니다’라고 홈페이지에 그 설치 목적을 밝히고 있다. 

출범부터
시끌시끌

공수처 설치 근거인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설치및운영에관한법률안’은 2019년 12월30일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됐다. 공수처 설치는 문재인 대통령의 1호 공약이자 여권의 대표적인 숙원이었다. 1996년 참여연대가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를 포함한 부패방지법안을 입법 청원한 지 23년 만에, 고 노무현 대통령이 2002년 대선 공약으로 내건지 17년 만에 입법화에 성공했다.

공수처는 대통령을 비롯해 국회의원·대법원장·헌법재판소장·국무총리와 국무총리비서실 정무직 공무원·검찰총장·판사·검사·시장·도지사 등을 수사할 수 있다. 이 중 판사·검사·경무관급 이상 경찰에 대해선 기소권도 갖는다. 또 중복되는 범죄 수사에 대해 검찰과 경찰보다 우선권을 지닌다. 

여기에 검·경 등이 범죄 수사 과정에서 고위공직자 범죄 등을 인지한 경우 이 사실을 즉시 공수처에 통보하는 조항이 법안에 담겼다. ‘통보 의무 조항’을 두고 수사 착수 단계부터 검·경 수사를 무력화하고 공수처가 특정 인사에 대한 선택적 수사 도구로 활용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공수처는 출범일인 지난해 7월15일을 훌쩍 넘긴 올해 1월21일 첫 발을 뗐다. 공수처장 후보 추천을 두고 여야간 갈등이 불거지면서 출범 시기가 늦어졌다. 당초 공수처법에는 공수처장 후보 추천 과정에서 야당의 비토권이 인정됐지만 지난해 12월10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공수처법 개정안은 이를 삭제했다. 

우여곡절 끝에 공수처는 김진욱 처장을 필두로 구색을 갖추기 시작했다. 하지만 행보마다 파열음이 울렸다. 이성윤 서울고검장(당시 서울중앙지검장) 황제 조사 논란, 5급 비서 특혜 채용 논란 등이 연이어 불거졌다. 수사 인력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인원을 제대로 채우지 못하는 일도 일어났다. 

3~9호 사건 전·현직 검사 겨냥
조희연 교육감 사건 역풍 고려?

관심을 모았던 공수처 1호 사건에 대해서도 비판이 이어졌다. 공수처는 지난달 10일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의 해직교사 특별채용 부당 의혹 사건을 1호 사건으로 등록하고 수사에 착수했다. 감사원은 조 교육감이 2018년 7~8월 해직 교사 5명을 특정해 특별채용 검토‧추진을 관련 부서에 지시했다며 조 교육감을 국가공무원법 위반으로 경찰에 고발했다.  

여권 인사로 분류되는 현직 교육감을 1호 수사 대상자로 선택하면서 정치적 독립성 논란을 불식시키려 한 것이라는 평가가 나왔지만, 일각에서는 기소권도 행사할 수 없는 사건을 굳이 주목도가 높은 1호로 선택했느냐는 비판이 적지 않았다.

이 같은 지적은 야당뿐만 아니라 여당에서도 터져 나왔다. 

지난 1월 출범 이후 이렇다 할 성과를 보여주지 못한 공수처는 최근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검·경 수사권 조정안과 함께 검찰개혁의 두 축으로 여겨졌던 공수처의 도입 배경이 선명해지는 모양새다. 문재인정부의 검찰개혁은 ‘검찰 힘빼기’로 요약되는 만큼 공수처가 그 역할에 충실하려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공수처는 지난 4월 1호 사건을 시작으로 한 달여 만에 9건에 대한 직접 수사에 나섰다.(17일 기준) ▲조희연 서울시교육감 해직 교사 부당 특별채용 의혹(1~2호) ▲‘김학의 별장 성접대’ 건설업자 윤중천 면담 보고서 허위작성 및 언론유출 의혹(3호) ▲이성윤 서울고검장 공소장 유출 의혹(4호) 등이다.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불법 출국금지 수사 외압 의혹(5호) ▲해남지청 현직 검사 직권남용 의혹(6호) ▲옵티머스 자산운용 펀드 사기 부실 수사·한명숙 전 국무총리 모해위증교사 수사 방해 의혹(윤석열 전 검찰총장 직권남용 혐의) (7~8호) ▲부산 엘시티 정관계 로비 사건 봐주기 수사 의혹(9호) 등도 보고 있다. 

한 달 만에
문어발 수사

사건의 면면을 살펴보면 친정권 인사를 보호하거나 반정권 인사에 칼을 대는 사건인 점이 눈에 띈다. 특히 조 교육감 사건을 제외한 3~9호는 모두 전·현직 검사를 수사 대상으로 하는 사건이다. 공수처가 검찰을 정조준하고 있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김진욱 공수처장이 직접수사를 통해 공수처의 존재감을 드러내려 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3호 사건 피의자는 2019년 대검 진상조사단 소속으로 ‘윤중천 보고서’를 작성한 이규원 검사다. 이 검사는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별장 성접대 의혹 사건 재조사 과정에서 핵심 인물인 건설업자 윤중천씨의 면담 보고서를 허위로 작성한 혐의 등을 받고 있다.

관련 내용을 특정 언론에 유출해 피의 사실 공표 혐의도 있다. 

4호 사건 역시 칼끝이 현직 검사로 향한다. 검찰은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불법 출국금지 수사 무마 의혹 사건에서 이성윤 서울고검장(당시 서울중앙지검장)을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혐의로 기소했다. 이후 언론을 통해 이 고검장의 공소장이 유출됐다.

이 과정에서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이광철 청와대 민정비서관의 이름이 흘러 나왔다.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의 불법 출국금지 수사 무마 의혹과 관련한 5호 사건에서도 검사들을 겨냥했다. 공수처는 사건에 연루된 문홍성 대검찰청 반부패·강력부장과 김형근 서울북부지검 차장검사, 검사 A씨 등 3명을 입건했다. 이들은 김 전 차관 불법 출금 사건 수사에 외압을 가한 의혹을 받고 있다. 

9개월 남은
대선 일정

윤석열 전 검찰총장에 대한 수사도 착수했다. 공수처는 지난 10일 윤 전 총장 직권남용 혐의 관련 2개 고발 사건을 수사하기로 결정했다. 옵티머스 사건 불기소와 한명숙 전 국무총리 모해위증교사 사건 조사·수사 방해 등으로 사법정의바로세우기시민행동(사세행)에서 고발한 사건이다. 


옵티머스 불기소 사건은 윤 전 총장이 서울중앙지검장이던 2019년 5월 한국방송통신전파진흥원의 옵티머스 수사의뢰 사건을 무혐의 처분했고, 이 과정에서 윤 전 총장이 수사에 개입해 사건을 축소했다는 내용이다. 사세행은 “윤 전 총장이 부하에게 수사 축소 지시를 한 것으로 의심된다”고 주장했다.

또 한 전 총리 모해위증교사 의혹 사건 수사와 기소를 방해했다고도 주장했다. 사세행은 “한 전 총리 모해위증교사 의혹 사건을 조사하던 임은정 대검 감찰정책연구관이 정식 수사를 위해 윤 전 총장에게 서울중앙지검 직무대리 발령을 수차례 요청했지만, 뚜렷한 이유 없이 거부당했기 때문에 지휘권의 부당한 남용이자 노골적 수사방해”라고 주장했다.

9호 사건은 ‘부산 해운대 엘시티 의혹 수사 부실’ 사건으로 역시 검찰을 타깃으로 잡았다. 2016년 부산지검의 엘시티 정관계 특혜 의혹 수사가 부실했다고 시민단체가 고발했다. 부산참여연대는 지난 3월 윤대진 법무연수원 기획부장, 임관혁 광주고검 검사 등 11명과 성명 불상의 차장·부장검사를 고발했다. 

공수처는 전·현직 검사에 대한 직접 수사를 진행하면서 검찰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여가고 있다. 하지만 공수처 앞에 놓인 과제는 첩첩산중이다. 당장 ‘유보부 이첩’을 두고 검찰과 정면으로 맞부딪쳤던 공수처는 법원의 판단에 한발 물러선 상황이다.

공수처가 수사 과정에서 들고 나온 유보부 이첩에 대해 법원이 검찰의 손을 들어주면서 난감한 처지가 된 것.

미묘한 수사 착수 시점
 “선거 개입은 아니다”


공수처는 지난 3월 김 전 차관 불법 출금 사건에 연루된 이규원 검사와 이성윤 서울고검장 등을 검찰로 다시 이첩하면서 ‘기소권은 우리가 행사할 테니 검찰은 수사만 한 뒤 사건을 다시 송치하라’는 유보부 이첩 개념을 제시했다. 검찰은 ‘사건과 권한을 분리해 이첩할 수 없다’ ‘검찰의 수사·기소권은 공수처가 부여하는 게 아니다’라고 반발하며 신경전을 벌였다. 

하지만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는 지난 15일 자격모용 공문서작성 등 혐의로 기소된 이규원 검사의 2차 공판준비기일에서 “검찰의 공소제기가 위법하다는 명확한 근거를 찾지 못했다”며 “확정적 견해는 아니다. 변경이 불가능하거나 확정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검사 공소제기가 적법하다는 것을 전제로 본안 심리를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출범 전부터 제기됐던 정치적 중립성 논란은 꼬리표처럼 따라붙고 있다. 이성윤 서울고검장 공소장 유출 의혹 사건(4호)은 박범계 법무부 장관이 문제 삼았던 사안이다. 박 장관은 이 고검장에 대한 공소장이 언론에 보도된 이후 대검에 진상 조사를 지시하고 “차곡차곡 쌓아두고 있다”며 검찰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바 있다. 

이 때문에 공수처에서 공소장 유출 의혹 사건을 직접 수사하겠다고 나섰을 당시 ‘하명 수사’라는 말까지 나왔다. 법조계에서는 공소장 유출 자체의 범죄 성립 여부에 대해서도 갑론을박이 오가고 있다. 공수처는 법무부 장관의 발언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지만 의심의 눈초리는 여전한 상황이다. 

여기에 7~8호 사건, 이른바 윤 전 총장을 겨냥한 고발사건을 직접 수사하겠다고 나선 것도 뒷말이 나오고 있다. 대선을 9개월 앞둔 상황에서 유력 대선후보인 윤 전 총장에 대한 수사를 개시하면서 선거 개입 논란에 휘말리게 된 것이다.

공수처가 윤 전 총장에 대한 직접 수사를 진행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야권은 물론 여권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제기됐다. 

어떤 결과도
논란 될 듯

공수처는 윤 전 총장 수사 착수 논란에 정면돌파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김 처장은 지난 17일 기자간담회에서 “공수처가 정치적 중립을 지킨다는 명목하에 정치적 논란이 있을 수 있는 사건을 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아 보인다”며 수사 의지를 분명히 했다. 이어 “선거에 임박해서, 선거에 개입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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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페이스북에 사과 입장을 밝혔다. 국민의힘 원내 지도부도 기자회견을 열고 고개를 숙였다. 사과는 짧았지만,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비난은 길었다. 사과 의견을 통해 확인되는 국면 전환 노림수는 ‘한동훈을 제외한 빅텐트’인 걸까? 국민의힘 공보실은 지난 2일 오후 10시54분 출입기자들에게 지난 3일 지도부 일정을 공지했다. 공보실에 따르면, 지도부의 일정은 ‘통상 일정’이었다.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의미다. 지난 3일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1주년이었다. 통상의 의미는? 지도부의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것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의 비상계엄 관련 공개 사과 및 기자회견 일정이 없었단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장 대표는 지난 3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사과 의견을 밝혔다. 장 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계엄이었다”는 등 “정당화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소지가 있는 주장부터 제시했다. 윤 전 대통령 파면에 대해서도 “한국 정치의 연속된 비극을 낳았고, 국민과 당원들께 실망과 혼란을 드렸다”는 등 ‘탄핵 반대’ 의견을 유지했다. 장 대표에 따르면, 국민의힘의 잘못은 하나로 뭉쳐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는 부분이었다. 자신에 대해서도 “당 대표로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강조했다. “장 대표가 사과하지 않을 것”이란 예상은 같은 날 오전 4시50분경 이정재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국민의힘 추경호 의원의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확실시됐다. 장 대표는 페이스북 게시글에서도 “추 의원 구속영장 기각은 어둠의 1년이 지나고 두터운 장막이 걷히고, 새로운 희망의 길이 열리는 신호탄”이라면서 대정부 투쟁에 의미를 부여했다. 장 대표는 “이재명정권의 대한민국 해체 시도를 국민과 함께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대표가 사과 불가는 지난달 28일 대구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장외집회에서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었다. 당시 그는 “비상계엄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우리가 흩어지고 분열한 결과, 이재명정권이 탄생했단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이재명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연설 대부분을 채웠다. 5일 간격으로 같은 얘기를 반복한 것이었다. 당시 장 대표가 주장한 민주당에 대한 비난의 핵심 내용은 ▲의회 폭거·국정 방해 ▲무모한 적폐 몰이에 따른 공무원 사찰 위협 ▲폭거로 인한 민생 파탄·국가 시스템 붕괴 ▲내란 몰이 등이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국민의힘의 비상계엄 관련 사과는 ▲송언석 원내대표 ▲유상범·김은혜 원내부대표 ▲최수진·최은석 원내대변인 등 원내 지도부 차원에서 나왔다. 송 원내대표 등은 지난 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께 큰 충격을 드린 비상계엄 발생을 막지 못한 데 대해 국민의힘 국회의원 모두는 무거운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며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군인·공직자·의료인·자영업자 등 비상계엄 선포 피해자들에게 “깊은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고개 숙였다. 하지만 이후의 메시지는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 등 장 대표의 주장과 크게 차이가 없는 내용이었다. 송 원내대표는 “국민의힘 의원들은 패배의 아픔을 딛고 분열과 혼란의 과거를 넘어서 다시 거듭나겠다”며 “소수당이지만 처절하게 다수 여당과 정권에 맞서 싸우겠다”고 강조했다. 이전까지 국민의힘에서 장 대표에게 공개적으로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정치인은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용태·김재섭·권영진·엄태영·이성권·조은희 의원 등이었다. 국민의힘 양향자 최고위원은 지난달 29일 대전에서 진행된 장외집회 중 “국민의힘은 불법 계엄을 방치했으니,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일부 지지자들의 강한 항의를 받았다. 김재섭 의원은 지난달 28일 YTN 라디오 <더 인터뷰>에 출연해 “당 지도부의 사과가 없으면 제 나름의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며 “같이 메시지를 낼 국민의힘 의원들이 약 20명은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연판장을 돌리거나 기자회견을 할 수도 있다”는 압박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었다. 오 시장도 같은 날 채널A <김진의 돌직구 쇼>에 출연해 “중도층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도 당 차원의 사과가 필요하다”며 “공당이라면 반성문을 쓰는 게 도리”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들은 당과 무관하게 대국민 사과를 했다. 오 시장은 지난 3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의힘 소속 중진 정치인이자, 서울시민의 일상을 책임지는 시장으로서 그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그날의 충격과 실망을 기억하는 모든 국민께 거듭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국민의힘 의원 25명은 지난 3일 국회에서 “비상계엄 선포 당시 집권여당의 일원으로서 비상계엄을 미리 막지 못하고 국민께 커다란 고통과 혼란을 드린 점에 대해 거듭 국민 앞에 고개 숙여 사죄드린다”면서 ▲헌법재판소의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 존중 ▲윤 전 대통령과의 정치적 단절 ▲국민의힘 체질 개선·재창당 수준의 혁신 등을 약속했다. 이어지는 각자 플레이 장 대표에게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후 자체적으로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한 국민의힘 정치인들은 대체로 수도권에 기반을 둔 소장파다. 이들 중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정당으로 자리매김하면 가장 큰 손해를 볼 정치인으로는 오 시장과 김재섭·김용태 의원이 거론된다. 오 시장은 높은 개인 인기를 바탕으로 민주당의 서울시장 탈환 공세에 맞서고 있다. 김재섭 의원의 지역구 서울 도봉갑은 원래 민주당 텃밭이었다. 김 의원은 지난해 총선 당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1094표 앞서 어렵게 이겼다. 지난해 12월7일 국민의힘의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 표결 집단 이탈에 동참했을 때도 지역구에서 규탄 집회가 개최되는 등 홍역을 치렀다. 김용태 의원도 경기 가평·포천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박윤국 한국도자재단 이사장에 2774표 앞서 어렵게 금배지를 다는 데 성공했다. 국민의힘에 대해선 “강경 보수화가 진행된다”는 지적이 각계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 우려는 장 대표가 지난달 16일 유튜브 채널 ‘이영풍 TV’에 출연해 ▲자유통일당 ▲우리공화당 ▲자유민주당 ▲자유와혁신 등 원외 강경 보수 4당과의 지방선거 연대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깊어졌다. 장 대표는 지난달 28일 개혁신당과의 연대 가능성에 대해선 “지금은 연대를 논의할 때가 아니”라면서 선을 그었다. 최근 국민의힘에선 “한동훈 전 대표를 축출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만한 밑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다. 국민의힘 여상원 윤리위원장은 지난달 17일 사의를 표명했다. 여 위원장은 “당에서 ‘물러나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며 “굳이 능욕당하면서 자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돼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답했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윤리위원회가 ‘계파 갈등 조장’을 이유로 윤리위에 넘겨진 국민의힘 김종혁 전 최고위원에 대해 주의 조치만 내린 것 때문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국민의힘 우재준 청년 최고위원은 지난달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원하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고 윤리위원장을 사퇴시키는 게 정당한 일이냐”며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드는 민주당과 뭐가 다르냐”고 정면 비판했다. 이어 국민의힘 당무감사위원회는 지난달 28일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한 조사 절차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당원 게시판 의혹은 “국민의힘 당원 게시판에 올라온 윤 전 대통령 부부 비방글 작성에 한 전 대표 가족이 연루된 게 아니냐”는 의혹이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밝혀 당원에게 알릴 것”이라는 방침을 밝혔던 바 있다. 윤 전 대통령 부부는 정치적으로 몰락해 서울구치소에 갇혔고,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국민의힘이 당원 게시판 의혹을 밝혀낸 후 거둘 수 있는 실익으로는 “한 전 대표를 국민의힘에서 쫓아내고, 친한(친 한동훈)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거론된다. 구 친윤(친 윤석열)계가 거둘 수 있는 이익이다. 한 전 대표에 대해선 보수 성향 유권자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명확하게 나뉜다. 하지만 한 전 대표는 윤 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갈등하면서 비상계엄 해제에 동참했던 이력이 있다. 이 때문에 한 전 대표는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일색이 되는 걸 막는 방파제·상징”이란 분석이 오랫동안 있어왔다. 친한계로 거론되는 국민의힘 의원 중 상당수는 수도권에 지역구를 둔 소장파라는 분석이 나온다. 윤리위원장 쫓아낸 이유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선 “윤 전 대통령이 정치에서 폭력을 동원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몰랐던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정치의 본질은 대화·토론·협상이다. 영국 하원에선 20세기 초까지 의원이 총칼을 이용해 결투·난투를 했다. 물리적 폭력이 아닌 ‘언어폭력’ 선에서 공방을 이어가는 정치 문화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정착됐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전 세계에 줬던 충격은 민주주의가 충분히 성숙했다고 믿었던 대한민국에서 군을 동원해 정적을 제거하려던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는 사과 메시지를 먼저 짧게 발표하면서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은 길게 이어가는 형식의 사과 의견을 밝혔다. 사과엔 ▲직접적인 반성 ▲분명한 잘못 인정 ▲재발 방지 약속 ▲보상 약속 등 4개의 원칙이 제기됐는데 “상대방 비판에 더 중점을 둔 사과는 역설적으로 ‘반성을 하는 게 맞느냐’는 비판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당시 대국민 사과를 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 2016년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후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 전 대통령은 “모든 것이 제 불찰이고, 국민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후속 조치 중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미흡했고, 우려를 덜어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국정을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라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면서 “국민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은 당시 크게 불거졌던 각종 우려를 ‘괴담’으로 규정지었다. 이 때문에 촛불 시위 세력이 제시한 재협상 시한과 맞물린 시점에서 사과가 나온 점을 감안할 때 국면 전환을 위한 명분 쌓기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이미 각종 의혹이 광범위하게 제기돼 근거 자료들까지 제시되는 시점에서 “취임 후 일정 기간 일부 자료들에 대해 최순실씨의 의견을 들은 적은 있지만, 청와대 보좌 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뒀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의 해명은 신뢰를 잃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두 전직 대통령의 사과처럼 자신의 주장을 뒤에 배치한 후 더 큰 비중을 부여하는 형식을 유지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이런 사과 형식은 국면 전환·지지층 결집 목적을 가진 이들이 활용한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고대 로마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있었던 마르쿠스 브루투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설이 꼽힌다. 카이사르 살해를 주동한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 대한 내 사랑은 카이사르를 사랑하는 다른 분보다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한다”고 선언한 후 “로마를 더 사랑해서 카이사르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이어 “나라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죽였다”고 강조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존경할 만한 분들”이라고 선언한 후 카이사르를 찬양하면서 그의 유언장을 공개했다. 유언의 핵심 내용은 “내 재산을 로마 시민에게 기증한다”는 것이었다. 또 카이사르가 살해당할 당시 입었던 칼자국과 피로 얼룩진 옷도 공개했다. 흥분한 로마 시민은 암살자들의 집을 습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토니우스·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정국을 장악했다. 불리한 내용을 먼저 짧게 거론한 후 유리한 내용을 장황하게 거론하는 형식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즐겨 이용된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가 짧은 사과 의견을 밝힌 후 이재명정부·민주당을 비중 있게 비판한 것도 강경 보수 세력에겐 강한 인상을 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장 대표는 비상계엄의 원인을 ‘의회 폭거’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윤 전 대통령은 카이사르가 된다. 비상계엄 해제에 찬성해 사실상 윤 전 대통령 몰락에 가담한 한 전 대표와 친한계는 브루투스 일당이 되는 구도가 그려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강경 보수 세력은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해 어떤 의견을 제시할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공나형 전남대 학술연구교수는 지난 2022년 발표한 논문 <대통령의 공적 사과 담화에서 드러나는 ‘개입’ 양상>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1993년 쌀 시장 개방을 수용하면서 밝힌 대국민 사과와 박 전 대통령의 최순실 게이트 관련 대국민 사과를 분석했다. 공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선의로 행한 행위가 어쩔 수 없는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고 강조하면서 결과의 부정성에 관여하는 자신의 의도의 비중을 제거했다”고 분석했다. 박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자기 고백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그 고백의 원인이 되는 행위에 대해선 소극적”이라고 분석했다. 12월3일 조용히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어쩔 수 없었다”는 항변과 상대방 비판을 내용으로 채웠다. 그러면서 민주당 심판·보수 재건·대여 투쟁을 강조했다. 결국 두 사람의 답은 ‘한 전 대표를 제외한 빅텐트’ 방침 재확인으로 보인다. 국민의힘의 12월3일은 이렇게 조용히 지나갔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