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도자의 언어는 단순한 사견이 아닌 사회적 파급력을 동반한다. 특히나 대통령의 발언은 정책 신호가 되며, 국민에게는 행동 지침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따라서 국가 최고 지도자가 어떤 맥락에서 어떤 표현을 쓰느냐는 단순한 말실수를 넘어 국가의 신뢰와 안전, 더 나아가 민주주의적 리더십의 정당성과도 직결된다.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남긴 이른바 ‘타이레놀 발언’은 이 같은 맥락에서 적잖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사례다.
앞서 지난 22일(현지시각)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 기자회견에서 “아세트아미노펜 복용은 좋지 않다. 고열이 심할 경우 등 의학적으로 필요하지 않은 여성들은 임신 중 타이레놀 사용을 제한할 것을 강력히 권장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미국 식품의약국(FDA)는 “최근 몇 년간 증거에 따르면, 임신 중 아세트아미노펜 사용과 자폐증 및 ADHD의 후속 진단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음을 시사한다”면서도 “다만 그 인과 관계는 확립되지 않았으며 과학 문헌에 반대 연구가 있다는 점에도 유의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또 아세트아미노펜은 임신 중 발열 치료에 사용하도록 승인된 유일한 일반의약품이며, 임산부의 고열은 자녀에게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부연했다.
타이레놀 제조사인 켄뷰도 트럼프의 ‘사용 제한’ 주장에 반박했다. 켄뷰는 성명을 통해 “여러 세대에 걸쳐 각 가정에선 타이레놀을 신뢰했는데, 이는 타이레놀이 역사상 가장 많이 연구된 약물 중 하나기 때문”이라며 “10년 이상 엄격한 연구는 아세트아미노펜과 자폐증을 연관시키는 신뢰할 수 있는 증거가 없음을 나타낸다”고 주장했다.
트럼프는 1기 행정부는 물론, 지난해 2기 행정부 들어서도 자주 대중 앞에서 의학·보건 문제에 대해 즉흥적이고 단순화된 언급을 해 왔다. 이번 ‘타이레놀 발언’은 특정 질병이나 사회적 문제 해결과 관련해 “타이레놀을 먹으면 해결되는 것 아니냐”는 취지로 요약되는데 복잡한 의학적·정책적 사안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단순히 유머러스한 농담으로 치부할 수 있는 차원을 넘어섰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왜냐면 트럼프는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국가의 지도자인 데다, 그의 언어는 미국 사회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심각한 파급력을 미치기 때문이다. 지도자가 의학적·사회적 난제를 ‘타이레놀 한 알’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처럼 표현한다면, 이는 대중에게 왜곡된 메시지를 전달할 수밖에 없다.
통상 국가 지도자의 발언은 정책적 신호로 기능한다. 트럼프가 단순화된 언어를 통해 문제 해결의 복잡성을 축소시키면, 이는 관료 조직과 전문가 집단에 잘못된 압박을 가할 수 있다. 복잡한 원인과 구조적 대책이 필요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의 ‘간단히 해결할 수 있다’는 메시지는 실질적 정책 논의의 무게를 가볍게 만들어 버린다. 이는 정책 결정 과정의 왜곡으로 이어질 수 있다.
또 국민에게 행동 지침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도 높다. 특히 보건·의료와 관련된 사안에서 대통령의 말은 전문가의 조언보다 더 빠르고 직접적으로 대중에게 흡수된다. 비근한 예로,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트럼프가 “소독제를 주사하면 어떻겠느냐”는 취지의 발언 당시 일부 미국 국민이 중독 피해를 입었던 사태를 단순한 헤프닝으로 치부해선 곤란하다.
‘타이레놀 발언’ 역시 단순한 비유일지라도 대중은 이를 오해하거나, 국가 지도자가 의료 문제를 가볍게 보는 것으로 인식할 수 있다.
게다가 국제적 신뢰도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미국 대통령의 발언은 곧 미국의 입장으로 간주된다. 타이레놀 발언 같은 과도한 단순화는 미국의 정책 결정 과정이 비합리적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으며, 동맹국과 국제사회에서의 신뢰를 약화시킬 수밖에 없다.
‘타이레놀 발언’은 단순한 언어 실수라기보다는 그의 정치 스타일을 반영한다. 그는 일관되게 전문가 의견을 경시하고 대중적 직관에 호소하는 방식으로 정치적 입지를 강화해 왔다. ‘타이레놀’이라는 비유는 복잡한 문제를 단순하게 풀어내려는 그의 대중 정치 전략의 일환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반지성주의를 강화한다.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과학적 근거와 전문적 분석은 필수적이다. 지도자가 이를 무시하고 ‘간단한 해법’을 제시하는 순간, 사회는 과학적 합리성을 버리고 포퓰리즘적 감각에 휘둘리게 된다. 이는 공공정책의 질을 떨어뜨리고, 장기적으로는 사회 전체의 문제 해결 능력을 저하시키는 지름길이다.
트럼프가 이런 발언을 반복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대중에게 친숙하고 직설적인 언어는 즉각적인 주목을 끌고, 정치적 지지층의 결집을 유도하기 위함이다. ‘타이레놀’처럼 누구나 알 수 있는 상징을 사용하면 메시지는 빠르게 확산되고, ‘트럼프다운 솔직함’이라는 이미지가 강화된다. 이는 선거 국면에서 단기적으로 큰 효과를 발휘한다.
그러나 정치적 인기와 사회적 책임은 별개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지도자가 대중을 웃기거나 단순한 메시지로 공감을 얻을 수는 있지만, 그것이 공적 책임을 경감해 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즉흥적 발언으로 인해 전문가와 행정부가 뒤처리를 해야 하고, 국제사회가 불필요한 혼란에 직면하는 경우가 많았다.
타이레놀 발언 역시 정치적 유머로는 통했을지 몰라도, 국가 지도자의 언어로는 치명적인 무책임성을 드러냈다.
민주주의는 토론과 설득, 그리고 합리적 언어에 기반한다. 대통령의 발언은 단순한 정치적 수사가 아니라 정책 결정의 기준점이 된다. 따라서 지도자는 언어를 선택할 때 그 사회적 파급력을 고려해야 한다. 트럼프의 타이레놀 발언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지도자의 언어가 어떻게 남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단순한 말실수가 아니라, 민주주의적 리더십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이번 트럼프의 타이레놀 발언은 ‘지도자의 언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운다. 대통령은 개인이 아니라 제도의 상징이자 국가의 얼굴이다. 그의 언어는 국민의 행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국제사회에서는 국가의 신뢰도를 좌우한다. 그런 점에서 단순화된 언어와 무책임한 비유는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문제다.
정치인은 대중적 인기를 위해 단순하고 자극적인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개인의 정치적 이득보다 공적 책임이 우선한다. 그의 이번 발언은 단순한 해프닝으로 남지 않을 것이며, 민주주의 사회에서 지도자의 언어가 지녀야 할 무게와 책임을 일깨우는 반면교사로 기록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