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피플> 대통령 이재명 60년 인생사

안동 산골 소년공 대한민국 지도자로

[일요시사 취재1팀] 안예리 기자 = 제21대 대통령선거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당선됐다. 대선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탄핵 이후 실시된 조기 선거였으며, 정치권 전반에 걸친 격변 속에서 치러졌다. 이재명 대통령은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와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를 상대로 본선에 나섰고, 그 결과 최종 승리를 거머쥐었다.

이재명 대통령은 1964년 12월22일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도촌리서 태어났다. 5남2녀 중 다섯째로, 이 대통령의 유년기는 극심한 가난 속에서 시작됐다. 출생신고조차 제때 이뤄지지 않아 음력 기준으로 나이를 따지게 됐으며, 초등학교 입학을 위해 생일을 무속인을 통해 정했다고 알려졌다. 그의 가족은 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유지했지만, 수입이 너무 적어 안정적인 생활을 이어가기 어려웠다.

찢어지게
어려웠다

이 대통령의 가족은 1976년, 그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무렵 경기도 성남시로 이주한다. 당시 이주한 지역은 공장과 달동네가 공존하던 성남 상대원동이었고, 9명의 대가족은 반지하 단칸방에 거주했다.

이사 직후 어머니는 시장 공중화장실 관리인으로 일했으며, 이 대통령과 여동생은 대변 20원, 소변 10원을 받는 화장실 요금을 걷는 일을 도왔다. 아버지는 청소 일을 하며 생계를 잇는 동시에, 주변에서 폐지를 주워 고물상에 팔기도 했다. 이런 생활환경 속에서 이 대통령은 더 이상 학업을 이어갈 수 없었다.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그는 13세부터 생업 전선에 뛰어들게 된다. 성남 일대의 여러 공장서 일하며 ‘소년공’으로 불리는 시기를 보냈다. 체인 수공업 공장, 고무공장, 냉장고 부품 조립 공장, 시계공장 등을 전전했다. 하루 12시간 노동은 기본이었고, 철야 작업이나 주야 맞교대 근무도 잦았다.


작업 환경은 매우 열악했다. 유해 화학물질 냄새가 가득한 공간서 환기 없이 일했고, 제대로 된 보호장비조차 제공되지 않았다. 10대 초반의 아이가 감당하기에는 가혹한 노동이었다.

이 대통령은 큰 사고로 장애를 얻게 되는데, 이는 대양실업이라는 야구 글러브 공장서 발생했다. 프레스 기계에 왼쪽 팔이 끼어 심각한 상해를 입었고, 이 사고로 평생 팔이 굽는 후유증을 남기게 된다. 이후 병역 판정서 지체 장애 6급으로 면제받았다. 또, 시계공장서 사용된 접착제 등 독성 화학물질의 영향으로 인해 후각 기능도 상실하게 된다.

그는 공장서 퇴근한 뒤 독서실에 가서 새벽까지 공부했다. 책상에 압정을 뿌려 졸음을 참았는데, 몸에 압정이 박힌 채 잠든 날도 있었다고 전한다. 이후 1년3개월 만에 중학교와 고등학교 검정고시에 모두 합격했다. 그의 나이 16세 무렵이었다.

당시 검정고시 합격률은 낮았고, 특히 고교 검정고시를 단기간에 통과하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검정고시 합격 이후 그는 곧바로 대학 입시 준비에 들어갔다. 입시 준비 과정서도 경제적 어려움은 여전했다. 과외는커녕 참고서조차 마음대로 사지 못해, 도서관과 중고 책방을 전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2년 중앙대학교 법학과에 전액 장학생으로 합격하게 된다.

등록금은 물론 매월 20만원의 생활비까지 지급받는 조건이었다. 당시 중앙대학교 법대는 높은 입시 경쟁률을 자랑했고, 장학 선발 기준도 매우 엄격했다.

중앙대학교는 이 대통령이 처음으로 입학한 ‘정규 교육기관’이었다. 검정고시로 학력을 취득한 이 대통령은 교복이나 학교생활에 대한 로망이 커서, 실제로 대학 입학식에 중·고등학교 교복을 빌려 입고 갔을 정도였다. 그러나 대학 생활 역시 순탄하지 않았다.


극심한 가난 흙수저 출신
주경야독 끝 사법시험 통과

당시 이 대통령이 입학한 1982년은 대한민국 사회가 군사정권 아래 놓여 있던 시기였다. 군부독재가 기승을 부리던 시기였고, 사회는 억압과 저항으로 뜨거웠다. 전두환정권 집권 초기로, 대학가는 학생운동과 민주화운동이 확산되고 있었다. 이 대통령은 공개적으로 활동을 벌이지는 않았지만, 민주화 운동을 지지하는 흐름에 영향을 받았다.

이 시기, 그는 중앙대학교 도서관서 우연히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된 기록 영상과 책자를 접하게 된다. 당시까지 언론 보도 등을 통해 광주 사건을 ‘폭동’으로 인식하고 있던 그는, 실제 내용을 접한 뒤 충격을 받았고,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되었다고 훗날 밝혔다.

이후 그는 5·18 민주화운동을 삶의 가치관에 결정적인 전환점을 준 사건으로 언급했고, 광주를 ‘사회적 어머니’라고 표현한 바 있다.

이 대통령은 사법시험 합격을 목표로 정진했다. 정규 고등학교 교육을 받지 않은 상태서 대학에 입학한 만큼 기초 법학 이론에 대한 학습이 다른 학생들에 비해 느릴 수밖에 없었지만, 이를 보완하기 위해 독학과 반복 학습을 통해 실력을 쌓았다.

수업이 끝난 뒤 도서관서 법전을 정독하며 정리한 필기 노트를 수차례 복습했고, 기출문제와 판례를 중심으로 공부했다. 이 과정서 고등학교 교과 과정의 기본 개념을 별도로 익혀야 했다.

법대 재학 중에도 경제적 여건은 여전히 나아지지 않았다. 부모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고, 일부 기간 동안 과외, 논술 지도 등으로 생활비를 보충한 것으로 알려졌다. 장학금으로는 최소한의 생활비만 충당할 수 있었고, 월세와 식비를 해결하기 위해 가급적 학교 시설을 활용하며 지냈다.

이 대통령은 1986년 제28회 사법시험에 최종 합격했다. 재학 중 시험에 도전했고, 학부 졸업을 앞둔 시점이었다. 이어 1988년 제18기 사법연수원 과정을 수료했다. 사법연수원 입소 당시에도 그는 학부 시절처럼 조용하고 성실한 수강생으로 알려졌으며, 노동법이나 사회복지 관련 과목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고 전해진다.

사법연수원 과정서 이 대통령은 고 노무현 당시 변호사가 진행한 강연을 들은 경험이 있다. 이 강연은 훗날 이 대통령이 노동·사회적 약자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 중 하나로 언급된다. 특히 인권 변호사로서의 진로를 선택하게 되는 계기로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13세부터
생업 전선

이 대통령은 대학 시절 학력, 재정 등 여러 제약을 극복하며 사법시험에 합격했고 이후 본격적인 법조인의 길을 걷게 됐다.

1988년 사법연수원 과정을 수료한 뒤 판사나 검사직이 아닌 변호사의 길을 선택했다. 당시 대다수의 연수원 수료생이 안정적인 법조 직군에 지원하던 분위기 속에서, 이 대통령은 인권 변호사로 활동하겠다는 뜻을 굳혔다. 성남시 수정구 태평동에 위치한 변호사 사무실을 열고 노동자, 서민, 사회적 약자의 권익을 대변하는 사건을 중심으로 변론을 맡기 시작했다.


그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의 회원으로 활동하며, 인권 중심의 법률 지원에 주력했다. 1990년대 당시 수도권 외곽 지역이던 성남은 개발 압력과 토지 보상 문제로 각종 분쟁이 끊이지 않았고, 그는 분당 백궁·정자지구의 용도 변경 비리 의혹이나 성남 파크뷰 특혜 분양 사건 등에 깊이 관여하게 된다.

해당 사건들은 개발 이익을 둘러싼 특혜와 비리 구조에 대한 문제 제기가 핵심이었으며, 이 대통령은 관련 주민들과 함께 행정감시 및 법률 대응을 주도했다.

특히 분당 파크뷰 사건은 그가 시민사회 활동가로서 본격적인 정치적 존재감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분양 과정서의 특혜, 가격 조작, 공무원 연루 의혹 등이 불거지며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았고, 이 대통령은 해당 의혹을 지역 언론과 시의회를 통해 지속적으로 제기했다.

이 활동은 당시 성남지역서 시민단체와 주민들이 이 대통령을 ‘행동하는 변호사’로 인식하게 되는 배경이 됐다.

그는 지역의료 공백 문제 해결에도 힘을 쏟았다. 2003~2004년 무렵, 성남서 운영되던 종합병원들이 연이어 폐업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그로 인해 지역 주민의 진료 접근권이 급격히 악화됐다. 그러자 그는 ‘성남시립병원 설립 운동’을 제안하고 추진했다. 주민 서명을 주도하며 총 20만명 이상의 동의를 얻어 시의회에 조례안을 제출했지만, 당시 다수당이던 한나라당 소속 시의원들의 반대로 조례는 부결됐다.

이 대통령은 동료들과 시의회 본회의장을 점거하고 항의 농성을 벌였고, 이 과정서 특수공무집행방해 등의 혐의로 수배되기도 했다. 수배 기간 동안 성남주민교회 지하 기도실에 은신하며 숙식을 해결했다고 알려졌다. 이 대통령은 이 일을 계기로 정치에 나서게 됐다.


그는 이후 공개 연설서 “2004년 3월28일, 성남주민교회 지하서 눈물로 결심했다”며 “시립병원의 꿈을 정치로 실현하겠다”고 밝혔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 대통령은 정당 정치를 진지하게 고려하게 된다. 2006년 성남시장 선거를 앞두고 열린우리당에 입당하며 정치에 입문했고, 같은 해 성남시장 선거에 출마하지만 낙선했다. 그러나 첫 출마 이후 지역 사회 내에서 그의 활동은 더 활발해졌고, 시민단체 및 자발적 지지자 모임을 중심으로 조직 기반을 확대해 나갔다.

본격적
존재감

결국, 2010년 지방선거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후보로 다시 성남시장에 출마해 당선되며 민선 5기 시장에 취임하게 된다. 이로써 그는 변호사 시절부터 이어온 공공성·복지 중심의 정책 기조를 행정 영역서 실현할 수 있는 자리에 오르게 된다. 이 대통령의 정치적 커리어는 이 시점을 기점으로 급격히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 대통령은 2010년 7월 성남시장에 취임하면서 본격적인 정치인으로서의 첫발을 내디뎠다. 취임 초기 성남시는 극심한 재정난에 직면해 있었다. 전임 시장 시절의 무리한 개발과 방만한 예산 집행으로 인해 시의 채무는 7300억원에 달했다.

당시 공무원 월급조차 지급이 어렵다는 보도가 나올 정도였으며, 시 재정은 파산 직전이라는 위기에 놓여 있었다.

이에 이 대통령은 강도 높은 긴축재정을 실시하고, 이른바 ‘모라토리엄(지급 유예) 선언’을 통해 부채 구조 조정에 나섰다. 공무원 해외 연수와 관행적 예산 낭비 항목을 전면 삭감하고, 고위 공무원 인사 기준을 대폭 손질했다. 이 대통령은 직접 차량을 운전하고 비서진 없이 이동하며 시장의 권위적 이미지도 벗기 시작했다.

시민과의 직접 소통을 강조하며 ‘24시간 트위터 시장’이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복지 행정서도 선도적인 정책을 시도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무상교복’과 ‘청년배당’이었다. 그는 성남시에 거주하는 고등학생들에게 교복을 무상으로 지급하고, 일정 연령의 청년들에게 연간 100만원 상당의 지역화폐를 지급하는 청년배당 정책을 도입했다.

이 같은 정책은 이후 경기도지사와 대선후보 시절까지 이어지는 ‘보편적 복지’ 철학의 기초가 됐다.

성남서의 성공적인 행정으로 인해 이 대통령에게 더 넓은 정치의 길이 열렸다. 2014년 지방선거서 재선에 성공한 그는, 이후 2016년 촛불 정국을 전후해 전국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정국 당시 강한 어조로 탄핵을 요구하며, SNS와 방송 출연 등을 통해 대중적인 인지도를 빠르게 높였다.

이 대통령의 직설적이고 명확한 화법은 지지층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

2017년 제19대 대통령선거에서는 민주당 경선에 참여했다. 당시 문재인·안희정 후보와 함께 주요 주자로 부상했으나, 경선서 문재인 후보에게 밀려 본선 진출에는 실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대통령은 약 21.2%의 지지를 얻었다. 경선 과정서 이슈 제기, 특히 기본소득과 지방분권 등은 이후 정치 담론에 큰 영향을 미쳤다.

노무현 만나 인권 변호사 길로
성남시장으로 정치 인생 시작

대선 경선 이후 이 대통령은 다시 경기도지사에 출마했다. 2018년 지방선거서 경기도지사에 당선되며, 전국 최대 광역단체의 수장이 된다. 경기도지사로서 그는 행정의 디지털화, 데이터 기반 정책 결정, 사회복지 확대 등에서 성과를 냈다.

대표 정책으로는 ▲경기도 기본소득형 국토보유세 ▲청년기본소득 ▲배달특급 등이 있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는 신속한 대응으로 높은 행정 평가를 받았다. 전 도민에게 재난기본소득을 지급한 결정은 전국적 논의로 확산되며 그의 정치적 입지를 다시 한번 강화하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경기도지사 시절, 이 대통령은 안 좋은 일들에 자주 휘말리게 됐다. 여러 차례의 사생활 논란과 형사 고발이 이어졌으며, 대장동 개발사업 의혹은 가장 큰 정치적 위기를 초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2021년 민주당 제20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고, 이듬해 2022년 3월 치러진 대선서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에게 근소한 차이로 패배했다.

대선 패배 이후에도 이 대통령은 정치 전면서 물러서지 않았다. 같은 해 6월, 인천 계양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됐고, 이어 8월에는 민주당 당 대표로 선출됐다. 대표 시절 그는 야당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강화하며, 윤석열정부의 각종 정책에 대한 비판과 대안 제시에 집중했다.

또 당내 개혁을 강조하며 공천 시스템 개선, 당헌·당규 개정 등의 작업을 추진했다.

2023년부터는 이른바 ‘검찰 수사 정국’이 이어졌다. 이 대통령은 대장동, 성남FC 후원금, 쌍방울 대북송금 의혹 등으로 검찰 수사를 받았으며, 총 5차례 이상 검찰에 출석했다. 그러나 국회 체포동의안은 부결됐고, 기소 후에도 그는 대표직을 유지하며 당내 결속을 이끌었다.

지난해, 윤석열 전 대통령의 탄핵이 가결되며 조기 대선 정국이 열렸다. 이 대통령은 지난 4월10일 공식 선언을 통해 대선 출마 의지를 밝혔다. 이는 윤석열 전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 이후 헌법재판소 탄핵 결정으로 대통령직이 공석이 됐기 때문에 정해진 조기 선거 일정에 따른 것이었다.

이 대통령은 민주당의 당내 경선서 김동연 경기도지사, 김경수 전 경남도지사를 상대로 89.77%의 압도적인 득표율을 기록하며 후보로 선출됐다. 경선 과정서의 당내 이견은 크지 않았고, 계엄령 사태 이후 당내 결속은 이 대통령을 중심으로 공고히 이뤄졌다. 이 대통령은 민주당 후보로 다시 대선에 출마했고, 제21대 대통령선거서 49.42%의 득표율로 승리를 거머쥐게 됐다.

크고 작은
논란·의혹

이번 대선은 2022년 제20대 대선서 불과 0.73%포인트 차이로 석패했던 이 대통령이 세 번째 도전 만에 거둔 승리였다. 동시에 탄핵과 계엄이라는 초유의 정치 상황 이후 선출된 첫 대통령이라는 상징적 의미도 담고 있다. 비상계엄 사태 속 치러진 이번 대선서 이 대통령의 당선으로 3년 만의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당선 직후 이 대통령은 여의도 민주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승리를 선언했다. 이 대통령은 국가의 조속한 회복과 경제 안정을 최우선 과제로 제시했다.

<imsharp@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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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무인기’ 안보실 비밀 작전 주도 의혹

‘평양 무인기’ 안보실 비밀 작전 주도 의혹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윤석열정부는 북한 도발에 역대 정부 중 가장 적극적이었다. 대북 확성기를 틀거나 삐라를 날리면서 군사적 긴장감을 끌어올렸다. 북한도 오물 풍선과 무인기를 날리면서 윤석열 전 대통령을 비판했다. 물론 윤정부도 참지 않았다. 북한처럼 평양에 무인기를 날렸다. 이 비밀 작전은 국가안보실이 주도한 것으로 파악됐다. 조은석 내란 특검팀은 군 관계자로부터 국가안보실 지시로 북한 평양에 무인기를 날렸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6개월 전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언급했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라는 평가다. 안보실 중 국방·안보 파트는 1차장 소관이다. 나머지는 각각 외교와 경제를 담당한다. 지난해 안보실 국방·안보 파트 담당은 김태효 전 1차장이었다. 계속되는 군 거짓말 내란 특검팀은 지난해 10월 북한이 평양에 추락한 우리 군 무인기라며 공개한 사진 외에도 우리 군이 보낸 또 다른 무인기가 있다는 진술을 군 관계자로부터 확보했다. 이 관계자는 특검팀에 “백령도에서 날린 무인기 두 대 중 한 대는 평양에 추락했고, 나머지 한 대는 평양 인근에 추락했다”고 주장했다. 그간 김명수 합참의장과 김용대 드론작전사령관은 “확인해줄 수 없다”며 사실관계 공개 자체를 거부해 왔다. 앞서 평양 무인기 침투 의혹은 북한 외무성이 지난해 10월 “한국이 10월3일, 9일, 10일 심야 시간을 노려 무인기를 평양 상공에 침범시켜 삐라(대북 전단지)를 살포했다”고 밝히면서 불거졌다. 국방부 국방과학연구소는 국회에 제출한 ‘북 전단 무인기 비교분석’ 보고서에서 “북한이 공개한 무인기와 우리 군 드론작전사령부(드작사)에 납품한 무인기의 전체적인 형상이 매우 유사하다”고 분석했다. 이와 관련해 민주당 등에선 윤석열 전 대통령이 12·3 비상계엄 선포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 북한의 도발을 유도하려고 무인기를 평양에 침투시켰다며 외환 의혹을 제기해 왔다. 그러나 2022년 있었던 북한군의 서울 상공 무인기 침투와 2024년 오물 풍선 살포에 대응한 대북 작전이었다는 게 군 관계자들의 입장이다. 평양 무인기 침투 작전이 이뤄진 지난해 10월은 남북 관계가 긴장 국면으로 치달았을 때다. 북한은 2022년 12월 무인기 5대를 수도권 일대 영공에 침투시켰다. 그중 1대는 대통령실이 있는 서울 용산구 일대 비행금지구역 안에 진입해 국가원수 경호 방공망이 뚫렸다는 지적도 나왔다. 그러다가 2024년 5월부터11월에는 북한이 오물 풍선 수천 개를 한국에 살포하면서 긴장이 고조됐다. 윤 전 대통령은 그해 6월 현충일 기념사에서 오물 풍선 도발을 겨냥해 “정부는 북한의 위협을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합참 지휘부는 대응 작전과 관련해 신중한 기조를 유지했다. 남북 긴장이 충돌로 이어지는 것을 막겠다며 상황 관리에 치중했다. “국방·안보 1차장 소관”…정보융합팀 추진? 국군조직법상 부적절…당시 실장들은 몰랐다 그러자 민주당 등에서도 오물 풍선의 자유 낙하를 기다리는 군의 대응이 미온적이라며 휴전선 상공에서 풍선을 격추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이 나왔다.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은 당시 “북한이 한계선을 넘어가고 있다. 다양한 대응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드론사의 평양 무인기 침투 작전이 진행됐다는 것이다. 특검은 드론사에 무인기 침투 작전을 지시한 최종 결정권자가 누구인지 수사 중이다. 군 안팎에선 ‘김 전 장관→김 의장→이승오 합참 작전본부장’을 거쳐 드론사에 지시가 내려갔을 가능성과, 김 전 장관이 김 의장이나 이 본부장을 건너뛰고 드론사에 직접 지시를 내렸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 합동참모본부와 방첩사령부도 이 사건에서 자유롭지 않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김 사령관은 무인기 북파 시점을 전후해 이승오 합참 작전본부장과 김 의장을 잇달아 면담했다. 특검팀은 “2024년 6월 드론사 방첩대가 평양 무인기 침투 작전을 알고 있어서 놀랐다”는 군 현역 장교의 증언도 확보했다. 당시 드론사 방첩대 지휘는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이 맡았다. 드론사는 적 무인기 등에 대응하기 위해 2023년에 출범한 육·해·공군 및 해병대 합동 전투부대로, 국군조직법에 따라 합참의장의 지휘·감독을 받는다. 안보실과는 동떨어져 있는 부대다. 그러나 특검팀에 출석한 군 관계자는 “모든 군 작전은 상급 기관인 합동참모본부의 지시를 받는데 무인기 침투 작전은 대통령실 안보실로부터 직접 지시를 받았다”며 “북한이 무인기 추락 사실을 공개한 날 작전을 수행한 드론사령부에 김용현 당시 국방부 장관이 격려금을 보냈다”고 증언했다. 관계없는 안보실 왜? 민주당 부승찬 의원도 “김용대 드론작전사령관이 V(대통령)의 지시라며 국가안보실 직통으로 무인기 침투 작전을 하달했다”는 내부 증언을 공개하기도 했다. 민주당 외환유치진상조사단은 올해 초부터 드론사가(歌) ▲무인기 기종 재고 현황 ▲평양에 드론이 침투한 지난해 10월 드론사 상황일지 ▲삐라통을 제작할 수 있는 3D 프린터 보유 여부 등의 자료 제출에 성실히 응하고, 수사기관이 김 사령관과 핵심 참모들에 대한 수사에 즉각 착수할 것을 요구한 바 있다. 안보실은 당시 기자단 공지를 통해 “인성환 제2차장이 지난 2024년 3월 드론사를 공식 방문한 바 있다”며 방문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그러나 이는 육·해·공군 주요 사령부 현장 확인의 일환으로 진행된 부대 방문이며, 당시 드론사의 업무보고 등 공식 일정에 다수의 드론사 장병들이 함께했다”고 해명했다. 또 “김용대 드론사령관은 같은 해 8월 국가안보실 방문 당시 드론 전력화 방안 및 국방혁신위원회 안건 등을 논의하기 위해 국방부 및 방사청 관계관 다수와 함께했던 것으로 확인했다. 다수의 인원이 함께한 공식 방문과 안보 태세 강화를 위해 정상적으로 추진한 업무를 ‘북풍 몰이’로 연결 짓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자, 터무니없는 정치공세”라고 주장했다. 특검팀은 외환 의혹 관련 윤 전 대통령의 ‘지시 연결고리’를 수사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국군 통수권자인 윤 전 대통령으로부터 국방부 장관, 군부대까지 이어지는 지휘체계 전체가 조사 대상이 될 전망이다. 특검팀이 김 전 국방부 장관을 추가 구속하고, 군검찰과 협조해 여 전 사령관·문상호 전 정보사령관을 추가 구속한 것도 외환 수사의 일환이라는 분석이다. ‘계엄 비선’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에 대해 추가 구속영장 발부를 요청한 것 역시 마찬가지다. ‘노상원 수첩’의 경우 ‘NLL(북방한계선)에서 북한 공격 유도’ 등 이른바 ‘북풍’ 준비 정황이 담겨 있어 실체 규명이 필요하다. 노 전 사령관이 정보사 비선 조직을 활용해 북한을 자극해 대남 도발을 유도했다는 시나리오가 가장 유력하다는 게 정보기관 간부들의 설명이다. 수상한 연결고리 김봉규 정보사 대령의 “(노씨가) 북한 오물 풍선 얘기를 시작했다. 언론에 특별 보도가 날 거라고 했다”는 경찰 진술 등도 특검으로 송부됐다. 특검팀 관계자는 “언론에 보도된 부분에 대해 사실관계를 확인해주는 것도 하나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드론사가 안보실의 지시로 무인기 침투 비밀 작전이 진행됐다는 의혹이 가리키는 시기는 지난해 8월이다. 안보실은 산하에 1·2·3 차장을 둔다. 이들은 각각 국방과 외교, 경제를 담당한다. 지난해 안보실 국방·안보 파트 담당은 김 전 1차장이었다. 안보실장은 장호진·신원식 전 국방부 장관이었으나 대통령실 내부에서는 사실상 허수아비에 불과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당시 안보실 행정관으로 근무하던 관계자는 “김 전 차장이 실세 중의 실세였다. 최종적으로 안보실장이 모든 보고를 받지만 핵심 정보는 김태효 전 차장이 먼저 훑는 경우가 많았다”고 주장했다. 김 전 차장은 국방이 아닌 외교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대북 문제에 어떤 군사적 방법으로 접근해야 하는지 전략을 세우는 데는 신 전 실장보다 한 수 아래였다는 평가다. 사실상 ‘국방 문외한’인 김 전 차장은 2023년 강원도 속초에 위치한 북파공작부대(HID)를 방문했다. 그는 “2023년 6월 초 정보 당국 관계자들과 HID 부대를 격려 방문한 바 있지만 1년7개월 전에 있었던 군 부대 격려 방문을 이번 계엄 선포와 연결 짓는 것은 터무니없는 비약”이라고 반박한 바 있다. 정보사 고위 관계자는 <일요시사>에 “윤석열 전 대통령도 오려고 했다는 건 사실이다. 김태효가 그때 왜 왔는지 모르겠다. 와선 안 되는 건 아닌데 올 일이 없다. 우리 입장에서는 이해 가지 않는 해명”이라고 지적했다. 다른 정보사 관계자도 “윤 전 대통령이 오고 싶어 했고 안보실이 그의 HID 방문이 검토된 바 없다고 하는데 (이건) 말도 안 된다. 당시에 대통령 방문 가능성 때문에 대비 회의까지 한 바 있다”고 강조했다. 속초 갔던 김, HID 출신 용산 스카우트 왜? “방문 이례적” 대북 공작 플랜 일환이었나 김 전 차장이 HID를 방문한 이후 신기한 일이 벌어진다. 인간정보 특기(820) 육관사관학교 60기 출신 오모 중령이 2023년 12월 안보실 2차장 산하 국가위기관리센터 안보현안대응팀에 들어갔다. 오 중령은 인성환 당시 안보실 2차장의 통제를 받지 않았다. 인 2차장도 “공개된 자리서 말하기 어렵지만 제가 통제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오 중령을 포함한 팀원들의 보고서는 인 2차장이 아닌 김 전 1차장이 검토했다. 안보실은 이 비밀 TF가 “규정화된 테두리 밖에서 대북 특수정보를 분석하는 팀”이라며 계엄과 관련해 정보사와 소통한 적은 없다고 해명했다. 또 “비밀 조직이 아니라 위기관리센터에 배치된 ‘정보융합팀’이다. 정보융합팀은 지난 정부의 정보융합비서관실을 대북 정보 분석에 특화시켜 슬림화한 조직으로, 2022년 5월1일 대통령직 인수위 브리핑서도 해당 조직의 신설 취지와 배경을 밝힌 바 있다”고 설명했다. 안보실이 당시에 언급했던 것처럼 오 중령이 소속된 팀은 ‘대북 특수정보’를 다룬다. 대북 문제에 대해 깊숙하게 알지 못하는 김 전 1차장을 사실상 보좌하는 팀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오 중령은 정보사 내 얼마 남지 않은 ‘대북 공작’ 전문가로 꼽힌다. 12·3 내란에 가담한 혐의로 재판을 받는 정성욱 정보사 대령의 계보를 잇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다. 안보실의 지시로 드론사가 평양 무인기 침투 작전을 실행했다는 의혹이 사실이라면 오 중령이 속한 팀이 작전의 밑그림을 그렸을 가능성이 크다는 게 정보사 내부의 분석이다. 무인기를 언제 평양에 보내고 어떤 방법을 구사해야 하는지도 대북 공작의 한 종류기 때문이다. 일부러 들키려 분명한 목적 정보사 한 고위 관계자는 “무인기를 날린 시기를 보면 대북 공작 플랜을 한두 달 전부터 준비한 것으로 보인다. 아무 때나 막 날리는 게 아니다. 어떤 목적을 정한 이후 그다음 시기를 정한다”고 분석했다. 이 관계자는 “통상 대북 공작은 일부러 들키게 하거나 정말 들키지 않아야 하는데 일부러 들키려 한 공작은 ‘북풍 공작’이다. 이 방법은 2000년대 초반 이후 쓰지 않았던 방법이다. 자칫하면 수많은 인명피해를 야기할 수 있고 실패할 경우 정보사의 피해까지 감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