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피플> 대통령 이재명 60년 인생사

안동 산골 소년공 대한민국 지도자로

[일요시사 취재1팀] 안예리 기자 = 제21대 대통령선거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당선됐다. 대선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탄핵 이후 실시된 조기 선거였으며, 정치권 전반에 걸친 격변 속에서 치러졌다. 이재명 대통령은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와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를 상대로 본선에 나섰고, 그 결과 최종 승리를 거머쥐었다.

이재명 대통령은 1964년 12월22일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도촌리서 태어났다. 5남2녀 중 다섯째로, 이 대통령의 유년기는 극심한 가난 속에서 시작됐다. 출생신고조차 제때 이뤄지지 않아 음력 기준으로 나이를 따지게 됐으며, 초등학교 입학을 위해 생일을 무속인을 통해 정했다고 알려졌다. 그의 가족은 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유지했지만, 수입이 너무 적어 안정적인 생활을 이어가기 어려웠다.

찢어지게
어려웠다

이 대통령의 가족은 1976년, 그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무렵 경기도 성남시로 이주한다. 당시 이주한 지역은 공장과 달동네가 공존하던 성남 상대원동이었고, 9명의 대가족은 반지하 단칸방에 거주했다.

이사 직후 어머니는 시장 공중화장실 관리인으로 일했으며, 이 대통령과 여동생은 대변 20원, 소변 10원을 받는 화장실 요금을 걷는 일을 도왔다. 아버지는 청소 일을 하며 생계를 잇는 동시에, 주변에서 폐지를 주워 고물상에 팔기도 했다. 이런 생활환경 속에서 이 대통령은 더 이상 학업을 이어갈 수 없었다.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그는 13세부터 생업 전선에 뛰어들게 된다. 성남 일대의 여러 공장서 일하며 ‘소년공’으로 불리는 시기를 보냈다. 체인 수공업 공장, 고무공장, 냉장고 부품 조립 공장, 시계공장 등을 전전했다. 하루 12시간 노동은 기본이었고, 철야 작업이나 주야 맞교대 근무도 잦았다.

작업 환경은 매우 열악했다. 유해 화학물질 냄새가 가득한 공간서 환기 없이 일했고, 제대로 된 보호장비조차 제공되지 않았다. 10대 초반의 아이가 감당하기에는 가혹한 노동이었다.

이 대통령은 큰 사고로 장애를 얻게 되는데, 이는 대양실업이라는 야구 글러브 공장서 발생했다. 프레스 기계에 왼쪽 팔이 끼어 심각한 상해를 입었고, 이 사고로 평생 팔이 굽는 후유증을 남기게 된다. 이후 병역 판정서 지체 장애 6급으로 면제받았다. 또, 시계공장서 사용된 접착제 등 독성 화학물질의 영향으로 인해 후각 기능도 상실하게 된다.

그는 공장서 퇴근한 뒤 독서실에 가서 새벽까지 공부했다. 책상에 압정을 뿌려 졸음을 참았는데, 몸에 압정이 박힌 채 잠든 날도 있었다고 전한다. 이후 1년3개월 만에 중학교와 고등학교 검정고시에 모두 합격했다. 그의 나이 16세 무렵이었다.

당시 검정고시 합격률은 낮았고, 특히 고교 검정고시를 단기간에 통과하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검정고시 합격 이후 그는 곧바로 대학 입시 준비에 들어갔다. 입시 준비 과정서도 경제적 어려움은 여전했다. 과외는커녕 참고서조차 마음대로 사지 못해, 도서관과 중고 책방을 전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2년 중앙대학교 법학과에 전액 장학생으로 합격하게 된다.

등록금은 물론 매월 20만원의 생활비까지 지급받는 조건이었다. 당시 중앙대학교 법대는 높은 입시 경쟁률을 자랑했고, 장학 선발 기준도 매우 엄격했다.

중앙대학교는 이 대통령이 처음으로 입학한 ‘정규 교육기관’이었다. 검정고시로 학력을 취득한 이 대통령은 교복이나 학교생활에 대한 로망이 커서, 실제로 대학 입학식에 중·고등학교 교복을 빌려 입고 갔을 정도였다. 그러나 대학 생활 역시 순탄하지 않았다.

극심한 가난 흙수저 출신
주경야독 끝 사법시험 통과

당시 이 대통령이 입학한 1982년은 대한민국 사회가 군사정권 아래 놓여 있던 시기였다. 군부독재가 기승을 부리던 시기였고, 사회는 억압과 저항으로 뜨거웠다. 전두환정권 집권 초기로, 대학가는 학생운동과 민주화운동이 확산되고 있었다. 이 대통령은 공개적으로 활동을 벌이지는 않았지만, 민주화 운동을 지지하는 흐름에 영향을 받았다.

이 시기, 그는 중앙대학교 도서관서 우연히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된 기록 영상과 책자를 접하게 된다. 당시까지 언론 보도 등을 통해 광주 사건을 ‘폭동’으로 인식하고 있던 그는, 실제 내용을 접한 뒤 충격을 받았고,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되었다고 훗날 밝혔다.

이후 그는 5·18 민주화운동을 삶의 가치관에 결정적인 전환점을 준 사건으로 언급했고, 광주를 ‘사회적 어머니’라고 표현한 바 있다.

이 대통령은 사법시험 합격을 목표로 정진했다. 정규 고등학교 교육을 받지 않은 상태서 대학에 입학한 만큼 기초 법학 이론에 대한 학습이 다른 학생들에 비해 느릴 수밖에 없었지만, 이를 보완하기 위해 독학과 반복 학습을 통해 실력을 쌓았다.

수업이 끝난 뒤 도서관서 법전을 정독하며 정리한 필기 노트를 수차례 복습했고, 기출문제와 판례를 중심으로 공부했다. 이 과정서 고등학교 교과 과정의 기본 개념을 별도로 익혀야 했다.

법대 재학 중에도 경제적 여건은 여전히 나아지지 않았다. 부모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고, 일부 기간 동안 과외, 논술 지도 등으로 생활비를 보충한 것으로 알려졌다. 장학금으로는 최소한의 생활비만 충당할 수 있었고, 월세와 식비를 해결하기 위해 가급적 학교 시설을 활용하며 지냈다.

이 대통령은 1986년 제28회 사법시험에 최종 합격했다. 재학 중 시험에 도전했고, 학부 졸업을 앞둔 시점이었다. 이어 1988년 제18기 사법연수원 과정을 수료했다. 사법연수원 입소 당시에도 그는 학부 시절처럼 조용하고 성실한 수강생으로 알려졌으며, 노동법이나 사회복지 관련 과목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고 전해진다.

사법연수원 과정서 이 대통령은 고 노무현 당시 변호사가 진행한 강연을 들은 경험이 있다. 이 강연은 훗날 이 대통령이 노동·사회적 약자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 중 하나로 언급된다. 특히 인권 변호사로서의 진로를 선택하게 되는 계기로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13세부터
생업 전선

이 대통령은 대학 시절 학력, 재정 등 여러 제약을 극복하며 사법시험에 합격했고 이후 본격적인 법조인의 길을 걷게 됐다.

1988년 사법연수원 과정을 수료한 뒤 판사나 검사직이 아닌 변호사의 길을 선택했다. 당시 대다수의 연수원 수료생이 안정적인 법조 직군에 지원하던 분위기 속에서, 이 대통령은 인권 변호사로 활동하겠다는 뜻을 굳혔다. 성남시 수정구 태평동에 위치한 변호사 사무실을 열고 노동자, 서민, 사회적 약자의 권익을 대변하는 사건을 중심으로 변론을 맡기 시작했다.

그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의 회원으로 활동하며, 인권 중심의 법률 지원에 주력했다. 1990년대 당시 수도권 외곽 지역이던 성남은 개발 압력과 토지 보상 문제로 각종 분쟁이 끊이지 않았고, 그는 분당 백궁·정자지구의 용도 변경 비리 의혹이나 성남 파크뷰 특혜 분양 사건 등에 깊이 관여하게 된다.

해당 사건들은 개발 이익을 둘러싼 특혜와 비리 구조에 대한 문제 제기가 핵심이었으며, 이 대통령은 관련 주민들과 함께 행정감시 및 법률 대응을 주도했다.

특히 분당 파크뷰 사건은 그가 시민사회 활동가로서 본격적인 정치적 존재감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분양 과정서의 특혜, 가격 조작, 공무원 연루 의혹 등이 불거지며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았고, 이 대통령은 해당 의혹을 지역 언론과 시의회를 통해 지속적으로 제기했다.

이 활동은 당시 성남지역서 시민단체와 주민들이 이 대통령을 ‘행동하는 변호사’로 인식하게 되는 배경이 됐다.

그는 지역의료 공백 문제 해결에도 힘을 쏟았다. 2003~2004년 무렵, 성남서 운영되던 종합병원들이 연이어 폐업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그로 인해 지역 주민의 진료 접근권이 급격히 악화됐다. 그러자 그는 ‘성남시립병원 설립 운동’을 제안하고 추진했다. 주민 서명을 주도하며 총 20만명 이상의 동의를 얻어 시의회에 조례안을 제출했지만, 당시 다수당이던 한나라당 소속 시의원들의 반대로 조례는 부결됐다.

이 대통령은 동료들과 시의회 본회의장을 점거하고 항의 농성을 벌였고, 이 과정서 특수공무집행방해 등의 혐의로 수배되기도 했다. 수배 기간 동안 성남주민교회 지하 기도실에 은신하며 숙식을 해결했다고 알려졌다. 이 대통령은 이 일을 계기로 정치에 나서게 됐다.

그는 이후 공개 연설서 “2004년 3월28일, 성남주민교회 지하서 눈물로 결심했다”며 “시립병원의 꿈을 정치로 실현하겠다”고 밝혔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 대통령은 정당 정치를 진지하게 고려하게 된다. 2006년 성남시장 선거를 앞두고 열린우리당에 입당하며 정치에 입문했고, 같은 해 성남시장 선거에 출마하지만 낙선했다. 그러나 첫 출마 이후 지역 사회 내에서 그의 활동은 더 활발해졌고, 시민단체 및 자발적 지지자 모임을 중심으로 조직 기반을 확대해 나갔다.

본격적
존재감

결국, 2010년 지방선거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후보로 다시 성남시장에 출마해 당선되며 민선 5기 시장에 취임하게 된다. 이로써 그는 변호사 시절부터 이어온 공공성·복지 중심의 정책 기조를 행정 영역서 실현할 수 있는 자리에 오르게 된다. 이 대통령의 정치적 커리어는 이 시점을 기점으로 급격히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 대통령은 2010년 7월 성남시장에 취임하면서 본격적인 정치인으로서의 첫발을 내디뎠다. 취임 초기 성남시는 극심한 재정난에 직면해 있었다. 전임 시장 시절의 무리한 개발과 방만한 예산 집행으로 인해 시의 채무는 7300억원에 달했다.

당시 공무원 월급조차 지급이 어렵다는 보도가 나올 정도였으며, 시 재정은 파산 직전이라는 위기에 놓여 있었다.

이에 이 대통령은 강도 높은 긴축재정을 실시하고, 이른바 ‘모라토리엄(지급 유예) 선언’을 통해 부채 구조 조정에 나섰다. 공무원 해외 연수와 관행적 예산 낭비 항목을 전면 삭감하고, 고위 공무원 인사 기준을 대폭 손질했다. 이 대통령은 직접 차량을 운전하고 비서진 없이 이동하며 시장의 권위적 이미지도 벗기 시작했다.

시민과의 직접 소통을 강조하며 ‘24시간 트위터 시장’이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복지 행정서도 선도적인 정책을 시도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무상교복’과 ‘청년배당’이었다. 그는 성남시에 거주하는 고등학생들에게 교복을 무상으로 지급하고, 일정 연령의 청년들에게 연간 100만원 상당의 지역화폐를 지급하는 청년배당 정책을 도입했다.

이 같은 정책은 이후 경기도지사와 대선후보 시절까지 이어지는 ‘보편적 복지’ 철학의 기초가 됐다.

성남서의 성공적인 행정으로 인해 이 대통령에게 더 넓은 정치의 길이 열렸다. 2014년 지방선거서 재선에 성공한 그는, 이후 2016년 촛불 정국을 전후해 전국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정국 당시 강한 어조로 탄핵을 요구하며, SNS와 방송 출연 등을 통해 대중적인 인지도를 빠르게 높였다.

이 대통령의 직설적이고 명확한 화법은 지지층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

2017년 제19대 대통령선거에서는 민주당 경선에 참여했다. 당시 문재인·안희정 후보와 함께 주요 주자로 부상했으나, 경선서 문재인 후보에게 밀려 본선 진출에는 실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대통령은 약 21.2%의 지지를 얻었다. 경선 과정서 이슈 제기, 특히 기본소득과 지방분권 등은 이후 정치 담론에 큰 영향을 미쳤다.

노무현 만나 인권 변호사 길로
성남시장으로 정치 인생 시작

대선 경선 이후 이 대통령은 다시 경기도지사에 출마했다. 2018년 지방선거서 경기도지사에 당선되며, 전국 최대 광역단체의 수장이 된다. 경기도지사로서 그는 행정의 디지털화, 데이터 기반 정책 결정, 사회복지 확대 등에서 성과를 냈다.

대표 정책으로는 ▲경기도 기본소득형 국토보유세 ▲청년기본소득 ▲배달특급 등이 있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는 신속한 대응으로 높은 행정 평가를 받았다. 전 도민에게 재난기본소득을 지급한 결정은 전국적 논의로 확산되며 그의 정치적 입지를 다시 한번 강화하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경기도지사 시절, 이 대통령은 안 좋은 일들에 자주 휘말리게 됐다. 여러 차례의 사생활 논란과 형사 고발이 이어졌으며, 대장동 개발사업 의혹은 가장 큰 정치적 위기를 초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2021년 민주당 제20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고, 이듬해 2022년 3월 치러진 대선서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에게 근소한 차이로 패배했다.

대선 패배 이후에도 이 대통령은 정치 전면서 물러서지 않았다. 같은 해 6월, 인천 계양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됐고, 이어 8월에는 민주당 당 대표로 선출됐다. 대표 시절 그는 야당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강화하며, 윤석열정부의 각종 정책에 대한 비판과 대안 제시에 집중했다.

또 당내 개혁을 강조하며 공천 시스템 개선, 당헌·당규 개정 등의 작업을 추진했다.

2023년부터는 이른바 ‘검찰 수사 정국’이 이어졌다. 이 대통령은 대장동, 성남FC 후원금, 쌍방울 대북송금 의혹 등으로 검찰 수사를 받았으며, 총 5차례 이상 검찰에 출석했다. 그러나 국회 체포동의안은 부결됐고, 기소 후에도 그는 대표직을 유지하며 당내 결속을 이끌었다.

지난해, 윤석열 전 대통령의 탄핵이 가결되며 조기 대선 정국이 열렸다. 이 대통령은 지난 4월10일 공식 선언을 통해 대선 출마 의지를 밝혔다. 이는 윤석열 전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 이후 헌법재판소 탄핵 결정으로 대통령직이 공석이 됐기 때문에 정해진 조기 선거 일정에 따른 것이었다.

이 대통령은 민주당의 당내 경선서 김동연 경기도지사, 김경수 전 경남도지사를 상대로 89.77%의 압도적인 득표율을 기록하며 후보로 선출됐다. 경선 과정서의 당내 이견은 크지 않았고, 계엄령 사태 이후 당내 결속은 이 대통령을 중심으로 공고히 이뤄졌다. 이 대통령은 민주당 후보로 다시 대선에 출마했고, 제21대 대통령선거서 49.42%의 득표율로 승리를 거머쥐게 됐다.

크고 작은
논란·의혹

이번 대선은 2022년 제20대 대선서 불과 0.73%포인트 차이로 석패했던 이 대통령이 세 번째 도전 만에 거둔 승리였다. 동시에 탄핵과 계엄이라는 초유의 정치 상황 이후 선출된 첫 대통령이라는 상징적 의미도 담고 있다. 비상계엄 사태 속 치러진 이번 대선서 이 대통령의 당선으로 3년 만의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당선 직후 이 대통령은 여의도 민주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승리를 선언했다. 이 대통령은 국가의 조속한 회복과 경제 안정을 최우선 과제로 제시했다.

<imsharp@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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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진주교대 교수 논문 표절 의혹

[단독] 진주교대 교수 논문 표절 의혹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대학의 교수 수준은 강의의 질과 비례한다. 학교는 학생에게 양질의 교육을 제공해야 할 의무를 지고 있다. 과거와 비교해 그 의미가 많이 퇴색했지만 ‘상아탑’으로 불리는 대학의 본질은 여전히 유효하다. 사회에 보탬이 되는 인재 양성, 특히 초등학생을 가르칠 선생님을 배출하는 ‘교대’라면 그 본질을 향해 한 발 더 나아가야 한다. 진주교육대학교(이하 진주교대)에서 2020년 시작된 교수 채용 논란이 6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1932년 공립사범학교로 시작해 100여년 동안 초등교육 발전에 힘을 보태 온 학교로서는 불명예스러운 논란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진주교대가 마치 ‘제3자’인 것처럼 멀찍이서 논란을 지켜만 보고 있다는 점이다. 첫 단추 잘못 끼웠나 2020년 10월 진주교대는 미술교육과, 수학교육과 등에 각 1명씩 총 4명의 교수를 채용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했다. 2021년 1학기 임용을 목표로 같은 해 11월부터 채용 절차가 시작됐다. 교육공무원법에 명시된 결격사유가 없어야 한다는 일반 요건과 함께 ‘전공 분야별 박사학위 소지자’라는 자격 요건이 붙었다. 전형은 ▲자격 심사 ▲전공 적부 및 전공 심사 ▲경력 심사 ▲면접 심사(심화 과정) ▲면접 심사(최종) 등으로 이뤄졌다. 논란은 미술교육과 교수 채용 과정에서 불거졌다. 진주교대는 채용 계획에서 미술교육과 전공 분야를 ‘도자공예 또는 미술교육(도자공예)’으로 정했다. 도자공예 교수가 정년 퇴임을 앞두고 있어 그 후임자를 뽑기 위한 채용이었다. 문제는 미술교육과에 최종 합격한 A 교수가 도자 관련 전공을 이수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일요시사> 취재에 따르면 A 교수는 진주교대에서 초등교육을 전공(학사)했고, 석사 학위는 초등미술 교육(진주교대), 박사학위는 디자인학(광주대) 전공으로 받았다. 미술교육과 채용에 지원하려면 ‘전공 분야별 박사학위’ 즉, 도자 관련 전공 박사학위가 있어야 하는데 그가 자격 요건에 못 미친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실제 A 교수의 전공 적부 논란은 면접 심사 과정에서 언급됐다. 면접에 들어간 한 심사위원이 A 교수의 전공이 채용 분야와 맞지 않는다고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면접 심사(5배수) 대상자 명단’ 자료에 따르면 A 교수를 제외한 4명의 지원자는 학사, 석사, 박사 과정 등에 도자 관련 전공을 이수한 사실이 확인된다. 당시 면접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던 미술교육과 B 교수는 “전공 적부와 관련해 다시 심사해야 한다고 이의를 제기했고 재심사가 이뤄지긴 했다”며 “그런데 첫 번째 전공 적부 전형에 참여했던 위원들이 재심사를 담당했다. 결과가 바뀔 리가 있겠나”라고 한탄했다. A 교수는 2021년 2월 최종 임용됐다. A 교수를 둘러싼 논란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가 쓴 <프리미티비즘의 조형 표현 요소 및 특성을 통한 현대 도자 작품 연구> 논문이 표절 시비에 휘말린 것이다. 광주대학교 대학원 디자인학 전공으로 박사 과정을 밟은 A 교수의 학위 논문이다. 2020년 6월경 논문 심사를 통과한 것으로 파악된다. 진주교대 교수 채용공고가 뜨기 3~4개월 전이다. 채용 과정에서 전공 적부 논란 임용 이후 추가 문제 제기됐다 2021년 3월, B 교수는 A 교수의 연구 부정행위(표절)를 광주대에 제보했다. A 교수가 해당 논문으로 광주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기에 검증도 광주대에서 진행해야 했다. 교육부 훈령 제449호 ‘연구윤리 확보를 위한 지침’ 제18조(연구부정행위 검증 절차)에 따르면 연구 부정행위를 검증하려면 예비조사와 본조사, 판정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 절차를 총괄하는 게 연구윤리진실성위원회다. 연구윤리진실성위원회는 예비조사와 본조사를 위한 위원회 구성과 운영에 대한 심의, 의결 권한을 갖는다. 또 예비조사와 본조사에서 나온 결과를 승인한다. 제보를 받은 광주대는 연구윤리진실성위원회를 소집했다. 황당한 지점은 광주대에서 A 교수의 논문을 두고 예비조사와 본조사를 수차례 반복했다는 사실이다. B 교수가 마지막에 나온 연구윤리진실성위원회 결과를 두고 민사소송을 제기한 시점은 2024년 8월로, 처음 제보했던 2021년 3월 이후 무려 3년5개월이나 걸렸다. 그나마도 표절 여부는 여전히 판명 나지 않았다. 교육부의 연구윤리 확보를 위한 지침 제25조(판정)에 따르면 예비조사 착수 이후 판정까지의 모든 조사는 6개월 이내에 종료해야 한다고 돼있다. 물론 이 기간 안에 조사가 이뤄지기 어렵다고 판단될 경우 연장도 가능하다. 하지만 광주대의 경우는 ‘절차상 하자’가 연이어 발생했다. 제보자나 피조사자 양측에서 이의를 제기하고 재조사하는 일이 반복됐다. 2021년 8월 광주대 본조사위원회는 A 교수의 논문에 대해 만장일치로 표절 판정을 내렸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A 교수에게 의견 진술권을 부여하지 않은 점이 문제로 떠올랐다. 다시 말해 A 교수가 자신의 논문이 표절이 아니라고 반론할 기회를 주지 않은 것이다. 결국 모든 조사는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2022년 연구윤리진실성위원회가 재구성됐는데 5월 예비조사와 8월 본조사에서 정반대의 결론이 나왔다. 예비조사위원회는 ▲A 교수 논문의 총 1234개 문장 중 425개(34.4%)가 표절로 의심되며 ▲특정인의 논문을 몇 페이지에 걸쳐 연속적으로 사용했고 ▲독창적인 부분을 적시해 달라는 요청에 피조사자가 답변을 회피하며 적극적 방어를 하지 않아 비교 대조표를 그대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점 등을 근거로 표절로 판정했다. 거듭된 하자 조사만 4번 반면 본조사위원회는 “이 사건 논문은 ‘작품 논문’이라는 특성상 다른 분야와 같은 기준으로 표절 여부를 판단하기 쉽지 않다”며 “작품 논문의 특수성을 감안할 때 논문의 핵심 부분인 작품 그 자체에는 독창성이 인정되므로 논문 자체를 표절이라고 판정할 수 없다”고 했다. 두 번째 조사에서도 또다시 ‘하자’가 발견되면서 판정이 무효로 돌아갔다. B 교수는 피조사자인 A 교수가 심사위원 제척 여부를 이유로 외부위원 명단을 요청했고 실제 공개된 점, 제보자에게 의견 진술의 기회를 주지 않은 점 등의 절차상 하자가 있다고 주장했다. 또 본조사위원회 보고서에 각 당사자의 진술 요지와 조사 결과 등이 반드시 포함돼야 하는데도 이 부분을 빠뜨리면서 실체상 하자도 발생했다고 강조했다. B 교수는 광주대 연구윤리진실성위원회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동시에 법원에 본조사위원회 판정 효력 정지 가처분을 신청했다. 이 건은 피고(광주대 측)가 “원고 측 이의를 받아들이고 기존 본조사 판정을 무효화하고 다시 본조사위원회를 소집하겠다”고 약속하고 B 교수가 소를 취하하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2023년 세 번째로 소집된 본조사위원회는 A 교수의 논문을 표절로 판정했다. 의견서에는 ▲전체 1200여개 문장 중 출처 표시 없이 인용된 문장이 360여개로 과도하게 많은 점 ▲저자의 독창성을 보여주는 부분이 많지 않은 점 ▲논문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제4장과 결론에서도 타인의 학술 논문과 내용이 유사하거나 출처 표시가 없는 문장이 다수인 점 등이 근거로 기재됐다. 하지만 이 결과도 연구윤리진실성위원회의 구성 문제가 대두되면서 전면 무효화됐다. ‘광주대학교 연구윤리진실성위원회의 설치 운영에 관한 규정’에 따르면 ‘학장, 교무처장 및 산학협력단장은 당연직으로 하고 교무처장이 위원장이 된다’는 조항이 있는데 이를 일부 준수하지 않은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다시 해를 넘겨 2024년 6월 예비조사위원회는 표절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놨다. 예비조사위원회는 A 교수의 논문이 박사학위 논문 심사를 통과했고, A교수가 KCI 논문 유사도 검사에서 1%의 유사도를 보인 결과서를 제출한 점을 근거로 들었다. 저작위원회 “유사성 인정” 또 A 교수가 인용 표시를 하지 않은 부분이 타인의 아이디어나 창작물을 침해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다른 저자의 논문 역시 다른 논문이나 저서를 그대로 따른 것으로 ‘독창적인 아이디어나 창작물’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눈여겨볼 대목은 표절이 아니라고 판정한 예비조사위원회의 결론을 연구윤리진실성위원회에서 승인했다는 점이다. 연구윤리진실성위원회는 본조사를 실시할 필요가 없다는 판정을 내리고 결론을 확정했다. 3년5개월여 동안 진행된 조사에서 연구윤리진실성위원회의 판정 승인이 떨어진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일단 표면상으로는 최종 결론이 난 셈이다. 첫 채용 공고 시기로 따지면 4년 가까이 이어진 논란은 B 교수의 반발로 법정에 가게 됐다. B 교수는 2024년 7월 광주대가 자신의 이의 신청을 기각하자 같은 해 8월 광주대의 운영 주체인 학교법인 호심학원을 상대로 ‘연구윤리진실성위원회 판정 무효확인 등’의 소송을 제기하기에 이른다. 예비조사위원회의 결론을 승인한 부분과 본조사위원회가 불필요하다고 한 부분을 무효로 판단해 달라는 취지였다. 이 과정에서도 절차상 하자가 언급됐다. B 교수는 “광주대 연구윤리위원회 규정에 따르면 연구 부정행위에 대한 충분한 혐의를 인지했을 경우에 예비조사를 생략할 수 있고, 피조사자가 연구 부정행위 사실을 모두 인정할 경우 본조사를 생략하고 바로 판정을 내릴 수 있다”며 “또 연구윤리진실성위원회는 예비조사 결과를 확정해 판정할 근거가 없다. 본조사 결과만 승인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A 교수 논문에 대한 표절 여부도 제대로 다시 확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비조사와 본조사를 거치는 과정에서 표절 판정이 엇갈린 만큼 저작권법, 연구윤리 확보를 위한 지침 및 한국연구재단이 제시하는 인용 방법 및 논문 표절 기준 등에 따라 A 교수의 논문을 구체적으로 살펴봐야 한다는 설명이다. 실제 B 교수는 A 교수의 논문을 한국저작권위원회에서 감정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법원에 요청했다. 한국저작권위원회는 저작권법 제112조에 따라 설립된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공공기관이다. 법원이 B 교수의 요청을 받아들이면서 한국저작권위원회는 A 교수가 박사학위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표절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12편의 논문을 비교, 감정했다. 반복된 조사 엇갈린 판정 결국 법정 공방으로 번져 <일요시사>가 입수한 감정 결과서에 따르면 A 교수의 논문은 총 12편의 비교 대상 논문 중 총 11편에 대해 저작권법상 보호를 받는 창작적인 표현 형식을 상당 부분 복제하고 있다며 저작권법상 실질적인 유사성이 인정된다고 했다. 또 ‘단순히 학술적 아이디어나 이론적 사실을 공유하는 수준을 넘어 선행 저작자들이 자신의 학문적 관점과 예술적 주관에 따라 논리적으로 체계화한 문장 구조, 단어 선택, 서술 방식 등을 그대로 사용했다’ ‘외국 문헌을 연구자 본인의 시각으로 재해석해 요약하거나 번역한 문장의 경우에도 원저작자의 창작적 개성이 반영돼 저작권법의 보호 범위에 포함됨에도 불구하고 A 교수의 논문은 이를 무단으로 복제해 논문에 활용했다’ 등의 감정 결과를 내놨다. B 교수는 “저작권법 위반 여부는 표절보다 그 인정 범위가 좁다. 논문의 독창성을 저작권으로 인정해 그 부분을 침해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한국저작권위원회의 결론은 A 교수가 다른 사람이 쓴 논문의 독창성을 인용 없이 가져다 썼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광주대의 운영 주체인 호심학원 관계자는 “소송 중인 사안으로 드릴 말씀이 없다”는 답변을 해왔다. 문제는 상황이 여기까지 흘러오는 동안 손 놓고 있는 진주교대의 태도다. A 교수의 박사학위 논문 표절 여부는 진주교대의 교수 채용과 밀접하게 얽혀있다. 채용 공고에서 지원 자격으로 박사학위 소지자가 명시됐던 만큼 논문 표절 여부는 이번 논란의 중요한 요소다. 표절로 판명되면 학위 자체가 취소되는 사례도 있어 A 교수가 진주교대 교수 채용에 아예 지원조차 할 수 없었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진주교대는 ‘강 건너 불구경 하듯’ 광주대와 B 교수 간의 소송 결과가 나오고 그에 따라 광주대가 조치한 뒤에야 행동을 취할 수 있다는 입장을 보였다. 진주교대 교무처 관계자는 “(학교가) 손 놓고 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며 “소송이 진행 중인 만큼 결과를 기다리는 과정에서 법률 검토 등 내부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B 교수는 “학교는 학생들의 수업권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다. 그저 누가 학교에 책임을 물을까 봐 전전긍긍할 뿐이다. 학교 측에서 했다는 법률 검토도 현재 손 놓고 있는 학교의 행보가 나중에 직무유기로 문제가 될까 알아본 것이라고 한다. 교대는 학생들이 커리큘럼에 따라 수업을 신청해야 하는 구조라 교수에게 문제가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수업을 들을 수밖에 없다”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학생들만 뒷전 됐다 그러면서 “광주대와의 소송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면 그 결과가 나올 때까지만이라도 A 교수가 수업을 하지 못하도록 제한해야 한다. 공무원의 경우 문제가 발생하면 일단 ‘직위해제’ 조치를 하지 않나. 그런 조치가 필요하다. 초등학교 교사를 길러내는 대학이다. 학교가 그 이름에 걸맞은 행보를 보여야 한다”고 거듭 주장했다. 한편, A 교수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드릴 말씀이 없다”고 답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