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 드는 ‘윤석열 대망론’ 막전막후

꽃놀이패 쥐고, 못 먹어도 고?

[일요시사 정치팀] 설상미 기자 = ‘윤석열 대망론’이 세간의 화제다. 정권을 가리지 않던 ‘칼잡이’였기에 중도층에서 각광을 받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에게는 확실한 ‘계파’가 없다. 현 정부 지지자들에게는 ‘정치 검찰’로 찍혔고, 보수 세력에게는 박근혜정부 몰락에 일조했다는 점 때문에 미움을 받고 있다. 게다가 ‘경직된 원칙주의자’로 불리는 그가 살아 움직이는 정치판을 견딜 수 있을 지도 미지수다.
 

▲ 윤석열 검찰총장

“우리 사회와 국민을 위해 어떻게 봉사할지 퇴임 후 방법을 천천히 생각해 보겠다.” 지난달 23일 법제사법위원회 대검찰청 국정감사에서 윤석열 검찰총장은 퇴임 후 거취에 대해 이렇게 대답했다.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그의 “정무 감각이 없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는 발언과는 확연히 결이 다른 ‘선언’이었다.

혜성인가
계륵인가

반향은 엄청났다. 정치인들의 전형적인 수사어인 ‘봉사’라는 단어에 그의 지지율은 15.1%로 상승했다. 대권 물망에 오르는 인물 중 3위로, 야권 정치인 중에서는 1위였다.

국감장에서 윤 총장은 줄곧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똑바로 앉으라”는 여당 의원의 호통에도 전혀 주눅 들지 않았으며 “검찰총장은 법무부 장관의 부하가 아니다”라는 한 마디로 정치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대답하고 싶지 않은 질문에는 능구렁이가 담 넘어가 듯 대처했다. 당일 국감 시청율은 10%에 육박했다.


온 국민의 시선이 국감장에 몰려 있는 상황에서 윤 총장은 지금까지 참아왔던 말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소병훈 의원이 “하나를 물으면 열 개를 답한다. 누가 누구를 국감하는지 모를 지경”이라며 불만을 터트릴 정도였다. ‘윤석열스러운’의 기개를 보여준 국감이였다는 평가가 나왔다.

윤 총장의 정계 입성론을 두고 인물난을 앓고 있는 야권에서는 기대가 터져 나왔다. 야권의 킹메이커를 자처한 김무성 전 의원은 “윤 총장은 국민들이 좋아할 타입”이라며 “박근혜정권에서도, 문재인정권에서도 소신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에 국민들이 열광한다. 윤석열이라는 영웅이 만들어져 가는 과정에 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퇴임 후 봉사? 야권 1위 지지율
인물도 없는데…꽃가마 태우나

무소속 홍준표 의원도 “여의도 판에서도 충분히 통할 수 있는 대단한 정치력, 잘 모실 테니 정치판으로 오라”고 말했다. 국민의힘 장제원 의원 역시 “범야권에 강력한 원심력으로 작용할 것. 확실한 ‘여왕벌’이 나타난 것”이라고 평가했다.

다만 윤 총장에게는 확실한 ‘뒷배’가 없다. 그는 정권을 가리지 않던 ‘칼잡이’로 유명하다. 참여정부 때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측근이었던 강금원 대표,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를 구속기소했다. 또 노 전 대통령의 딸 정연씨의 미국 고급 아파트 매입 의혹을 수사하면서 외환관리법 위반으로 기소한 바 있다.

정권이 바뀌어도 그의 칼날은 예리했다. 박근혜정부 시절에는 조영곤 당시 서울중앙지검장에 대한 항명 논란이 있었다.

윤 총장은 국정원 댓글조작 사건에서 반대를 무릅쓰고 국정원 직원의 체포를 강행했고, 상부 보고 누락과 지시 불이행으로 업무에서 배제됐다. 그해 그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국감에서 수사 외압을 폭로하면서, “나는 조직에 충성하지,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유명한 발언을 남겼다.
 

▲ 대화 나누는 문재인 대통령(사진 왼쪽)과 윤석열 검찰총장

윤 총장은 2016년11월 국정 농단 사건이 터지자, 박영수 특별검사팀의 수사팀장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이후 그는 사법농단 사건을 파헤치며, 전직 대법원장을 구속하고 두 명의 전직 대법관을 기소했다.

검찰 조직에서 좌천된 검사였던 윤 총장에게 ‘날개’를 달아준 사람은 다름 아닌 문재인 대통령이였다. 그는 문 대통령의 각별한 총애를 입었다. 윤 총장은 사법시험 9수생이다. 환갑이 돼야 검사장 정도 달 수 있어, 검찰 내에서는 윤 총장이 총장직을 달 것이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정치 몰라도?
중도층 각광

하지만 윤 총장은 문 대통령 취임 이후 검사장 승진과 동시에 ‘검찰의 꽃’으로 불리는 서울중앙지검장으로 발탁됐고, 5기수를 건너 뛰어 검찰총장 후보에 올랐다. 전직 대통령, 재벌 총수, 전직 대법원장 등을 구속하면서 ‘적폐 청산’ 수사를 이끈 그의 공로 때문이다.

그의 지명은 문정부의 검찰 개혁에 대한 의지였다. 윤 총장은 여권 지지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검찰 조직의 정점에 올랐다.

적폐 청산의 상징이었던 그가 ‘적폐’로 몰린 것은 지난해 ‘조국 사태’를 거친 후부터였다. 검찰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를 했다. 적폐 청산 수사를 일관적으로 해온 검사들이 조 전 장관을 수사하면서 ‘역적’으로 전락한 것이다.

이후 윤 총장은 추미애 법무부 장관과 각을 세웠고, 법무부와 대검찰청의 기싸움은 도가 지나칠 정도로 계속되고 있다. 이후 그는 여권 지지자들에게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의 ‘1호 대상’으로 지목되고 있다.

여권의 날선 지탄에 대한 반사이익도 상당했다. ‘반문’(문재인), ‘반추’(추미애)‘ 연대는 그에게 힘을 실어줬다. 대검찰청 앞에 그를 응원하는 수백 개의 화환이 이를 방증한다.

그렇다면 윤 총장이 대망론에는 어떤 시나리오가 있을까.

현재로서는 민주당 후보로 나설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그는 평소 시장경제를 신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민주당이 내세우는 시장 논리와 부합하지 않는다. 게다가 여권의 핵심 지지층인 친문 세력에게 ‘정치 검사’로 찍힌 상태다.

이 뿐만이 아니다. 여권에는 민주당 이낙연 대표와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나란히 1·2위를 다투고 있다. 이들의 지지 세력은 공고하다. 2022 대선에서 쟁쟁한 여권 후보들을 제치는 것은 아무래도 어려워 보인다.

날개 달아준
문 대통령


다른 시나리오는 그가 보수 정당의 후보가 되는 것이다. 야권이 인물난을 앓고 있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지다. 다만 당내 세력 확장 여부가 변수다.

정치는 세력 다툼이다. 대선 후보는 당과 지지자들에게 ‘우리 사람’으로 보여야 한다. 그런 점에서 그가 보수 진영의 맹목적인 환영을 받기는 어려워 보인다. 윤 총장은 적폐 청산 수사를 진두지휘하면서, 박근혜정부의 몰락과 이번 정권 창출에 큰 공을 세웠다.

그가 이명박·박근혜정권 인사들을 줄줄이 구속시킨 것에 대한 보수 세력의 불만은 크다. 중도층에서는 각광을 받을지 몰라도, 당 핵심 지지층의 마음을 얻기까지는 꽤 긴 시간과 노력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 윤석열 검찰총장을 응원하는 화환들

마지막 시나리오는 그가 제3당의 후보가 되는 길이다.

하지만 87년 대통령 직선제 도입 후 비정치인 출신이었던 제3의 후보들의 ‘대망론’은 성공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고건 전 총리와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대표적인 예다. 2012년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 역시 그랬다. 모두 여론조사에서 열광적 지지를 받으며 대선에 출마했다. 하지만 정치는 그들의 예상보다 녹록지 않았고, ‘정치 신인’들은 대선 레이스도 완주하지 못한 채 스러졌다.

이들은 모두 혜성처럼 나타났다. 정치에 대한 불신도가 높은 한국 정치 특성상 국민들은 신선하고 새로운 인물을 좋아한다. 이들에 대한 국민들의 주목도 역시 높다.


정치권 분위기를 환기시킬 수 있어 국민들에게는 잠시 매력적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윤 총장의 지지율이 올라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반짝하는 인기는 ‘허상’에 불과하다. 정치는 정무적 감각을 무장한 채 외교·안보·남북관계·경제 등을 두루 섭렵한 훈련된 인물이 해야 한다.

정권 가리지 않던 칼잡이
원칙주의자에서 ‘킹’으로?

인기에 영합한 정치의 단면은 반기문 전 유엔 총장 사례를 통해 잘 드러난다. 국정 농단 사태가 터지기 전, 반 전 총장의 지지율은 40%에 육박했다. 여야를 통틀어 단연 1위였다. 국민의힘의 전신이었던 새누리당은 반 전 총장을 영입하기 위해 오랜 시간 공을 들였다.

하지만 2016년 국정 농단 사태가 터진 이후, 새누리당 지지율과 함께 반 전 총장의 지지율은 10%대로 추락했다. 반 전 총장은 각종 잡음을 견디지 못하고, 대선 출마 를 선언한 지 3주 만에 정계를 떠났다. 정치의 냉혹한 현실을 깨달은 관료 출신의 씁쓸한 뒷모습이었다.
 

▲ 김무성 전 대표

야권은 그대로 흔들렸다. 당시 김무성 전 대표는 반 전 총장을 ‘킹’으로 만들기 위해 스스로 대권 출마를 포기하는 결단을 한 상태였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은 반기문 전 총장의 캠프에서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을 예정이었다. 거품과 같은 지지율에 기댔던 야권은 그야말로 패닉 상태였다.

이 같은 전례에 빗대어 봤을 때 ‘윤석열 바람’에 휘둘리다 야권에 또 변수가 생기면, 당으로서는 궤멸적 참패를 맞을 공산이 높다. 윤 총장의 지지율이 높아지면서 윤 총장이 ‘계륵’으로 전락할 것이란 관측이 나오는 배경이다.

인물이 가진 리스크도 크다. 윤 총장은 칼을 휘두르는 데 익숙한 천직 검사다. 지나칠 정도로 ‘경직된 원칙주의자’인 그가 살아 움직이는 생물로 불리는 정치에 적응할 수 있을까. 인물난을 겪고 있는 범야권에서 정치력을 증명해야 할 과제가 그에게 남는 셈이다.

현실적으로도 윤 총장이 다음 대선에 나가기 어려워 보인다. 그의 임기는 내년 7월이다. 2022 대선까지 6개월이 남은 시점이다. 국회의원 선거도 진흙탕 싸움으로 쉽게 번지는 정치판이다. 세력을 구축하고 민심을 얻기에는 터무니없이 짧은 기간이다. 지금까지 쌓아 온 커리어마저도 다 망치는 최악의 선택이 될 수 있다.

현실적으로
다음 어렵다?

야권에서도 ‘꽃가마 인사’에 대한 거부감이 감지된다. 국민의힘 김병욱 의원은 “무임승차할 수 있는 대권은 없다”며 “대통령이 되고자 한다면 국회의원을 하든 대표를 하든 정당에서 훈련과 검증을 거쳐야 하지 않을까”라고 반문했다. 국민의힘 주호영 원내대표 역시 “정치도 경륜과 경험이 필요한 전문 영역인데 정치를 해 보지 않고 곰삭지 않은 사람들이 정치에 와 자꾸 실패한다. 정치인을 인기 투표식으로 평가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지적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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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페이스북에 사과 입장을 밝혔다. 국민의힘 원내 지도부도 기자회견을 열고 고개를 숙였다. 사과는 짧았지만,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비난은 길었다. 사과 의견을 통해 확인되는 국면 전환 노림수는 ‘한동훈을 제외한 빅텐트’인 걸까? 국민의힘 공보실은 지난 2일 오후 10시54분 출입기자들에게 지난 3일 지도부 일정을 공지했다. 공보실에 따르면, 지도부의 일정은 ‘통상 일정’이었다.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의미다. 지난 3일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1주년이었다. 통상의 의미는? 지도부의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것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의 비상계엄 관련 공개 사과 및 기자회견 일정이 없었단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장 대표는 지난 3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사과 의견을 밝혔다. 장 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계엄이었다”는 등 “정당화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소지가 있는 주장부터 제시했다. 윤 전 대통령 파면에 대해서도 “한국 정치의 연속된 비극을 낳았고, 국민과 당원들께 실망과 혼란을 드렸다”는 등 ‘탄핵 반대’ 의견을 유지했다. 장 대표에 따르면, 국민의힘의 잘못은 하나로 뭉쳐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는 부분이었다. 자신에 대해서도 “당 대표로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강조했다. “장 대표가 사과하지 않을 것”이란 예상은 같은 날 오전 4시50분경 이정재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국민의힘 추경호 의원의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확실시됐다. 장 대표는 페이스북 게시글에서도 “추 의원 구속영장 기각은 어둠의 1년이 지나고 두터운 장막이 걷히고, 새로운 희망의 길이 열리는 신호탄”이라면서 대정부 투쟁에 의미를 부여했다. 장 대표는 “이재명정권의 대한민국 해체 시도를 국민과 함께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대표가 사과 불가는 지난달 28일 대구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장외집회에서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었다. 당시 그는 “비상계엄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우리가 흩어지고 분열한 결과, 이재명정권이 탄생했단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이재명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연설 대부분을 채웠다. 5일 간격으로 같은 얘기를 반복한 것이었다. 당시 장 대표가 주장한 민주당에 대한 비난의 핵심 내용은 ▲의회 폭거·국정 방해 ▲무모한 적폐 몰이에 따른 공무원 사찰 위협 ▲폭거로 인한 민생 파탄·국가 시스템 붕괴 ▲내란 몰이 등이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국민의힘의 비상계엄 관련 사과는 ▲송언석 원내대표 ▲유상범·김은혜 원내부대표 ▲최수진·최은석 원내대변인 등 원내 지도부 차원에서 나왔다. 송 원내대표 등은 지난 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께 큰 충격을 드린 비상계엄 발생을 막지 못한 데 대해 국민의힘 국회의원 모두는 무거운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며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군인·공직자·의료인·자영업자 등 비상계엄 선포 피해자들에게 “깊은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고개 숙였다. 하지만 이후의 메시지는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 등 장 대표의 주장과 크게 차이가 없는 내용이었다. 송 원내대표는 “국민의힘 의원들은 패배의 아픔을 딛고 분열과 혼란의 과거를 넘어서 다시 거듭나겠다”며 “소수당이지만 처절하게 다수 여당과 정권에 맞서 싸우겠다”고 강조했다. 이전까지 국민의힘에서 장 대표에게 공개적으로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정치인은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용태·김재섭·권영진·엄태영·이성권·조은희 의원 등이었다. 국민의힘 양향자 최고위원은 지난달 29일 대전에서 진행된 장외집회 중 “국민의힘은 불법 계엄을 방치했으니,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일부 지지자들의 강한 항의를 받았다. 김재섭 의원은 지난달 28일 YTN 라디오 <더 인터뷰>에 출연해 “당 지도부의 사과가 없으면 제 나름의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며 “같이 메시지를 낼 국민의힘 의원들이 약 20명은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연판장을 돌리거나 기자회견을 할 수도 있다”는 압박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었다. 오 시장도 같은 날 채널A <김진의 돌직구 쇼>에 출연해 “중도층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도 당 차원의 사과가 필요하다”며 “공당이라면 반성문을 쓰는 게 도리”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들은 당과 무관하게 대국민 사과를 했다. 오 시장은 지난 3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의힘 소속 중진 정치인이자, 서울시민의 일상을 책임지는 시장으로서 그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그날의 충격과 실망을 기억하는 모든 국민께 거듭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국민의힘 의원 25명은 지난 3일 국회에서 “비상계엄 선포 당시 집권여당의 일원으로서 비상계엄을 미리 막지 못하고 국민께 커다란 고통과 혼란을 드린 점에 대해 거듭 국민 앞에 고개 숙여 사죄드린다”면서 ▲헌법재판소의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 존중 ▲윤 전 대통령과의 정치적 단절 ▲국민의힘 체질 개선·재창당 수준의 혁신 등을 약속했다. 이어지는 각자 플레이 장 대표에게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후 자체적으로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한 국민의힘 정치인들은 대체로 수도권에 기반을 둔 소장파다. 이들 중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정당으로 자리매김하면 가장 큰 손해를 볼 정치인으로는 오 시장과 김재섭·김용태 의원이 거론된다. 오 시장은 높은 개인 인기를 바탕으로 민주당의 서울시장 탈환 공세에 맞서고 있다. 김재섭 의원의 지역구 서울 도봉갑은 원래 민주당 텃밭이었다. 김 의원은 지난해 총선 당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1094표 앞서 어렵게 이겼다. 지난해 12월7일 국민의힘의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 표결 집단 이탈에 동참했을 때도 지역구에서 규탄 집회가 개최되는 등 홍역을 치렀다. 김용태 의원도 경기 가평·포천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박윤국 한국도자재단 이사장에 2774표 앞서 어렵게 금배지를 다는 데 성공했다. 국민의힘에 대해선 “강경 보수화가 진행된다”는 지적이 각계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 우려는 장 대표가 지난달 16일 유튜브 채널 ‘이영풍 TV’에 출연해 ▲자유통일당 ▲우리공화당 ▲자유민주당 ▲자유와혁신 등 원외 강경 보수 4당과의 지방선거 연대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깊어졌다. 장 대표는 지난달 28일 개혁신당과의 연대 가능성에 대해선 “지금은 연대를 논의할 때가 아니”라면서 선을 그었다. 최근 국민의힘에선 “한동훈 전 대표를 축출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만한 밑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다. 국민의힘 여상원 윤리위원장은 지난달 17일 사의를 표명했다. 여 위원장은 “당에서 ‘물러나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며 “굳이 능욕당하면서 자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돼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답했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윤리위원회가 ‘계파 갈등 조장’을 이유로 윤리위에 넘겨진 국민의힘 김종혁 전 최고위원에 대해 주의 조치만 내린 것 때문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국민의힘 우재준 청년 최고위원은 지난달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원하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고 윤리위원장을 사퇴시키는 게 정당한 일이냐”며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드는 민주당과 뭐가 다르냐”고 정면 비판했다. 이어 국민의힘 당무감사위원회는 지난달 28일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한 조사 절차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당원 게시판 의혹은 “국민의힘 당원 게시판에 올라온 윤 전 대통령 부부 비방글 작성에 한 전 대표 가족이 연루된 게 아니냐”는 의혹이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밝혀 당원에게 알릴 것”이라는 방침을 밝혔던 바 있다. 윤 전 대통령 부부는 정치적으로 몰락해 서울구치소에 갇혔고,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국민의힘이 당원 게시판 의혹을 밝혀낸 후 거둘 수 있는 실익으로는 “한 전 대표를 국민의힘에서 쫓아내고, 친한(친 한동훈)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거론된다. 구 친윤(친 윤석열)계가 거둘 수 있는 이익이다. 한 전 대표에 대해선 보수 성향 유권자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명확하게 나뉜다. 하지만 한 전 대표는 윤 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갈등하면서 비상계엄 해제에 동참했던 이력이 있다. 이 때문에 한 전 대표는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일색이 되는 걸 막는 방파제·상징”이란 분석이 오랫동안 있어왔다. 친한계로 거론되는 국민의힘 의원 중 상당수는 수도권에 지역구를 둔 소장파라는 분석이 나온다. 윤리위원장 쫓아낸 이유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선 “윤 전 대통령이 정치에서 폭력을 동원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몰랐던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정치의 본질은 대화·토론·협상이다. 영국 하원에선 20세기 초까지 의원이 총칼을 이용해 결투·난투를 했다. 물리적 폭력이 아닌 ‘언어폭력’ 선에서 공방을 이어가는 정치 문화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정착됐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전 세계에 줬던 충격은 민주주의가 충분히 성숙했다고 믿었던 대한민국에서 군을 동원해 정적을 제거하려던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는 사과 메시지를 먼저 짧게 발표하면서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은 길게 이어가는 형식의 사과 의견을 밝혔다. 사과엔 ▲직접적인 반성 ▲분명한 잘못 인정 ▲재발 방지 약속 ▲보상 약속 등 4개의 원칙이 제기됐는데 “상대방 비판에 더 중점을 둔 사과는 역설적으로 ‘반성을 하는 게 맞느냐’는 비판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당시 대국민 사과를 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 2016년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후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 전 대통령은 “모든 것이 제 불찰이고, 국민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후속 조치 중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미흡했고, 우려를 덜어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국정을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라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면서 “국민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은 당시 크게 불거졌던 각종 우려를 ‘괴담’으로 규정지었다. 이 때문에 촛불 시위 세력이 제시한 재협상 시한과 맞물린 시점에서 사과가 나온 점을 감안할 때 국면 전환을 위한 명분 쌓기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이미 각종 의혹이 광범위하게 제기돼 근거 자료들까지 제시되는 시점에서 “취임 후 일정 기간 일부 자료들에 대해 최순실씨의 의견을 들은 적은 있지만, 청와대 보좌 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뒀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의 해명은 신뢰를 잃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두 전직 대통령의 사과처럼 자신의 주장을 뒤에 배치한 후 더 큰 비중을 부여하는 형식을 유지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이런 사과 형식은 국면 전환·지지층 결집 목적을 가진 이들이 활용한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고대 로마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있었던 마르쿠스 브루투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설이 꼽힌다. 카이사르 살해를 주동한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 대한 내 사랑은 카이사르를 사랑하는 다른 분보다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한다”고 선언한 후 “로마를 더 사랑해서 카이사르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이어 “나라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죽였다”고 강조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존경할 만한 분들”이라고 선언한 후 카이사르를 찬양하면서 그의 유언장을 공개했다. 유언의 핵심 내용은 “내 재산을 로마 시민에게 기증한다”는 것이었다. 또 카이사르가 살해당할 당시 입었던 칼자국과 피로 얼룩진 옷도 공개했다. 흥분한 로마 시민은 암살자들의 집을 습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토니우스·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정국을 장악했다. 불리한 내용을 먼저 짧게 거론한 후 유리한 내용을 장황하게 거론하는 형식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즐겨 이용된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가 짧은 사과 의견을 밝힌 후 이재명정부·민주당을 비중 있게 비판한 것도 강경 보수 세력에겐 강한 인상을 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장 대표는 비상계엄의 원인을 ‘의회 폭거’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윤 전 대통령은 카이사르가 된다. 비상계엄 해제에 찬성해 사실상 윤 전 대통령 몰락에 가담한 한 전 대표와 친한계는 브루투스 일당이 되는 구도가 그려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강경 보수 세력은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해 어떤 의견을 제시할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공나형 전남대 학술연구교수는 지난 2022년 발표한 논문 <대통령의 공적 사과 담화에서 드러나는 ‘개입’ 양상>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1993년 쌀 시장 개방을 수용하면서 밝힌 대국민 사과와 박 전 대통령의 최순실 게이트 관련 대국민 사과를 분석했다. 공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선의로 행한 행위가 어쩔 수 없는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고 강조하면서 결과의 부정성에 관여하는 자신의 의도의 비중을 제거했다”고 분석했다. 박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자기 고백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그 고백의 원인이 되는 행위에 대해선 소극적”이라고 분석했다. 12월3일 조용히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어쩔 수 없었다”는 항변과 상대방 비판을 내용으로 채웠다. 그러면서 민주당 심판·보수 재건·대여 투쟁을 강조했다. 결국 두 사람의 답은 ‘한 전 대표를 제외한 빅텐트’ 방침 재확인으로 보인다. 국민의힘의 12월3일은 이렇게 조용히 지나갔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