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24.11.22 03:01
가난할 땐 힘들어도 희망이 있었다. 저축률은 30%를 훨씬 넘었다. 사람들은 성실하게 일하며 적금을 들었고 가정을 꾸릴 꿈을 꿨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열리고도 한동안 고속 성장을 이어갔다. 1997년의 외환위기를 맞이하기 전의 대한민국은 그랬다.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인 한국은 세계를 향해 금융시장을 열었다. 저축하던 개인은 투자자로 변신했다. 역설적이게도 과도한 기업부채로 발생한 외환위기가 지나자 가계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은 외환위기 극복에 유효했다는 평가와 극단적인 양극화 문제의 본질적인 원인이라는 비판을 동시에 받는다. 사람들은 부채를 두려워하지 않게 됐다. 저금리 시대엔 현명한 빚쟁이가 오히려 빛을 발했다. 누구나 대출받아 집을 사고 주식을 샀다. 소비는 미덕이 됐고 노동 소득은 오히려 가난의 상징처럼 느껴졌다. 지금도 전혀 다르지 않다. 고금리와 고물가가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사람들은 금리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린다. 마약성 진통제가 치료제가 아니듯 저금리가 유일한 최선책이 아니란 건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저금리의 환각은 강력하다. 가계부채는 여전히 늘어나고 있고 자영업자들은 비명을 지르고 있다. 부동산 위기도 몸으로
ELS 사태로 원금 손실을 입은 피해자들은 ‘국민의 등에 칼 꽂은 은행’을 향해 울분을 토한다. 그러면서 손실 위험 고스란히 품은 금융상품의 설계 제조 책임은 왜 아무에게도 묻지 않을까? 정작 수수료 듬뿍 얹어주며 판매를 맡긴 ELS 제조사, 설계자는 베일에 가려져 있다. 피해자들은 그들이 누군지 알 수도 없고 고발조차 하지 못한다. 아무리 봐도 정상적이지 않은 이 기형적 상황은 누구 책임일까? 이 비극적인 금융 테러 사건은 언제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 1980년대, 세계적인 신자유주의 물결은 거셌다. 미국 투자은행이 처음 ELS를 선보인 것도 그쯤부터다. 경쟁을 통해 경쟁력을 키운다며 시장에 자유를 선물했다. 투자은행, 상업은행 가리지 않고 자유롭게 새로운 파생 금융상품을 출시했고 자본시장의 외형은 급격하게 커졌다. 1990년대엔 유럽의 상업은행도 가세했고 본격적으로 일반인들에게 ELS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IMF 사태로 불리는 외환위기가 지나고 2000년대를 맞았을 무렵, ELS는 한국에 상륙했다. 정부는 ‘자본시장 안정화’를 명분으로 삼았다. 국가 자원과 역량으론 재벌 기업의 덩치를 키우는 데 급급하면서도 정작 시장 안정화엔 전문적 지식과 정보 접근성
김영권의 <대통령의 뒷모습>은 실화 기반의 시사 에세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재임 시절을 다뤘다. 서울 해방촌 무지개 하숙집에 사는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당시의 기억이 생생히 떠오른다. 작가는 무명작가·사이비 교주·모창가수·탈북민 등 우리 사회 낯선 일원의 입을 통해 과거 정권을 비판하고, 그 안에 현 정권의 모습까지 투영한다. 우리는 언제 어느 때라도 통일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습관을 지녀야만 한다. 내일 모레라도 통일이 닥쳐온다는 생각, 한 발짝 더 나가 오늘 당장 통일이 되었다고 상상하며 살아보는 것도 이익이 되었으면 되었지 결코 쓸데없는 짓은 아니리라. 과연 어떤 방식일지는 누구도 모른다. 어느 날 갑자기 북조선 체제가 붕괴돼 버릴 수도 있다. 지도층 내부의 권력 암투로 우왕좌왕 급전직하하다가 자멸하든지, 인민 대중들이 궐기해 괴수 족속들을 몰아내고 새롭고 참된 민주 세상을 만들어 삼팔선 철조망 자체를 무용지물이나 평화의 기념물로 변화시킬 수 있다. 자멸론 다만 북진 통일론은 핵무기와 골수 군대 때문에라도 이제 완전히 폐기처분해 버려야 한다. 지금도 그런 망상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낡은 세뇌에 빠진 상태일 테니 빨리 뇌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