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할 땐 힘들어도 희망이 있었다. 저축률은 30%를 훨씬 넘었다. 사람들은 성실하게 일하며 적금을 들었고 가정을 꾸릴 꿈을 꿨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열리고도 한동안 고속 성장을 이어갔다. 1997년의 외환위기를 맞이하기 전의 대한민국은 그랬다.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인 한국은 세계를 향해 금융시장을 열었다. 저축하던 개인은 투자자로 변신했다. 역설적이게도 과도한 기업부채로 발생한 외환위기가 지나자 가계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은 외환위기 극복에 유효했다는 평가와 극단적인 양극화 문제의 본질적인 원인이라는 비판을 동시에 받는다.
사람들은 부채를 두려워하지 않게 됐다. 저금리 시대엔 현명한 빚쟁이가 오히려 빛을 발했다. 누구나 대출받아 집을 사고 주식을 샀다.
소비는 미덕이 됐고 노동 소득은 오히려 가난의 상징처럼 느껴졌다. 지금도 전혀 다르지 않다.
고금리와 고물가가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사람들은 금리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린다. 마약성 진통제가 치료제가 아니듯 저금리가 유일한 최선책이 아니란 건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저금리의 환각은 강력하다. 가계부채는 여전히 늘어나고 있고 자영업자들은 비명을 지르고 있다.
부동산 위기도 몸으로 느껴진다. 집 한 채가 재산의 전부인 이들의 긴장감은 훨씬 더 크다. 금리가 떨어지기만 기다리는 건 마치 가뭄 속에서 기우제를 올리는 농부의 심정과 비슷하다.
그런다고 금리인하가 근본적인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되리라고 기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달러/원 환율은 1400원대를 바라보고 있다. 국민소득 3만달러 시대는 환율 때문에 방어하기 어려울 전망이다. 달러 대비 원화 가치가 떨어지는 것 때문에 국민 삶의 질이 떨어지는 건 아니다.
다만, 물가상승을 부추기는 강력한 기폭제로 작용한다는 건 분명하다.
선진 자본시장을 구축하고 민주주의를 이룬 우리나라가 왜 이 지경이 됐을까? 세계 경제 10대 강국이 된 우리에게 무슨 문제가 있었을까? 혹시 우리는 이미 성장의 정점을 지나 길고 고통스러운 경제 침체기의 나락으로 빠져드는 건 아닐까 두렵기까지 하다.
자본주의가 성장해도 양극화가 심해지고 국민 다수의 경제적 자유가 축소되면 그 자본주의는 실패다. 민주주의가 성공적인 자본주의의 전제조건인지 확신할 수 없지만, 자본주의가 실패한다면 우리 민주주의는 분명 퇴보한다.
1인 1표의 선거권이 평등의 기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우리는 안다. 자본주의의 불평등한 속성을 관리, 조절하는 건 정치의 몫이다.
소수와 약자를 보호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소득이 많은 곳에서 더 많은 세금을 거둬 힘겨운 다수를 보호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성장과 번영의 지속 가능성을 높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가계부채 위기를 언급하지만 한계 상황의 개인은 더 높은 이자율을 감당해야 한다. 반대로 부자는 싼 이자로 대출받고 더 많은 투자 기회를 누릴 수 있다.
채무 감당 능력을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언제나 유리하고 더 좋은 대우를 받는 게 자본주의의 본질은 아니지 않을까?
냉혹한 경쟁의 결과로만 이기고 살아남은 사람만이 경쟁력을 거머쥐는 건 사회가 아니라 정글이다. 경쟁력 있는 국가는 포기하고 무너지는 국민조차 다시 일으켜 세우는 힘에서 나온다.
우리의 자본주의 시장경제 시스템을 고치고 손질할 필요를 느끼는 지도자가 필요한 시점에 와있다.
세상엔 좋기만 한 자본주의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설사 나쁜 자본주의라도 수정은 가능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망가진 건지 손댈 수 없이 이상해진 자본주의엔 희망이 없다. 공존과 공생, 평등한 기회와 공정한 분배를 마음 놓고 얘기해도 사상과 이념을 의심받지 않는 세상이 오길 바랄 뿐이다.
[조용래는?]
▲전 홍콩 CFSG 파생상품 운용역
▲<또 하나의 가족>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