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진단> ‘중국통’ 윤석헌 아시아경제개발위원회 회장의 APEC 총평

“옛 친구와 새 친구 사이에 섰다”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전 세계의 관심이 집중됐던 APEC 정상회의가 마무리됐다. 의장국을 맡은 한국은 대형 외교 이벤트를 무난하게 치렀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일요시사>는 윤석헌 아시아경제개발위원회 회장과 만나 미국과 중국, 일본 등 세계 강대국의 외교 전쟁 무대가 된 경주 APEC 정상회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지난달 31일부터 이달 1일까지 양일간 경북 경주 등에서 열린 아시아 ‘2025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끝났다. APEC은 무역과 투자 등에 대해 정부 간 논의하는 지역경제협력체로 1989년에 설립됐다. 우리나라는 20년 만에 의장국을 맡아 외교무대를 진두지휘했다.

경주에 쏠린
세계인의 눈

이번 APEC 정상회의의 관심사는 단연 미·중 정상회담이었다. 패권국인 미국과 그 뒤를 바짝 쫓는 중국 정상 간의 만남이 성사될지를 두고 전 세계의 이목이 모였다. 실제 미국과 중국은 APEC 참석과 정상회의를 두고 신경전을 벌였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취임한 직후 시작된 무역 전쟁의 연장선이었다.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만남이 결정되면서 관세 문제가 어떤 방향으로 진행될지 관심이 집중됐다. 미국과 중국은 한쪽이 관세를 부과하면 그에 더해 추가 관세를 부과하는 방식으로 갈등을 빚었다. 이 과정에서 양국이 서로에게 부과한 관세가 수백~수천%에 이르기도 했다.

중국은 전 세계 생산량의 80%를 차지하고 있는 희토류를 무기로 미국을 압박했다. 희토류는 희귀 광물로 반도체 제작 등에 사용된다. 지난 9월9일 중국 상무부가 역외로 나가는 희토류의 수출을 통제하면서 미국과의 긴장 수위가 높아졌다.


AI를 앞세운 정보 전쟁의 시대인 만큼 희토류 확보가 중요한 시점이었다. 당장 미국은 관세 부과로 응수했다.

이번 APEC에서 진행된 미·중 정상회담은 이 같은 배경에서 이뤄졌다. 지난달 30일 김해공항에서 미·중 정상회담이 진행됐다. 트럼프 대통령과 시 주석이 만난 건 6년 만이다. 이날 회담에는 양안(대만-중국) 문제 등 민감한 이슈 대신 무역과 경제 관련 논의가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 대통령과 시 주석은 이날 공군기지 의전실인 나래마루에서 만나 약 100분간 회담 후 ‘휴전, 확전 자제’ 수준의 합의를 이뤄냈다. 미국은 중국을 상대로 시행 중인 합성 마약 펜타닐 관련 징벌적 세를 기존 20%에서 10%로 낮추고, 중국은 희토류 수출 통제를 1년간 유예하기로 했다.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던 부분에서 어느 정도 합의가 나온 것이다.

6년 만에 트럼프-시진핑 만나
희토류·관세 한발 물러섰나

지난달 30일 서울 금천구의 한 사무실에서 만난 윤석헌 아시아경제개발위원회 회장은 “미국과 중국 모두 APEC 정상회의를 무대로 부담이 덜한 선택을 했다”고 분석했다. 양국이 따로 정상회담을 진행하려 했다면 의전이나 장소, 의제 등을 두고 오래도록 논의가 이어졌을 가능성이 큰데 APEC 정상회의 참석을 계기로 그런 부분이 단숨에 정리됐다는 설명이다.

윤 회장은 “관세 협상을 하는 방식을 보면 트럼프 대통령이 다자주의보다는 양자주의를 지향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각국 정상과 1대 1로 만나 이른바 ‘거래의 기술’을 통해 원하는 바를 얻어내는 식이다. 그런 트럼프 대통령이 APEC 정상회의에 참석한 중요 이유는 시 주석을 만나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중국 역시 APEC 다음 의장국으로서 한국방문이 예정돼있는 상황에서 북한과의 관계 등 다양한 사항을 고려했을 때 나름 최선의 방법을 택했다”고 언급했다.

이어 “각국 정상이 공항 의전실에서 만나 회담을 진행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런데 미·중 정상회담은 김해공항 의전실에서 열렸다. 한국을 떠나는 트럼프 대통령과 한국으로 들어오는 시 주석이 상호 가장 효율적으로 만날 수 있는 장소였기에 그곳으로 결정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미·중 정상회담에 많은 관심이 집중된 이유는 두 나라가 전 세계에 끼치는 영향이 엄청나기 때문이다.

윤 회장은 “우리 근대사를 보면 패권국이 독주 체제로 갈 때보다 경쟁국이 존재할 때 더 발전했다. 일례로 미국과 러시아가 패권국을 놓고 경쟁했던 시기를 생각하면 된다. 그러다 러시아가 몰락한 뒤 미국이 패권국으로 전 세계를 좌지우지했으나 9·11 테러가 일어나는 등 반작용이 나타난 것도 그 시기”라고 말했다.

고래 싸움
새우 등은?

이어 “중국이 미국을 위협할 만큼 성장하면서 세계는 G1과 G2라는 경쟁 체제를 보게 됐다. 패권국의 지위를 지키려는 나라(미국)와 그 자리를 차지하려는 나라(중국) 간의 건전한 경쟁은 결국 세계질서 재편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이런 경쟁은 작게는 국가 발전에, 크게는 인류 발전에 영향을 줄 것”이라고 해석했다.

우리나라 역시 미·중 정상회담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한국은 ‘영원한 우방’인 미국과 ‘결코 멀어져서는 안 될’ 중국 사이에서 끊임없이 긴장해야 하는 위치에 있다. 특히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외교 스탠스가 명확한 미국에 비해 중국과의 관계는 정권 성향에 따라 달라지는 점이 문제로 지적돼왔다.

윤 회장은 시 주석의 방한 시기에 주목했다. 시 주석은 2014년 박근혜정부 때 한국을 찾은 이후 11년 동안 걸음을 하지 않았다. 윤 회장은 “한국과 중국의 관계가 가장 좋았던 때는 박근혜정부 시기다. 시 주석의 방문으로 전략적 협력 동반 관계에서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로 한중 사이가 격상됐다”고 전했다.

그는 당시 시 주석이 서울대에서 강연한 내용을 언급하면서 “시 주석은 ‘금 100냥으로 집을 사고 금 1000냥으로 이웃을 산다’는 중국 속담을 인용해 정말 좋은 이웃은 금으로도 바꾸지 않는다며 중국인들이 신라 왕자 김교각을 존경한다고 하는 등 한국 친화적인 연설로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줬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하지만 문재인정부, 윤석열정부를 거치면서 중국과의 관계가 소원해졌다. 개인적으로는 이 시기에 시 주석이 한국을 방문할 만한 분위기가 성숙하지 않았다고 봤다. 정상회담을 진행한다는 건 양측 모두 굵직한 무언가를 남겨야 한다는 부담을 안은 상태인데, 그 논의가 이뤄지기엔 (그 당시) 분위기가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한미 회담
진전 있어

윤 회장은 한국 정부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명확한 외교 스탠스를 잡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진보 정권일 때와 보수 정권일 때 중국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는 부분을 정리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1992년 수교 이후 한국과는 경제적으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도 맞지만 정치, 외교 부분에서는 복잡하고 미묘한 관계인 만큼 분명한 자세를 취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러면서 이번 시 주석의 방한 의미를 잘 들여다봐야 한다고 짚었다.

윤 회장은 “시 주석의 방한은 급변하는 세계정세와 빨간불이 켜져 있는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 앞에서 양국의 경제협력이라는 새로운 길을 찾게 되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특히 내수시장을 확대하겠다는 중국 정부의 방침과 한국 기업의 중국 내수시장 진출 전략이 맞아떨어지면 양국 간 ‘윈-윈’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윤 회장은 ‘미국은 옛 친구, 중국은 새 친구’라는 개념을 꺼냈다. 그는 “윤석열 전 대통령 시기에는 중국 입장에서 미국에 기울어진 외교를 펼치면서 중국 대사들이 곤란함을 토로했다. 하지만 이제는 세계 10대 경제 강국에 걸맞은 21세기형 선진 한국에 맞는 외교 스탠스로 대중 관계에 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미국과는 1945년 해방 이후 정치, 사회, 군사, 문화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상호 밀접한 관계다. 중국은 1992년에야 수교를 맺은 한국의 새 친구다. 새 친구가 생긴다고 옛 친구를 버리지 않고, 옛 친구가 있다고 새 친구를 사귀지 않는 게 아니지 않나. 옛 친구(미국)에 대한 예의, 새 친구(중국)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20년 만에 의장국으로
“전체적으로 무난했다”


윤 회장은 윤석열 전 대통령과 조 바이든 전 미국 대통령이 캠프 데이비드에서 만난 일을 거론했다. 당시 한국 정부는 외교 루트를 통해 언론에 보도된 정도의 내용만 중국 측에 전달했다고 한다.

윤 회장은 “한국과 미국의 정상이 만나는데 중국에는 기사에 나온 내용 정도만을 알린 점 등은 대중 외교의 패착이라고 생각한다. 공식이든 비공식이든 어떤 식으로든 미리 언질을 줬어야 한다”며 “그것이 외교의 본질”이라고 했다.

윤 회장은 “옛 친구인 미국에 대한 예의와 함께 새 친구인 중국에 대한 배려를 갖춘다면 피할 수 없는 미중 양국의 패권 경쟁에서도 중국과의 관계 증진은 물론, 불확실성의 시대에 시시때때로 바뀌는 국제 정세 속에서도 양국의 우의를 지켜나갈 수 있을 것”이라며 “경제, 외교, 문화 속에서도 협력의 길을 찾게 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일요시사>는 서면을 통해 APEC 정상회의에 대한 총평을 부탁했다.

윤 회장은 “전반적으로 성공적으로 치러졌다”고 평가했다. 이재명정부 출범 이후 한국에서 진행된 첫 대형 외교 이벤트를 무난하게 치렀다는 설명이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의전, 한·미 정상회담에서의 성과 등을 높게 봤다.

윤 회장은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도록 하는 게 굉장한 관심사였고, 한국 정부로서는 사활을 걸어야 할 문제였다. 일본에서는 2박3일을 보냈는데 한국에서는 숙박도 하지 않고 잠깐 들렀다 가는 수준으로 방한했다면 외교적으로 실패했다는 인상을 줄 수 있었는데 그 부분이 잘 정리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미 정상회담 과정에서 관세 협상이 일정 수준 정도로 타결됐고 무엇보다 핵추진 잠수함 건조와 관련해 미국과 논의가 이뤄진 점은 아주 높은 현실적 성과라고 볼 만하다. 이미 포화상태에 이른 방폐장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군비 경쟁에서 앞서나갈 수 있는 등 여러 가지로 한국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결정된 것”이라고 덧붙였다.

핵추진 잠수함 건조는 한국군의 ‘숙원’이라고 할 정도로 오랜 시간 추진한 이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을 통해 “한미 군사동맹은 어느 때보다도 강력하다”며 “그것에 기반해 나는 한국이 보유한 구식이고 기동성이 떨어지는 디젤 잠수함 대신 핵추진 잠수함을 건조할 수 있도록 승인했다”고 밝혔다.

앞으로가
중요하다

윤 회장은 “APEC 정상회의는 정상이 모여서 무언가를 결정하기보다 정상끼리 얼굴을 맞대고 관계의 물꼬를 트거나 돈독하게 만드는 자리다. 한국은 이번 APEC을 통해 미국, 중국, 일본 등 세계 강대국과 연달아 회담을 진행했다. 전 세계인의 관심이 집중된 미·중 정상회담의 무대도 제공했다. 이제 이 관계를 건전하고 국익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조언했다.

<jsjang@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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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엔진 멈춘 3억 마이바흐 미스터리

[단독] 엔진 멈춘 3억 마이바흐 미스터리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 = 서울 소재 H건설사 대표가 타는 메르세데스 벤츠의 최고급 사양인 마이바흐가 구매한 지 3년 만에 엔진 고장으로 멈췄다. H사 대표 박모씨는 2022년 말 메르세데스벤츠코리아와 한성자동차를 상대로 수리비 및 대차료 지급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무상 수리해야 한다고 했던 1심 재판부는 급기야 ‘벤츠의 책임이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2019년식 ‘마이바흐 S560 4MATIC’은 2022년 9월13일 오전 11시, 박씨의 운전기사가 서울 용산 한강로를 주행하던 중 계기판에 엔진 경고등이 켜지면서 차체 진동과 함께 엔진이 멈췄다. 곧바로 차량을 한성자동차 성동서비스센터에 입고했으나 진단은 충격적이었다. 침수차 의심 수리 나 몰라라 “엔진 연소실에 물이 들어가 부품이 손상된 것으로 보인다. 침수 차로 의심된다”며 무상 수리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에 박씨와 자동차 감정사는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그날은 폭우나 침수와 무관한 날씨였으며 정상 주행 도중 발생한 차량 고장이었기 때문이다. 원고인 H사는 “벤츠코리아가 제공하는 ‘통합서비스패키지(ISP)’ 보증에 따라 3년 또는 10만km 이내의 결함은 무상 수리 대상”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1심 재판부(서울중앙지법 민사47단독, 2024년 7월23일)는 “침수나 연료 혼유 등 외부 요인으로 단정할 증거가 부족하다. 한성자동차는 ISP 약정에 따라 엔진 결함을 무상 수리해야 한다”며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면서 벤츠의 수입사인 한성자동차에 대해 월 400만원의 대차료 배상을 명령했다. 법원은 독립 감정인 강대공씨를 지정해 정밀 감정을 실시했다. 강씨의 감정서에는 “침수 차량에서 보이는 오염 흔적이 없다. 냉각수(부동액) 누출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며 “엔진 내부 수분은 외부 요인이나 정비 과정에서 유입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또 추가 사실조회 회신에서도 “혼유(연료 내 수분 혼입) 여부는 감정 범위를 벗어나며, 침수가 아닌 요인으로 인한 수분 유입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2심(서울중앙지법 제8-3민사부)에서 피고 측은 반격했다. 벤츠코리아의 법률대리인 김성진 변호사(김앤장 법률사무소)는 지난 8월27일 제출한 준비서면에서 “ISP는 차량 ‘결함’이 발견된 경우에만 적용된다. 외부 수분 유입으로 인한 손상은 명백히 예외 사항이며 제조사 귀책이 없는 이상 무상 수리 의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한성자동차 측(법무법인 세종)도 항소이유서에서 “ISP는 제조상의 하자에 국한된 품질보증 계약이다. 이번 사안은 ‘우발적 손상’으로 보증 대상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8-3부는 지난 9월26일, “한성자동차의 패소 부분을 취소하고, 박씨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판시했다. 2심 판결은 “외부 요인, 제조 결함이 아니”라며 1심을 전면 뒤집은 것이다. 항소심 재판부는 “외부 수분 유입으로 인한 손상은 차량 제조사 귀책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 ISP는 ‘제조 결함’에 한정된 보증이다. 한성자동차의 패소 부분을 취소하고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밝혔다. 즉, 법원은 이 사건을 ‘차체·부품 결함’이 아닌 ‘사용 중 발생한 외부 요인’으로 결론 내린 것이다. 주행 중 경고등 켜지고 진동 후 엔진 스톱 감정 결과 “누수 없음, 외부 수분 가능성” 결국 박씨는 3년에 걸친 법정 다툼 끝에 패소했다. 따라서, 한성자동차는 더 이상 수리 의무를 부담하지 않게 됐으며, H사의 항소도 기각됐다. 이번 재판의 핵심 쟁점은 ‘수분 유입의 원인’이 제조 결함이냐, 외부 요인이냐였다. 법원은 “차체·부품의 결함으로 인한 냉각수 누수가 없었고, 외부 요인 가능성이 더 크다”고 판단했다. 결국, 제조물 책임(PL법)에 따른 보증 범위가 아닌 사용·관리상의 문제로 결론이 난 셈이다. 이번 판결은 ‘결함’의 해석 범위를 좁혀 정의한 사례다. 즉, ‘사용자 과실이 아닌 상황’이라도 차체·부품 자체의 결함이 입증되지 않으면 보증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동차 전문가들은 “소비자 입증 책임만 더 무거워졌다”며 “ISP나 제조사 보증이 소비자 보호장치로 설계됐지만, 현실적으로 ‘결함 입증’의 벽이 너무 높다. 이번 판결은 소비자가 과실이 없더라도 제조사 책임을 묻기 어렵다는 선례가 될 수 있다”고 비판했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이번 판결을 “제조물 책임법과 민법상 품질보증의 경계선을 명확히 한 판례”로 평가하고 있다. 박씨의 마이바흐는 결국 엔진을 교체하지 못한 채 3년 동안 방치됐다. 이번 사건은 ‘명차’의 기술력보다 보증 체계의 경계선이 어디까지인지를 가늠케 한 사건이다. 소비자는 결함을 주장할 때 ‘입증의 문턱’을, 제조사는 ‘보증의 한계’를 확인했다. 독일 명차 대명사인 벤츠의 전기차는 해마다 폭발하는 배터리 화재로 뉴스를 장식하고 있다. 전기차뿐만 아닌 내연기관 모델 중에서도 최상위급인 마이바흐조차 원인 모를 엔진 고장으로 멈췄지만, 고객과 3년간 법정 다툼을 이어간 회사로 남겨졌다. 1심선 인정 “무상 수리” 벤츠는 고객과 진행한 재판에선 승소했지만, 우리나라 정부의 제재 착수 대상이 됐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전기차에 저가 배터리를 쓰고도 고가 배터리를 쓴 것처럼 허위 광고한 혐의를 받는 벤츠코리아에 대한 제재에 착수했다. 공정위의 최종 판단은 벤츠코리아와 벤츠 전기차 이용자 간 진행 중인 법적 분쟁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해당 저가 배터리는 지난해 인천 청라 아파트 지하 주차장 화재가 시작된 전기차에도 쓰였다. 업계에 따르면 공정위는 지난 8월12일, 벤츠코리아를 표시광고법·공정거래법 위반 혐의로 제재해야 한다는 의견을 담은 심사보고서(검찰 공소장에 해당)를 회사 쪽에 발송했다. 벤츠코리아는 자사의 모든 전기차에 중국 1위 배터리 업체인 시에이티엘(CATL)의 배터리가 장착됐다며 허위 사실을 소비자에게 알린 혐의를 받는다. 제휴사 딜러를 상대로 소비자에게 이런 허위 사실을 설명하라고 교육하는 등 소비자를 부당하게 속여 유인한 혐의도 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EQE 차주들은 벤츠 본사, 벤츠코리아, 공식 딜러사 한성자동차 등 판매사 7곳, 벤츠파이낸셜서비스코리아 등 리스사 2곳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벤츠 전기차는 지난해 8월1일 인천 청라국제도시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화재 사고를 일으켰다. 당시 충전 중이던 벤츠 전기차 한 대에서 불이 나 인근 차량 87대가 전소되고 783대가 그을러 38억원에 달하는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당시 주민 23명은 연기를 마셔 병원으로 이송됐으며 화재로 아파트 14개 동 1581가구의 수돗물 공급이 끊기고, 5개동 480가구가 단전돼 승강기 운행이 중단되는 등 입주민 불편이 극심했다. 한때 주민 수백명이 피신하는 등 ‘도심 대형 전기차 화재’의 대표 사례로 기록됐다. 하지만 경찰은 장기간의 감식 끝에 “정확한 화재 원인을 확인할 수 없다”며 ‘원인 불명’ 결론을 내렸다. 수사 결과, 해당 벤츠 전기차의 배터리는 중국 CATL이 제조한 셀을 벤츠가 직접 조립해 만든 배터리팩으로 확인됐다. 현재 국내에서 판매 중인 벤츠 전기차 대부분(EQE, EQS 등)은 중국 CATL 또는 파라시스(Parasis) 배터리를 탑재하고 있다. 2심에선 “책임 없다” EQA 등 극히 일부 모델에만 LG에너지솔루션, SK온 배터리가 사용된다. 이에 공정위는 화재 발생 이후 벤츠코리아에 대한 직권조사를 시행했다. 공정위는 지난해 9월과 지난 1월에 각각 벤츠코리아 본사와 제휴 딜러사에 대한 현장 조사를 벌여 제재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냈다. 공정위는 벤츠코리아 추가 의견서를 받고, 위원회 회의를 열어 최종 제재 여부와 수위를 확정할 예정이다. 표시광고법 위반 시 관련 매출액 최대 2%, 공정거래법 위반 시 최대 4% 내에서 과징금이 산정, 제재 강도가 낮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공정위 제재 착수에도 벤츠의 콧대는 꺾이지 않았다. 벤츠코리아는 “심사보고서의 결론은 당사의 법률적 판단과는 일치하지 않으며 제기된 혐의는 근거가 없다고 보고 있다”며 “추후 심사보고서 내용을 면밀히 검토한 후, 절차에 따라 의견을 제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공정위 판단을 존중하지만, 회사의 법률적 판단과는 일치하지 않는다”며 “제기된 혐의는 근거가 없다고 보고 있다”는 공식 입장을 발표해 진통이 예상된다. 벤츠 전기차는 지난해 인천 청라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대형 화재를 낸 데 이어, 최근 수원시에서도 유사한 사고를 일으켜 배터리 안정 논란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지난 10월5일 경찰과 소방에 따르면, 이날 오전 8시4분경 경기 수원시 권선구의 1800세대 규모 아파트 지하 1층 주차장에 서 있던 벤츠 전기차에 불이 났다. 이 불로 관리사무소 50대 직원이 연기를 마셔 병원으로 옮겨졌으며, 주민 수십여명이 명절 전날 오전 한때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 사고로 벤츠 전기차를 포함해 인근 차량 3대가 불에 탔고, 주차장 내부가 그을려 한동안 입주민 출입이 통제됐다. 소방당국은 ‘지하주차장 차량에서 연기가 난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 펌프차 등 장비 10여대와 소방관 50여명을 투입해 진화 작업을 벌였다. 화재 발생 20여분 만에 연소 확대를 저지했고, 오전 8시43분경 초진에 성공했다. 이후 잔불 정리와 차량 냉각 작업을 거쳐 오전 10시16분에 완진시켰다. 소방 관계자는 “119 신고가 신속했고 출동 거리가 짧아 초기 대응이 빠르게 이뤄져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법원 ‘결함 아님’ 판결 ‘제재 대상’ 벤츠 편든 재판부 소방대원들은 불이 난 차량을 지상으로 끌어올려 열기를 식히는 등 2차 발화를 막기 위한 안전조치를 이어갔다. 현재까지 파악된 바에 따르면, 화재 당시 차량은 충전 중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다만 배터리 결함에 의한 발화인지, 전선 또는 충전기 접속부 문제 등 다른 원인에 의한 것인지는 아직 조사 중이다. 경찰과 소방당국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함께 합동감식을 실시해 배터리팩 손상 여부 및 충전 설비 결함을 중심으로 원인을 조사할 예정이다. 화재 차량은 2023년식 EQA-250 모델로 SK온 배터리가 장착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국내 전기차 등록 대수는 지난 9월 기준, 60만대를 돌파했지만 화재 사고 관련 안전 관리는 미흡한 상태다. 국토교통부는 청라 화재 이후 지하주차장 내 전기차 충전소 안전기준 강화안을 추진 중이지만, 구체적인 방재 설비 기준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지방자치단체별 안전관리 강화 조례도 제각각이다. 지속되는 품질 문제에 전기차 관련 허위광고 혐의까지 겹치면서 벤츠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벤츠코리아 설립 이후 최대 위기”라는 평가도 나온다. 여기에 국내 최대 딜러사인 한성자동차 노조의 파업으로 서비스 품질 저하 문제가 불거지며 브랜드 이미지에도 타격이 예상된다. 연일 터진 사고 이전까지 벤츠는 국내 수입 전기차 시장에서 높은 판매량을 기록했다. 소형 전기 스포츠유틸리티차(SUV) EQA·EQB에 이어 전기 세단 EQE·EQS까지 라인업을 확대하며 시장을 선도했다. 2023년에는 전기차 판매량 9282대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2024년 8월 벤츠 EQE 전기차 화재 사고 이후 분위기는 급변했다. 화재 전 월평균 400대 수준이던 판매량은 사고 이후 절반 이하로 급감했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KAIDA)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벤츠 전기차 판매량은 768대로, 전년 동기(2764대) 대비 72.2% 줄었다. 사고 이후 월 판매량은 100~200대에 그치며 반등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벤츠의 국내 최대 딜러사인 한성자동차의 노조 파업도 새로운 악재다. 수입차 업계는 딜러사와 벤츠코리아가 별개 법인임에도 불구하고 노조 파업으로 소비자 피해가 커지고 있어 결국 벤츠의 이미지 실추로 이어지고 있다고 분석한다. 추락하는 럭셔리카 한성자동차 노조는 지난 7월 31일부터 무기한 총파업에 돌입했다. 2023년 노조 설립 이후 진행된 3년 연속 파업으로, 사실상 매년 파업을 이어오고 있다. 노조는 구조조정과 차량 할인에 영업사원 인센티브를 활용하는 ‘선수당 할인’ 제도 등에 반발하고 있다. 최근에는 일부 정비 인력까지 준법투쟁에 나서면서 서비스 지연도 발생하고 있다. 실제 차량 정비 예약이 당일 일방적으로 취소되는 사례가 잇따르면서 소비자 불만은 커지고 있다. 이로 인해 “벤츠의 사후 관리 부실은 결국 한성자동차 탓”이라는 비판까지 나온다. <smk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