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25.05.21 20:07
선포된 지 6시간 만에 해제 선언된 비상계엄령. 긴박한 새벽녘 6시간 동안 해외로 타전된 뉴스에 세계인이 보낸 반응은 싸늘했다. “아니 한국이 왜 이러지?”라며 의아해한다. 8억명의 중국인이 그 짧은 시간 동안 우리나라 계엄 상황을 뉴스로 검색했다. 민주적 절차를 경험하지 못한 중국인들조차 당황하고 냉소한 반응이다. 외국 언론은 불안한 한국의 모습을 보도한다. 그동안 역외선물환 시장서 우리 원화 환율은 1450원에 가까웠다. 뉴욕 증권시장에 상장된 한국물 가격도 급전직하했다. 지금 한국은 외부로부터의 공격이 아닌 우리 내부의 문제로 원화의 가치와 대외 협상력이 상처를 입었다. 나라의 국제 위상은 대외 신뢰도가 결정한다는 면에서 보면 우리가 입은 내상과 외상의 크기는 짐작하기도 어렵다. 치유에 얼마나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한 지도 가늠하기 어렵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됐을까? 정치와 경제를 이야기할 때 그것은 분명 별개의 주제지만 그 관계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학문의 영역서 정치학과 경제학이 분리된 것도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정치와 경제가 함께 작동하는 것 같지만 사실 정치와 제도가 먼저고 더 중요하다. 돈만 열심히 벌어서는 분명 한계가 있다. 정치가
‘와타나베 부인’(Mrs. Watanabe)이란 이름은 30년 세월의 저금리 환경에 적응하려는 일본인을 상징한다. 경기침체(Recession)는 물가하락(Deflation)을 이끌고 낮은 물가는 경제를 더 끌어내리는 악순환을 겪었다. 일본의 실질금리가 마이너스 경로에 빠져들었다는 것은 은행에 돈을 맡긴 국민이 이자를 받기는커녕 오히려 돈 보관비까지 물게 된 것과 마찬가지다. 한 푼의 이자 수입이 절실한 일본인이 금리 관점으로만 엔화를 바라본다면 엔화는 돈도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다른 나라의 돈, 그 중에서도 단연 미국 달러화다. 일본과 미국의 기준금리 차이는 계속 확대돼 5.5%에 이르렀다. 와타나베 부인 입장서 캐리트레이드는 더 나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 그 자체였을 것이다. ‘엔캐리트레이드’라는 이름의 투자 방식은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크게 끼쳤다. 1990년대 후반, 국내 외환위기 때, 외화대출 중에서도 특히 엔화 대출은 악명이 높았다. 눈떠보니 하루아침에 대출금이 두 배, 세 배로 커지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안전자산으로 인식되던 달러/엔 환율은 떨어지고 심각한 경제위기를 맞은 우리나라의 원화는 달러당 800원 선에서 2000원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