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수사 기록 곳곳에 ‘노상원’ 세 글자가 빼곡하다. 오래전부터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이 사방을 들쑤셨지만 그 누구도 민간인이 개입한 이유를 묻지 않았다. 덕분에 노 전 사령관은 ‘부정선거 맹신론자’를 등에 업고 나라를 쥐락펴락했다.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은 박근혜 전 정부 당시 정보사령관을 지냈다. 육군정보학장 재임 중이던 2018년 여군 교육생을 술자리 등에서 강제 추행한 혐의가 인정되면서 불명예 퇴직 처리됐다. 민간인으로 돌아가 점집을 운영하던 그가 어떻게 계엄에 사사건건 개입할 수 있었을까? 노 전 사령관의 행적을 쫓아가면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의 이름이 나온다.
나를 따르라
두 사람의 인연은 지금으로부터 약 3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9년 김 전 장관이 대통령 집무실을 경호하는 수도방위사령부 제55경비대대 작전과장이던 당시 노 전 사령관은 같은 경비대대서 대위로 근무했다.
이후에도 두 사람은 꾸준히 연을 이어가며 끌어주고 당겨주는 사이가 됐다.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이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된 이후 둘의 친분을 자주 언급했다고 한다. “김용현과 자주 소통한다” “오늘도 용산에 다녀와 만났다” 등의 말이었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검찰 특수본 수사 기록에 따르면, 지난해 11월17일 김봉규 중앙신문단장 대령은 정성욱 정보사령부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만남을 요청했다. 사람의 눈을 피해 트럭이 세워진 공터로 이동한 뒤 김 대령은 1장에 2쪽씩 인쇄된 A4용지 10장 분량의 문서를 주며 “노상원이 줬다”고 말했다.
10장 중 7장 분량은 부정선거 관련 내용이, 뒷부분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 직원 명단과 해야 할 일 등이 기재됐다. ‘계엄이 선포되면 선관위에 가서 명단에 기재된 직원 약 30명을 잡아 선관위 내 회의실로 데리고 오라’는 내용이었다.
‘계엄이 선포되면’이라는 문구로 미뤄볼 때 비상계엄 선포를 전제로 작성된 문건인 셈이다.
닷새 뒤 문상호 정보사령관은 정 대령에게 “30명 추천자 명단 파일을 노상원 회장에게 보내라”고 지시했다. 명단은 고스란히 노 전 사령관의 손으로 들어갔다.
김용현 이름 팔아 부정선거 설레발?
“날 단장이라 불러라” 실세 놀이도
노 전 사령관은 문 사령관의 출장 일정에 간섭하기도 했다. 당시 문 사령관은 11월25일 대만으로 출국한 뒤 29일 귀국 예정이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노 전 사령관이 흥분해 화를 내며 “이 중요한 시기에 무슨 해외 출장을 가느냐. 당장 취소해라”라고 말했고 당황한 문 사령관이 “국가 대 국가로 오래전부터 약속된 일”이라고 설명했다.
그러자 노 전 사령관은 “늦어도 11월27일 밤까지는 귀국해라”라고 지시했다.
계엄이 선포되기 사흘 전인 12월1일, 이른바 ‘햄버거 회동’이 열렸다. 노 전 사령관과 문 사령관을 비롯한 정 대령, 김 대령은 경기도 안산의 한 프랜차이즈 햄버거 가게서 비상계엄을 사전 모의했다.
이날 노 전 사령관은 구체적인 임무 지시를 내렸다. ‘버스를 보내 선관위 인원을 버스에 태워 수방사 벙커로 보내라’ ‘ 방이 여러 개 있으니 인원별로 나눠 넣고 못 나오게 해라’ ‘노태악 선관위원장은 내가 X지면 된다’ 등의 내용이었다. ‘애들(선관위 직원) 잡을 때 말을 안 들으면 위협해라. 케이블타이, 니퍼, 망치, 복면이나 두건, 야구방망이, 테이프를 준비하라’는 지시도 내렸다.
이를 전해 들은 이들은 해당 물건은 구입하지 않고 부대 내에 있던 것을 준비했다.
노 전 사령관은 자신을 ‘단장’이라고 부르게 시켰다. “나중에 선관위 직원을 수방사로 이동시키고 나면 전부 내가 지시할 테니 내 말만 따르면 된다”며 진두지휘하는 모습을 보였다.
노 전 사령관의 뻔뻔한 행보는 비상계엄 선포 당일 정점을 찍었다. 문 사령관은 진술서를 통해 오전 10시경 노 전 사령관이 전화해 “금주 중 야간에 임무가 있을 수 있다. 1개 팀 준비시켜라. 각별히 보안을 유지해라”고 신신당부했다. 점심 무렵에는 “2개팀 편성하고 오후 9시30분경 소집해 대기해라”라고도 말했다.
내란중요임무 종사자로 지목된 여인형 전 국군방첩사령관은 노 전 사령관의 번호를 전달하기도 했다.
“말한 거 준비해” 니퍼, 망치, 복면…
외부인 한마디에 일사불란 ‘착착’
정 대령이 “정보 사령관에게 연락이 왔다”고 말하자 여 사령관이 “걔는 또 뭐야, 뒷번호 뭐야”라고 한 뒤 “이 사람 아니야. 내가 알려준 번호 적어봐. 노상원 장군이야”라고 말했다. 여 사령관과 노 전 사령관이 사전에 접촉한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여 사령관은 검찰 진술에서 당시 상황을 인정하며 “비상계엄이 선포된 이후 김 전 장관이 저에게 ‘선관위에 나가는 사람에게 노 전 사령관을 연결하라’고 했다”며 “그 말을 듣고 ‘노상원이 왜 나오나’ 생각했다”고 진술했다. 단순히 김 전 장관과 노 전 사령관이 잘 아는 사이니 막연히 지시를 따랐다는 것이다.
이날 노 전 사령관과 정 대령 간의 통화에는 “아이X 너네 아직도 출발 못한 거야? 너네가 와서 빨리 받아” 같은 이야기가 오갔다. 서너 번 통화가 오간 뒤 노 전 사령관은 “우리가 여기(선관위) 확보했으니 와서 포렌식 떠”라고 말했다.
정 대령은 추후 법적 문제를 걱정해 “우리가 무슨 능력이 있어 포렌식을 하냐”고 말하자 노 전 사령관은 “너희가 할 수 있다던데? 오면 카피(복사)해서 분석할 거라는데?”라는 말을 반복했다.
사태가 이렇게 될 때까지 그 누구도 노 전 사령관의 존재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저 문 사령관이 “김 전 장관의 지시”라고 말하니, 당연히 노 전 사령관이 적법한 절차를 걸쳐 부정선거 의심 사실 확인 업무를 돕고 있다고만 생각한 것이다.
김 대령 역시 진술을 통해 “민간인이 현직 사령을 돕게 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문 사령관이 같은 지시를 하니,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노 전 장관이 진급을 미끼로 사람들을 꿰어냈을 것이란 추측도 나온다. 노 전 사령관이 자신의 인맥을 활용해 장군으로 진급할 수 있다는 등 이야기를 하며 “도움을 주겠다”는 말을 수차례 한 정황이 드러난 것이다.
진급 미끼로
비상 계엄이 해제된 12월4일 새벽, 이들은 노 전 사령관으로부터 어떤 연락도 받지 않았다. 김 전 장관이 노 전 사령관에게 전화해 “상원아, 이제 어떡하냐”라는 말을 들었다는 진술이 전부다.
노 전 사령관은 ‘단장’ 대신 ‘비선 장관’이라는 꼬리표를 달았다. 든든한 뒷배로 여겼던 이들도 몽땅 수사 대상에 올랐다. 지난 2월 첫 공판 재판서 노 전 사령관 측은 “내란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며 혐의를 부인했지만 오랫동안 준비해 온 노 전 사령관의 행보에는 흔적이 남아 있다.
비공개로 이뤄지는 재판은 현재 진행형이다. 민간인 신분으로 나라를 발칵 뒤집은 대가를 기다릴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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