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⑧축소 수사와 특검 수사

‘무인기’ 질문도 하지 않았다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오혁진 기자 = 12·3 내란 사태에 관해 검찰은 피의자 신분인 군 장성들에게 ‘센 질문’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질문은 하지 않았다. 검찰의 축소 기소 의혹이 제기되는 이유다. 취재진이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검찰은 여인형 전 국군방첩사령관을 비롯한 내란 핵심 멤버에게 평양 침투 무인기 사건과 외환죄에 관한 질문을 하지 않았다.

취재를 종합하면, ‘북풍 공작’ 장본인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은 지난해 12월19일 구속된 이후 진술을 거부하고 있다. 검찰이 입수한 그의 수첩에는 ‘국회 봉쇄’ ‘수거 대상’ ‘사살’ ‘북의 NLL(북방한계선) 공격 유도’ 등이 적혀 있다. 실제로 노 전 사령관은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과 북한 오물풍선의 ‘원점 타격’ 방안까지 논의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는 군사적 재앙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는 점에서 반드시 규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규명 필요한데···

<일요시사>가 입수한 검찰 특수본 수사 기록 자료에 따르면, 여인형 전 국군방첩사령관은 지난해 12월14일과 12월24일 두 차례에 걸쳐 검찰에 출석했다. 당시 여 전 사령관은 김 전 국방부 장관과 합작해 평양 무인기 사건을 기획했다는 의혹을 받는 인물이었지만, 검찰은 이와 관련된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다.

비상계엄 한 달 전인 지난해 11월5일 여 전 사령관이 휴대전화에 작성한 메모에는 ‘전시 상황이 와야 한다’ ‘적의 여건을 조성한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그는 이 적이 ‘북한’을 의미한다고 검찰에 진술했다. 이 때문에 검찰은 북한 도발을 유도하려 한 게 아니냐고 물었지만, 여 전 사령관은 부인했다.

또 검찰은 “적에게 먼저 행동하도록 유도한다는 의미로 보이는데 맞느냐” “통제 불가의 상황을 만든다는 것이냐”며 여 전 사령관을 추궁했다. 비상계엄을 정당화하기 위해 북한과의 전시 상황을 일부러 유도한 게 아닌지 의심한 것이다.


이에 여 전 사령관은 “적은 북한이고, 계엄은 적이 먼저 움직여야 한다는 뜻이었다”며 계엄 반대 취지였다고 설명했다. 이 밖에 ‘적은 매우 수세적’ ‘적의 여건을 조성’ ‘인내하면서 당장의 위협을 완화하고 결정적인 호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표현도 담겼다.

검찰은 북한 오물풍선을 언급하며 “원점 타격 등을 통해 적이 우리나라를 공격하는 등 위험 요건을 조성한다는 의미로 보인다”고 추궁했다. 직접적으로 “북풍을 기대하거나 조성한다는 의미로 보인다”고도 했다. 하지만 여 전 사령관은 “이는 계엄과 무관한 군사대비 태세와 관련된 내용”이라며 “북한이 러시아 파병으로 파국으로 끝날 것이기 때문에 인내하면서 위협을 완화해야 한다는 뜻이었다”고 반박했다.

여 전 사령관의 메모 작성 약 2주 뒤엔 합참 측이 오물풍선을 두고 이례적인 대북 성명을 내기도 했다. 지난해 11월18일 남기수 합참 공보부실장은 “북한의 행위는 선을 넘고 있으며, 이후 발생하는 모든 사태의 책임은 북한에 있음을 다시 한번 엄중 경고한다”고 발표했다.

메모 작성 직전인 지난해 10월에는 평양 무인기 침투 논란이 불거진 바 있다. 북한은 지난해 10월 ‘평양 상공에 남한 무인기가 침투했다’고 발표했다. 실제로 다음 날 새벽 경기 연천군 일대서 ‘추락한 드론작전사령부 소관 무인기’가 우리 군과 경찰에 의해 발견된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군은 이 무인기가 아군기라는 이유로 별도의 조서를 남기지 않고 모두 수거했다.

‘묵묵부답’ 노상원 태연한 반북 공작전
여인형 ‘북파 무인기’ 알고도 모른 척

계엄을 사전 모의한 혐의를 받는 노 전 사령관이 작성한 메모에도 ‘NLL 부근서 무인기를 띄워 북한의 도발을 유도하고, 백령도서 반격한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경찰은 이를 토대로 외환죄 혐의에 대한 수사를 진행으나, 노 전 사령관은 진술거부권을 행사하며 버티고 있다.


경찰청 국가수사본부 특별수사단은 지난해 12월23일 노 전 사령관의 경기 안산시 ‘아기보살’ 신당서 확보한 수첩에 이 같은 내용이 적혀있다고 밝혔다. 손바닥 크기의 60~70쪽 가량의 수첩에는 계엄과 관련된 내용의 초안이 적힌 것으로 파악됐다.

수첩에는 국회 봉쇄, 정치인, 언론인, 종교인, 노조, 판사, 공무원 등이 적혀있었고 이들을 ‘수거’하라는 표현이 적혀있던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 관계자는 “수첩에는 파편적인 단어들이 적혀있는데, 수거는 체포를 의미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대상자들을 체포한 이후 수용하고 처리할 것인지에 대한 메모도 적혀있었다고 경찰은 밝혔다.

노 전 사령관은 윤석열 전 대통령이 검찰총장 시절 마찰을 빚었던 이성윤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사살 대상’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여 전 사령관도 노 전 사령관이 내란의 핵심이라고 지목했다.

여 전 사령관은 지난 12월14일 1차 진술서 “언론에서는 제가 비상계엄의 계획을 수립했다고 보도하기도 하나, 저는 그런 역할을 하지 않았다”며 “오히려 노상원 장군이 조력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정기적으로 (노상원과) 연락을 하던 관계는 아니다”라고 의심을 일축했다.

내란 수사가 미궁으로 빠진 가운데, 야권은 ‘12·3 비상계엄 사태’와 관련한 의혹 일체를 수사토록 하는 ‘내란 특검법’을 지난달 30일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서 상정했다. 내란 특검법은 12·3 비상계엄을 중심으로 윤 전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인사 및 여권 인사들을 수사 대상으로 한다.

윤 전 대통령을 비롯한 내란 수괴들이 북한과의 국지전을 유발, 외환을 꾀했다는 의혹도 포함됐다.

앞서 민주당은 내란 특검법을 두 차례 발의했지만, 지난해 12월31일 당시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했다. 이어 지난 1월8일 재표결에 부쳐졌으나 부결로 자동 폐기됐다.

최 장관은 당시 거부권 행사에 앞서,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상정된 내란 특검법을 두고 윤 전 대통령이 구속 기소돼 재판 절차가 진행 중이어서 특검의 필요성이 없다고도 주장했다.

12·3 당일 대통령 말린 최상목
내란 특검법 반대하는 속내가···

“현재는 비상계엄 관련 수사가 진전돼 현직 대통령을 포함한 군·경의 핵심 인물들이 대부분 구속 기소되고, 재판 절차가 시작됐다. 앞으로의 사법절차 진행을 지켜보아야 하는 현 시점에서는 ‘별도의’ 특별검사 도입 필요성을 판단하기 어렵다는 의견이 많았다”는 것이다.

12·3 계엄 당일 국무회의에 참석한 최 장관은 계엄을 반대했다고 주장했다. 이쯤 되면 내란 특검법을 거부한 최 장관의 속내가 궁금해진다.


그는 지난해 12월20일 검찰 진술서 “대통령으로부터 갑자기 들어오라는 연락을 받아 (12월3일) 대통령실에 오후 9시55분경 도착했다. 회의장에 들어갔더니 한덕수 총리님과 국무위원 분들이 몇 분 앉아 계시길래, 제가 거기 계신 분(누구인지 기억나지 않음)에게 ‘왜 부르신 겁니까’라는 취지로 물어봤더니 누군가가 ‘곧 비상계엄을 발표한다’라는 이야기를 했다”며 “저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고 너무 놀라서 (한덕수) 총리님께 ‘총리님 왜 반대 안하세요’라고 말씀을 드렸더니 총리께서 ‘이미 여러 번 반대의 말씀을 드렸다’고 답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그래서 제가 총리님께 ‘제가 들어가서 말씀드려보겠다’고 하고 대통령이 계시는 집무실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대통령께 ‘이건 안 된다. 경제와 국가 신인도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에 절대로 안 된다’는 취 지로 말씀을 드렸다. (재차 안된다고 설득했지만) 대통령께서 ‘돌이킬 수 없다’는 취지로 말씀하였다”고 진술했다.

계엄을 수 차례 반대했던 최 장관이 내란 특검법을 2차례나 거부한 이유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한편, 민주당 김병주 의원실 등을 통해 파악한 결과, 군과 경찰은 지난해 10월12일 새벽 4시23분 연천군 군남면 임진강변 일대서 추락한 무인기를 발견했다. 의원실이 확보한 경찰 관계자의 증언에 따르면, 우리 군은 이 무인기를 ‘아군기’로 판단하고 경찰과의 정식 합동 조사 절차 없이 자체적으로 현장을 채증했다.

이후 무인기와 현장을 찍은 사진 등 채증 자료를 모두 수거해갔다고 한다. 심의 조서를 비롯한 기록은 따로 없었다고 한다.

군이 수거한 무인기는 최종적으로 드론작전사령부(드론사)에 회수된 것으로 확인됐다. 이날 합동참모본부는 ‘이 무인기가 북한이 평양 상공서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무인기와 동일 혹은 유사 기종인지’를 묻는 질의에 “작전 보안상 확인해드릴 수 없다”며 함구했다.


여기서 이 무인기의 존재가 ‘평양 무인기 침투설’을 뒷받침하는 정황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그냥 넘겼다

추락한 무인기가 발견된 시점은 북한이 우리나라 무인기의 평양 상공 침투를 밝힌 직후다. 북한은 지난해 10월3일과 9일, 10일 심야 시간에 평양 상공서 한국 무인기가 발견됐다고 지난해 10월11일 발표했다.

합참은 북한에 무인기를 보냈는지에 대해 “확인해드릴 수 없다”고 일축해 왔다. 지난 1월에는 윤석열 전 대통령이 당시 북한에 무인기를 침투하라고 지시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더불어민주당 부승찬 의원은 지난해 6월부터 드론사가 북한에 무인기를 보낼 준비를 해온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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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⑥좌파 14명 체포 실패 내막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⑥좌파 14명 체포 실패 내막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12·3 계엄 당일 내란 주동자들은 정치인과 판사 등 자신들이 반국가 세력으로 지칭한 14명의 체포를 위해 서둘렀다. 하지만 준비가 된 것은 각 군의 사령관들뿐이었다. 계엄사령부와 합동수사본부의 설치는 훈련 상황서도 24시간가량 걸리는데 이를 간과한 것이다. 미리 계엄을 준비했다는 증거가 계속해서 나오는 상황에 실무진에게 준비시키지 않은 점이 의문점으로 남아있다. 12·3 비상계엄 선포 이후 윤석열 전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 등 내란 주도자들이 정치인과 판사 등 ‘좌파세력’이라고 지칭한 14명의 체포를 시도했지만 무산됐다. 그 내막에는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이하 합수본)의 미설치가 있다. 진술 나오자 다른 전략 <일요시사>가 검찰 진술 조서를 입수해 분석한 결과, 계엄이 시작된 계기와 14명의 체포 미수 및 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 불법 점거의 실패 이유로 ‘합동수사본부 미설치’를 꼽았다. 12·3 내란 사태가 발생하기 이전 국회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대립은 심각했다. 과반 의석을 차지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등 야당은 자기들끼리 뭉쳐서 법안을 통과시켰고 윤 전 대통령은 재의요구권을 사용했다. 또 야당은 이진숙 방통위원장과 민주당 이재명 전 대표를 수사한 검찰들에 대한 탄핵을 시도하고 김건희씨와 관련한 특검법을 계속 발의했다.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의 검찰 진술조서에 따르면 지난해 11월27일경, 윤 전 대통령이 관저 식사 자리서 “수사받다가 마음에 안 든다고 검사를 탄핵하고, 재판받다가 마음에 안 든다고 판사를 탄핵하고, 헌법재판소가 마음에 안 들면 정족수를 자르고, 이게 나라냐.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반국가 세력의 준동에 관해 청주간첩단 및 창원간첩단 사건과 관련해 수사 과정서 잡은 인원들을 판사 기피 신청이 들어오면 단기간에 결정하는 것이 상식인데 6개월이나 결정을 하지 않아 간첩들의 구속 기간이 끝나 다 풀려나 돌아다니는데도 이런 것을 방치하고 있는 상황이니 나라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며 “미래 세대에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어주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비상계엄)이 필요하겠다”고 강조했다. 일주일이 지난 후 윤 전 대통령은 김 전 장관에게 “야당의 패악질로 나라의 미래가 없다. 국가 비상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말했고 이들은 비상계엄 관련 논의를 했다. 이때 체포 명단인 이른바 ‘좌파 세력’ 14명의 명단과 군대를 어떻게 투입할지 등을 확정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들은 체포 명단의 사람들의 신병을 확보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게다가 내란 주동자들은 검찰 진술과 형사 법정 등에서도 체포하려 하지 않았다고 진술하고 있다. “합수부 미설치로 체포 불가” “합수부 없어 시작부터 위법” 김 전 장관은 검찰에 “주요 정치인 등에 대한 검거를 시도한 바 없다. 혐의가 있어야 검거를 시도하지 않겠냐”며 “언론에 나오는 위치 추적 등은 포고령에 따라 정치활동이 금지되고 있는 상황이니 주요 정치인 몇 분과 부정선거 등과 관련해 사회서 의혹이 제기되는 사람들의 위치를 미리 파악하라고 이야기한 것일 뿐”이라고 진술했다. 하지만 홍장원 전 국정원 1차장과 작전에 투입된 군인들의 진술로 체포 명단이 실제로 존재했으며 체포를 지시하고 시도했다는 것마저 모두 드러났다. 체포 시도가 있었다는 진술이 계속해서 나오자 내란 주동자들은 다른 전략을 세우게 된다. 바로 ‘합동수사본부 미설치’다. 김 전 장관은 검찰 진술서 합수본이 미설치돼 체포가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그는 “계엄사령부와 합수본이 설치되는 과정이라 검거가 불가능하다”며 “합수본이 설치되려면 검찰과 경찰의 협조가 필요한데 아무런 대비도 없이 체포부터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진술했다. 김 전 장관의 진술은 계엄 직후 선관위에 국군 정보사령부 부대원들을 보내 선거인 명부 관리 서버를 장악하고 선관위 당직자들에 대한 통신 제한(휴대전화 압수)과 감금이 위법한 수사 활동임을 나타내고 있다. 계엄이 터지면 통상적으로 합수본 역할을 맡는 국군 방첩사령부 관계자도 검찰 진술 당시 선관위 투입은 잘못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최영희 방첩사 비서실 1과장은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이 방첩사 소속 군인들로 하여금 중앙선관위 서버를 꺼내오도록 지시하거나 계엄 해제 이후 관련 증거를 제거하도록 시킨 것은 자신들의 정당한 권한 범위를 넘어선 것”이라고 말했다. 불법성 미리 알고? 박성하 방첩사 기획조정실장은 “현장에 나가 있던 소위 체포조에 대해서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면서도 “하지만 전시에도 방첩사가 일부 범죄에만 수사권이 있기 때문에 전시나 계엄 상황이라도 관할권이 없는 선관위나 정치인 등 체포나 점거는 경찰의 협조가 필요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게다가 합수본(방첩사)은 직접 수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통합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해야 하는데 지역 합수단서 해야 할 일을 방첩사 인원으로 진행한 것도 문제”라고 말했다. 한 군검찰 출신 변호사는 “합수본은 계엄사령관이 임명하는 군사경찰 관리, 경찰공무원, 국가정보원 직원 중 사법경찰 관리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 그 밖에 사법경찰 관리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로 구성된다”며 “또 합수본은 계엄사령관이 지정한 사건의 수사와 정보기관 및 수사기관의 조정·통제업무를 관장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하지만 선관위로 투입된 인원들은 계엄사령관으로부터 임명을 받지도, 임무를 하달받지도 않았다”며 “게다가 합수본까지 설치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시작부터 위법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정보사와 방첩사 모두 계엄사령군(군사경찰)이 아니기에 정당한 절차가 없었다면 반란군이라고 볼 수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여기서 의문이 드는 점은 계엄 업무를 해본 김 전 장관이 왜 무리수를 뒀는지다. 김 전 장관은 대한민국 합동참모부서 작전본부장을 역임한 바 있다. 합참 작전본부에는 계엄과가 편제돼있기 때문에 김 전 장관이 계엄군과 합수본 지정 및 운용 등을 몰랐다고 보기 힘들다. 합참 계엄과서 편찬하는 계엄실무편람에도 잘 나와있기 때문이다. 김 전 장관은 논란을 줄이기 위해 계엄이 선포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화상으로 개최하면서 박안수 전 육국참모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을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일부 사령관 등에게만 공유됐던 12·3 계엄 작전은 계엄사령부가 설치되기도 전에, 합수본이 설치되기도 전에 끝났다. 사령부만 알았다 <일요시사>가 확보한 검찰 진술 조서에 따르면, 김 전 장관은 전군주요지휘관회의서 이진우 전 수도방위사령부 사령관, 곽종근 전 육군 특수전사령부 사령관에게 국회와 선관위 출동을 하면서 방첩사에 합동수사본부를 구성해서 임무 수행을 하라고 지시했다. 김 전 장관이 방첩사에 지시한 임무는 경찰과 국방부 조사본부에 100명씩 인원을 요청하고 선관위로 먼저 투입된 국군 정보사령부가 접수한 선관위 서버를 꺼내오라는 지시였다. 국방부 조사본부와 경찰에 인원 요청을 한 것은 정치인, 판사, 등 민간인 체포를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조사본부는 방첩사가 요청한 수사관 지원 요청을 4차례 거절했다. 조사본부 한 관계자는 검찰 조사 당시 “지난 3일 계엄령 선포 이후 방첩사로부터 수사관 100명 지원을 네 차례 요청받았지만, 근거가 없다고 판단해 응하지 않았다”며 “이후 합수본 실무자 요청에 따라 시행 계획상 편성돼있는 수사관 10명을 지난해 12월4일 오전1시8분 출발시켰다”고 진술했다. 방첩사의 수사관 파견 요청에는 불응했고, 계엄 시행 이후 방첩사를 중심으로 꾸려지는 합수본 요청에는 응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수사관이 파견된 시간은 이미 계엄 해제 의결이 이뤄진 뒤였다. 합수본이 계엄 해제와 비슷한 시기에 모양새라도 갖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김 전 장관이 계엄 직후 전군주요지휘관회의서 여 전 사령관에게 합수본 설치를 지시했지만 설치가 늦어진 이유가 있다. 방첩사에 내려진 지시는 좌파세력 체포와 합수본 설치, 검찰과 경찰 및 국방부 조사본부 등에 협조 요청 등으로 내란 주동자들에게는 어느 것 하나 미룰 수 없는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 기획조정실장은 “부대에 도착해보니 OOO회의실에 여 전 사령관이 이경민 참모장, 이창엽 비서실장과 같이 있었다”며 “합수본 설치 지시를 받으려 사령관에 물어봤지만 답을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여 전 사령관이 다른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합수본부장으로 임명됐다. 우리 대원들은 다 나가 있다’고 말하며 통화에만 집중했을 뿐 합수본 설치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계엄 6개월 전부터 준비 실무진만 ‘닭 쫓던 개’ ‘비상계엄이 선포되면 국가적으로 엄중한 상황이 될 텐데 방첩사는 계엄 선포 예정 사실을 알고 준비하지 않았느냐’는 검사의 질문에 “계엄이 선포되면 합수본을 설치해야 하는 사람이 나다. 하지만 나는 해당 사실을 알지 못했다”며 “체포조를 운영한 수사단장도 해당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답했다. 그는 “방첩사 비상소집이 완료된 시간이 지난해 12월4일 오전 1시4분”이라며 “합수본은 기본 시설도 갖추지 못한 상태서 계엄이 해제됐다”고 말했다. 방첩사 인원들이 전원 소집되는 시간에 이미 계엄은 해제된 것이다. 방첩사의 작전 계획상에는 상황실 설치에 8시간, 합수본 설치에 24시간을 예정하고 있는데 비상계엄이 3시간 만에 해제됐다. 본부 설치에만 24시간이 걸리며 계엄사령관으로부터 임명을 받아 합수본을 완전히 구성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한 군사학과 교수는 “계엄 선포에 대해 사령관과 참모진 외에 실무자에게도 공유가 됐다면 미리 합수본 설치를 준비하고 있다가 계엄이 선포된 후 바로 체포를 진행했을 것”이라며 “이번 계엄의 패착은 이전 계엄과 달리 빠르게 대처한 국회를 막지 못한 것과 계엄사령부부터 합수본까지의 실무자들이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방첩사 사령부에서는 미리 계엄 준비를 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방첩사 소속 간부 A씨는 검찰 조사에서 “방첩사와 경찰청 국가수사본부가 체결한 MOU에 언급된 ‘합동수사본부’는 계엄 시 설치되는 합수부가 맞다”고 진술했다. 방첩사와 국수본은 지난해 6월28일 ‘안보범죄 수사 협력에 관한 업무협약’을 체결하면서 “합동수사본부 설치 시 편성에 부합하는 수사관 등을 지원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검찰은 이를 근거로 방첩사가 계엄을 오래전부터 준비한 것으로 보고 있다. A씨는 “지휘부에서 최초에는 지난해 5월 초순경 3주안에 체결하라는 지시를 했다”며 “보통 미국 국방정보국(DIA) 등 해외정보수사기관과 이런 MOU를 맺고, 국내 기관은 관련 법령이 있어 MOU를 맺지는 않는다. 국내 기관과 MOU를 맺은 건 이번이 처음이고, 굳이 이런 MOU를 맺는 게 의아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다만 조지호 경찰청장은 해당 MOU에도 불구하고 계엄 당일 수사관 지원 요청을 이행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조 청장은 지난 5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긴급 현안 질의에 나와 “방첩사 주관으로 수사본부가 꾸려질 수 있으니 경찰서 필요한 인력을 지원해줬으면 좋겠다고 해서, 제가 준비하겠다고 했다”고 밝혔으며 계엄 당일 수사관 81명이 방첩사 요청으로 대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두환과 구상 흡사 내란 주동자들은 경찰력을 대거 방첩사로 파견해 합동수사본부를 꾸리고 정치인 체포 작전을 벌일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1979년 비상계엄하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피살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만든 합수본과 흡사한 구상이다. 당시 합수본은 정권에 반대하는 정치인에 대한 정보 기능을 도맡아 12·12 군사 반란의 수괴인 전두환씨가 권력을 장악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됐다. <kcj5121@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계엄 사령부 구성도 완전 실패 <일요시사>가 확보한 검찰 진술조서에 따르면 계엄사령부는 구성조차 못했다. 권영환 전 대한민국 합동참모본부 계엄과장은 계엄이 선포된 후 김용현 전 국방부장관으로부터 ‘계엄사령부 설치를 도와라’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에 그는 육군 본부 참모진들이 올라올 때까지 계엄사 상황실 구성 준비를 했다. 계엄이 선포되면 계엄사에는 2실(비서실, 기획조정실) 8처(정보처, 작전처, 치안처, 법무처, 보도처, 동원처, 구호처, 행정처)를 구성하도록 돼있으나. 권 전 과장이 계엄사 상황실을 구성하고 있을 당시 국회에서는 ‘비상계엄해제 요구결의안’이 가결됐다. 당시 권 전 과장이 박안수 전 육군참모총장에게 “(계엄해제 요구안이 가결됐으니) 법률상 지체 없이 계엄을 해제하도록 돼있다”고 말하자 박 전 총장은 “그런 것을 조언할 것이 아니라 일이 되게끔 만들어야지 일머리가 없다”며 “올해 연습을 두 번이나 했다고 하면서 구성을 왜 빨리 못하냐”고 꾸짖었다고 한다. 이는 내란 주동자들이 2차 계엄을 생각하고 있었으며 계엄사 구성의 역할이 합참에 있었다는 것을 내포하는 대목이다. <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