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함상범 기자= 1979년 10월26일은 역사적으로 특별하다. 무려 18년 넘게 집권하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대통령이 부하로부터 총에 맞아 사망한 날이기 때문이다. 드라마, 영화, 각종 시사프로그램 등등에서 숱하게 거론된 하루다. 현대사나 정치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다.
연출자에게 있어 이 흥미로움은 ‘양날의 검’이다.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엔 유리하지만, 자칫 기존의 것을 답습하는 데 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을 꼭 만들어내야 유의미한 결과물이 된다. <내부자들> <마약왕>의 우민호 감독이 <남산의 부장들>이라는 양날의 검을 빼들었다.
<남산의 부장들>은 10·26을 마지막 지점으로 이전 40일부터의 과정을 그린다. 1977년 있었던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코리아 게이트’ 이후 미국 연방 하원의 프레이저 청문회서 비밀스러운 내용을 거침없이 폭로한 사건을, 영화적 재미를 위해 1979년으로 붙인 것 외에는 고증에 충실하다. 다만 이름은 싹 바꿨다. ‘김재규=김규평’ ‘각하=박정희’ ‘김형욱=박용각’ ‘차지철=곽상천’ ‘전두환=전두혁’ 등이다.
역사를 조금만 알아도 어떤 인물로 모티브가 됐는지 쉽게 보인다.
공포의 대명사였던 남산과 서슬 퍼런 군사정권서 굵직한 권력을 맡았던 자들의 숨겨진 이야기를 차가운 톤으로 차분하게 담았다. <그 때 그 사람들>이 블랙코미디 형태로 당시 인물들을 풍자하고 비꼬았다면 <남산의 부장들>은 김규평(이병헌 분)의 불안함에 포커스를 맞춘다.
스토리
미국 프레이저 청문회서 박통의 실체를 낱낱이 고발한 박용각(곽도원 분)을 황급히 만난 김규평(이병헌 분)은 의외의 소리를 듣는다. 중앙정보부장도 경호실장도 아닌 또 다른 2인자가 있다는 것이다. 그 이름은 ‘이아고’라고 한다. 박용각은 김규평에게 새로운 왕좌에 오르는 그림을 그린다. 미국도 김규평에게 ‘다음 스텝을 밟으라’며 박통의 하야와 새로운 왕좌를 암시한다.
그런 가운데 군 후배이자 경호실장인 곽상천(이희준 분)은 미쳐 날뛴다. 무슨 일만 터지면 ‘중정부장이 이것도 모르냐’며 면박을 주는 것은 물론 ‘캄보디아처럼 100만명 200만명 탱크로 싹 밀어야 한다’며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말로 박통(이성민 분)을 꼬드긴다. 박통은 그 말에 넘어가는 모양새다. 여러 상황 속에서 김규평은 박통을 향해 충정을 다 바치는데, 1인자의 총애에선 점점 더 멀어진다. 부마항쟁이 발발하면서 박통·경호실장과 의견이 엇갈리는 가운데 김규평은 커다란 결심을 한다.
주제의식
10·26을 대하는 미디어의 방식은 늘 달랐다. 12·12사태의 전초전이었거나 혹은 누군가를 조롱의 대상으로 여겼거나, 누군가를 미화하는 방식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남산의 부장들>은 역사물 또는 다큐멘터리에 가깝다. <밀정>의 음울함과 비슷한데 특별한 메시지가 보이지는 않는다.
특별한 점은 이 작품은 김규평의 심리와 시선으로만 이 기간을 해석한다는 점에 있다. 미국에 미운털이 박힌 박통, 자신을 지원하겠다는 미국, 꼴도 보기 싫은 경쟁자와 그를 총애하는 상관, 뒤에서 자신을 믿고 받쳐주겠다는 혁명 동지 사이서 김규평은 혼란스러워한다. 영화는 1979년도에 이런 불안함을 느낀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설명하기만 한다.
그 불안함을 견디지 못하고 쏴버린, 우발적인 총성은 그가 외쳤던 민주주의 대신 더 악랄한 신군부를 탄생시키고 만다. 권력의 시종이 어쩔 줄 모르다가 쏜 총성으로 인해 한국의 민주주의는 더 후퇴하게 된다. 김재규에 대한 재평가가 꾸준히 있어왔지만, 우발적인 행동이 낳은 처참한 결과로 인한 비판의 여지도 많다.
그럼에도 영화는 김재규를 비교적 긍정적으로 해석한다. 민주주의에 대한 소신이 있는 인물로 그려지며, 냉철하고 이성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마지막은 멋있다. 그를 무시했던 <그 때 그 사람들>과는 사뭇 다르다. 영화 말미 김규평의 불안하고 초조한 얼굴이 현시대를 살아가는 관객들에게 어떤 메시지로 전달될지 궁금하다.
연출
70년대 후반의 빛깔이 스크린을 가득 메운다. 뉴트로가 유행이듯 예전 것을 세련되게 바꿔놨다. 의상을 비롯한 다양한 소품, 철저하게 준비된 공간이 1980년대로 빨려 들어가게 한다.
프레이저 청문회에 이은 김형욱의 죽음, 김규평과 차지철의 대립, 부마항쟁, 궁정동 10·26 사태까지 당시를 잇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다소 느리게 전개된다. 영화는 인물의 감정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보인다. 중간에 다소간의 지루함을 막지는 못한다.
후반부 다소 갑작스럽게 결단내리고 수행하는 과정이 매끄럽지는 않다. 관객들이 여백을 꽤 이해해줘야 할 것으로 보인다. 조금만 더 촘촘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역사가 스포일러지만, 후반부 궁정동 안가 시퀀스는 굉장한 긴장감을 준다. 롱테이크신은 두고 두고 회자될 것으로 보인다.
연기
무엇보다 이 영화의 가장 빛나는 대목은 연기다. 다소 지루한 감이 없지 않은 과정서도 배우들의 연기는 상당히 빛난다. 박통을 연기한 이성민은 ‘비슷하지 않을 것’이라는 일각의 우려와 달리 높은 싱크로율과 함께 새로운 박통을 만들어낸다. 한 마리 이리 같으면서도 욕망에 찌들어있는 권력자를 표현한다.
언제나 새로운 얼굴과 강렬한 연기를 드러내는 이병헌은 엄청난 비중을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소화했다. 애써 감추려 하지만 툭툭 묻어나오는 불안함과 함께 마지막 장면서의 얼굴은 영화를 관통한다.
무려 25kg을 찌운 이희준은 ‘차지철이 정말 저랬을지도 몰라’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묘한 연기를 펼친다. 김규평을 끊임없이 조롱하는, 무대포 같은 표현법이 자연스럽다. 과하게 느껴지지 않을 선을 찾아낸 것이 묘수다.
영화의 시작을 끊은 곽도원과 유일한 여성 캐릭터에 가까운 김소진도 제 몫 이상을 해준다. 그 외 작은 분량의 캐릭터들 중에 허점은 딱히 보이지 않는다. 연기로는 빈틈이 없다.
총평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를 새롭게 그려내고자 했던 제작진의 노력이 관객들에게 통할 것으로 예상된다. 총선을 약 90일 앞둔 시점에, 정치적인 비판을 피하기 위한 선택도 영리해 보인다. <마약왕> 실패 이후 절치부심이 느껴진다.
하지만 초반 김규평을 자극한 ‘이아고’가 사라진 대목, 큰 결단을 내리는 과정서 부족한 설득력, 영특한 기질을 보인 김규평이 중정이 아닌 육군본부로 선택한 진짜 이유를 그리지 않은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이 시대의 역사를 잘 아는 관객보다 적당히 잘 모르는 관객이 더 높은 평가를 줄 것으로 예상된다.
개봉: 2020.01.22
등급: 15세 관람가
상영시간: 114분
제작사: 하이브미디어코프, 젬스톤픽처스
배급사: 쇼박스
한줄평: 한 남자의 불안함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