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인10색> 월급 안 받는 총수들 속사정 & 노림수

무보수 회장님 “먹고 살 걱정 없는데 뭐...”

[일요시사=경제1팀] 한종해 기자 = 보수를 포기하는 그룹 회장님들이 늘고 있다. 이유는 모두 다르다. 경영 복귀 차원에서 '무보수 경영'을 선언한 총수가 있는가 하면 고액 연봉에 따른 비판과 회사의 경영 악화에 대한 책임으로 '무보수 경영'을 선택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이들이 먹고 살 걱정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수억에서 수천억에 이르는 배당금 덕분이다.

재벌 총수 중 무보수를 가장 먼저 선언한 것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다. 이 회장은 2008년 4월 등기 이사를 사임한 뒤 2010년 3월 경영에 복귀한 뒤 '무보수 경영'을 내세우며 그룹을 지휘하고 있다.

하지만 이 회장의 무보수 경영은 여타 회장과 성격이 다르다. 이 회장은 경영 복귀를 위함이지만 다른 회장들은 고액 연봉에 따른 비판과 회사의 경영 정상화를 위해 보수를 포기하거나 연봉을 반납했다. 

이건희 회장
무보수 첫 시작

최태원 회장이 지난해 보수 전액을 포기했다. SK그룹은 지난 7일 최 회장이 지난해 받은 보수 301억원 전액을 사회에 환원하고 SK C&C 퇴직금 수령도 포기한다고 밝혔다. 최 회장은 지난해 SK(주), SK하이닉스, SK이노베이션, SK C&C 등 4개 계열사에 등기임원으로 재직하면서 급여 94억원, 2012년분 성과급 207억원 등 총 301억원의 보수를 받았다.

SK그룹 측은 "지난달 초 회장님이 지난해 받은 보수 전액을 좋은 일에 써야겠다는 뜻을 전달해 왔다"며 "그룹 차원에서 실무진이 처리 방식과 사용처 등을 놓고 검토 작업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룹 측은 이어 "회장님은 올해 초 대법원 유죄 판결 이후 보수의 처리 방식을 결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보수공개가 이뤄지자 무척 아쉬워했다"고 전하기도 했다.


최 회장은 올해부터 SK(주)와 SK이노베이션, SK하이닉스의 비상근 회장으로 재직하되 보수는 전혀 받지 않는 집행임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보수뿐 아니라 작년 실적을 토대로 한 성과급도 받지 않기로 결정했으며 SK C&C에서도 임원직 사임과 함께 퇴직금을 받을 예정이었지만 역시 포기하기로 했다. 최 회장의 SK C&C 임원 재직기간은 15년, 퇴직금은 수십억원에 이른다.

최 회장의 이번 결정은 지난해 배임 등 혐의로 수감 생활을 하면서 실질적으로 경영참여를 하지 못했는데도 고액의 보수를 받자 사회적 비판이 일어난 데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곱지 않은 시선은 여전하다. 비판 여론 잠재우기에만 급급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생색내기라는 것. 일각에서는 똑같이 사법 처리된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과 비교를 하는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다.

김 회장은 지난해 한화건설을 비롯한 계열사로부터 331억원이 넘는 연봉을 받았지만 200억원을 반납했다. 나머지 131억원2000만원은 상여금이다. 김 회장은 지난해 한화건설에서 52억5200만원, 한화케미칼에서 26억1200만원, ㈜한화에서 22억5200만원의 상여금을 받았으며 한화L&C와 한화갤러리아에서도 각각 15억200만원의 상여금을 수령했다.

계열사별 반납 급여는 한화케미칼 49억7300만원, ㈜한화 49억7200만원, 한화건설 34억1400만원, 한화L&C와 한화갤러리아가 각각 33억2400만원이다.

같은 듯 다른 연봉 포기 내막은?
월급 없어도 배당금으로 '떵떵'

한화그룹 측은 "김 회장이 2012년 8월 배임 및 횡령 혐의로 구속된 뒤 병원에 입원하는 등 정상적인 경영활동에 참여하기 어려웠던 만큼 구속 이후 받았던 급여 전액을 반납했다"고 전했다. 반납액 200억원은 김 회장이 법정 구속된 2012년 이후로 정상적 경영활동에 참여하지 못한 기간에 해당하는 급여를 모두 반환한 것이라는 얘기다. 김 회장 역시 올해부터 계열사 7곳의 등기이사에서 모두 물러났다. 김 회장은 경영 복귀 전까지 급여나 상여금 일체를 받지 않기로 했다.

지난해 경영난이 심했던 GS건설로부터 거액 보수를 받아 논란이 된 허창수 GS그룹 회장도 고액 연봉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 보수를 포기했다.


허 회장은 지난해 경영난이 심했던 GS건설로부터 거액 보수를 받아 논란이 됐다. 지난 3월 공개된 연봉 5억원 이상 등기임원 명단에 따르면 허 회장은 지난해 GS건설로부터 급여 15억9500만원에 상여금 1억3200만원을 포함, 17억2700만원의 보수를 받았다. 허 회장의 동생인 허명수 부회장도 급여 5억7900만원에 상여금 5600만원으로 6억3500만원을 받았다.

반면 GS건설은 지난해 9350억원가량의 영업손실을 입는 등 엄청난 적자를 기록했다. 여기에 GS건설은 지난달 3일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경인운하 사업과 관련한 담합이 드러나 70억7900만원의 과징금이 부과됐으며 금융위원회에 플랜트 부문의 대규모 손실과 기업어음(CP) 발행 사실을 숨긴 채 회사채를 발행한 것이 적발돼 20억원의 과징금 처분을 받았다.

허 회장이 올해 보수를 포기함에 따라 허 부회장과 전문경영인 임병용 사장도 올해 보수를 받지 않기로 했다. GS건설 사내 등기임원 3명 모두 무보수를 선언한 것이다.

조정호 메리츠금융지주 회장은 지난해 6월 고액 연봉 논란이 불거지면서 퇴임했다가 보수를 전액 포기하고 지난 4월 책임경영을 강조하며 회장직에 복귀했다. 메리츠금융지주와 메리츠화재의 금융감독원 사업보고서를 보면 조 회장은 지난해 총 보수는 '0원'이다.

퇴직소득과 성과급을 포기한 것. 금융지주에서 받을 예정이던 근로소득 2억1384만원과 퇴직소득 9억원, 메리츠화재에서 받기로 한 퇴직소득 33억3230만원과 근로소득 12억595만원 모두를 받지 않았다. 다 합치면 총 56억5209만원이다. 

회사 정상화를 위해 주머니를 연 회장들도 있다. 한진해운의 새로운 대표이사로 취임한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한진해운이 흑자가 날 때까지 연봉을 받지 않기로 했다. 조 회장은 지난달 29일 임시 주총 직후 열린 이사회에서 취임사를 통해 "한진그룹의 인전·물적 자원을 최대한 지원해 한진해운이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초일류 해운 기업으로 재도약할 수 있도록 총력을 쏟겠다"며 "흑자로 돌아설 때까지 연봉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비상경영을 선포한 권오준 포스코 회장과 황창규 KT 회장은 기본급 30%를 자진 반납했다. 황 회장은 지난 1월 KT 분당 사옥에서 열린 대책회의에서 "현재 KT는 핵심인 통신사업의 경쟁력이 크게 훼손된 데다 비통신 분야의 가시적 성과 부재, 직원들의 사기 저하 등으로 인해 사상 최대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며 "사활을 걸고 경영 정상화에 매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권오준·황창규
기본급 30% 반납

황 회장은 이를 위해 자신의 기본급 30%를 반납하고, 장기성과급 역시 회사의 성장 가능성이 보일 때까지 받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황 회장의 올해 연봉은 2012년도 KT 회장 대비 60% 이상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KT 임원들 역시 기본급의 10%를 자진 반납하기로 했다.

KT는 지난해 4분기 6조2145억원의 매출을 올리며 전기 대비 8.4% 상승했으나 영업손실 1493억원을 기록하면서 적자로 돌아섰다. 2012년 4분기 당기 순이익 적자, 2009년 4분기 영업이익 적자에 이어 3번째 적자다.

권오준 포스코 회장도 기본급 30%를 반납하겠다고 밝혔다. 권 회장이 지난 3월 취임 후 처음 열린 임원회의에서 이같이 밝히자 윤동준 경영인프라 본부장은 "회사가 어려운 경영 여건을 조기에 극복하기 위해 임원들도 자율적으로 급여 반납에 동참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이에 임원 전원은 자율적으로 기본급의 10∼25%를 반납하기로 했다.
 

포스코는 지난해 매출, 영업이익, 순이익이 모두 줄어들었다. 지난해 매출액은 61조8646억원을 기록, 전년보다 2.7% 줄었고, 영업이익은 2조9961억원을 기록해 18% 감소했다. 당기순이익은 1조3550억원으로 43.2% 줄었다. 부채비율은 2008년 65.7%에서 지난해 84.6%로 18.9%포인트 높아졌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도 주력 계열사 현대상선의 경영난을 고려해 올해 연봉을 30% 정도 줄이기로 했다. 현 회장은 등기임원으로 활동 중인 3개 계열사에서 총 25억원의 보수를 받았다. 금감원 전자공시에 따르면 현 회장은 현대상선에서 8억8000만원, 현대엘리베이터와 현대로지스틱스에서 각각 8억1000만원의 보수를 수령했다. 지난해 현대그룹은 총 1조원이 넘는 적자를 기록했다. 현대상선은 5858억원의 당기순손실을 입었다.

재벌 회장들
주수입원은?

금호산업 정상화 작업을 진두지휘하는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은 금호산업 대표이사를 맡았음에도 연봉은 '1원'에 불과하다. 박 회장은 정상화를 이뤄내지 못하면 금호그룹에서 완전히 손을 떼기로 했다. 실패할 경우 등기이사 사임은 물론 보유지분을 모두 매각해야 한다는 위험성이 있다.

재벌 회장들이 연봉을 받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들의 곳간은 넉넉하다. 연봉이 아닌 배당금이 주수입원이기 때문이다. 4년째 연봉이 '0원'인 이건희 회장은 배당금만으로도 재계 총수 가운데 소득 '1위'다.

CEO스코어에 따르면 30대 그룹 대주주 일가와 주식을 보유한 임원 등 2742명 가운데 이 회장은 배당금이 1078억6400만원으로 지난해 가장 많았다. 삼성전자(714억원), 삼성생명(352억원), 삼성물산(11억원) 등이다.

고액연봉 논란에 수백억 포기
경영난 등기임원도 봉급 반납


301억원의 연봉으로 랭킹 1위에 올랐던 최태원 회장은 배당금에서는 3위를 차지했다. 최 회장은 SK(주), SK케이칼, SK C&C, SK하이닉스 등 4개 계열사로부터 285억7000만원의 배당금을 받았다. 전년보다 20% 늘어난 금액이다. 배당금의 99%는 SK C&C에서 나왔다. SK C&C는 그룹 지주회사인 SK(주)의 지분을 30% 이상 보유한 최상위 지배회사다. SK C&C의 주당 배당금은 지난해 1250원에서 올해 1500원으로 상승했다.

김승연 회장은 67억9000만원의 비교적 적은 배당금을 받았지만 200억원의 연봉을 제외하고 남은 131억2000만원의 연봉을 합쳐 연간 수입 6위를 기록했다.

허창수 회장은 2012년에 비해 반토막이 나긴 했지만 올해 60억원 수준의 배당금을 챙길 것으로 보인다. 이는 허 회장이 대주주인 GS건설이 실적 부진에 따라 배당을 하지 않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비판 여론
잠재우기

조양호 회장은 배당금 3억원을 받아 10대 그룹 총수 중 꼴찌를 기록했다. 대한항공 등 한진 주요 계열사가 배당을 실시하지 않았기 때문. 하지만 조 회장은 한진그룹 계열사에서 총 58억원의 연봉을 받았다. 대한항공이 27억3545만원, 한국공항이 19억8175만원, ㈜한진이 10억8175만원 등이다.

조 회장은 이들 회사 외에 한진해운홀딩스, 한진정보통신, 정석기업, 한진칼, 한진관광, 토파스여행정보 등 상장회사와 비상장회사의 등기이사도 맡고 있어 실제 보수는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 기업은 연봉지급액이 5억원을 넘지 않거나 기업규모가 연봉공개 기준에 미치지 못해 조 회장의 연봉을 공개하지 않았다.

회사가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하는 와중에 현정은 회장은 지난해 92억원의 순손실을 낸 현대유엔아이에서 적립금까지 끌어다 12억원의 배당금을 받았다. 현 회장의 장녀 정지이 전무도 유엔아이에서 2억원의 배당금을 받았다.

 

<han1028@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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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 협상’ 일본과 비교해보니⋯

‘관세 협상’ 일본과 비교해보니⋯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트럼프발’ 통상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앞서 못 박은 시한은 끝났다. 우리나라는 유예 기간이 끝나기 전날 타결했다. 이제 협상 결과를 두고 계산기를 두드려야 할 때다. 일본과 유럽연합(EU), 그리고 한국. <일요시사>가 세부 내용을 들여다봤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취임 전부터 각국에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미국을 상대로 돈을 번, 즉 대미 무역 흑자를 거둔 나라들이 표적이 됐다. 지난해 11월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부터 전 세계는 ‘트럼프발’ 통상 전쟁에 휘말렸다. 트럼프 대통령이 숫자를 외칠 때마다 세계 경제가 요동쳤다. 하루 전 극적 타결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 다소 늦게 통상 협상을 시작했다. 지난해 12월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지난 6월 조기 대선이 치러질 때까지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탄핵심판 등 대형 정치 이슈가 거듭되면서 미국과 협상을 하고 싶어도 테이블에 앉을 사람이 마땅치 않은 상태였다. 실제 한덕수 전 국무총리나 최상목 전 경제부총리 등이 협상에 나섰지만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이 새 정부가 해야 할 일이라고 제동을 걸었다. 또 한 전 총리의 대선 출마 선언, 최 전 부총리 탄핵안 상정 등의 상황이 겹치면서 미국과의 협상은 큰 진전 없이 시간만 흘렀다. 이후 이재명 정부가 출범했다. 우리나라는 좀처럼 미국 실무진과 접점을 찾지 못했다. 그 사이 트럼프 대통령은 이재명 대통령에게 ‘모든 한국산 제품에 대해 산업별 관세와는 별도로 25%의 일반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시한은 지난 1일로 못 박았다. 우리나라는 미국과 FTA 체결로 사실상 무관세 수준이었기에 관세 부과가 현실화하면 경제 전반에 타격이 불가피했다. 자동차나 반도체 등 핵심 수출 품목에 붙는 관세 외에도 비관세 장벽(관세 이외의 수단으로 무역을 제한하는 조치)을 허물라는 압박도 가해졌다. 쌀이나 소고기 등 농·축산물 시장 개방, 정밀 지도 반출,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증액 등이 협상 테이블에 오를 것으로 예상됐다. 국내 상황과 맞물려 쉽게 내주기 어려운 조건들이었다. 일·EU와 같은 15%로 막아 대미 투자는 3500억달러로 협상도 난항을 겪었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2+2 통상 협상을 하루 앞두고 출국하려다 미국 측의 취소로 불발하는 일이 일어났다. 앞서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부 장관이 방한을 닷새 앞두고 일정을 취소하기도 했다. 미국 고위급 인사들과의 만남이 잇따라 무산되면서 ‘한미 관계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 일본과 유럽연합(EU)이 차례로 미국과 협상을 타결하면서 불확실성은 더욱 커졌다. 특히 일본의 협상 결과가 공개되면서 우리나라가 최소한으로 맞춰야 할 기준이 생겨버렸다. 우리나라와 일본은 자동차 등 수출 품목이 일부 겹치기에 일본보다 관세가 높아지면 수출 경쟁력이 망가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22일 일본과 무역 협상을 완료했다고 발표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밝힌 일본산 수입품에 부과하는 상호관세는 15%다. 기존 25%에서 10%포인트 줄어들었다. 일본이 미국에 5500억달러(약 759조원)를 투자할 것이고 이 중 90%의 수익을 미국이 받게 된다고도 했다. 동시에 자동차와 농산물을 일부 개방한다는 조건도 달렸다. 지난달 27일에는 미국과 EU가 관세 협상을 타결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EU로부터 수입되는 모든 품목에 대해 일괄적으로 15%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미국산 에너지 7500억달러(약 1030조원) 구매 및 대미 투자 6000억달러(약 820조원) 확대 방안을 담은 ‘무역협정 틀’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일본과 EU의 협상 타결로 미국의 협상 전략이 윤곽을 드러냈다. 관세를 낮추는 조건으로 무엇을, 얼마나 내놓느냐가 관건이 된 것이다. 관심이 집중된 부분은 대미 투자액이었다. 애당초 통상 전쟁 자체가 타국이 얻는 대미 무역 흑자를 줄이겠다는 명목으로 시작된 터라 트럼프 대통령은 상대국에 대미 투자라는 일종의 ‘청구서’를 요구한 셈이다. 일본이 5500억달러, EU가 6000억달러를 미국에 각각 투자하기로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우리나라에 날아올 청구액에 관심이 쏠렸다. 협상 시한이 다가오면서 언론보도 등을 통해 3000억달러, 4000억달러 등의 추측이 난무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제멋대로’ 외교에 우리나라 협상팀이 휘둘리고 있다는 말도 나왔다. 쌀 소고기 지켰다는데 우리나라는 협상 시한을 하루 앞둔 지난달 31일 한국산 제품에 대한 상호관세를 25%에서 15%로 낮추는 내용을 골자로 협상을 타결했다. 일단 일본, EU와 동일한 수준으로 관세 인하를 이끌어낸 것이다. 관심을 모았던 자동차 관세율은 15%, 철강·알루미늄·구리는 기존 관세율(50%)을 유지하기로 했다. 또 반도체와 의약품 관세 부과 시 최혜국 대우도 약속받았다. 다른 나라보다 불리한 관세를 적용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부분도 일본, EU와 같은 합의 내용이다. 대통령실에 따르면 민감한 품목으로 분류됐던 쌀과 쇠고기 등의 개방은 하지 않는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은 농산물 전면 개방을 언급해 향후 변동 가능성을 지켜봐야 한다. 대미 투자액은 3500억달러(약 490조원)로 결정됐고 1000억달러(약 140조원) 상당의 액화천연가스(LNG) 또는 기타 에너지 제품을 수입하기로 했다. 김용범 정책실장은 “한국과 일본의 대미 무역 상황은 지난해 기준 각각 660억달러 흑자, 685억달러 흑자로 규모가 유사한 상황에서 일본보다 작은 규모인 3500억 달러 펀드를 조성하기로 했다”며 “기업이 주도하는 조선펀드 1500억달러를 제외하면 우리 펀드 규모는 2000억달러로 일본의 36%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번 합의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미국과 조선업 분야 협력을 확대하기로 한 것”이라며 “한미 조선협력펀드 1500억달러는 선박 건조, MRO(유지·보수·정비), 조선 기자재 등 조선업 생태계 전반을 포괄한다”고 덧붙였다. 우리나라 협상팀은 조선 협력을 내세운 게 협상 타결의 ‘키’였다고 자평했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 주미 한국대사관에서 브리핑을 하며 마스가(MASGA·Make American Shipbuilding Great Again) 프로젝트가 협상 타결에 가장 큰 기여를 했다고 밝혔다. ‘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뜻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 구호인 ‘매가(MAGA·Make America Great Again),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에서 따온 표현이다. 자동차는 관철 못 해 아쉬운 부분으로는 자동차 관세를 꼽았다. 이전까지 우리나라 자동차는 관세가 0%였다. 2.5%였던 일본과 비교해 근소하게 가격 경쟁력을 가졌다. 하지만 이번 협상 타결로 일본과 똑같은 15% 관세가 결정되면서 자동차 업계는 가격 경쟁력을 잃게 됐다. 우리나라 협상팀이 끝까지 자동차 관세 12.5%를 요구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모두 15%’라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재명 대통령은 “큰 고비를 하나 넘었다”며 “이번 협상으로 정부는 수출 환경의 불확실성을 없애고 미국 관세를 주요 대미 수출 경쟁국보다 낮거나 같은 수준으로 맞춤으로써 주요국들과 동등하거나 우월한 조건으로 경쟁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다”고 평했다. 협상 결과를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성공과 실패를 떠나 일단 ‘최악은 면했다’는 의견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협상 타결이 이뤄지기 전까지 유예 기간을 놓쳐 관세 25%를 맞을 수도 있다고 우려한 것에 비하면 나름 ‘선방했다’는 의견이다. 동시에 미국이 내민 청구서의 구체적인 부분을 더 살펴야 한다는 신중론도 존재한다. 일본 등은 트럼프 대통령의 협상 타결 발표와 실제 합의 내용이 다르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결정된 사항을 즉흥적으로 바꾸는 등 외교 과정에서 ‘오락가락’하는 면모를 보인 적이 여러 차례 있다.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불확실성을 극대화하는 협상 기술을 사용한다는 평이다. 정밀 지도·국방비 등 안보 이슈 백악관서 만나 대통령끼리 담판? 트럼프 대통령이 우리나라와의 협상 타결 내용을 발표하면서 언급한 정상회담이 ‘진짜’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그는 “한국이 투자 목적으로 상당한 금액을 추가 투자하기로 합의했다”면서 2주 내로 이재명 대통령과 백악관에서 정상회담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자리에서 투자액이 발표될 것이라고 했다. 추가 청구서가 나올 수 있다는 뜻이다. 이번 통상 협상에서 논의되지 않은 정밀 지도 반출 문제가 협상 테이블에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 김용범 정책실장은 지도 반출 등 안보 사안은 한미 정상회담에서 별도로 논의할 것으로 예상된다면서 “(지도 반출과 관련해) 우리가 계속 방어해왔다. 추가 양보는 없다”고 말했다. 미 무역대표부(USTR)는 지난 3월 <2025 국가별 무역 장벽 보고서>에서 정밀 지도 반출 제한을 한국과의 디지털 무역 장벽 중 하나로 지목했다. 우리나라 정부는 군사기밀 유출을 우려해 정밀 지도의 국외 반출을 막아왔다. 정밀 지도에 해외 기업이 가진 위성사진을 결합하면 국가 안보와 직결된 지도 정보로 완성될 가능성이 있다. 미국 정계와 IT업계는 정밀 지도를 반출해야 한다는 주장을 고수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협상에서는 다뤄지지 않았지만 정상회담의 의제로 오를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뜻이다. 주한미군 주둔 방위비 분담금, 국방비 문제도 거론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동맹국들에 국내총생산(GDP) 대비 5% 이상을 국방비 예산으로 잡으라고 압박했다. 우리나라에도 대선 후보 시절부터 방위비 분담금으로 100억달러를 내야 한다고 여러 차례 말하는 등 전방위로 요구한 바 있다. 추가 청구 나올까? 한미 정상회담은 이 대통령의 ‘외교 시험대’가 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이 대통령은 취임 직후 G7 정상회의에 참석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지 못했다. 나토 회의에는 이 대통령 대신 위성락 안보실장이 참석했다. 이번 정상회담이 ‘안보’ 회담이 될 가능성이 큰 상황에서 이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이 어떤 딜을 벌일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