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교동 사람들 릴레이인터뷰 ⑤> 남궁진 전 장관

“곁에서 본 DJ, 매일 자신과 치열하게 싸웠다”



학창시절 시작한 민주화 운동으로 DJ와 필연적 만남
78일간 가택연금 함께 하며 고난의 시절 ‘동고동락’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로 동교동계 인사들이 주목받고 있다. 오랜 시간 김 전 대통령의 곁에 머물면서 그의 삶을 생생히 목도했던 이들이기 때문이다. 세간에 알려진 ‘김대중’보다 더 따뜻했던, 눈물 많고 정 많은 김 전 대통령을 보았고 민주화를 위해 끝없이 투쟁한 인동초 삶의 곁에 있었다. 김 전 대통령의 유훈도 이들에게는 평소 들어오던 말일 뿐이다. 동교동계 인사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김 전 대통령의 숨겨진 일면들과 그가 이루고자 했던 것들을 되새겨봤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살아간 세월은 한반도의 사계를 닮았다. 그는 한겨울 눈보라보다 더 매서웠던 군사정권의 탄압 속에서 민주화라는 봄을 꿈꿨다. 여름처럼 뜨거운 열정으로 민중 속에서 살아 숨쉬었으며 누구보다 추억할 것이 많은 가을을 보냈다.
김 전 대통령과 같이 길을 걸었던 이들에게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김 전 대통령이 떠나고 이들은 어떤 계절을 보내고 있을까.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한 지난달 15일 고즈넉한 인사동 한켠에서 남궁진 전 장관을 만났다.
다음은 남궁 전 장관과의 일문일답.
 
- 국장 후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어떻게 지내고 있나.
▲ 김 전 대통령의 서거는 땅이 꺼지는 슬픔이었다. 나라의 진로와 국민이 나아가야 할 길을 가르쳐줄 스승을 잃은 충격일 것이다. 국장 후 거의 낙담한 채 실의에 찬 나날을 보내고 있다.

- DJ와 어떻게 만나게 된 것인가.
▲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인연이 닿았다. 4·19가 일어났을 때 나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당시 서울에는 중앙, 보성, 배제, 양정, 경성, 휘문, 중동 등 7대 사립고와 이 학교들의 학생회장단 모임이 있었다. 나는 그 해 중앙고 학생회장이자 학생회장단회의  의장을 맡고 있었다. 이 나라에 민주주의가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했고 전 고등학교가 4·19를 결의했다. 이들 중에 경동고 대표로 온 최장집 고려대 교수와 보성고 대표였던 서진영 교수가 기억에 남는다.

- 파란만장한 고교 시절이었다. 최장집·서진영 교수와는 대학에서 다시 뭉치지 않나.
▲ 고등학생 때는 4·19로 수배자 신분이 되더니 대학에 오니 한일협정이 문제가 됐다. 고려대에서 모이게 된 최장집, 서진영 교수와 함께 6·3 한일협정 반대를 주도하는 씽크탱크 역할을 했다. 산업화는 성공했지만 민주주의가 되지 않으면 나라의 발전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신체제, 긴급조치로 전국이 혼란스러웠다. 당시 정권이 북한을 비방하는 것을 보고 ‘김일성,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1인 독재나 박정희 전 대통령의 18년 독재나 뭐가 다른가’라는 생각을 했다. 북한이 경제적으로 안 좋은 상황에 놓였고 우리가 나은 상황이 됐다뿐이지….
1980년 민주연합 연정에 가담해 민주화운동을 했다. 1984년에 김영삼 총재와 김대중 선생을 대신한 김상현 전 의원의 민추협에 함께했다. 기획위원과 기관지인 민주통신 발행의 편집 책임을 맡았다.
민주통신 발행은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중앙정보부나 경찰에 체포되면 안 되기 때문에 비밀 아지트를 이용했다.

- 민추협 활동으로 DJ와 직접적인 인연이 생긴 것인가.
▲ 민추협이 신민당으로 총선에 나서자 1985년 2월8일 김 전 대통령이 귀국했다. 정권이 그를 공항에서 체포하려고 할까 봐 미국에서 하원의원 두명이 따라와 김 전 대통령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김 전 대통령의 귀국은 국민적인 지지를 받았고 곧 치러진 총선에서 신민당은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압승을 거뒀다.
2월14일 김 전 대통령이 나를 “보자”고 했다. 비서실 전문위원을 맡아 달라 부탁했다. 6개월간 비서실 전문위원을 하자 비서를 하라고 하셨다.
- DJ와 78일간의 가택연금을 함께한 것으로 알고 있다.
▲ 1985년 2월8일 귀국 후 54번의 연금을 당했지만 60항쟁 전후 78일간의 연금이 가장 긴 연금이자 마지막 연금이었다. 당시 동교동에는 김 전 대통령 내외분과 나, 김옥두 전 의원, 운전기사까지 5명이 있었을 뿐이다. 경찰 2000여 명이 동교동 자택을 감싸고 있어 누구도 들어오거나 나가지 못했다. 손님은 물론 김 전 대통령의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찾아온 아들들도 들어오지 못했다.

- 상당히 긴 시간이었는데 가택연금 기간 동안 DJ는 어떻게 지냈나.
▲ 아침 6시 반이나 7시면 머리를 빗고 넥타이에 양복을 단정히 입으시고 나서야 거실로 나오셨다. 연금 중이라 누구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집이니 편안한 옷을 입고 계실 만도 한데 한결같으셨다. 연금 40일째쯤 “편하게 입으시지요”했다.
그러자 김 전 대통령은 ‘인간에게는 인간과 자연과의 싸움, 인간과 인간과의 싸움, 인간의 그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세 가지 싸움이 있다’는 토인비의 말을 꺼냈다. 매일 자기 자신과 싸우고 있다는 것이다. 민족과 남북화해협력 등 하고자 하는 일들을 하기 위해서는 절제해야 하고 자신와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흐트러질 수 없다고 했다.


- 연금생활 동안 소소한 취미생활도 즐기셨을 것 같은데.
▲ 꽃을 사랑하셨다. 자택에 40여 평 남짓한 마당이 있는데 그곳에 꽃을 심었다. 그리고 꽃마다 팻말을 세웠다. 동교동에 오는 사람들이 꽃과 친해질 수 있게 하고 싶어서였다.
장미를 특히 사랑해 한 블록 가득 장미를 심었다. 멀쩡한 장미를 잘라내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를 보고 동교동을 찾았던 기자가 “가혹한 면이 있다”고 했다. 내가 김 전 대통령에게 왜 장미를 잘라내냐고 물으니 “이 꽃을 잘라야 새로 나오는 꽃봉오리의 꽃의 더 아름답게 필 것”이라고 하셨다.
김 전 대통령의 꽃밭관리는 특별했다. 매일매일 응달에 있던 꽃들은 양달로, 양달에 있던 꽃들은 응달로 옮겨 심었다. 그 의미를 물으니 “정부의 따사로운 손길이 응달진 사람들에게도 미쳐야 한다”고 하시더라. 기회가 생겨 집권을 하게 되면 서민과 가난한 사람을 돕겠다는 나름의 의지였던 것 같다. 실제 집권을 하고 청와대로 들어간 김 전 대통령은 ‘생산적 복지’를 주장, 기초생활비 등을 제도화했다.

- DJ 하면 ‘책’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 동교동 지하에는 김 전 대통령의 서재가 있다. 3만 권의 장서가 있는데 그 책의 분류를 내가 했다. 문학, 철학, 역사, 과학 등 다양한 책들을 도서관처럼 라벨을 붙여 정리했다. 정리를 하다 보면 그 책이 어떤 책인지 알기 위해 목차나 서문이라도, 책의 내용 일부라도 봐야 했다. 거의 모든 책에 볼펜으로 중요한 내용이 표시돼 있었고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토요일이면 당번 비서에게 신문을 가지고 오라고 하셨다. 이주의 신간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신간 중 목록을 정해 사오라고 했다. 한 번에 2~30권의 신간을 사서 서재 책상 위에 올려놓으면 시간이 날 때 책의 목차나 서문을 보고 버릴 것, 서가에 꽂을 것, 책상 위에 둘 것으로 분류했다. 책상 위에 둔 책은 지니고 다니시면서 정독하셨다.

- 78일간의 연금은 어떻게 끝난 것인가.
▲ 전두환 전 대통령은 “개헌은 없다”며 이전처럼 장충체육관에서 대통령을 뽑으려 했다. 그러나 직선제를 향한 국민들의 열망은 타올랐고 전 민주세력이 민주화를 위한 열망을 불태웠다. 박종철 열사 등 희생자도 나왔다. 민심은 들불처럼 일어났고 6·10항쟁으로 이어졌다. 그제야 연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연금에서 풀려난 날을 기억하나.
▲ 6월20일 새벽에 잘 아는 분에게 전화가 왔다. 3시에 쿠테타가 일어나니 몸조심하라는 내용이었다. 전화를 받고 새벽 5시에 김 전 대통령이 잠든 방의 문을 두드렸다. 김 전 대통령이 “무슨 급한 일인가”하시더니 말을 전해 듣고는 “어, 알았네. 나가있게”하셨다.
김옥두 전 의원과 나는 3시에 무장군인들이 쳐들어온다는 말에 낙담해 있었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샤워를 하고 속옷을 갈아입었다.
김 전 대통령이 부르셔서 갔더니 수북이 쌓인 수첩을 앞에 두고 계셨다. 김 전 대통령은 수첩을 책상 위에 놓거나 바닥에 던지거나 해서 하나하나 분류했다. 그리고는 “바닥에 둔 것은 태워라. 그리고 책상 위에 둔 것은 역사에 남아야 하는 기록물이니 꽃을 옮겨 심는 척하고 깊게 파서 숨겨라”라고 했다. 수첩에 김 전 대통령의 교우관계나 연락처, 비밀 이야기가 있으니 정권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판단에서였다. 김 전 대통령이 매일 했던 것처럼 꽃을 옮겨 심는 척하고 화단 한쪽을 깊게 파 수첩을 숨겼다.
점심시간에 김 전 대통령 내외분이 한복으로 갈아입고 나오셨다. 최후의 오찬이었다. 민주주의의 장송곡을 불러야 하는 순간이 온 것이다.
다섯 명 모두 식탁에 앉아 종교에 따라 성호를 끗거나 기도를 했다. 나는 눈만 감았을 뿐 기도를 하지 못했다. 그런데 김 전 대통령이 김옥두 전 의원에게 “김 차장, 뭐라고 기도했어요”라고 물으시는 게 아닌가. 김 전 의원이 “예, 저는 이 나라의 민주주의가 하루속히 이뤄지고 오늘 선생님 내외분이 다치지 않고 건강하시기를 기도했습니다”라고 했다.
김 전 대통령이 “남궁 동지, 뭐라고 기도했어요”라고 묻자 나는 차마 눈만 감았다 떴다고 할 수 없었다. “예, 선생님. 저도 비슷한 기도를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이 한 말은 아직도 생생하다. 김 전 대통령은 “응, 그렇지. 그런 기도도 좋지. 그러나 오늘 같은 날은 ‘모든 것을 주께 맡깁니다’라는 기도가 더 좋을지도 모르지”라고 하셨다. 나와 김 전 의원은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 물을 틀어놓고 엉엉 울었다.

- 국민의 정부가 들어섰을 때 동교동에서 지명직 공직에는 나서지 않겠다는 성명을 발표한 것으로 알고 있다. 청와대에서나 문화부 장관으로 활동하게 된 사연이 있을 성싶다.
▲ 대선 막바지에 성명을 발표했는데 두 가지 의미를 지녔다. 하나는 우리가 너무 오랫동안 고생을 해서 집권을 하면 권력을 남용하지나 않을까 하는 국민들의 불신을 씻어주기 위해서였다. 나머지 하나는 우리가 지명직 공무원이 되면 사회 각 분야에서 인재들을 뽑아 쓸 수 있는 기회가 그만큼 줄어들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옷로비 사건이 터지면서 김 전 대통령은 딜레마에 빠졌다. 인재도 좋지만 청와대에는 투철한 국가의식을 가진 이가 들어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명감 없이는 안 된다는 게 김 전 대통령의 판단이었다.
국감 중이었다. 김 전 대통령이 나를 찾아 청와대로 들어와 줄 것을 부탁했다. 위기를 극복하고 인사쇄신을 해서 기강을 바로 세우기 위해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국민과 약속을 했는데 안 됩니다. 선거가 5개월밖에 남지 않았는데 청와대에 가려면 국회의원직을 두고 가야 합니다. 제 자신이 아깝습니다”라고 말했다.
선거를 얼마 앞두고 있지 않은 시점에서 청와대행이 썩 내키지 않았다.
김 전 대통령은 “국민과의 약속은 사죄하고 열심히 하는 것으로 답하면 된다. 지역민도 납득할 수 있게 설득하면 된다. 출세를 하러 오는 것도 아니고 희생을 하는 것인데 비판이 아니라 동정받을 일이다. 어려우니 도와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일주일의 시간이 주어졌다. 집에 와서 집사람과 상의했더니 “당신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했다. 김 전 대통령이 나같이 부족한 사람을 불렀는데 부귀영화를 위해 김 전 대통령의 요청을 거절하는 것은 비서로서의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김 전 대통령에게 조그마한 보탬이 돼야겠다고 결심했다.
새벽 6시 반에 전화를 해서 “하겠습니다”했다. “고마워”하셨다. 전화를 끊고 많이 울었다.

- DJ가 한 일 중 가장 가슴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 김 전 대통령이 역사에서 평가받을 만한 일은 6·15 선언을 이끌어 냈다는 것이다. 평양에 가시기 전 이회창 총재와 김 전 대통령이 영수회담을 가졌다. 사전 합의문을 조율하고 영수회담 후에 발표했다.
합의문을 조율하기 위해 한나라당에서 이완구, 김형오 등 7~8명이 나왔고 민주당에서도 나갔다.
합의 마지막까지 “남북문제는 김대중 정부가 ‘상호주의’로 해나가기로 한다”는 내용이 문제가 됐다. 상호주의란 한 가지를 주면 한 가지를 얻어야 한다는 것인데 김 전 대통령은 남북문제는 이러한 관점으로는 해결이 힘들다고 봤다.
그래서 “이 조항을 빼자”고 했더니 한나라당에서 “그럼 영수회담은 없다”고 하더라. 나흘을 밀고 당기기를 했다. 결국 ‘전략적 상호주의’를 넣고 합의했다. 김 전 대통령은 매우 실망했지만 한나라당에서는 ‘전략적’이라는 말을 넣었다고 난리가 났다.

- DJ가 한 일 중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일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 최근 존 포드 감독에 의해 영화화 된 존스타인 벡의 <분노의 포도>를 봤다. 대공황 시절을 담고 있는데 경제가 무너지면 국민들의 삶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도 이 같은 시절이 있었다. IMF 외환위기다. 그러나 정부는 국민들에게 IMF 외환위기의 절박한 내용을 제대로 알리지 못했다.
대중에게는 ‘금 모으기 운동’이라는 국민들의 비장한 결단이 나라를 살렸다고, 위대한 국민이라고 했다. 하지만 금 224톤을 판돈은 20억 달러에 불과했다. 국민을 속여도 유분수지 그 돈 가지고는 해결할 수 없는 사태였다.
김 전 대통령의 명성을 들은 세계은행(IBRD)에서 “지구상에 김대중, 만델라, 하벨이라는 위대한 인물이 있는데 김대중이 대통령이 됐으니 도와주자”고 했다. 50억 달러를 5년 분할해서 주기로 했는데 한 번에 줬다. 미국도 도와주겠다던 7억 달러의 배인 14억 달러를 줬다. 일본에서는 단기 채권을 2년간 유예했다. 결국 서울대에서 10년 만에 극복하면 천운이라고 한 IMF를 2년 반 만에 극복했다.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당정 충돌’ 검찰개혁 엇박자 막전막후

‘당정 충돌’ 검찰개혁 엇박자 막전막후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추석 연휴 전에 검찰개혁을 진행하려던 더불어민주당이 신중한 입장에 들어갔다. 검찰개혁 초안을 발표하려던 당의 의견에, 주체이자 객체인 법무부의 수장 정성호 장관이 다른 의견을 내면서다. 정 장관의 의견에 대해 여권 관계자들은 공개적으로 비판까지 했다. 당정 간 불협화음으로 검찰개혁이 무너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도 나왔다. 당 지도부와 정부는 뒷수습에 나섰지만, 완전히 진화될지 관심이 모인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에서 계속 강조해 온 ‘검찰개혁’이 가시권에 들어왔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의 공언대로 ‘추석 전 검찰개혁 입법 마무리’를 목표로 속도전에 돌입한 가운데 친명(친 이재명)계 좌장인 정성호 법무부 장관이 민주당 지도부와 결이 다른 의견을 연일 내놓으며 당정 간 불협화음이 나타났다. 속도전 앞두고… 민주당 국민주권 검찰 정상화 특별위원회는 지난달 26일, 회의를 열고 검찰개혁의 대원칙인 수사권·기소권 분리 내용을 담은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확정할 방침이었다. 민주당은 이번 개정안으로 수사권·기소권의 분리 대원칙을 실현하기 위해 검찰청을 폐지한다. 그리고 기존 검찰의 수사권과 기소권을 분리·이관하기 위해 공소청과 중대범죄수사청(중수청)을 설치할 예정이다. 공소청은 기존 검찰의 기소권을 이관받아 기소와 공소 유지, 영장 발부 등 검찰의 고유 업무를 도맡는다. 중수청의 경우, 검찰의 수사 대상이었던 6대 범죄(부패·경제·공직자·선거·방위사업·대형참사)의 수사를 담당한다. 이 외에도 국수위 설치 여부도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국수위는 국무총리 산하 기관으로 경찰을 비롯해 중수청,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등 국가 수사 기관 전체를 통솔하는 시스템이다. 이번 검찰 조직 재편으로 수사 기능을 갖게 될 중수청을 행정안전부와 법무부 중 어느 소속으로 할지 등의 쟁점 현안들도 정리돼 개정안에 담길 것으로 보인다. 현재 검찰을 제외한 수사기관은 경찰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가 있다. 이들은 각각 행안부와 대통령 직속기관으로 소속돼있다. 이 같은 초안에 대해 당 안팎에선 우려를 제기했다. 특히 국수위의 권한이 자칫 과도해지면, 정부의 수사 통제와 외압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또 앞서 밝힌 것처럼 행안부 산하에 이미 경찰이라는 수사기관이 있는 상황에서 중수청까지 포함될 경우, 행안부의 수사 기능이 자칫 과도하게 커지는 것도 우려되는 지점이다. 공소청의 보완수사권에 대한 당과 정부의 이견도 걸림돌이다. 당은 수사와 기소 분리 대원칙 측면에서 공소청에 보완수사권을 부여할 수 없다는 입장이지만, 법무부는 경찰이 수사종결권을 가진 상황에서 원활한 사건 처리를 위해서는 공소청에 보완수사권 부여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26일 초안 발표 예정이었지만 구체안 두고 특위·법무부 입장 차 지난달 25일 민주당 검찰정상화특위는 국회 의원회관에서 비공개 회의를 열었지만 최종안을 내지 않았다. 민형배 특위위원장은 지난 7일 비공개 당정대 협의 후 기자들과 만나 “속도 조절론은 없다”며 이날 회의를 최종안 확정을 위한 데드라인으로 예고했지만, 180도 달라졌다. 대신 이날 회의는 법안의 완결성에 집중했다고 한다. 특위 간사인 이용우 의원은 "초안이 사실상 나왔다고 보면 된다"면서도 "그야말로 특위안이고, 당정대 간의 논의 과정이라든지 국민적 공론화를 해 나가는 과정이라든지 이 과정이 여전히 많이 남아서 최종적으로 가다듬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민주당의 속도조절 배경에는 개혁의 주체이자 객체인 법무부의 입장이 있던 것으로 분석된다. 지난 25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민주당 송기헌 의원은 정 장관에게 ‘검찰개혁의 핵심이 수사와 기소의 분리냐’고 물었다. 이에 정 장관은 “그렇다”면서 “검찰이 수사를 개시하거나 인지해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권한은 분리해낸다는 게 1차적인 목표”라고 답했다. 다만 정 장관은 “현재는 (검찰이) 보완수사 요구 또는 재수사를 할 수 있는데, (사건이) 핑퐁처럼 왔다 갔다 하다가 과거보다 사건 처리 기간이 2배 이상 늘었다”며 “이런 문제가 심화할 가능성이 있어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사건) 전건 송치를 할 것인지, 전건 송치를 하지 않는다면 수사지휘권을 줄 것인지, 송치된 사건에 대한 보완 수사 범위를 어느 정도로 할 것인지 복합적으로 고려해야 할 문제”라고 부연했다. 정 장관은 민주당이 중수청을 행안부 산하에 두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도 사실상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그는 “경찰·국가수사본부·공수처·중대범죄수사청 4개 수사기관이 모두 행안부 밑에 들어가면 권한이 집중된다”고 우려했다. 또 기존 검찰청을 공소청으로 바꾸는 것에 대해서도 “검찰은 헌법상 검찰총장 임명 관련 규정들과 검사 관련 규정들도 있기 때문에 위헌 문제를 제기하는 분들도 있다”고 설명했다. 정 장관의 다른 의견 국수위에 대해서는 “지금 나와 있는 안에 의하면 국수위가 경찰의 불송치 사건에 대한 이행을 담당하게 돼있는데 최근 통계에 4만건 이상 된다”며 “독립된 행정위원회가 4만건 이상 사건을 다룬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지난 26일 예결위 전체회의에서도 국민의힘 정점식 의원이 ‘검찰 조직을 폐지하는 것이 적절하냐’고 묻자 정 장관은 “검찰을 해체한다고 표현하지만 저는 검찰이 수행해오던 기능을 재분배하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답했다. 그는 검찰의 보완수사권 폐지에 대해 “민주당의 당론은 아직 아니”라며 “1차 수사기관, 특히 경찰의 부실·봐주기 수사를 보완할 제도적 장치는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정 의원이 ‘검찰청 폐지로 검찰의 전문 수사 역량이 약화될 우려가 있다’는 취지로 질문하자 정 장관은 “굉장히 중요한 과제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특히 주가조작 등 자본시장을 교란하는 금융 범죄 또는 조세 사건은 굉장히 난이도가 높아 고도의 수사 기법이 필요하고 법리적 쟁점들이 많다”며 “이런 전문 수사 역량을 중수청에 어떻게 이어갈지 고민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정 장관은 회의 당일 페이스북을 통해 “검찰의 수사개시권과 인지수사권은 완전히 배제돼야 한다”면서도 “국민의 기본권을 지키고 범죄로부터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검찰개혁의 본질은 잊지 말아야 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이견설 진상은? 그러면서 “수사기관과 공소기관 사이의 ‘핑퐁’ 등 책임 떠넘기기, 수사 지연, 부실 수사로 인해 국민이 피해를 입는 일이 없도록 현실적이고 촘촘한 제도 설계가 필요하다”며 “개혁은 구호가 아니라 현실에서 작동할 때 비로소 성공한다”고 소신을 밝히기도 했다. 정 장관의 발언 이후 당 안팎에서는 정 장관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목소리를 냈다. 민주당 검찰개혁 특위 위원장인 민형배 의원은 지난달 27일 국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검찰 보완수사권 전면 폐지를 재논의해야 한다는 정 장관의 입장에 관한 질문에 “당 지도부는 장관께서 좀 너무 나가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민 의원은 “특위안에는 그런 내용이 없고, 당정에서 합의됐거나 의논해서 한 건 아니”라며 “법무부 장관이 개인적 의견을 말씀한 것 같다”고 언급했다. 정 장관이 행안부 산하 중수청 설치 방안에 우려를 밝힌 데 대해서도 “당에서 입장을 내지 않았는데 그렇게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 장관 본분에 충실한 건가, 이런 우려가 좀 있다”면서 “(장관이) 저희 특위 초안을 모르는 상태 같다”고 지적했다. 당 지도부의 의견을 내세워 정 장관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한 것이다. 이른바 ‘검찰개혁 4법’을 발의하고 관련 논의를 주도해 온 김용민 의원 역시 이날 페이스북에서 “바꾼다고 모든 것이 개혁은 아니다”라며 “개혁을 왜 하려고 하는지 출발점을 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지도부·정부 나서 진화 “당 결정대로 따라갈 것” 민주당과 정 장관의 의견이 갈리면서 ‘당정이견’설이 분출한 가운데, 당 지도부가 진화에 나섰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는 28일 오후 인천 파라다이스시티 호텔에서 열린 국회의원 워크숍 지도부 인사말에서 “개혁의 작업은 한 치의 오차·흔들림·불협화음 없이 우리가 완수해야 할 시대적 과제”라며 “이 과정에서 당정대는 원팀 원보이스로 굳게 단결해서 함께 나아가야 할 것”이라고 말해 눈길을 끌었다. 김병기 원내대표도 “국민주권정부의 실질적 성과는 당정대 원팀 정신이 그 중심에 있다”며 “다음 주부터 우리 이재명정부 출범 이후 첫 정기국회가 시작된다. 이재명정부 국정 기조와 국정 과제의 실천을 (당이) 더 확실하게 뒷받침해야 한다”고 당정 일치 기조를 강조했다. 정부와 대통령실에서도 수습·진화에 나섰다. 이날 워크숍 현장에 방문한 정 법무부 장관은 기자들과 만나 “이견은 없다”며 “어쨌든 입법의 주도권은 정부가 아니라 당이 갖고 있다. 당에서 잘 결정되는 대로 잘 논의해서 따라갈 것”이라고 한발 물러났다. 우상호 대통령실 정무수석도 당과 법무부 사이 이견에 대해 “자연스러운 과정”이라며 “대통령과 여당 지도부 만찬에서 전체적인 로드맵을 합의했다. 정부와 당이 각자 검찰개혁안에 대한 여러 가지 각론에 대한 의견들을 제기하기도 하고 수렴하기도 하는 과정을 거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우 수석은 “당과 정부의 의견만 다른 게 아니라 당 내부에도 다양한 의견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그런 각각의 의견들이 다 도출되는 과정이라고 본다. 말하자면 일종의 공론화 과정에 이제 들어간 것이다. 대통령실은 이 내용들을 지켜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우 수석은 “다만 바라건대 내용 자체의 토론에 좀 집중했으면 좋겠다”며 “특정인과 좀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사람에 대한 공격 같은 건 하지 말고 이렇게 내용 토론으로 좀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갖고 있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법조계 의견은? 한편 법조계에선 정 장관이 민주당과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은 평소 소신과 이재명 대통령의 의중이 반영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검사장 출신 한 법조인은 “정 장관은 외골수처럼 직진하기보다 남의 편을 설득하고 내 편을 혼내가면서 합의점을 찾는 정치를 해온 사람”이라면서 “강성 개혁에 집착하기보다는 국민의 삶에 도움이 되는 실용적인 변화를 추구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