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2팀] 함상범 기자 = 영화 <부산행>과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 시리즈는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도 통한 명작으로 불린다. 일명 K-좀비물이라고도 불릴 정도로 대다수 국적의 영화광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K-좀비물의 서막을 알린 인물이 <부산행>의 연상호 감독이다. 그리고 4년이 지났다. 한국의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다룬 연 감독의 신작 <반도>에 대한 관심이 국적과 무관하게 굉장히 뜨거웠다. 그 <반도>가 지난 9일 베일을 벗었다.
연상호 감독의 신작 <반도>를 향한 기대감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았다.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 <사이비> <창> 등 구조화된 폭력에 대한 문제의식과 인간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력을 보이기도 했고, 본인의 영역이 아닌 실사영화 <부산행>으로 국내에서 첫 시도된 좀비물을 성공시킨 그였기에, 영화계의 시선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아시아 구세주?
아울러 코로나19가 전 세계로 확산되며 국내뿐 아니라 대부분 국가의 영화계가 강추위에 떨고 있는 상황서, 구원투수처럼 등판하는 점도 관심의 농도를 높인 요소였다. 일각에선 ‘한국을 넘은 아시아의 구세주’라는 평가를 내놓을 정도였다.
감독의 재능뿐 아니라 강동원, 이정현, 이레, 권해효를 비롯해 구교환, 김민재 등 크고 작은 영화서 자기 몫을 충분히 하는 배우들이 출연하는 점도 이 영화의 기대치를 높였다.
그렇게 베일을 벗은 <반도>. 기대와 달리 영화는 볼거리만 충실한 ‘절반의 성공’에 그친다. 좀비를 때려잡는 시원함은 있지만, 연 감독의 장기인 밀도 높은 서사와 명확한 문제의식은 거세됐다. 전체적인 대사도 심심한 편이다. 장르물이 아닌 오락물에 더 가깝다.
<킹덤>의 좀비가 ‘정치권력의 해악서 비롯된 결과물’이라는 것처럼 좀비를 해석할 만한 기본적인 설정이 없다. 좀비는 그저 영화의 소재로만 사용된다. 작품성의 수준은 <부산행>보다는 <염력>으로 더 기울었다.
이 영화는 좀비가 출몰한 <부산행>의 세계로부터 약 4년이 지난 대한민국을 그린다. 모든 것이 폐허가 됐고, 인간이 살고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르는 흑암의 세상. 외국인들은 한국인을 보면 ‘좀비 아니냐’며 겁을 내거나 무시한다.
4년 전 홍콩으로 탈출한 정석(강동원 분)은 탈출 직전 배에서 누나와 조카를 잃었다. 매형(김도윤 분)만이 유일한 피붙이에 가깝다. 홍콩서의 삶도 절망적이다. 그때 홍콩의 폭력배로부터 제안을 받는다.
허술한 서사
짙어진 신파
사라진 의식
반도에 2000만달러(약 250억원)가 있는 트럭이 오목교에 있는데, 이를 갖고 돌아오라는 것. 돌아오면 약 250만달러를 주겠다는 약속을 받는다.
정석은 이 제안이 영 내키지 않지만, 매형은 팔자 고치겠다면서 좀비가 집어삼킨 반도에 갈 생각을 한다. 어쩔 수 없이 따라나선 정석과 그 일행은 2000만달러가 있는 차를 발견한다. 인천항으로만 돌아가면 되는 순간, 어디선가 조명탄이 날아오고, 상상할 수 없는 숫자의 좀비 떼가 이들을 덮친다. 정석 일행을 위기에 빠뜨린 자들은 반도를 탈출하지 못한 613부대로 탈출에 실패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다 미쳐버린 자들의 집합체다.
정석과 그 일행은 이 위기를 극복하고 살아날 수 있을까.
앞서 연상호 감독은 <반도>를 만들 때 참고한 영화로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를 꼽았다. 국내서도 엄청난 화제를 모은 이 작품은 비교적 단순한 서사지만, 실제보다 더 현실적이고 충격적인 카체이싱 장면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쳤다.
<반도> 역시 <매드맥스:분노의 도로>와 궤를 같이 한다. 일직선의 서사를 바탕으로 무려 23분의 카체이싱으로 영화를 채운다. 다만 그 시도가 답습에 그친다.
수많은 좀비 떼를 엄청난 스피드의 차로 날려버리며 쫓고 쫓기는 레이싱 장면은 분명 볼거리다. 매우 빠르게 느껴지는 속도감이 흥미진진하다. 쉽게 눈을 뗄 수 없는 강력한 힘이 있다. 다만 이 카체이싱이 이야기와 밀접하지 않고, 따로 논다는 게 흠이다. 카체이싱을 보여주기 위해 이야기를 끼워 넣은 느낌이다.
최근 드라마 <방법>과 웹툰 <지옥>을 집필한 바 있는 연 감독의 장기는 기발한 상상력을 현실적으로 풀어내는 것이다. 그 가운데서 타락한 본능과 성숙한 이성의 충돌을 예리하게 드러내고, 혐오와 분노, 각종 폭력 등의 사회 문제를 날카롭게 꼬집었다. 전작에서 그 다재다능함을 증명한 그다.
예술성 대신 카체이싱만
적당한 오락물에 그쳐
연 감독은 어째서인지 <반도>서 자신의 장기를 쓰지 않는다.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는 상황에 매형을 구하러 가는 정석,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위를 일삼는 613부대의 인간들과 아이러니한 그들만의 질서, 민정(이정현 분)의 가족들이 4년간 생존한 스토리 등 여러 부분서 뭉뚱그리고 넘어가는 설정이 너무 많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물 대다수가 파괴된 인간성을 명확히 설명하지 않는다는 측면이 있다 하더라도, 너무 많은 부분에서 개연성이 낮다. 딱히 문제의식도 보이지 않으며, 인간의 본질을 잡아내는 통찰도 없다. 대중성만을 의식한 결말은 눈을 뜨고 보기 어렵다.
<부산행>서도 많은 비판을 받았던 신파적인 요소는 더 짙어졌다. <부산행>이 촌스러운 신파를 다소간 첨가한 것이라면, <반도>는 올드한 느낌을 강하게 풍긴다. 스크린의 인물들은 슬픔이 가득한데, 관객은 덤덤하다. ‘울려버리겠다’는 속내가 너무 드러나, 도무지 슬프지 않다.
엉성한 이야기 속에서도 빛나는 건 배우들이다. 특히 서 대위 역의 구교환이 빛난다. <반도>의 가장 큰 수혜자는 구교환이 될 것이다.
이정현은 안정감이 있고, 이레는 강렬하다. 이야기의 화자인 정석 역의 강동원은 멋있기는 하나, 감정선서 다소 갸우뚱하게 되는 부분이 있어 조금의 아쉬움이 남는다. 할아버지 역의 권해효는 연기력은 좋았으나, 인물 자체가 장치적으로만 활용된 것 같아 빛을 보기엔 어려울 것 같다. 그럼에도 매력이 뚜렷한 배우들이 부족한 서사를 많이 메웠다고 볼 수 있다.
이름값 못하다
연상호라는 이름값에 뒤따르는 기대감만큼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기존 한국 영화에서는 보기 힘든 매력적인 장면이 많다. 특히 눈을 사로잡는 좀비들의 파괴력은 더욱 진화했으며, 좀비를 이용한 카체이싱은 분명 이 영화만이 갖고 있는 신선함이다. 영화를 오락으로 여기는 관객들에겐 2시간을 죽이기엔 안성맞춤인 영화일 수 있다. 반대로 연상호의 성공작을 기대한 관객들에겐 씁쓸한 뒷맛으로 남지 않을까 예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