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정치팀] 김명일 기자 = 정치권에서 비리스캔들이 불거질 때마다 그 중심에는 언제나 정치사조직이 있었다. 가장 최근에는 이른바 ‘성완종 게이트’로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든 성완종 전 의원의 ‘충청포럼’이 비리스캔들의 중심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정치권 사조직의 민낯을 <일요시사>가 제대로 살펴봤다.
우리나라에서 정치사조직이 본격 등장한 것은 1987년 직선제 개헌 이후다. 이전에도 육사출신 모임인 ‘하나회’ 등이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선거지원을 위한 성격인 현재의 정치사조직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1987년 치러진 대선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은 ‘태림회’와 ‘월계수회’를 앞세워 당선됐다. 태림회는 노 전 대통령의 동생 노재우씨가 주도한 외곽단체로 조직원이 전국적으로 60만명에 달했다.
비리스캔들의 온상
또 ‘대선에서 승리해 월계관을 쓰자’는 뜻으로 만든 월계수회의 리더 박철언 전 장관은 노 전 대통령이 대선에서 승리한 후 이른바 ‘6공 황태자’로 불리며 막강한 권력을 누렸다. 이때부터 정치사조직들은 정권이 출범할 때마다 각종 인사와 이권에 개입하는 등 국정을 농단하다 정권 말기에는 줄줄이 쇠고랑을 차는 불행한 역사를 반복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김영삼 전 대통령 시절에는 사조직 민주산악회(민산)와 나라사랑운동본부(나사본)가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민산은 제5공화국 헌법부칙에 따라 기존 정당들이 해산된 이후 김 전 대통령이 80년대에 만든 사조직이다. 김 전 대통령은 민산을 통해 정치활동에 제약을 받고 있던 야권인사들과 연대를 모색했다. 또 1992년 대선을 앞두고는 김 전 대통령의 아들 현철씨가 나사본을 만들어 대선 승리에 크게 일조했는데, 나사본을 이끌던 현철씨는 정권 말 각종 비리사건에 연루돼 결국 구속됐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정치사조직에 의지했다. 김 전 대통령의 장남 홍일씨가 만든 새시대새정치연합청년회(연청)는 김대중정부 시절 소속 인사들이 공공기관장 등에 대거 진출하고 인사청탁 의혹까지 불거지면서 야당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대선승리에 결정적 기여를 했던 ‘안국포럼’과 ‘영포회’도 마찬가지였다. 안국포럼과 영포회에 참여했던 이들은 이명박정부 시절 각종 비리 의혹에 휘말렸고 심지어 양측이 권력쟁탈전까지 벌였다.
꼭 대선주자급이 아니더라도 정치인들이 만든 정치사조직은 번번이 문제를 일으켰다. 지난해에는 ‘오봉회’라는 정치사조직이 화제에 올랐다. 서울종합예술실용학교 김민성 이사장과 새정치연합 신계륜, 김재윤 의원 등이 뭉쳐 만들었다는 오봉회는 입법로비와 금품수수 의혹에 휘말렸다. 또 일명 ‘해피아’ 비리에 연루된 새누리당 박상은 의원도 사조직 ‘바다와 경제포럼’을 입법로비 창구로 이용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순수 모임? 결국엔 정치로비로 귀결
감시 사각지대 “이제라도 감시해야”
가장 최근에는 이른바 성완종 게이트로 온 나라를 뒤흔든 성완종 전 의원이 만든 ‘충청포럼’이 비리스캔들의 중심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성 전 의원이 지난 2000년 결성한 충청포럼은 당초 충청지역 지식인들의 학술회 성격으로 정기적인 회동과 연찬을 통해 공통의 관심사를 놓고 토론하고 정보를 교환하며 향우로서의 인간적 유대를 강화하는 목적의 단체로 출발했다. 하지만 검찰 수사가 진행될수록 충청포럼이 사실상 성 전 의원의 로비창구로 이용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이후부터는 정치사조직이 팬클럽 형태로도 진화했다. 정치인이 자비를 들여 운용하는 사조직과는 달리 팬클럽은 각종 선거관련법 제약으로부터 자유롭고, 확장성도 커 정치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사조직 형태다.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박사모(박근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완사모(이완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팬클럽은 정치권에서 인지도가 높지 않으면 자발적으로 만들어지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때문에 몇몇 정치인들은 선거철이 다가오면 자비를 들여 팬클럽 유사조직을 몰래 만들다가 적발되기도 한다.
정치인 팬클럽 또한 잡음이 적지 않았다.
노혜경 전 노사모 대표는 민주당 공천비리와 연루된 정황이 포착돼 곤욕을 치렀고, 가장 최근에는 완사모의 이모 자문위원장이 성완종 게이트 수사 과정에서 회삿돈을 횡령한 혐의로 구속됐다. 검찰은 이 돈이 이완구 전 국무총리에게 흘러들어간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또 초창기 정치인 팬클럽은 후보를 후방에서 응원하는 것에 그치는 수준이었지만 최근 들어서는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는 정치사조직으로 변모하고 있다. 특히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하는 박사모의 경우 박사모 임원단의 영향력이 웬만한 국회의원보다 크다는 분석까지 나올 정도다.
실제로 박사모는 지난 18대 총선에서 친박(친박근혜) 인사들을 대거 공천에서 탈락시켜 이른바 ‘친박 공천학살’을 주도한 이방호 당시 사무총장에 대한 낙선운동을 전개해 이 총장을 새누리당의 텃밭에서 끝내 낙선시키는 이변을 연출했다.
박사모 역시 잡음이 끊이질 않는다. 박사모 정광용 회장의 경우에는 온갖 비리 의혹에 휘말리기도 했다. 급기야 정 회장은 박사모 회원들로부터 사기와 횡령 혐의로 고소를 당했다. 게다가 각종 당내 선거가 있을 때면 박사모 회원들이 특정후보를 지지하는 방식 등으로 이권에 개입했다.
박사모는 지금도 각종 당내 문제에 목소리를 내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 같은 논란을 의식해서인지 박사모는 박 대통령의 대선 승리 이후 박사모의 존폐 여부를 놓고 회원들의 의견을 수렴하기도 했다. 하지만 회원들의 투표결과 박사모는 압도적인 표차이로 존립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그렇다면 왜 정치 사조직은 로비 창구로 변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은 성완종 전 의원의 자서전 내용을 통해 살짝 엿볼 수 있다.
인맥정치의 한계
성 전 회장은 자신의 자서전을 통해 “사람을 만날 때 이해관계를 먼저 따지는 것은 바보짓”이라며 “사심없이 만나다보면 언젠가는 자기도 모르게 그 관계 속에서 도움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고 했다. 사조직에서 활동하면서 언젠가 범법을 저지르겠다고 다짐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사조직에서 활동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남을 돕게 되고 그 과정에서 범법을 저지르게 된다는 것이다.
정치전문가들은 “아직도 정치권에는 친분이나 인맥으로 인사를 하는 경향이 남아있어 실력보다는 줄서기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럴수록 정치인들은 사조직에 의지할 수밖에 없고 부패 가능성도 크다”며 “사적인 영역이라는 이유로 감시 사각지대에 있는 사조직에 대해 감시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