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벼락 떨어진 듯 다가온 사고라기엔 징조가 뚜렷했다. 피해자는 불안을 호소하면서도 일상을 영위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결과는 죽음이었다. 반복되는 죽음을 막을 수 있도록 법망을 촘촘하게 만들어달라는 요구가 빗발쳤지만 감감무소식이다.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이 죽어야 하느냐는 목소리가 들린다.
지난 14일 경기 남양주에서 20대 여성이 40대 남성의 칼에 찔려 사망한 사건이 일어났다. 가해자는 피해자의 출근 동선을 파악해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범죄를 저질렀다.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스토킹을 당하고 있던 것으로 파악됐다. 가해자는 10개월 전 피해자를 칼로 위협해 접근금지 명령을 받았지만 스토킹을 멈추지 않았다.
정쟁에 밀려
가해자는 범행을 저지르기에 앞서 피해자의 직장 주변을 살피면서 계획을 세운 것으로 드러났다. 범행 당일 그는 외길에서 피해자의 차량을 가로막고 사전에 준비한 전동드릴로 차창을 깬 뒤 흉기로 살해했다. 이후 가해자는 약물을 복용했지만 병원 치료를 받은 뒤 상태가 호전돼 조사를 받았다.
과거 성범죄 이력으로 전자발찌를 착용하고 있던 가해자는 가정폭력처벌법상 임시조치 2·3호와 스토킹 처벌법상 잠정조치 1·2·3호 적용 대상자로 피해자에게 연락하거나 주거지와 직장 100m 이내 접근이 금지된 상태였다. 피해자는 올해 들어서만 다섯 차례나 가해자를 경찰에 신고했다.
또 사건 발생 2분 전 경찰에 구조 요청이 전달되는 스마트워치를 눌렀지만 끝내 숨졌다.
스토킹 피해를 호소하던 여성이 길 한복판에서 살해되는 사건이 또다시 일어나면서 경찰의 대응이 도마 위에 올랐다. 피해자가 여러 차례에 걸쳐 경찰에 SOS 신호를 보냈음에도 사건을 막지 못하면서 부실 대응 논란이 불거진 것이다. 가해자는 전자발찌를 찼고 피해자는 스마트워치가 있었어도 모두 무용지물이었다.
지난 16일 이규연 홍보소통수석은 청와대 춘추관에서 브리핑을 진행하고 남양주 스토킹 살해 사건에 대한 이재명 대통령의 지시를 전달했다.
이 수석은 “이 대통령은 관계 당국의 대응이 더뎠고 국민의 눈높이에 한참 못 미쳤음을 엄하게 질타했다”며 “희생자를 애도하고 유가족에게 심심한 유감을 전하면서 이번 사태에 책임이 있는 관계자들을 감찰한 뒤 엄하게 조치하라고 지시했다”고 밝혔다. 이어 “이번 사건은 스토킹 범죄에 대한 우리 사회의 방지 대책이 미흡함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덧붙였다.
이 대통령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가해자를 피해자로부터 적극적으로 격리하고 가해자의 위치 정보를 신속히 파악하며 전자발찌와 스마트워치를 연동하는 등 스토킹 교제 폭력 범죄 피해자가 세심하게 보호받을 수 있도록 관련 조치를 신속히 추진하라고 지시했다.
경찰은 감찰에 착수했다. 경찰청 감찰담당관실은 지난 16일 언론 공지를 통해 “(남양주 사건 관련) 경찰의 부실 대응에 대해 즉시 감찰 조사에 착수했다”며 “전반적인 사건 처리 과정을 신속하게 조사하고 그 결과에 따라 엄정하게 조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또 관계성 범죄에 대한 전수 점검에 나선다. 먼저 추가 피해를 막기 위해 경찰이 수사·관리 중인 스토킹 등 관계성 범죄 사건에 대해 경찰서장이 직접 전수조사한다. 경찰이 현재 수사 중인 관계성 범죄는 1만5000여건에 달한다. 이후 임시 조치·잠정 조치 등 보호조치 대상자, 최근 3개월간 2회 이상 신고 사건 등을 대상으로 전수조사를 이어간다는 계획이다.
제도 보완도 추진한다. 남양주 사건에서 스마트워치와 전자발찌 운영을 두고 경찰과 법무부의 실시간 정보 공유가 이뤄지지 않은 점이 문제로 떠올랐다. 경찰은 ▲실효적 가해자 격리 방안 ▲법무부와의 전자발찌 대상자 정보 공유 ▲전자발찌와 스마트워치 연동 등 이번에 제기된 문제를 망라해 보완책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수차례 신고했지만…
사건 때만 반짝 관심
유재성 경찰청장 직무대행은 “가해자가 전자발찌 부착 대상자로 재범 위험성이 높았음에도 가해자를 피해자로부터 격리하는 등 경찰 대응이 부족했다”고 인정했다. 그러면서 희생자와 유가족에게 진심 어린 애도와 유감을 표한다고 말했다.
경찰 지휘부를 향해서는 “관계성 범죄 피해자들이 추가 범죄를 당하지 않도록 보호하는 일은 경찰의 핵심 책무”라며 “법과 제도가 허용하는 틀 안에서 최대한으로 조치하라”고 주문했다.
일각에서는 사건이 일어날 때만 ‘반짝 관심’에 그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법안 등으로 피해자를 보호할 수 있는 틀을 만들어야 하는데 논의만 이뤄질 뿐 실현까지는 갈 길이 멀다는 것이다. 또 현재 시행되고 있는 제도의 허점을 법안 등으로 메워야 하는데 그 속도가 너무 느리다는 목소리도 있다.
그사이 누군가는 또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권칠승 의원이 경찰청으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스토킹 관련 112 신고는 2024년 3만1974건에서 지난해 4만4687건으로 1년 새 약 40% 늘었다. 또 경찰이 스토킹 재범 위험이 크다고 판단해 법원에 전자장치 부착을 요청한 건수도 2024년 325건에서 지난해 862건으로 3배 가까이 증가했다.
하지만 실제 법원이 전자장치 부착을 결정한 비율은 2024년 32.6%에서 지난해 36.9%로 30%대에 머물고 있다. 전자장치 부착 이후 접근 금지를 위반하거나 장치를 훼손 또는 이탈하는 등의 위험 사례도 2024년 9402건에서 지난해 4만8426건으로 5배나 늘었다.
권 의원은 “전자장치 부착만으로 스토킹 범죄를 예방할 수 있다는 단순한 접근으로는 피해자 보호에 한계가 있다”며 “신고와 위험 경보가 빠르게 늘고 있는 만큼 제도의 실효성을 다시 점검하고 피해자 중심의 보호 체계를 강화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전자장치 제도가 실제 안전장치로 기능하려면 관리 인력과 현장 대응 체계를 함께 보완해야 한다”며 “특히 신고가 집중되는 수도권에서 선제적인 피해자 보호 조치가 강화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2024년 5월, 22대 국회 개원 이후 발의된 스토킹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스토킹 처벌법) 개정안은 32건에 이른다. 이 중 15건은 지난해 7월 울산과 경기 의정부, 대전 등에서 연이어 발생한 스토킹 사건 이후 제출됐지만 반년 넘게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심사 단계에 머물러 있다.
검찰개혁, 사법개혁 등 소위 말하는 굵직한 이슈에 밀려 스토킹 처벌법은 뒷전에 됐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2021년 처음 시행된 스토킹 처벌법은 신생 법안인 만큼 보완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기됐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식의 뒷북 대응이 계속되면서 방지책을 만들어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된 개정안이 우후죽순처럼 발의됐다.
민생 뒷전?
그럼에도 실제 법안이 통과돼 실시된 사례가 없어 국회의 직무 유기라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스토킹 처벌법이 누구든 피해자가 될 수 있는 현 상황에서 꼭 필요한 민생 법안임에도 정쟁에 밀려 표류하는 사이 피해자는 순식간에 다가온 죽음의 기운을 피하지 못했다. 살인을 저지른 건 가해자지만 막지 못한 건 국회일 수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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