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대응 못하는 ‘관계성 범죄’, 왜?

아는 사람이 더 무섭다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연인, 친구, 가족. 한 사람의 삶을 구성하는 관계다. 하지만 이 같은 관계를 통해 범죄를 경험하는 문제가 사회적으로 계속 나타나고 있다. 이른바 관계성 범죄는 계속 늘어나고 있지만, 경찰의 현장 대응이나 후속 조치는 과거에 머물러 있다는 비판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경찰은 이에 대한 대응을 계속 주문하고 있지만, 현장에서는 관련 법을 통한 처벌이 먼저 나와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가정폭력, 교제폭력, 스토킹 등 평소 친밀한 관계에서 일어나는 범죄가 극성이다. 학계에서는 이런 범죄를 ‘관계성 범죄’라고 부른다. 이 같은 관계성 범죄에 대응해 특례법 제정 등을 통해 피해자 보호조치를 마련하고 경찰은 이를 집행하고 있지만, 현장에선 실무적인 문제나 관련 법 제정이 미비해 제대로 된 피해자 보호조치가 불가능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친밀한 관계
느는 범죄들

경찰청에 따르면 가정폭력 112신고는 2021년 21만8680건에서 2024년 23만6647건으로 증가했다. 같은 기간 아동학대는 2만6048건에서 2만9735건, 스토킹은 1만4509건에서 3만1947건, 교제폭력은 5만7305건에서 8만8394건으로 크게 늘었다.

이에 따른 피해자 보호조치도 함께 증가했다. 2023년 가정폭력 보호조치는 1만3691건에서 2024년 1만6881건으로 늘었고 아동학대에 대한 긴급 임시·임시 조치는 같은 기간 8864건에서 1만468건으로 증가했다. 스토킹 피해자에 대한 긴급응급·잠정조치도 1만4176건에서 1만6337건으로 늘었다.

하지만 관계성 보복 범죄를 막긴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실제로 최근 불구속 상태로 수사받던 스토킹 범죄 가해자가 피해자를 살해하는 충격적인 사건들이 다수 발생했다. 지난 10일, 대구 달서구에서 스토킹 범죄 신고로 경찰의 신변 안전조치를 받고 있던 50대 여성이 흉기에 찔려 숨졌다. 지난달 12일에는 경기 동탄에서 스토킹 범죄 관련 안전조치를 받던 30대 여성이 납치·살해됐다.

가정폭력의 경우는 더 심각하다. 지난달 19일 인천 부평구 한 오피스텔에서는 60대 남성이 아내를 흉기로 수차례 찔러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지난해 말 가정폭력으로 100m 이내 접근금지와 연락 제한 등 임시조치를 명령받았고 접근금지 조치가 종료되자 일주일 만에 아내를 살해했다.

이 같은 관계성 범죄의 보복 범죄는 법이 얼마나 피해자 보호에 동떨어져 설계돼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그러면서 관계성 범죄가 살인 등 강력범죄로 뻗어나가는 비극의 고리를 끊으려면 재범 위험이 큰 가해자를 사회로부터 격리할 강력한 제재 방안을 도입해야 한다는 지적의 목소리가 나온다.

유한별 법률사무소 내곁애 변호사는 “가해자가 접근금지 명령 등의 긴급 임시 조치를 위반할 경우 형사처벌이 가능하도록 법령을 개정해야 한다”며 “과태료 부과 수준에 그치는 지금의 처벌 수위는 피해자를 지키기엔 실효성이 떨어진다”고 지적했다.

‘강압적 통제’ 개념을 법률에 넣어 신고 상황에서 물리적 폭행이 없더라도 피해자 상태를 면밀히 관찰하는 한편, 가해자를 적극적으로 격리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강압적 통제는 친밀 관계의 피해자가 가해자에 의해 완전히 압도·장악된 상태를 뜻한다.

지난해 약 38만6000건 신고
현장 출동해도 속수무책

허민숙 국회 입법조사관은 “신체 폭력 없이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상태인 통제 상황이야말로 극도의 위험 증거기 때문에, 이 개념을 도입해 관리할 필요가 있다”며 “스토킹처벌법에 근거가 있는 GPS 전자장치를 가정폭력 가해자에게도 부착시켜 접근을 원천 금지토록 하는 방안을 도입하고, 위험군에 대한 ‘의무체포’ 논의도 이제 진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일련의 가정폭력처벌법 개선 과제 전반은 법률 보호 대상을 혼인·동거 관계가 아닌 친밀 관계로 넓히는 것을 전제해야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제언한다.

유 변호사는 “혼인 등 관계 이상으로 친밀성이 확장된 지금 시기에 젠더 폭력 문제를 대응하기엔 법적으로 한계가 있어 보호 범주를 확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허 조사관은 “교제폭력 피해자도 가정폭력처벌법 범주 안에서 보호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수사기관의 현장 대응 혼란을 줄이기 위해서도 일원화된 체계로의 변화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경찰 내부에서는 신고가 들어와도 강제로 체포할 수 없다는 의견이 나온다. 부산경찰직장협의회 대표 정학섭 경감은 “관계성 범죄(가정폭력)에 대한 112신고가 접수되면 지역 경찰관들이 가정폭력방지법에 따라 현장에 출동해 현장 조사를 하게 된다”며 “문제는 가정폭력 행위자가 경찰관의 현장조사를 거부하는 등 업무수행을 방해해도 처벌이 고작 500만원 이하 과태료에 불과하다 보니, 신고 현장에 출동한 경찰관이 업무를 보다 더 적극적으로 수행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현행 법률 규정을 살펴보면 가정폭력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 (이하 가정폭력방지법) 제9조의4(사법경찰관리의 현장출동 등) 사법경찰관리는 가정폭력 범죄의 신고가 접수된 때에는 지체없이 가정폭력의 현장에 출동해야 한다.

하지만 가정폭력 행위자가 해당 현장 조사를 거부해도 500만원 이하의 과태료만 부과될 뿐이다. 정 경감은 과태료는 벌금과 같은 것으로 행정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행정질서벌이라 경찰관이 현행범 체포 등 물리력을 행사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정 경감은 현장에 출동해 피해자에 대한 응급조치를 진행하지만 가정폭력 신고 현장에서 긴급 응급조치를 취할 수 있지만 이에 대한 실효성이 있는지에 대한 의문도 제기했다.

현장 조사
문제점?

현행법에 따르면 경찰은 관계성 범죄 중 가정폭력 신고 현장에서 긴급 응급조치를 취할 수 있다. 그 종류는 ▲가해자·피해자 분리 ▲현행범의 체포 수사 ▲피해자 상담소 등 장소로 인도 ▲폭력행위 재발 시 임시조치 신청 가능성 통보 ▲피해자 신변보호 요청 등이다.

응급조치에도 불구하고 가정폭력범죄가 재발될 우려가 있고 긴급을 요해 법원의 임시조치 결정을 받을 수 없을 때에는 경찰관의 직권 또는 피해자의 신청에 의해 긴급임시조치를 할 수 있다.

긴급 응급조치는 ▲가해자·피해자 격리 ▲가해자·피해자 100m 이내 접근 금지 ▲전기통신을 이용한 접근 금지 등이다.

문제는 임시조치 과정에서 체포된 가해자는 보통의 경우 가정폭력 사건은 경찰서 여성청소년과에서 수사를 진행한 후 가해자를 구속하지 않는 경우 석방, 귀가 조치하는데 경찰서 정문을 나가는 순간부터 가해자가 어떤 행위를 할지 아무도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여기서부터 피해자 보호에 대한 많은 문제점을 내포한다고 경찰 관계자들은 말한다.


이에 반해 검사의 청구에 의해 법원의 임시조치 결정을 받은 사람이 이를 위반한 경우,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 구류에 처하고 있다. 현장 경찰관들은 이에 따라서 경찰관이 피해자를 실질적, 효과적으로 보호하기 위해서는 긴급임시조치를 위반한 사람에 대해서는 형사처벌할 수 있도록 개정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놨다.

정 경감은 현행 경찰관이 피해자 안전을 위해 실시하는 안전조치 유형이 11가지가 있지만, 해당 제도만으로 피해자를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안전조치 유형은 ▲보호시설 연게 ▲임시숙소 제공 ▲특정 시설 신변 안전조치 ▲신변 경호 ▲맞춤형 순찰 ▲112 시스템 등록 ▲스마트워치 지급 ▲CCTV 설치 ▲가해자 경고 제도 ▲피해자 권고 제도 ▲신원 정보 변경 보호 제도 등이다.

그는 “가해자를 실질적으로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는 대책 마련이 필요하며 피해자 안전 조치도 중요하지만, 더욱 더 중요한 것은 가해자를 피해자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선제적 대응
가동하기로

또 현행 전자장치부착등에관한 법률에 따르면 성폭력 범죄자, 살인, 강도, 스토킹 범죄자 등에는 전자장치 부착을 법원에 청구할 수 있지만 가정폭력 사범에 대해서는 전자장치를 부착할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 점도 문제로 꼽았다.


경찰청에서도 이 같은 문제를 파악하고 있는 듯 유재성 경찰청 차장(경찰청장 직무대리)는 관계성 범죄에 대한 선제적 대응 체계를 본격 가동하기로 했다. 단순한 말다툼이라도 가정폭력이나 스토킹 가능성이 엿보이면 여성청소년·지구대 경찰이 동시에 출동하는 시스템을 마련해 보다 선제적이고 다층적인 현장 대응에 나선다는 방침이다.

경찰청은 최근 전국 지휘부 화상회의를 열고 관계성 범죄 피해자 보호를 위한 '단계별 대응 체계'와 ‘사건별 Case 관리 시스템’을 구축하기로 했다. 이는 지난달 12일 경기도 화성 동탄에서 신변 보호를 받던 여성이 전 연인에게 납치돼 살해당한 사건이 발생한 이후 마련된 대책이다.

해당 회의에선 112 신고가 접수될 경우 피해자와 가해자의 과거 이력이나 상담 기록이 확인되면 단순 말다툼이라도 가정폭력이나 스토킹으로 간주해 여청수사·지구대 경찰이 동시 출동하는 체계를 마련할 방침이다.

또 경찰청은 이 같은 현장 대응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관련 법 개정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현재 국회에서도 긴급 임시조치 위반 시 형사처벌을 가능하게 하는 내용을 담은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개정안이 발의된 상태다.

경찰청 관계자는 “스토킹과 가정폭력은 반복성과 예측 가능성을 지닌 범죄로, 강력한 현장 대응력이 필요하다”며 “가정폭력 처벌 수준 역시 기존 과태료에서 형사처벌로 상향하는 방향으로의 개정을 추진 중이다. 경찰 역시 이를 최우선 과제로 인식하고 전력을 다해 대응 중”이라고 말했다.

이미 일선 청에서는 관계성 범죄를 근절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관계성 범죄가 가장 많이 발생한 관악서에서는 지난 1월 “관계성 범죄의 살인 등 강력범죄 발전 가능성을 선제적으로 차단하고, 관계성 범죄의 경찰 신고를 활성화하기 위한 유관기관과의 협업, 범죄 예방·홍보 강화 등을 골자로 하는 ‘관계성 범죄 대응 강화 종합대책’을 시행했다”고 밝혔다.

경찰 내부망서도 토로
“관련 법 제정이 우선”

지난해 10월 기준 서울청 주요 112신고 순위를 보면 스토킹이 1위, 교제 폭력이 2위로 꼽혔다. 특히 관악구는 서울 25개 구 가운데 1인 여성 가구 비율이 29.4%로 가장 높고, 스토킹·교제폭력 등 관계성 범죄 신고가 많은 지역이다. 관악경찰서는 이런 지역 특성을 반영해 종합대책을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종합대책에 따라 관악경찰서는 관계성 범죄 112신고에 대해 적극 사건 처리하고 필요하면 구속 수사하는 등 엄정 대응한다는 방침이다. 가·피해자 분리, 임시 숙소 연계, 민간 경호 등 피해자 보호에도 집중하고 있다.

특히 피해자 신고가 쉽지 않고 반복·지속적인 관계성 범죄 특성을 고려해 112신고 이후 ‘처벌불원’ 등을 이유로 현장 종결한 사건에 대해서도 전수 피해자 모니터링을 통해 다시 한번 사건 처리 방식을 종합 판단한다. 친밀한 관계에 의한 범죄 통계가 제대로 정리되지 않는 상황인만큼, 관계성 범죄 112신고 종결 때엔 신고처리 내용에 ‘연인’ ‘부부’ 등 가·피해자 관계를 정확히 입력하도록 했다.

형사과 등 여성청소년과(여청과) 이외 수사 부서에서 관계성 범죄를 수사할 경우에는 여청과에 적극적으로 통보하도록 해 피해자가 모니터링 대상에서 누락되는 것을 방지하고 있다.

매일 아침 여청·수사·형사과 등 주요 당직 사건 처리 부서가 모여 실시하는 일일상황점검회의도 2차례 실시 중이다. 관계성 범죄신고 초동조치, 가·피해자 분리 등 각종 피해자 보호조치 사항을 중복 점검하기 위해서다. 아울러 관악구청·구의회·우체국 등 관내 유관기관들과 협업해 관계성 범죄 위험성을 적극적으로 알려 신고 활성화를 유도하고 있다.

이 외에 남양주남부경찰서, 경산경찰서, 사천경찰서 등 전국적으로 관계성 범죄와 관련해 전반적인 대응체계를 점검하는 회의를 개최하고 AI를 통해 범죄 분석을 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경찰청은 실질적인 피해자 보호를 위해 ‘민간 경호’도 전국적으로 도입했다. 경찰청은 지난 2023년 6월부터 ‘고위험 범죄 피해자 민간경호 지원사업’을 시범 도입해 서울과 인천, 경기 등 수도권 지역에서 운영해 왔다.

2년간 시범 운영 결과 254명에게 민간경호를 지원하면서 단 한 건의 추가 피해가 발생하지 않았고 민간경호원의 신고로 접근금지 명령을 위반한 스토킹·가정폭력 가해자 10명이 검거되는 성과를 올렸다.

피해자 보호
민간 경호도

이에 따라 경찰은 올해부터 서비스 운영 지역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이로 인해 ‘위험성 판단 체크리스트’ 위험도 등급 ‘매우 높음’으로 판단되거나 경찰서장이 특별히 필요하다고 판단한 경우 범죄 피해자에 근접·밀착 등 경호를 통해 보호조치가 이뤄지고 있다.

이에 민간 경호 지원 기간은 14일이며 1회 연장 가능해 최대 28일까지다. 대상자에게 민간 경호업체 소속 경호원 2명이 24시간 이내 배치된다.

<kcj5121@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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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꾸는’ 장동혁 용꿈

‘혼자 꾸는’ 장동혁 용꿈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의 임기 초반 난맥상이 이어지지만,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지지율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용꿈을 꾸지만, 새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채 강경 보수 세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장 대표에게 그와 용꿈을 함께 꿀 수 있는 창조적 소수가 없는 이유는 뭘까? 국민의힘은 지난달 장외투쟁에 집중했다. 지난달 21일엔 대구에서, 지난달 28일엔 서울에서 각각 개최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지난 2일 기자간담회에서 “장외투쟁을 통해 정부·여당의 잘못을 국민에게 알렸다”며 “그 과정에서 정부·여당의 지지율이 하락했다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고, 지지층 결집으로 싸울 동력도 확보했다”고 주장했다. 벌어지는 지지율 격차 하지만 외부의 평가는 다르다. 보수 신문 <조선일보>는 지난달 23일 사설에서 “스마트폰과 각종 미디어가 발달한 시대라서 국민은 정치권 소식을 실시간으로 보고 듣는다”며 “장외투쟁은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느낌을 준다”고 비판했다. 추석 연휴 직전인 지난 2일 오후엔 이진숙 전 방송통신위원장이 체포됐다가 지난 4일 체포적부심이 인용돼 석방됐다. 김건희 여사의 경기 양평군 공흥지구 개발사업 개입 의혹과 관련해 김건희 특검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던 고 정희철 단월면장도 “특검이 강압 수사를 했다”는 취지의 자필 메모를 남긴 채 같은 날 사망했다. 이후 국민의힘은 국회에 정 면장의 분향소를 차렸고, 의원들이 돌아가면서 빈소를 지키고 있다. 지난달 6일 방송된 JTBC 예능 프로그램 <냉장고를 부탁해>엔 이재명 대통령 부부가 출연했다. 이 방영분은 지난달 26일 발생한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 사건 이후인 지난달 28일 촬영됐다. 이를 두고, 국민의힘 주진우 의원은 “국가적 재난 때문에 지금도 국민은 피해를 보고 있는데, 한가하게 예능 촬영하고 있었다면, 이 대통령은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추석 연휴 내내 쟁점화를 주도했다. 하지만 국민의힘의 대여 투쟁엔 힘이 붙지 않는다. 리얼미터가 <에너지경제신문> 의뢰로 지난 1일부터 2일까지 전국 18세 이상 유권자 100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국민의힘 지지율은 전주 대비 2.4% 하락한 35.9%로 확인됐다. 47.2%의 지지를 얻은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보다 11.3% 뒤처지는 수치였다. 이는 장 대표의 자화자찬과는 다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이 대통령과 민주당엔 ▲검찰 해체 시도 ▲조희대 대법원장과의 갈등 ▲이 대통령의 예능프로 출연 논란 ▲김현지 제1부속실장 관련 논란 등 악재가 이어졌다. 그런데도 지지율 격차가 10% 이상 벌어진 결과가 나온 것이다. 정의화 전 국회의장은 지난 13일 장 대표와 상임고문단의 오찬 회동에 참석해 그 이유를 설명했다. 정 전 의장은 장 대표에게 “과거 안하무인 정치 행태를 보여온 보수 정당의 잘못이 크다는 걸 인정해야 하고, 깊은 반성과 성찰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개혁신당 이준석 대표·국민의힘 유승민 전 의원 등과 함께 못할 이유가 없다. 새 지도부는 용광로 같은 화합의 정치를 만들어내길 바란다”며 “부정선거론이나 ‘윤 어게인’ 같은 낡은 의제와 결별하고, 민생을 살피면서 국가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데 온 힘을 다해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답 없는 장외투쟁에 멀어지는 대권 ‘밖에서’ 집착… 본질 “사람 없어서” 정 전 의장의 발언 중 핵심은 한 전 대표를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장 대표는 지난해 12월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와 관련해 의견이 엇갈려 한 전 대표와 결별했다. 장 대표는 지난달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한 전 대표를 지지하는 분들이 무차별적으로 저를 비난·모욕·배척하는데 어떻게 정치 행보를 같이 할 수 있겠느냐”고 비판했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엔 자신의 당 대표 당선을 도운 강경 보수 성향 유튜버들의 반발을 감수하면서 당내 중도 성향으로 평가받는 김도읍 의원을 정책위의장으로 발탁하는 등 중도 공략을 고려하는 것으로 보였다. 유튜버 고성국씨는 이에 크게 반발하면서 “많은 분이 ‘김도읍이 웬 말이냐’고 비판하는데, 김 의원은 그런 비판을 받을 만하다”고 주장했다. 고씨는 “국민의힘은 자유통일당 등 원외 보수 정당에 지방자치단체장 30석을 양보하라”고 요구했다. 장 대표는 이들의 요구를 일체 무시하면서 이들의 영향력 감소를 시도하는 것으로 보였다. 한때는 “공천 청탁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등 “보수의 김어준 반열에 오르려는 것 아니냐”는 평가까지 들었던 전한길씨도 최근엔 전당대회 당시의 기세는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장 대표는 추석 연휴이던 지난 7일, 서울의 한 극장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 2>를 관람했다. <건국전쟁 2>는 1947년부터 군·경찰·서북청년단 등과 남조선노동당이 제주도에서 번갈아 이어간 학살 사건인 4·3 사건을 다뤘다. 이를 연출한 김덕영 감독은 주로 남조선노동당의 학살 위주로 내용을 구성했다. 김 감독은 평소 이승만 전 대통령을 지지하면서 부정선거론을 주장해 왔던 인물이다. 4·3 사건은 국가 폭력을 상징하는 전형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여전히 민감하다. 하지만 국민의힘과 보수 진영 일각에선 잊을 만하면 양민 학살을 부정하거나 군경의 대응을 찬양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장 대표의 <건국전쟁 2> 관람은 보수 정당 수장이 4·3 사건에 대한 국가 책임을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소지를 남긴다. 아울러 국가 책임을 부정하는 주장을 수시로 제시하는 세력은 강경 보수 세력이다. 이런 대응은 이재명 대통령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국민의힘이 대안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다. 이는 국민의힘 지지율 추세로 확인할 수 있다. 추석 연휴 전까지 집중했던 장외투쟁도 장 대표 스스로 직접 전면에 나서 여론을 움직이려 한다는 취지로 해석됐다. 하지만 장 대표가 강경 보수 진영의 지원을 토대로 당선됐던 것 자체가 강경 보수 외 유권자에겐 큰 호감을 주지 못하는 족쇄가 되고 있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이후 국민의힘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됐던 것은 당내 쇄신이었다. 기행은 멈췄지만… 특검 3개(김건희·내란·채 상병)가 국민의힘을 동시에 겨냥하는 현 상황은 모두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국민의힘엔 ▲부정선거론 근절 ▲강경 보수 세력의 영향력 제거 ▲중도 공략 등 산적한 숙제가 있었다. 장 대표가 무시 전술로써 강경 보수 세력의 영향력을 서서히 줄이고 있지만, 유권자로선 만족을 느끼기 어렵다. 정권을 맡을 수 있는 정당으로 다시 도약하기 위해선 확실한 절연이 필요했다. 하지만 장 대표 스스로 <건국전쟁2>를 관람하면서 그동안 구사했던 무시 전술도 그 진의를 의심받을 가능성이 열렸다. “당내 쇄신이 아닌 자신의 영향력 확대만을 위한 무시였느냐”는 의심이다. 특정 세력의 지원을 받은 수장이 수성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대개 토사구팽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정치력을 높이 평가받는 역사적 인물들은 적절한 토사구팽을 통해 수성기를 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장 대표 취임 이후의 국민의힘이 이전과 달라진 게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장 대표 취임 이전 국민의힘은 권영세 전 비상대책위원장·권성동 전 원내대표가 일명 ‘쌍권 체제’를 구성해 ▲대선후보 심야 교체 시도 ▲자체 개혁안에 대한 특정 계파의 조직적 저항 등 기행을 저지르면서 여론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장 대표 취임 이후의 국민의힘에서 이런 기행은 잘 보이지 않으나, 그 이상으로 나아가질 못하고 있다. 이는 재보궐선거 당선으로 국회에 입성해 재선 의원이 된 지 불과 1년여가 지난 장 대표의 짧은 정치 경험 등 부실한 정치 기반으로부터 비롯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는 장 대표에 대해 꾸준히 “용꿈을 꾸고 있다”고 평가한다. 장 대표도 이를 직접 부인하진 않는다. 그런데 용꿈은 특정 정치인 1명이 특출나다는 이유만으로 꿀 수 있는 꿈이 아니다. 장 대표는 아직 “용꿈을 꿀 만큼 특출난 정치인”이란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하다. 용꿈을 현실로 구현하기 위해선 ▲시대적 사명 구현 ▲강한 개혁 의지 ▲구체적 개혁 대안 제시 ▲강도 높은 자체 혁신 ▲추상적 비전을 구체화할 수 있는 전문가 집단 구성 등 요소가 필요하다. 용꿈은 용이 되려는 사람과 이를 뒷받침하는 집단의 상호 작용으로 현실이 된다. 전문가 집단은 추상적 비전을 구체적 개혁 대안으로 제시해야 하고, 용꿈을 꾸는 사람은 구체적 개혁 대안을 현실에서 구현해 민심의 호응을 얻어야 한다. 부실한 정치 기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저서 <역사의 연구>를 통해 ‘창조적 소수’라는 개념으로 용꿈을 현실화하는 과정을 이론화했다. 토인비는 문명의 순환을 통해 역사의 변혁 과정을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문명이 쇠퇴하거나 낯선 도전에 직면했을 때 이를 극복하면서 새로운 발전을 꿈꾸는 집단이 나타난다. 토인비는 이들에게 ‘창조적 소수’라는 이름을 붙였다. 장 대표가 강경 보수와의 관계에 명확하게 선 긋지 못한 채 장외투쟁에 집중하는 것에 대한 해답도 있다. 토인비는 창조적 소수가 새로운 발전을 이끌 수 있는 비결로 혁신적인 구상을 제시했다. 혁신적인 구상을 통해 세상에 충격을 주면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동력을 확보해야 한다. 이는 우리 역사에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진골 귀족들 간 왕위 쟁탈전이 장기간 이어져 중앙정부가 지방 통제 능력을 잃었던 통일신라 말기엔 후삼국시대가 이어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미 멸망한 고구려·백제가 통치했던 지역에선 유민 의식이 유지되고 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을 물리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정치적 비전이었다. 왕건은 ‘삼한일통’이란 구호를 내걸면서 신라에 우호적인 관점을 유지했다. 이는 신라를 무력으로 함락해 경애왕을 살해한 후 신라의 각종 기술자를 후백제로 압송했던 견훤의 대응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견훤의 대응에 분노했던 신라 호족은 고려로 기울었고, 이는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게 된 결정적 밑거름이 됐다. 훗날 고려는 원나라의 간접 지배와 권문세족의 수탈로 인해 저물었다. 권문세족이 산과 강을 경계로 대농장을 소유하면서, 조세·부역을 직접 감당하는 평민의 경제 기반이 무너졌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2000명 규모의 사병 집단 가별초를 거느린 대부호였다. 그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기반으로 왜구와의 전쟁에서 대활약해 실력자로 부상했다. 그의 막료로 가담한 정도전·조준·남은·윤소종은 당시 새로운 흐름이었던 성리학을 배운 신진사대부였다. 이들 중 조준은 권문세족의 토지 겸병을 막을 수 있는 방편으로 과전법을 제시했다. 과전법은 권문세족의 토지를 모두 몰수해 국유화한 후 전·현직 관료에게 경기도에 한정해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제도였다. 과전법은 이성계의 막강한 권력·군사력을 기반으로 실현됐고, 그가 새 왕조의 문을 열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가 됐다. 과전법이 시행돼 백성들이 춤을 추면서 기뻐할 때, 국왕 즉위 이전부터 대토지를 보유했던 고려 마지막 임금 공양왕은 아쉬움의 눈물을 흘렸다. 고려가 왜 멸망했고, 조선이 왜 개창될 수 있었는지 잘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싸울 동력 확보” 자화자찬 “이미 한계만 노출” 평가도 이성계의 등장 이전 강력한 권력과 군사력을 가졌던 사람은 최씨 무신정권을 열었던 최충헌이었다. 그런데 최충헌은 정치개혁과 체질 개심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정예 병력을 자신의 사병 조직에 포함할 뿐, 거란 유민의 고려 침공을 방치했다. 거란 유민은 당시 떠오르던 몽골과의 협력을 통해 물리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늑대를 몰아내고 호랑이를 불러들였을 뿐이었다. 최충헌 사후 닥친 국난은 여몽 전쟁이었다. 최우 등 최충헌의 후계자들은 임시 수도 강화도에서 오로지 정권 보위에만 집중했다. 그들은 몽골군이 쳐들어오면 항복한 후 몽골군이 철군하면 항복 조건을 어기는 행태를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 백성들은 각자도생해야 했다. 최씨 정권이 몰락한 후 집권했던 무신 집권자들도 이 행태를 반복했다. 그들이 국난 극복을 등한시한 결과, 고려는 몽골이 중국을 접수한 후 세운 원나라의 간섭을 장기간 받아야 했다. 이는 현대 정치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역대 정권은 모두 새로움을 강조하는 슬로건을 제시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군정 종식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노무현 전 대통령은 사람 사는 세상을, 이명박 전 대통령은 경제위기 극복을, 문재인 전 대통령은 적폐 청산을, 이 대통령은 내란 종식을 제시했다. 토인비가 문명의 순환을 강조했던 이유는 성공하거나 많은 것을 누리면 나태해지는 인간의 속성과 관련돼있다. 토인비는 “성공한 창조자는 다음 단계에서 다시 창조자가 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로는 “성공 자체가 큰 흠결이 되기 때문”이라며 “이미 성공했기 때문에 노를 젓는 손을 쉬고 있어서 사회 발전에 쓸모를 다했다”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에선 김용태 전 비대위원장과 윤희숙 전 혁신위원장이 당 체질을 개선할 혁신안을 발표한 후 실행하려고 했다. 하지만 일명 ‘언더 찐윤’으로 통하는 영남권 일부 국민의힘 의원들은 조직적으로 이를 방해했다. 이를 똑똑히 목격한 장 대표는 지방선거 승리를 외치면서도 당내 혁신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 주류와 반목하는 한 전 대표와 친한계(친 한동훈)를 겨냥해 패널 인증제를 언급하는 등 당 주류의 영향력을 고착화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누구나 꿈꿔도 이룰 수 없는… 하지만 여론은 국민의힘의 혁신과 중도 확장을 바라고 있다. 이 때문에 이재명정부의 초반 난맥상에도 불구하고, 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지지율 격차는 더욱 커지고 있다. 용꿈을 함께 실현할 창조적 소수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자기 사람은 진득하게 비전을 통해 설득하면서 만들어진다. 장 대표에게 필요한 것은 “국정감사 이후엔 어디서 장외투쟁을 하느냐”가 아니라 “왜 내 주변엔 사람이 없어서 내가 직접 장외투쟁을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용꿈은 누구나 꿀 수 있지만, 아무나 이룰 수는 없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