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이 “이제 제발 그만! 도대체 언제까지 참고 견디란 말인가”라고 하소연한다. 도를 넘은 집회와 시위로 인한 피해와 불편함을 호소하는 것이다.
학교가 삼청동을 지나 북촌에 자리하고 있어 어쩌다 주말에 연구실을 향할 때면 불편함에 짜증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주말마다 광화문, 시청, 대통령실이 있는 삼각지 등에서 대규모 집회가 열리고, 그때마다 대로서 차단된 한쪽 방향은 집회와 시위의 장으로 바뀐다.
이 여파로 대중교통은 물론이고 모든 육상 교통수단은 통행에 제한을 받아, 운행이 지연된다. 어쩌다 지나치는 시민의 통행 제한, 지연 등의 불편과 피해도 그렇지만, 지역 주민과 상인들의 영업손실과 소음공해는 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주변에 온통 외국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관광명소가 즐비해 한국을 찾은 외국 관광객들에게도 불편과 피해를 초래하게 되고 결국 한국에 대한 이미지도 좋아질 리 만무한 것이다.
물론 집회와 시위는 헌법이 보장하는 중요한 시민의 권리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집회와 시위대가 누리는 권리만큼이나 집회와 시위에 참여하지 않는 절대다수 사람의 권리도 중요하다. 그것은 일부 집회와 시위가 우리 헌법 35조가 보장하는 쾌적한 생활을 누릴 권리가 있는 다수 시민의 환경권을 공공연히 침해하고 있는 것이다.
헌법은 21조1항과 22조1항서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지만, 동시에 21조4항에선 그 표현의 자유가 다른 사람의 명예나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대변하고 있다. 이는 우리 헌법이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그 수단의 하나일 수 있는 집회와 시위의 자유도 보장하고 있지만, 모든 자유와 권리에는 의무와 책임도 따르게 마련이다.
상대적으로 소수라 할 수 있는 집회와 시위 참가자들의 표현의 자유도 중요한 헌법적 가치요 민주주의의 근간이지만, 이 자유와 권리는 절대다수 다른 사람들의 이익과 권리, 그리고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권리와 자유만 있고 책임과 의무가 없다면 그것은 진정한 자유와 권리도, 민주주의도 아닐 것이다.
특히 집회와 시위가 만에 하나라도 폭력적이거나 불법적으로 변해도 자유와 권리만을 외칠 수 있는 것인가 반문하고 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원천적인 의문이 생긴다. 우선 당국에서는 차량 통행을 위한 차도서 차량 통행까지 막으면서 집회와 시위를 허가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도로는 차량과 사람이 통행하는 곳이지 집회와 시위를 위한 공간은 아닐 것이다. 여기서 다수 시민의 피해와 불편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미국 워싱턴 기념비 앞에서의 킹 목사를 중심으로 한 집회를 보라. 우리는 왜 꼭 대로서만 집회와 시위를 하고, 그것을 허가할까?
또 허가된 집회와 시위의 범위를 넘는 집회와 시위에도 불구하고, 왜 그에 대한 엄정한 법 집행과 책임은 따르지 않는지 묻고 싶다. 미국서 현직 시장이나 국회의원이 1인 시위로 현장서 수갑이 채워지는 모습도 보지 않았던가.
과거 WTA 문제로 농민 시위가 극에 도달했을 때, 죽창과 쇠 파이프가 난무하는 상황으로까지 치달았으나, 같은 시위대가 미국 워싱턴주의 시애틀시에서 열린 WTA 총회장으로 원정 시위를 가서는 단 한 명도 경찰의 폴리스라인을 단 한 발짝도 넘지 않고 완벽하게 준법 시위를 했다고 한다.
이런 시위대의 모습을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해야 하며, 이는 우리에게 어떤 함의를 던지고 있는가?
집회와 시위는 헌법으로 보장하는 시민의 권리이자 중요한 민주주의 가치인 만큼 당연히 합법적이고 민주적이라면 제한 없이 허용돼야 하겠지만, 절대다수인 제3자의 법익과 권리와 자유를 해치고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권리요 자유여야 하는 것이다.
집회와 시위로 도심이 ’집회와 시위의 지옥‘이 된다면 그것은 누구도 바라지 않지 않을까? 광화문 광장이 시위의 광장이 되고, 도심 교통의 중심지가 집회와 시위의 중심지가 돼서는 안 되지 않을까?
[이윤호는?]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명예교수
고려사이버대 경찰학과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