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 붐이 한창이었던 1850년대 스코틀랜드에서는 시대를 주름잡던 특출 난 골퍼가 많이 배출됐고, 윌리 파크 역시 주목받는 골프 선수였다. 1833년생으로 머슬버러골프장을 무대로 활동하던 윌리 파크는 어린 시절부터 골프 신동으로 불리며 의심할 여지없는 당대 최고수 중 한 명으로 꼽혔다.
윌리 파크는 20세였던 1853년 느닷없이 알렌 로버트슨에게 다소 특별한 방식으로 도전을 신청했다. 당사자에게 정식으로 편지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신문지상에 100파운드를 걸면서 공개 도전장을 낸 것이다. 1815년생인 알렌 로버트슨은 당시 38세였고, 골프 선수로는 노장으로 분류됐다.
그럼에도 알렌 로버트슨은 스코틀랜드서 당대 최고라는 지위를 잃지 않았다. 세인트앤드루스를 기반으로 올드코스의 헤드 프로면서 올드코스 공방을 책임지고 있는 데다가 가죽 볼 제조 장인으로서 인정받는 터였다.
기 싸움
당시 알렌 로버트슨은 발군의 실력자로 이제까지 패한 적 없는 전설의 골퍼였다. 1843년 윌리 던과 스코틀랜드 지존의 자리를 놓고 대결했을 때에도 알렌 로버트슨은 윌리 던을 무찔렀다. 알렌 로버트슨과 윌리 던의 대결은 공식적인 문헌으로 기록된 프로 골퍼 간 최초의 일대일 승부였다.
당시 대결은 10일 동안 20라운드를 펼치는 방식이었다. 9일째 18라운드서 1홀 차로 앞섰던 알렌 로버트슨은 마지막 날 오전 라운드서 이기면서 윌리 던을 2홀 차이로 무찌른 바 있다.
윌리 파크가 내민 도전장에 알렌 로버트슨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이렇게 되자 세인트앤드루스에서는 혹시 알렌 로버트슨이 대결을 기피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나돌았다. 무패 전적의 알렌 로버트슨이 떠오르는 신예에게 발목 잡힐 것을 우려한다는 풍문이 나돌기도 했다.
윌리 파크에게 화답이 도착한 건 1854년이었다. 다만 상대하겠다는 골퍼는 알렌 로버트슨이 아니라 톰 모리스였다. 1821년생으로 32세의 톰 모리스는 올드코스 공방서 알렌 로버트슨의 수제자로 일하는 당대 최고의 골퍼 중 한 사람이었다.
무서운 신예의 당찬 도발
끝내 무산된 별들의 전쟁
결국 윌리 파크는 알렌 로버트슨 대신 톰 모리스와 대결하기로 합의하고, 1856년 3판2승제 경기를 치르기로 했다. 세인트앤드루스서 1차전, 머슬버러서 2차전을 치르고, 노스 버윅서 최종 승자를 가리기로 결정했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박빙의 대결을 예상했다.
윌리 파크는 무섭게 성장하는 젊은 피의 신예 였고, 톰 모리스는 완숙한 경지에 오른 골퍼였다.
그러나 대결은 생각보다 싱겁게 끝나 버렸다. 톰 모리스의 홈그라운드였던 올드코스서 예상을 뒤엎고 윌리 파크가 가볍게 톰 모리스를 제압했다. 윌리 파크는 자신의 홈구장인 머슬버러서 펼쳐진 2차전서도 톰 모리스를 가볍게 이겼다.
물론 훗날 영국 골프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톰 모리스는 윌리 파크에게 패한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결국 분을 이기지 못한 톰 모리스는 윌리 파크에게 도전장을 내밀었고, 재대결은 같은 해 10월 올드코스서 열렸다.
이번에도 승자는 윌리 파크였다. 톰 모리스는 홈구장의 이점을 전혀 살리지 못한 채 윌리 파크에게 압도적으로 패배했다. 기세를 탄 윌리 파크는 이듬해 또 다른 신예였던 윌리 던과 대결마저 승리하면서 전성기를 구가하기 시작했다.
알렌 로버트슨이 윌리 파크의 공개 도전에 즉답을 피한 이유는 아직까지 알려진 게 없다. 이전까지만 해도 도전을 피하지 않았던 알렌 로버트슨이었기 의문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흐지부지
윌리 파크와 톰 모리스 간 대결이 벌어진 지 3년이 흐른 1859년에 알렌 로버트슨은 44세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지병인 폐암이 사망하게 된 이유였지만 사람들은 고무볼이 알렌 로버트슨의 생명을 앗아갔다고 생각했다. 6대째 가죽볼을 제작해 온 집안의 마지막 장인이었던 알렌 로버트슨은 고무볼이 가죽볼을 대체하자 스트레스를 받았고 삶의 의미를 찾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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