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로 끝? ‘라돈 침대’ 집단소송전 현주소

4년 기다리고 ‘쓴맛’

[일요시사 취재1팀] 남정운 기자 = 사람이 하루 8시간씩 맞닿아 있는 곳. 바로 침대다. 건강을 위해 웃돈을 주고 샀던 침대에는 알고 보니 발암물질이 가득했다. 충격에 빠진 소비자들은 앞다퉈 소송에 나섰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다. 4년을 끌어온 소송전. 소비자 70여명은 이미 패소의 쓴맛을 봤다. 그리고 또 다른 판결을 기다리는 소비자는 5886명. 과연 이들은 합당한 보상을 받아낼 수 있을까. 

‘고진감래’를 기대했건만, 현실은 달랐다. 4년 만에 처음 나온 ‘라돈 침대’ 손해배상소송 판결에서 소비자가 패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206단독 장원지 판사는 지난 9일 소비자 69명이 대진침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소송 1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건강 대신
모나자이트

라돈 침대 사건의 발단은 2018년 5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언론 보도를 통해 대진침대가 생산한 침대 매트리스에서 방사성물질 ‘라돈’이 기준치 이상으로 검출된 사실이 드러났다. 라돈은 호흡기를 통해 몸속에 축적돼 폐암을 유발하는 방사성 기체다.

세계보건기구(WHO) 산하 국제암연구센터(IARC)는 라돈을 1급 발암물질로 지정했다.

한때 불었던 ‘음이온’ 열풍이 화근이었다. 라돈은 대진침대가 매트리스에 도포한 음이온 파우더 원료 ‘모나자이트(Monazite)’에서 검출됐다. 애초에 모나자이트 자체가 소량의 우라늄과 토륨을 포함한 방사성물질이다. 하지만 당시 세간에선 모나자이트의 위험성보다 ‘음이온을 발산한다’는 검증되지 않은 속설이 이목을 끌었다.


그 결과 모나자이트는 수년간 별다른 제지 없이 각종 생활용품에 활용됐다.

이 중 상당 비율이 대진침대를 거쳐 라돈 침대로 유통됐다. 2019년 MBC 보도에 따르면 이전 6년간 국내 유통된 모나자이트는 총 40톤. 그중 7%가 넘는 2.9톤이 대진침대에 공급된 것으로 알려졌다. 대진침대는 2005년부터 꾸준히 관련 제품을 판매했다.

이를 고려하면 실제로 대진 침대를 통해 시중에 풀린 모나자이트는 이보다 많을 것이 확실시된다.

원자력안전위원회는 조사 끝에 “대진침대 매트리스에서 방사선 피폭선량이 기준치를 최고 9.3배 초과했다”고 발표했다.

대진침대 측은 최초 보도 후 닷새 만에 전량 회수 및 리콜을 결정했다. 라돈이 검출된 매트리스 4종이 그 대상이었다. 이는 추후 7종까지 늘어났다. 대진침대는 2010년 이후 해당 제품들을 총 6만1406개 생산한 것으로 파악됐다.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줄곧 법적 대응을 시사했던 소비자들이 결국 칼을 빼들었다. 대진침대 소비자들은 적게는 수십명, 많게는 수천명이 모여 공동소송을 개시했다. 

예컨대 소비자 69명은 2018년 7월 대진침대를 상대로 위자료를 청구하는 소송을 냈다. 이들은 인당 200만원, 총 1억3800만원을 위자료로 책정했다. 


발암물질 침대 소비자 위자료 청구서 패소  
유사한 재판 줄지어 대기 중…영향 미칠까?

이들은 재판에서 “대진침대는 안전기준에 어긋나는 침대를 제조·판매하는 위법행위를 해 채무불이행 또는 불법행위를 저질렀고, 침대를 사용함에 따라 소비자들이 입은 정신적 손해에 대해 위자료를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대진침대 측은 라돈 검출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2018년 5월14일 안전기준이 변경되기 전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제품이었기 때문에 불법행위가 인정되지 않는다”고 맞섰다.

서울중앙지법만 해도 관련 사건 약 10건이 계류 중이다. 이 중 대부분이 집단 손해배상 청구 소송인 것으로 알려졌다. 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결론이 난 사건은 거의 없다. 앞서 제기된 소송 결과를 기다리는 등 외적 지연 요인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 사이 사건을 수사한 검찰은 2020년 1월 대진침대 대표와 납품업체 관계자들을 무혐의 처분했다. “라돈 침대 사용과 폐암 발생 간 인과관계가 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물건값’에 대한 보상 여부도 정리됐다. 지난해 12월 서울동부지방법원은 “대진침대가 사건 당시 소비자들에게 교환·환불을 약속하고도 장기간 이행하지 않아 손해배상 책임이 인정된다”며 “매트리스 교환 가치에 상응하는 돈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다만 물건값 배상과 위자료 지급은 다른 문제다. 법원은 위자료 청구 소송의 첫 판결에서 대진침대 손을 들어줬다.

장 판사는 “대진침대가 소비자들에게 침대를 제조·판매한 것이 생활방사선법을 위반한 제품을 판매한 것으로서 불완전 이행에 해당한다거나, 당시 대진침대가 음이온을 배출한다고 알려진 모나자이트가 라돈을 방출하고 이로 인해 인체에 피폭되는 방사선이 해로울 수 있음을 알았다거나 알지 못한 데 주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과실이 있다고 인정하기 부족하고, 달리 이를 인정할 증거가 없다”고 판시했다.

연쇄작용?
일단 미지수

이어 “가공제품의 연간 피폭방사선량에 관한 기준을 규정한 생활방사선법이 2011년 7월 제정돼 2012년 7월 시행됐다”며 “원자력안전위원회의 2018년 5월자 라돈 검출 침대 조사 중간결과에 따르면 대진침대가 2015년과 2016년에 생산한 매트리스 속 커버 제품 2개에 대한 외부 피폭선량이 생활방사선법상 가공제품 안전기준인 연간 피폭선량 1mSv에 못 미치는 0.05mSv 내지 0.15mSv에 불과한 것으로 조사됐다”고 덧붙였다.

또 “신체 외부 및 내부에 피폭하는 양을 모두 합해 가공제품의 연간 피폭 방사선량을 측정하고 제품에 첨가하는 것이 금지되는 원료물질에 라돈이 추가된 생활방사선법 개정은 2019년 1월 비로소 이뤄지고 같은 해 7월 시행됐다”며 “가공제품 피폭 방사선량 한도인 1mSv는 유해 기준이 아니라 안전 관리기준에 해당하고, 라돈 침대의 사용과 폐암 등 질병 발병과의 인과관계가 입증됐다고 볼만한 증거가 없다”고 설명했다.

일부 소비자는 이번 재판 결과의 ‘연쇄작용’을 우려한다. 순차적으로 진행될 다른 재판 판결들이 ‘선례’를 따라가지 않겠냐는 걱정이다.


반면 법조계는 이번 판결이 다른 재판에 절대적 영향력을 발휘할 가능성은 작다고 보고 있다.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판결과 다르게 통상 지방법원의 1심 판결은 기속력이 없다. 대법원은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는 사건을 대법원 전원협의체 판결로 정리한다.

이후 결정되는 유사 사건 판결은 앞선 대법원판결 법리를 따르게 된다. 이것이 ‘기속력’이다. 반면 지방법원 1심 판결에는 이 같은 권위가 없다는 설명이다.

다만 영향을 미칠 가능성을 전면 배제할 수는 없다. 피고인 대진침대가 각 재판에서 동일한 변호인을 고용했다면, 이번 판결을 활용해 유사한 판결을 유도할 수 있다. 재판부에 이번 판결을 참고해달라고 요청해 ‘인용 판결’을 노리는 전략이다.

어느 방향이든 사건의 최종 결론이 나오기까지는 더 시일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특히 공동소송 플랫폼 ‘화난사람들’에서 모인 소비자들이 제기한 소는 여전히 재판이 한창이다. 이 인원만 해도 5886명에 달한다.

인원뿐만 아니라 청구 금액 규모도 훨씬 크다. 위자료 명목으로만 1인당 1000만원을 책정했다. 치료비 등은 별개다. 소송 인원 모집 당시 예상 청구액은 1인당 3000만원을 넘겼다. 

알면서도
판매 강행?


이들은 앞선 재판보다 세부적인 근거를 제시해 인과관계를 인정받겠다는 계획이다. 공동소송 담당 변호사는 “대진침대의 일부 모델에서 라돈이 검출된 점, 라돈이 발암물질이고 인체에 유해하다는 점은 명백한 사실”이라며 “잠복기가 길어 언제 증상이 발현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이어 “일단 라돈이 검출된 침대를 구매해서 사용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정신적인 손해는 발생했다고 본다”며 “침대 때문에 혹시나 나에게 건강상 이상이 생기지는 않을지, 불안에 떨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공동소송단은 본 사건의 입증 책임이 대진침대 측에 있다고 주장한다.

담당 변호사는 “실제로 진단서상 드러나는 질환이 있다면 그 신체상 손해를 계산해서 배상을 청구하겠지만, 이 부분은 인과관계의 입증이 굉장히 까다롭다”면서 “다만 라돈이 인체에 유해하다는 사실은 이미 공지된 사실이므로, 만약 대진침대를 사용한 소비자 집단의 발병률이 일반적인 한국인 집단보다 더 높다면 이는 라돈 침대로 인한 영향일 것이라고 보아 인과관계가 추정된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어 “이에 따라 대진침대에서 검출된 라돈으로 인해서 발병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대진침대 쪽에서 입증하는 것이 공평의 원칙상 타당하다는 입장”이라고 강조했다.

공동소송 참여자 중 일부는 원자력 병원에서 전문 검사를 받고, 그 결과를 증거로 제출했다. 담당 변호사는 “검사 결과, 이들은 유전자 파괴 정도가 일반인에 비해 심했다”며 “충분히 유의미한 수치를 얻었다고 판단해 증거로 제출했다”고 밝혔다. 

공동소송단은 대진침대에 대한 검찰 수사기록을 확보해 분석했다. 변호사는 이를 통해 대진침대가 침대 판매 전부터 그 위험성을 인지했음에도, 이를 묵인하고 판매를 강행한 정황을 발견했다. 수사기록대로라면 당초 음이온 파우더 상품화는 ‘A테크’ 설립자인 김모씨 제안에서 시작됐다.

5900명 뭉친 ‘본 게임’ 남았다
뒤집기 성공할까…추가 쟁점은?

대진침대는 제안을 받아들여 음이온 파우더 활용 상품을 ‘B 베드산업’이 개발하게 했다. 

김씨는 “대진침대·B 베드산업과 매트리스를 공동으로 기획·개발하다 중도 이탈했다”고 진술했다. 이를 기점으로 두 업체가 라돈 검출 매트리스의 기획·제작·판매의 주축이 됐다는 주장이다.

검찰 측이 공개한 김씨 진술조서에는 “2004년 하반기에 위 요업기술원의 성분분석을 통해 음이온 파우더에서 방사선이 방출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 사실을 B 베드산업을 방문해 성분분석서와 함께 토륨·우라늄 등 방사성물질이 포함된 사실을 알렸다”고 적혀 있다.

또 대진침대 내부 직원 진술조서에도 B 베드산업에게 보고받아 내부에서 업무보고서를 작성한 것으로 기록돼있다. 

공동소송단은 “관련자들 진술에 따르면 대진침대는 상품 기획 및 개발단계부터 음이온 파우더에서 방사선이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품 제작 및 판매를 강행한 것으로 의심된다”고 지적했다.

이어 “음이온·은나노 마케팅 광풍이 불던 시기 대진침대는 한 백화점에서 매출이 저조해 퇴출될 위기에 처했다는 것이 B 베드산업 개발 책임자의 전언”이라며 “그는 진술조서에서 ‘대진침대가 당시 경쟁사에 비해 판매가 저조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토로했다’”고 덧붙였다. 

공동소송단은 대진침대 측이 “위기를 모면할 심산으로 음이온 매트리스 판매를 강행했다”고 의심한다. 실제로 방출 위기에 처해있던 대진침대는 라돈이 검출된 음이온 매트리스의 판매고 덕에 위기를 모면한 것으로 전해진다. 

관련 의혹이 모두 사실로 판명된다면, 판세를 뒤집을만한 핵심 증거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이를 근거로 앞선 판결서 인정되지 않았던 대진침대의 과실과 고의성을 입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동소송 담당 변호사는 지난달 해당 진술조서를 증거로 제출했다. 대진침대 측은 증거 제출 이후로도 별다른 대응을 취하지 않고 있다.

새 증거로
뒤집을까

담당 변호사는 “검찰 측 자료인 만큼 증거의 신빙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며 “다만 증거력은 재판부가 자유로운 심증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재판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지는 두고 봐야 알 수 있다”고 부연했다. 본 재판은 다음 달부터 다시 속행될 예정이다. 빠르면 올해 안에 1심 판결이 나올 수 있다는 전망도 제기된다.


<jeongun15@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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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전 서열 2위’ 국회의장 쟁탈전

‘의전 서열 2위’ 국회의장 쟁탈전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대한민국 의전 서열 1위는 대통령이다. 그다음은 통상 국회의장으로 분류된다. 의전 서열 2위를 차지하기 위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거물급 잠룡들의 몸풀기가 시작됐다. ‘친명(친 이재명계 일색’ 민주당에 국회의장까지 ‘찐명’ 몫으로 돌아갈 상황이다. 차기 국회의장(이하 의장)에 누가 오를지 관심이 쏠린다. 당초 4파전으로 예고됐던 선거가 지난 주말 사이 우원식·추미애 당선인의 양자구도로 정리되는 등 물밑 경쟁도 치열한 양상이다. 그동안 의장직은 다수당의 5선 이상인 중진급 의원이 맡는 게 관례였다. 원내 정당의 의견을 교섭하고 조율하는 역할인 만큼 계파색이 옅은 인사가 적임자로 여겨졌다. 이는 국회의장에게 주어지는 ‘직권상정’이라는 특권 때문이다. 의장은 법제사법위원회(이하 법사위)를 거치지 않고 본회의에 법안을 상정시킬 수 있는 힘이 주어진다. 가운데서… 외로운 싸움 현재 국회를 이끄는 수장은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출신인 김진표 국회의장이다. 김 의장의 임기는 오는 29일 종료되며 차기 의장은 오는 16일 선출된다. 김 의장은 국민의정부서 중용돼 부총리를 비롯한 장·차관 등을 역임했다. 2002년 본격적으로 정계에 입문한 후에는 수원서 내리 5선에 성공하면서 당내 우직한 인사로 평가받아왔다. 선수가 높았던 탓에 21대 전반기 국회의 의장 후보로 거론됐지만 당시 6선이었던 박병석 의원과 단일화가 이뤄지면서 자연스럽게 불출마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김 의장은 이로부터 2년 뒤인 2022년 21대 후반기에 의사봉을 쥔 후로 지금까지 국회를 이끌고 있다. 당선 당시 김 의장은 “제 몸에는 민주당의 피가 흐른다”며 “당적을 졸업할 때까지 선당후사의 자세로 민주당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이 때문에 정치권 안팎에서는 중립을 유지해야 하는 의장이 당에 대한 애정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우려와 달리 김 의장이 무조건 민주당의 손을 들어주는 일은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오히려 임기 막바지엔 친정인 민주당으로부터 쓴소리를 듣기까지 했다. 법안 상정 시 여야 합의를 지나치게 중요시한다는 점에서다. 이와 관련해 한 민주당 관계자는 <일요시사> 취재진과 만난 자리서 “본회의에 (법안을)올릴 때 무조건 우리 편을 들어달라는 게 아니다. 적어도 민심이 어디를 향하는지는 봐야 할 것 아닌가”라며 서운함을 드러냈다. 21대 후반기 국회는 ‘역대 최악’이라는 평을 받을 만큼 험난함의 연속이었다. 여야의 입장이 첨예하게 갈리는 온갖 특검법이 쏟아지면서 강대강 국면에 접어든 것이다. 평소 온화하기로 소문난 김 의장조차 본회의 진행 중 의원들의 고성이 이어지자 처음으로 “국민이 보고 있습니다!”라며 언성을 높이기까지 했다. 4·10 총선 이후 본격적인 수난 시대가 열렸다. 이번 총선을 통해 ‘윤석열정부 심판론’이 힘을 받자 정부·여당을 향한 민주당의 압박 수위가 단숨에 높아진 탓이다. 지난 2일 ‘채 상병 특검법’을 처리하는 과정서 김 의장의 고초가 그대로 드러났다. 당시 김 의장은 멕시코·인도네시아·대한민국·튀르키예·호주 의회로 구성된 협의체인 ‘믹타(MIKTA)’ 회의에 참석할 예정이었는데 야당 내에서 “해당 법안을 상정하지 않을 경우 출장길을 막겠다”며 의장을 압박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어르고 달래도 소용없는 여야 21대 국회 끝도 진흙탕 싸움 본회의 직전까지도 야당 의원들의 성토가 이어졌다. 의장실서 나온 김 의장 옆으로 진보당 강성희 의원이 “여야 합의가 필요하다”며 끈질기게 쫓아가는 장면이 포착됐다. 강 의원이 엘리베이터 앞까지 따라붙자 김 의장은 “알아들었다” “본회의장서 한다니까”라며 결국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 채 상병 특검은 본회의 안건으로 상정돼 통과하면서 김 의장을 향한 공세는 일단락됐다. 하지만 전세 사기 특별법 등 예민한 현안이 산적한 만큼 21대 국회 폐원 전까지 김 의장의 책임은 여전히 막중하다. 국회의원 300명이 모두 만족하는 결과를 도출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지만 김 의장은 언제나 여야 협치에 방점을 찍었다. 이번 21대 국회가 이견 조율에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는 불만이 나오자 차기 의장을 노리는 후보들은 저마다 ‘탈중립’을 강조하면서 대조되는 모습을 보였다. 가장 먼저 신호탄을 쏴 올린 인사는 경기 하남갑에 당선돼 6선 고지에 오른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이다. 추 당선인은 지난달 헌정사상 최초로 여성 국회의장이 될 가능성과 관련해 “국민을 지키고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혁신 의장에 대한 기대라면 얼마든지 자신감 있게 그 과제를 떠안을 수 있다”고 말해 출마를 암시했다. 추 당선인은 한 라디오를 통해 “의장은 좌파도 우파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중립도 아니다”라는 파격적인 발언을 하기도 했다. 이후 강성 민주당 지지자 사이에서는 그를 차기 의장으로 밀어줘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됐다. 다른 후보 역시 앞다퉈 선명성 경쟁에 나섰다. 5선인 민주당 우원식 당선인은 후보 등록 첫날인 지난 7일 기자회견을 열고 “개혁 의장이 되겠다”며 공식적으로 출마를 선언했다. 우 당선인은 자신을 이 대표의 ‘사회개혁 가치의 동반자’라고 소개했다. 그는 “윤정부에 맞서기를 주저한 적이 없다. 국회가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라는 마음으로 임하겠다”며 “말로만이 아닌 온몸을 던져 싸워왔다. 윤정부의 민주주의 후퇴, 삼권분립 훼손에 단호히 맞서 제대로 싸울 사람”이라고 강조했다. 6선 민주당 조정식 당선인도 같은 날 출마를 선언했다. 조 당선인은 입장문을 통해 “국회 국토교통위원장과 예결위 간사, 당 정책위의장 및 사무총장 등을 역임하며 실력을 검증 받았다”며 “특히 지난 1년 8개월 간 당 사무총장으로서 이 대표와 함께 민주당을 지키고 총선 승리를 이끄는 성과를 냈다”고 말했다. 확 바뀐 패러다임 조 당선인은 이번 총선의 민의를 ‘민생회복과 윤정부에 대한 심판과 견제를 제대로 하라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22대 국회는 국민의 명령을 제대로 실현해야 한다”며 “당원과 국민의 뜻을 받들고 개혁국회의 성과를 낼 국회의장이 선출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추 당선인은 후보 마감일인 지난 8일 기자회견을 통해 공식적으로 출마를 선언했다. 그는 “민의를 따르는 ‘개혁국회’를 만들어 민생을 되살리고 평화를 수호하며 민주주의를 회복해야 한다”며 “첫 번째 민생 입법으로 이 대표가 제안한 신용사면 등 처분적 법률를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친명 좌장으로 불리는 5선의 민주당 정성호 당선인도 같은 날 “국회의원들의 의정활동을 빛나게 하는 ‘뒷바라지 국회의장’이 되겠다”며 출사표를 던졌다. 정 당선인은 “이번 총선의 민의는 소극적 국회를 넘어서는 적극적이고 강한 국회를 실현하는 것”이라며 “이를 받들어 국회의 권위를 회복하고 민생과 민주주의의 효능을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국회를 만들어 가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막판까지 고심을 거듭하던 5선 민주당 박지원 당선인은 “지금은 제가 나설 때가 아니라고 결론을 내렸다”며 불출마를 선언했다. 이어 “22대 국회가 국민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우리 당의 좋은 국회의장 후보가 선출되기를 기대한다”며 “이 대표와 박찬대 원내대표를 중심으로 나라를 살리고 민주당이 성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렇듯 4파전으로 치러질 예정이었던 의장 선거는 주말 사이 급격한 변화를 보였다. 지난 12일, 조 당선인과 정 당선인이 자진사퇴 의사를 밝히면서 추 당선인과 우 당선인으로 후보군이 압축됐다. 조 의원은 이날 추 당선인과 후보 단일화에 합의한 뒤 “민주당이 대동단결해서 총선 민심을 실현하는 개혁 국회를 만들기 위해 제가 마중물이 되고자 의장 후보직을 사퇴한다”며 “추 후보가 연장자라는 점을 존중했다”고 설명했다. 정 당선인도 입장문을 내고 “민주당의 승리와 정권교체를 위해 더 열심히 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조 당선인과 달리 추 당선인을 공개적으로 지지하진 않았다. 정치권에서는 친명계 핵심부가 의장 선거를 앞두고 추 당선인으로 교통정리에 나섰다고 해석했다. 추 당선인은 후보 중 가장 선수가 높고 연장자인 만큼 불필요한 갈등을 줄이기 위해 관례에 따랐다는 설명이다. 일각에서는 추 당선인의 선명성을 높이 샀다는 분석도 뒤따른다. 선명성이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은 데에는 김 의장의 과도한 중립성이 주된 원인으로 꼽힌다. 풀어지는 중립 기어 추 당선인은 “옳은 방향으로 갈 듯 폼은 다 재다가 갑자기 기어를 중립으로 넣어버리고 멈춰버려 죽도 밥도 아닌, 다 된 밥에 코를 빠트리는 우를 범한 전례가 있다”고 꼬집은 바 있다. 선명성 경쟁에 대해 최요한 시사평론가는 <일요시사>와의 전화 통화서 ‘김진표 학습 효과’라고 해석했다. 최 평론가는 “김 의장은 ‘일단 여야가 합의를 해오지 않으면 상정하지 않겠다’는 철학을 갖고 있는데 대다수의 민주당 당원이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며 “때문에 22대 국회의장 선거에서는 기계적 중립이 필요 없다는 말들이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의장 선거를 약 일주일 앞두고 “기계적으로 중립만 지켜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는 기류가 점차 굳어지는 분위기다. “의장이 아닌 정부·여당과 맞서 싸우기 위한 당 대표를 뽑는 것 같다”는 여권의 비판이 제기되는 이유다. 지난 3일 친명계 박찬대 의원이 신임 원내대표로 선임된 가운데 의장까지 친명 체제로 꾸려진다면 쏠림 현상이 가속화될 것이란 우려가 제기된다. 특히 22대 국회처럼 여소야대 국면서 야당이 강경 입법 드라이브를 예고한 상황이라면 더욱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 현재 민주당은 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9개의 법안을 21대 국회서 마무리하겠단 방침이다. 폐원 전 합의에 이르지 못하면 22대 국회로 넘어가게 된다. 그동안 거부권이 행사된 법안은 양곡관리법을 비롯한 ▲간호법 ▲노란봉투법(노조법) ▲방송 3법 ▲김건희 여사 특검법 ▲대장동 50억 클럽 특검법 등이다. 민주당 박찬대 신임 원내대표는 “우선순위를 정해 순차적으로 발의할 수 있다”면서도 “필요 시에는 이들 법안을 묶어 ‘패키지’ 형태로 재발의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여기에 민주당이 국회 법사위와 운영위원회(이하 운영위) 등 중요 상임위를 모두 가져가겠다는 의지를 보이면서 여당은 협상에 난항을 겪을 것으로 예상된다. 만일 민주당이 국회의장과 법사위원장을 모두 가져가면 야당이 추진하는 법안을 빠르게 통과시킬 수 있게 된다. 대통령 재의요구권인 거부권 외에는 막을 방법이 없는 만큼 여당의 부담이 가중되는 셈이다. “한쪽으로 기운 의장은 꼭두각시” 우려에도 ‘찐명’ 내세운 이유? 그동안 국민의힘은 민주당이 의석수로 법안을 밀어붙일 때마다 ‘입법 폭주’라며 “타협과 절충으로 이뤄낸 협치의 싹이 또다시 거대 야당의 폭주로 꺾였다”고 비판해 왔다. 국민의힘 김민수 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국회의원 개인의 목소리를 억제하고 이 대표의 엄명을 따르라 강요하는 것은 국민 기만행위”라고 지적했다. 김 대변인은 “대한민국 의전 서열 2위이자 입법부의 수장인 국회의장 후보로 나선 민주당 후보들조차 이 대표의 눈에 들어보겠다며 위헌적인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며 “이 대표 연임 추대론까지 밀어붙이고 있는 민주당은 전체주의 집단으로 전락한 것인가”라고 견제에 나섰다. 민주당 단일 체제에 우려를 표하는 건 여권뿐만이 아니다. 김 의장도 “한쪽 당적을 계속 가지고 편파된 의장 역할을 하면 그 의장은 꼭두각시에 불과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는 MBN과의 인터뷰서 중립의무를 비판한 후보를 겨냥한 듯 “조금 더 공부하고 우리 의회의 역사를 보면 그런 소리한 사람 스스로 부끄러워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의장 선거를 앞두고 의장의 중립적인 태도에 회의적인 목소리가 커지자 이를 비판한 것으로 풀이된다. 김 의장은 “국회는 대화와 타협을 통해 국가적 현안을 여야 간에 협의하라고 국민이 위임한 기관 아니냐”며 “끝까지 협의해야 제대로 된 선진 민주정치의 모습”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경제력이나 국민의 의식은 다 높은 수준에 가 있는데 정치인들만 ‘올 오어 낫싱(all or nothing. 전부 아니면 전무)’의 정치를 한다”며 지적하기도 했다. 싹쓸이 한다면… 정치권에서는 의장 후보들이 선명성을 강조하는 모습을 두고 이례적이라는 반응이 나온다. 김 의장의 국회 운영 방식에 갈증을 느꼈다는 평이 대부분이지만 거대 야당에 힘을 실어주기 위한 ‘실행력 있는 의장’이 필요하다는 의견에 점차 무게가 쏠린다. 민주당 내에서는 ‘명심(이재명 대표의 의중)’과 ‘민심’은 다르다며 분명하게 선을 긋고 있다. 하지만 당 일각에선 “여당과 협치보다는 총선서 승리를 이끈 이 대표와 호흡이 잘 맞는 사람이 의장직에 어울리지 않겠냐”는 설이 나오면서 민주당이 22대 국회 고삐를 꽉 죄는 계기가 될 것으로 내다봤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민주당은 민심을 빠르게 좇지 못한 김 의장이 비판받는 모습을 지켜봐 왔다”며 “(민주당이)국회를 쥐더라도 민심을 잘 파악한다면 지금과 같은 비판은 잦아들 것”이라고 전망했다. <hypak28@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국회부의장도 친명전 차기 국회부의장(이하 부의장)을 거머쥐기 위한 경쟁도 막을 올렸다. 야당 몫의 부의장 후보로 4선의 남인순·민홍철·이학영 의원이 물망에 오르면서 해당 선거 역시 최소 3파전으로 치러질 예정이다. 후보들은 이번 총선 승리의 의미를 강조하며 국회의장(이하 의장)과 합을 맞춰 22대 국회를 ‘개혁 국회’로 이끄는 데 방점을 찍었다. 부의장은 의장과 달리 당적 보유가 가능하다. 이들 중 대다수가 친명(친 이재명)으로 분류되는 만큼 22대 국회가 개원하는 동시에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영향력이 강화될 것으로 관측된다. <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