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아트인> 비디오아트 선구자 박현기

작고 20주기 그가 남긴 질문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갤러리현대가 박현기의 개인전 ‘I’m Not a Stone’을 준비했다. 작고 10주기를 기념해 2010년 회고전 형식으로 진행한 ‘한국 비디오아트의 선구자 박현기’ 전과 2017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전에 이어 갤러리현대에서 준비한 박현기의 3번째 개인전이다. 

2000년 세상을 떠난 박현기는 ‘한국 비디오아트의 선구자’로 국내외 명성이 높다. 대학에서 회화와 건축을 공부하고, 미술가와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활약한 그는 조각과 설치, 판화, 비디오, 퍼포먼스, 회화, 드로잉, 포토미디어 등 다양한 매체를 전방위로 실험하며 도전적인 작품을 발표했다.

무제

‘I’m Not a Stone’ 전은 박현기의 창작활동에서 전환점이 되는 기념비적 대표작을 집중 조명했다. 이번 전시는 비디오 아티스트라는 수식에 가려진 그의 방대한 예술세계를 접할 수 있는 기회다. 또 아시아 현대미술사의 중요한 아티스트로 재평가되고 있는 그의 미술사적 성취와 위상을 확인할 수 있다. 

출품작 10점은 1978년부터 1997년까지 그의 커리어를 폭넓게 아우른다. 강가의 돌을 전시장에 그대로 옮겨와 인간과 예술, 그리고 자연과의 관계를 시적으로 성찰한 ‘무제’, 신체와 공간, 미술과 건축에 관한 자신만의 아이디어를 유머러스하게 풀어낸 설치작품 ‘무제(ART)’ 등을 유족과 미술평론가 등으로 구성된 ‘박현기 에스테이트’의 자문과 감수를 거쳐 다시 제작했다. 

지하전시장 초입에는 조명을 받아 반짝이는 작은 돌탑 3점 ‘무제’가 있다. 전시장 바닥에 좌대 없이 놓인 이 돌탑들은 넓적하고 둥그스름한 형태의 크기가 다른 돌 6~10개를 성인의 허리춤이나 무릎 아래 정도의 높이로 층층이 쌓아 올린 모습이다.


옛 마을 어귀에 잡석을 정성껏 올려 쌓은 돌탑을 떠올리게 한다. 

미술가와 디자이너 사이
2000년 위암으로 별세

박현기에게 돌은 태고의 시간과 공간을 포용하는 자연이며 선조들의 미의식을 간직한 정신적 산물이자 세상을 비추는 카메라면서 영상 이미지가 상영되는 스크린이었다. 그는 작가노트에 한국전쟁 당시 피난길에서 마주한 고갯마루의 성황당 돌무더기 전경을 잊지 못한다고 적었다.

이런 체험과 기억은 그가 작품의 주재료로 돌을 사용하는 계기가 됐다. 

지하전시장 한편에서는 박현기가 1983년 수화랑의 개인전에서 관람객 없이 펼친 퍼포먼스를 사진으로 기록한 아카이브 자료 영상이 재생된다. 박현기는 당시 등에는 ‘I’m Not a Stone’, 가슴과 배에 걸쳐서 ‘stone and so forth’라고 쓴 채 나체로 돌무더기 사이를 탐색하듯 걷고 서성이고 뛰었다. 

전시장 1층에는 목재를 조립해 만든 ‘무제(ART)’가 있다. 1986년 인공갤러리의 개인전에서 발표한 이 작품은 관람객의 시점과 위치에 따라 작품과 공간에 관한 지각의 범위가 달라진다. 관조의 대상으로만 존재하던 미술에 대한 기대를 깨뜨리는 작품이다. 

세 개의 구조물은 직선과 곡선, 수직과 수평이 교차하며 구성됐다. 관람객은 세 구조물 사이와 구조물의 좁은 내부를 오가며 작품을 체험하고, 구조물로 새롭게 구획된 공간의 변화를 탐색하는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관람객은 이 작품의 온전한 형태와 명확한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다. 세 구조물은 각각 알파벳 A, R, T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그 높이 때문에 조감의 시선에서만 전체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관람객들은 작품 사이를 헤매면서도 그 모양을 명확히 알 수 없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놓인다. 

박현기에게 공간은 늘 해석과 분석의 대상이었다. 그는 전시장을 ‘도심의 건축 공간’으로 설정했다. 1980년대 초반까지 영상을 담은 TV와 돌들을 탑이나 돌무덤 등의 건축적 구조로 구현한 작품에 매진한 그는 1980년대 중반부터 비디오를 배제하고 벽돌과 나무 등 건축 자재만 사용한 공간 설치작업에 몰두했다. 

돌탑 쌓고 공간 넘나들고
포르노와 티베트 불교 결합

2층 전시장에서는 박현기의 대표작인 TV 돌탑 ‘무제’와 ‘만다라’ 연작을 감상할 수 있다. 두 개의 큰 돌이 하단에 쌓여 기단 역할을 맡고, 그 위로 4대의 대형 브라운관이 차곡차곡 이어진다. 개별 TV 모니터에는 두 돌을 쌓은 중간 지점이 보이는데, TV 모니터가 쌓여 화면 속 돌들이 자연스럽게 이어진 것과 같은 환영을 만든다. 

만다라 시리즈는 박현기가 이전에 발표한 정적이고 명상적인 비디오 작업과는 달리, 디지털 편집기술을 적용한 역동적인 비디오 작품이다. 초당 30프레임 이상의 짧은 영상 클립은 100여겹이 넘는 레이어로 직조돼 입체적으로 움직이는 착시를 일으킨다. 

프레임의 기초를 이루는 이미지는 찰나적인 포르노 영상이다. 포르노 영상 위로 티베트 불교에서 만다라 수련의 교본으로 즐겨 사용하는 불교 도상 모음집을 얹었다. 여기에 우주창조의 이치를 81자로 풀이한 천부경의 한자가 겹쳐진다.

가장 세속적인 인간의 본능 행위와 종교적 도상, 천지창조와 그 운행의 묘리를 설명하는 데 사용되는 기호가 합쳐진 것이다.

만다라

무수한 레이어로 완성된 만화경적 이미지와 리드미컬한 움직임으로 관람객의 시선을 붙잡는 만다라는 박현기가 창조한 비디오아트의 정수로 평가받는다. 갤러리현대 관계자는 “만다라 작품에는 그가 평생 질문한 인간과 자연, 나아가 우주의 근원과 그 존재에 대한 성찰과 숭고한 세계관이 반영돼있다”고 전했다.


jsjang@ilyosisa.co.kr

 

[박현기는?]

1942년 일제강점기 일본 오사카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45년 해방 직전 그의 가족은 고향인 대구로 돌아와 정착했다.

초등학교부터 미술에 남다른 재주를 보였던 그는 고등학교 때 미술부 활동을 하면서 각종 미술대회에서 수상했다.

1961년 홍익대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했다. 

1974년부터 1979년까지 5회에 걸쳐 진행된 ‘대구현대미술제’의 창립 멤버로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1978년 서울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개최했으며, 작고 후 15년이 지난 2015년 그가 남긴 풍성한 아카이브를 중심으로 작품세계를 조망한 회고전 ‘박현기 1942-2000 만다라’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열렸다.

1999년 8월경 위암 말기 판정을 받고, 2000년 1월13일 길지 않은 생을 마감했다.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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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국방부, 내란 문건 ‘대청소 프로젝트’

[단독] 국방부, 내란 문건 ‘대청소 프로젝트’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김철준 기자 = 12·3· 내란 사태와 관련된 국방부 문건이 대규모로 파쇄된 것으로 파악됐다. 이 조치는 오영대 전 인사기획관의 지시로 이뤄졌다. 오 전 기획관은 검찰 특수본과 재판서 정보사와 수사2단 인사안의 문제점을 증언했던 인물이다. 자신이 비상계엄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사실을 숨기기 위해 수사에 협조한 것으로 의심되는 대목이다. “올해 초 신년맞이 대청소라면서 문서를 대량으로 파쇄했다.” <일요시사>와 접촉한 국방부 직원들의 말이다. 파쇄된 문건들은 12·3 내란 사태와 관련된 자료라고 한다. 지시자는 오영대 전 국방부 인사기획관이다. 검찰 수사에 협조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으나 실상은 다르다는 게 군 내부자들의 주장이다. 뭘 숨기나 안규백 국방부 장관이 지난달 말 취임하면서 시작한 첫 번째 군 개혁은 인사다. 신임 인사기획관에 일반 공무원 출신인 이인구 군사시설기획관을 임용한 건 안 장관이 강조해 왔던 ‘군 문민통제’와도 맞닿아 있다. 인사기획관은 본래 예비역 장성이 맡아왔다. 이 신임 기획관의 전임자였던 오 전 기획관도 예비역 준장 출신이다. 군 내부에서는 국방부에 여전히 12·3 내란 사태에 협조한 군인들이 남아 있다고 지적한다. 핵심으로 인사기획관실의 총괄과이자 인사기획관의 일정, 예산 등을 모두 관리하는 인사기획관리과가 언급된다. 다수의 국방부 관계자들은 “오 전 기획관은 물러났지만 책임져야 할 다수의 인물이 아직 자리를 보전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 부서의 간부들은 전부 육군사관학교 출신이다. 과장 김모 대령은 오 전 기획관이 대령이었을 때 소령으로 근무했고, 총괄 이모 중령은 오 전 기획관이 특전사 여단장을 역임했던 1공수여단서 중대장과 707중대장을 거쳤다. 장군인사팀장 김모 대령은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이 수도방위사령관으로 근무했던 시절 비서실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김 전 장관과 가깝거나 육사 출신인 이들이 국방부 인사의 핵심부서인 인사기획관리과에 포진하면서 계엄 실행을 위한 보직 이동이 이뤄진 셈이다. 김 전 장관은 실제 대통령경호처장일 때부터 노상원 전 국군정보사령관과 군 인사에 대해 논의했다. 직무에서 배제되지 않은 인사기획관리과 간부들은 ‘장관이 모든 책임을 오 전 기획관에게 묻는 형식으로 퇴직을 시켰으니 우리는 지시를 받아 어쩔 수 없이 한 것처럼 조용히 지내면서 정부초기 개혁의 소나기만 피하면 진급 가능’이라며 서로서로 쉬쉬하고 있다고 한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인사기획관리과 간부들은 내란 이후인 지난해 12월 중순 오 전 기획관의 지시에 따라 문건 파쇄를 계획했다. 김 전 장관이 물러난 이후 인사기획관리과장 김 대령 및 총괄인 이 중령 외에는 계획되지 않은 대면보고는 금지했고 내부 보안에 심혈을 기울였다. 인사과 간부들 계엄 실패 후 12월 계획···1월 파쇄 “지시자는 검찰 수사 응했던 오영대 전 인사기획관” 한 달여 뒤 이 중령은 모든 과에 ‘신년맞이 대청소’를 하라고 전파했다. TF 자리 배치와 오래된 문건을 정리한다며 유독 인사기획관리과만 복도로 책상을 빼고, 대량 세절이 가능한 세절실을 예약해 엄청난 양의 문서들을 파쇄했다. 여기엔 내란 핵심 파일도 포함된 것으로 파악됐다. 안 장관은 이와 관련해 국회에서 오 전 기획관에게 여러 차례 질문한 바 있다. 당시 오 전 기획관이 당황해하며 우물쭈물하는 모습이 담긴 동영상이 퍼지기도 했다. 이 중령은 동영상을 보며 웃는 직원들의 명단과 안 장관에게 제보한 인물을 색출하기 위해 탐문 활동을 벌여 오 전 기획관에게 추정해 보고했다. 이들은 모두 오 전 기획관으로부터 승진추천, 성과상여금, 각종 포상 등 인사상 불이익을 본 것으로 전해진다. 이들이 문건을 파쇄한 이유는 내란에 적극적으로 가담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내란 당일 오후 10시가 넘은 시각임에도 퇴근하지 않고 사무실에 있던 오 전 기획관의 지시를 받은 이 중령은 각 과의 총괄 담당자들을 소집해 ‘계엄 선포가 됐는데 선제적으로 인사 관련 조치를 왜 안 하냐’ ‘합참에는 계엄사령부가, 지작사령부에는 지역계엄사령부가 곧 창설될 텐데 각 군 본부 및 지작사와 인사 지침을 협의해 계엄령 취지에 맞게 배포하라’고 강조했다. 특히 오 전 기획관은 계엄 해제 결의안이 국회 본회의 테이블을 통과했음에도 합동참모본부 전투통제실에서 이 중령에게 “(계엄이) 해제되긴 했는데 다시 시행될 수도 있으니 빨리 계엄사 창설 지원을 위한 인사 조치를 완성하고 지작사 병력에 대한 휴가 지침 및 통제 등 건의 사항을 받아보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오 전 기획관은 내란 직전까지 김 전 장관의 의중에 따라 군 인사를 반영했다. 최근 내란 특검팀이 군 장성급 인사 자료 확보에 나선 것도 이에 관해 들여다보기 위한 것으로 확인됐다. 특검팀은 최근 국방부 장군인사팀과 육군본부 장군인사실 등을 압수수색해 해당 부서 내 인사 관련 파일 등을 확보했다. 정치권에선 지난 2023년 11월과 지난해 4월 이례적인 인사가 이뤄졌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진급에 절박한 군 인사들을 계엄 실행 세력으로 활용했단 의혹이다.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의원은 “윤석열정부 장군 인사는 특이하고, 이례적인 경우가 유독 많았다”며 “인사를 통해 군을 장악하고, 내란을 준비했다는 의혹 관련 특검의 철저한 수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2·3차 계엄 대비 문건 없애” 증거 인멸 국회서 해제 불구 지작사와 인사 논의? 내란중요임무종사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 이진우 전 수도방위사령관, 곽종근 전 특수전사령관은 지난 2023년 11월 인사에서 소장에서 중장으로 진급했다. 박안수 전 계엄사령관은 ‘75주년 국군의 날 행사기획단장 겸 제병지휘관’ 등 한직에서 2023년 10월 육군참모총장에 발탁됐다. 지난해 4월엔 지휘부에 이어 작전본부 인사가 이어졌다. 원천희 당시 육군 소장이 4차 진급으로 합참 정보본부장으로 승진했고, 이승오 소장은 군단장을 거치지 않고 합참 작전본부장으로 진급했다. 안찬명 당시 육군22사단장은 임명 5개월 만에 합참 작전부장으로 보직을 옮겼다. 통상 사단장은 1년 반~2년가량 보직을 맡는다. 군 안팎에서 이례적이란 평가가 나왔던 이유다. 경질 위기이던 문상호 전 정보사령관은 유임됐다. 그는 지난해 6월 정보사 군무원의 블랙요원 명단 국외 유출 사건 및 박민우 전 정보사 100여단장과의 갈등 등으로 논란의 중심에 섰다. 당시 국방부 장관이던 신원식 전 안보실장은 지난해 8월 국회에서 “후속 조치를 강하게 할 생각”이라고 언급했지만, 다음 달 본인이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검찰 비상계엄 특별수사본부는 군 관계자에게서 “노 전 사령관과 김 전 장관이 장군들 인사에 대해 논의했고 오 전 기획관에게 전달됐다”는 진술을 확보한 바 있다. 위기감을 느낀 오 전 기획관은 특수본 수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기 시작했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오 전 기획관의 특수본 진술조서를 보면 그는 “신원식 (전 국방부) 장관이 저와 원천희 국방부 정보본부장에게 문 전 사령관에 대한 보직해임·정보사령관 교체 검토를 지시했으나 지난해 9월6일, 김 전 장관이 취임하면서 문 전 사령관에 대한 ‘현 보직 유지’를 지시했다”며 “납득하기 어려운, 이해하기 어려운 인사였다”고 했다. 앞뒤 달랐다 오 전 기획관은 “(문 전 사령관이 박 준장으로부터 고소당한 혐의가) 어느 정도 사실로 확인됐지만 문 전 사령관에 대한 인사 조치는 없었다”며 “공론화된 문제고 어느 정도 사실로 확인됐는데도 이렇게 유야무야 넘어가는 일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hounder@ilyosisa.co.kr>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