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파고든’ 사이코패스 막전막후

우리 주변에 ‘괴물’이 산다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사이코패스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했을 때 대중들은 생소함을 느꼈다. 일반 사람과는 다른 일종의 ‘괴물’로 여기는 인식도 강했다. 하지만 범죄 용의자가 사이코패스로 판명 나는 일이 늘어나면서 대중과의 거리감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 사이코패스가 일상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 정인양 양모 ⓒEBS

16개월 영아 정인양을 학대해 숨지게 한 혐의를 받고 있는 양모 장모씨가 심리분석 검사에서 ‘사이코패스’ 성향을 보였다는 증언이 나왔다. 지난 3일 서울남부지법에서 열린 장씨의 3차 공판에서다. 

공격성↑
공감력↓

대검찰청 심리분석관 A씨는 이날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해 장씨에 대한 임상심리평가 결과를 설명했다. 그는 “관련 검사에서 장씨는 사이코패스로 진단되는 25점에 근접한 22점을 받았다”고 진술했다. 임상심리평가는 대상자의 인지능력·심리상태·성격특성·정신질환 여부·재범 위험성 수준 등을 검사하는 기법이다. 

앞서 검찰은 1차 공판기일에서 살인죄가 적시된 공소장 변경을 신청하면서 장씨에 대한 심리생리검사·행동분석·임상심리평가 등이 담긴 ‘통합심리분석 결과보고서’를 법원에 근거로 제출한 바 있다. 

A씨는 “평가 결과 장씨의 지능과 판단 능력은 양호했지만,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이 결여된 모습을 보였다”며 “내면의 공격성과 사이코패스적 성향이 강한 점 등에 미뤄보면 아이를 밟거나 학대를 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됐다”고 말했다. 


또 심리생리검사와 행동분석 결과를 근거로 ‘살인의 고의성’을 부인했던 장씨 진술의 신빙성이 떨어진다고도 덧붙였다. 심리생리검사는 사람이 거짓말할 때 보이는 생리적 반응의 차이를 간파해 진술의 진위를 추론해 내는 기법이다. 행동분석은 진술자의 언어·비언어적 행동 변화를 관찰해 거짓말 여부를 파악하는 분석 방법이다. 

장씨는 지난해 6월부터 10월까지 4개월에 걸쳐 정인양을 상습 폭행, 학대하고 10월13일 정인양의 등에 강한 충격을 가해 숨지게 한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장씨의 남편 안씨도 아내의 학대 사실을 알고 별다른 조처를 하지 않은 혐의로 함께 기소됐다.

전혀 다른 종류의 범죄자로 인식
과거 비해 심리적 거리감 좁아져

장씨는 재판 과정에서 아이를 고의로 바닥에 던지거나 발로 밟은 사실이 없다고 주장했다. 아이의 복부에 외력이 가해진 부분에 대해서는 ‘실수로 떨어뜨리고 심폐소생술을 했을 뿐 다른 외력은 없었다’고도 했다. 하지만 행동분석에서 장씨의 진술에 신빙성이 없다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두 해도 못 살고 세상을 떠난 정인양에 대한 양부모의 학대 소식이 알려지자 대중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세상을 떠나기 전 힘없이 앉아있던 정인양의 모습이 어린이집 CCTV를 통해 공개되면서 안타깝다는 반응이 쏟아졌다. 이런 상황에서 양모 장씨에게 사이코패스 성향이 있다는 심리평가 결과가 공개되자 대중의 분노는 더 커지는 모양새다.
 

▲ 유영철과 강호순

사이코패스는 반사회적 인격장애증을 앓고 있는 사람을 말한다. 1920년대 독일의 쿠르트 슈나이더가 처음 소개한 개념으로 다른 사람의 고통에 무감각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문제는 이 같은 특징이 평소에는 내부에 잠재돼있다가 대부분 범행을 통해서만 밖으로 드러난다는 점이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사이코패스라는 용어가 이슈화된 건 유영철 사건 이후다. 유영철은 2003년 8월부터 2004년 7월까지 21명의 여성을 살해했다. 주로 부유층 노인과 여성을 범행 대상으로 삼았다. 자신이 직접 만든 망치나 칼 등을 이용해 범행을 저질렀고, 증거인멸을 위해 불을 지르거나 시체를 토막 내 야산에 묻기도 했다. 


프로파일러들이 ‘최악의 연쇄살인범’으로 꼽는 정남규는 2006년에 검거됐다. 2004년 1월부터 2006년 4월까지 13명을 살해하고 20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당시 유영철의 소행으로 알려졌던 서울 이문동 살인사건의 진범이기도 하다. 그는 체포 이후에도 “더 이상 살인을 못 할까 봐 조바심이 난다”고 말했을 정도로 살인에 집착했다. 

유영철 사건
널리 알려져

길을 가던 어린 아이나 집에 있던 부녀자를 성폭행하고 둔기로 내려치는 잔인한 수법을 사용했다. 범행 순간 쾌감을 느끼는 사이코패스의 전형으로 알려졌다.

국내 1호 프로파일러 권일용 동국대 경찰사법대학원 겸임교수는 정남규에 대해 “제가 만난 1000명의 범죄자 중 가장 잔혹했다”고 말했다. 그는 2009년 11월21일 서울구치소에서 목을 매 자살을 기도,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이튿날 새벽 사망했다. 

2009년에는 강호순이 검거됐다. 2006년 9월부터 2008년 12월까지 경기도 서남부 일대에서 여성 10명을 납치하고 살해했다. 성폭행이나 성관계를 위해 피해 여성들에게 접근해서는 범행 이후 곧바로 살해했다. 특히 희생자 대부분을 스타킹으로 목 졸라 살해한 뒤 시신을 알몸 상태로 매장하는 등의 수법을 되풀이했다. 

여성에게 살인 충동을 느끼고 사냥하듯 접근해 잔혹하게 살해한 범행 수법에서 전형적인 사이코패스의 특징이 나타난다는 분석이 나왔다. 강호순은 검거 이후에도 수사관들에게 ‘증거가 있으면 제시해보라’는 식으로 말하며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않는 듯 굴었다고 한다. 
 

▲ 연쇄살인범 정남규

특히 당시 강호순의 이웃들은 ‘아이들에게 잘하는 친절한 아버지의 이미지’로 그를 기억했다. 반면 함께 살았던 전 부인 등에게는 폭력적인 성향을 보였다고 한다. 이런 다중인격 역시 사이코패스의 전형적인 특성이라는 분석이다. 

사이코패스의 개념이 대중에 널리 알려진 건 유영철 때부터지만 그보다 앞서 연쇄살인을 저질렀던 정두영도 사이코패스의 전형적인 특성을 보였다. 그는 1999년 6월부터 2000년 4월까지 부산과 경남 지역에서 9명을 살해하고 10명을 다치게 했다. 18세 때 살인을 저질러 11년형을 선고받은 정두영은 출소한 이후에도 살인을 멈추지 않았고, 결국 2000년 사형수가 됐다.

대중매체
흔한 소재

정두영은 금품을 훔치다 들키면 목격자를 흉기나 둔기 등으로 잔혹하게 살해했다. 검거된 후 살해 동기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내 속에 악마가 있었던 모양”이라고 말했다. 유영철이 검찰 조사에서 “2000년 강간죄를 저질러 교도소에 수감돼있을 당시 정두영 연쇄살인사건에 대해 상세하게 보도한 월간지를 보고 범행에 착안하게 됐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2016년 8월 대전교도소에 수감돼있던 정두영은 탈옥 시도를 했다 발각돼 사회를 또 한 번 발칵 뒤집었다.

최악의 장기미제사건으로 손꼽힌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진범 이춘재도 뒤늦게 사이코패스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춘재는 처제를 포함해 총 15명의 여성을 살해하고 9명의 여성을 상대로 성폭행과 강도질을 한 것으로 확인됐다. 살해된 피해자들 역시 대부분 성폭행을 당한 후 죽임을 당했다. 
 

▲ 화성연쇄살인사건 진범으로 밝혀진 이춘재

이춘재는 범행 동기에 대해 별다른 진술을 하지 않았지만 경찰은 수십 차례에 걸친 프로파일러 면담 결과 등을 토대로 그의 범행 동기를 ‘변태적 성욕 해소’로 판단했다. 또 사이코패스 검사에서 그는 “피해자의 아픔과 고통에 대해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등 사이코패스 성향이 뚜렷하다”는 결과를 받았다. 

경찰 관계자는 “이춘재는 내성적 성격으로 자기 삶에서 주도적 역할을 못하다가 군대에서 처음으로 성취감과 주체적 역할을 경험한 뒤 전역 후에는 무료하고 단조로운 생활로 인해 스트레스가 가중된 욕구불만의 상태에 놓였다”며 “결국 욕구 해소와 내재한 욕구불만을 표출하고자 가학적 형태의 범행을 한 것으로 분석된다”고 말했다.

이춘재·정두영·유영철·정남규·강호순 등의 연쇄살인범들은 대부분 사이코패스로 판명됐다. 이들은 대중들에게 일종의 ‘괴물’처럼 인식됐다. 범죄자들 사이에서도 ‘돌연변이’에 가까운 독특한 존재들로 여겨진 것. 

정인이 양모도 같은 성향 보여 
일각에선 “언론의 과잉 보도”

하지만 최근 사이코패스에 대한 대중들의 심리적 거리감이 조금씩 좁혀지는 모양새다. 연쇄살인, 연쇄 성폭행 등의 초강력 범죄를 저지른 용의자들에게만 나타나는 듯했던 사이코패스 성향을 가진 범죄자가 이전보다 비교적 흔하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대중매체에서 사이코패스를 소재로 하는 창작물을 많이 쏟아내고 있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아동성폭행 혐의로 12년형을 선고받고 지난해 출소한 조두순의 경우 사이코패스 테스트에서 29점을 받았다. 26~27점을 받은 강호순보다도 높은 점수다. 이유라 경기경찰청 과학수사계 범죄분석관이 수사전문 월간지 <수사연구>에 기고한 ‘아동성범죄의 특성과 조두순’에 나온 내용이다.


조두순은 특히 죄책감과 공감 능력이 없고 자신의 행동을 통제하는 능력이 부족한 것으로 나타났다. 충동성과 무책임성, 장기적인 목표 부재, 기생적인 생활방식 등의 항목에서도 정신병적 성향이 두드려졌다.

기고에 따르면 2008년 12월 검거 직후 면담 과정에서 보인 행동의 특징을 토대로 조두순은 분노 감정에 민감하고 매우 공격적인 성향이 있다고 밝혔다. 

앞서 2017년 여중생을 살해해 시신을 유기한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어금니 아빠’ 이영학의 경우도 사이코패스 성향이 짙은 것으로 파악됐다. 그는 사이코패스 테스트에서 40점 만점에 25점을 받았다. 

당시 서울청 과학수사계 소속 이주현 프로파일러는 “어린 시절부터 장애로 놀림을 당하거나 따돌림을 당한 이씨가 친구들을 때리는 등 보복적 행동을 보였다”며 이 과정에서 사이코패스 성향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판단했다. 이씨의 이중생활 역시 사이코패스 성향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실제로는
얼마 없다?

일각에선 언론이 사이코패스의 존재에 대해 과잉 불안감을 조성한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일반인들이 사이코패스의 존재를 지나치게 과장해서 인식하고 있다는 연구 결과가 2015년에 나오기도 했다. 당시 대한범죄학회 최신호에 실린 <사이코패스 관한 대중의 인식과 두려움> 논문에 따르면 응답자들은 평균 범죄자들의 23.4%가 사이코패스일 것이라고 답했다. 앞서 2000년에 발표된 연구논문이 추정한 범죄자들의 사이코패스 비율 11%의 두 배가 넘는 수치다. 


<jsjang@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사이코패스 테스트 ‘25점 넘으면 위험’

사이코패스를 진단하는 도구로는 캐나다의 심리학자 로버트 헤어가 만든 PCL-R이 주로 사용된다.

조은경 한림대 심리학과 교수와 이수정 교수가 한국판으로 표준화했다.

PCL-R은 20개 문항으로 구성돼 있다. 피검사자는 전문 검사자가 불러주는 문항을 듣고 ‘아니다(0점)/아마도(1점)/그렇다(2점)’로 나눠서 답한다. 

만점은 40점이고, 우리나라에선 25점 이상이면 사이코패스로 분류한다.

미국은 30점 넘어야

미국은 30점 이상부터 사이코패스 성향이 있다고 분석한다.

우리나라가 미국에 비해 범죄 기록이 다양하지 않고 아동·청소년기 기록이 부족하기 때문에 생긴 차이로 전문가들이 기준점을 보정했다. 

‘과도한 자존감’ ‘죄책감 결여’ ‘타인을 목표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간주’ ‘청소년 비행’ 범죄 경력‘ 등에 대해 묻는다.

유영철은 38점, 중곡동 주부 살해범 서진환은 31점, 조두순은 29점, 강호순은 27점, 이영학은 25점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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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구성원의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된 수장이 반년 만에 끌려 내려왔다. 막말에 가까운 강한 발언과 제멋대로인 행보가 탄핵을 불렀다. 강성 수장이 물러나면서 변화를 기대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대화의 문이 열릴 것인가, 더 높은 벽이 쌓일 것인가. 임현택 대한의사협회(이하 의협) 전 회장이 3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탄핵당했다. 지난 5월 취임 이후 6개월 만으로 의협 역사상 2번째, 최단기간 내 불명예 퇴진한 회장이 됐다. 첫 번째는 2014년 4월 임기 1년여를 앞두고 탄핵당한 노환규 전 회장이다. 두 번째 최단기간 의협은 지난 10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의협회관서 임시대의원총회를 열고 임 전 회장의 불신임안을 처리했다. 참석 의원 224명 가운데 170명(75.9%)이 찬성했다. 반대는 50명, 기권 4명이다. 전체 대의원 249명 가운데 224명(91.1%)이 표결에 참여했다. 의협 정관에 따르면, 회장 불신임안은 제적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출석하고, 출석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하면 가결된다. 지난 3월 임 전 회장은 선거서 유효 투표수 3만3084표 중 2만1646표를 받아 당선됐다. 65.43%의 압도적인 지지다. 의협 회장 선거는 정부의 의대 정원 증원 발표로 의정 갈등 수위가 높아지고 있을 무렵에 치러졌다. 전공의가 병원을 떠났고 정부가 ‘2000명’을 강조하던 시기였다. 의협 회원들은 강성 중의 강성으로 분류되는 임 전 회장에게 힘을 실었다. 임 전 회장의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갔던 것일까? 임 전 회장의 언행은 사사건건 도마 위에 올랐다. SNS에 올린 글, 공식 석상서 했던 발언 등이 막말 논란으로 번졌고, 단식투쟁 등의 행보는 ‘쇼’라는 비판을 받았다. 무엇보다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이하 대전협) 비대위원장과 갈등을 빚으면서 의료계 내부 분열을 조장한다는 지적이 뼈아팠다. 임 전 회장이 8개월 동안 보여준 모습은 고스란히 탄핵 사유가 됐다. 의협 회원 사이에서는 임 전 회장이 SNS로 막말과 실언을 해 의사단체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또 ‘임 회장이 전공의 지원금을 빼돌렸다’는 허위 비방 글을 올린 시도의사회 임원에게 고소 취하 대가로 1억원을 요구한 사실이 녹취록을 통해 알려져 논란이 불거졌다. 특정 인물에 대한 수위 높은 비판은 여론의 역풍을 불렀다. 장상윤 대통령실 사회수석을 겨냥해 “정신분열증 환자 같은 개소리”라고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가 환자를 비하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임현택, 6개월 만에 탄핵당해 막말 논란·의대 증원 못 막아 또 2021년 한 의사가 80대 환자에게 ‘맥페란’ 주사제를 투여한 뒤 부작용이 나타나 기소된 재판에 대해서도 도 넘는 발언을 쏟아냈다. 이른바 ‘맥페란 재판’ 항소심서 판사가 1심의 금고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해당 의사의 항소를 기각하자 “이 여자 제정신입니까?”라는 글을 SNS에 올린 것이다. 임 전 회장의 발언에 법원은 이례적으로 “재판장의 인격에 대한 심각한 모욕일 뿐 아니라 국민의 신뢰를 크게 훼손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행동”이라고 공개적으로 유감을 표명했다. 의대 정원 증원 집행정지와 관련해 기각·각하 결정을 내린 재판장이 ‘회유’받았을 것이라는 주장으로도 입길에 올랐다. 서울고등법원 재판부가 결정을 내린 다음 날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재판장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지난 정권에서는 고법 판사들이 차후 승진으로 법원장으로 갈 수 있는 그런 길이 있었는데 제도가 바뀐 다음에는 그런 통로가 막혀서 이분이 아마 어느 정도 대법관에 대한 회유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있다” 말했다. 서울고법은 법원 명의로 입장문을 내고 “해당 단체장의 아무런 객관적 근거가 없는 추측성 발언은 재판장의 명예와 인격에 대한 심대한 모욕”이라면서 “사법부 독립에 관한 국민의 신뢰를 현저히 침해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언사다.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고 밝혔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정부의 2025학년도 의대 증원을 막지 못한 점, 간호법 제정을 저지하지 못한 점이 탄핵 사유로 꼽혔다. 임 전 회장은 총회를 앞두고 의사 회원들에게 사과하고 페이스북 계정을 삭제하는 등 재신임을 호소했지만 반전은 없었다. 회장을 탄핵한 의협은 비대위원회 체제로 전환하고 지난 13일 새로운 회장 선거 전까지 단체를 이끌 비대위원장을 뽑았다. 그 결과 박형욱 대한의학회 부회장이 1차 투표서 총 유효 투표수 233표 중 123표(52.8%)를 얻어 과반으로 당선이 확정됐다. 임기는 내년 1월 차기 회장이 선출될 때까지다. 뒤늦게 호소했지만…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정부는 의료 파탄이란 시한폭탄을 장착해놨다”며 “정말 대화를 원한다면 정부는 먼저 시한폭탄을 멈춰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비대위원들의 합의에 기초해 입장과 행동을 결정할 것”이라며 “비대위 운영서 소외돼왔던 전공의들과 의대생들의 견해가 충분히 반영될 수 있게 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임 전 회장이 물러나고 새로운 비대위원장이 등장하면서 의협의 투쟁 방향에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커졌다. 일각에서는 의협의 이번 행보를 의정 갈등의 중요한 변곡점으로 보고 있다. 강성 회장을 필두로 정부와 강하게 대립했던 이전 모습서 벗어나 대화에 참여할 것이라는 의견과 이전보다 더 수위 높은 대정부 투쟁이 예상된다는 의견으로 갈리는 중이다. 후자의 배경에는 대전협이 있다. 앞서 박단 비대위원장 등 전공의 70여명은 전날 의협 대의원들에게 “비대위원장으로 박형욱 교수를 추천한다”는 메시지를 보내 공개 지지 의사를 드러냈다. 대의원회서도 박단 비대위원장의 공개 지지에 대해 경고하는 등 잡음이 일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대전협의 지지를 등에 업은 박형욱 비대위원장이 당선되면서 전공의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의협과 대전협의 공조가 본격화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문제는 양측의 교류가 정부와의 대화로까지 이어질 수 있느냐는 점이다.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당선 소감부터 정부의 태도 변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또 윤석열 대통령의 변화도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의정 갈등서 줄곧 선봉에 선 전공의들은 ‘의대 정원 증원 백지화’라는 요구사항서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인 적이 없다. 전공의의 행보는 의대생, 의대 교수 등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영향력 커진 전공의 단체 의료계가 전공의 중심으로 굴러가고 있는 셈이다. 실제 대전협은 지난 11일 출범했던 여야의정협의체(이하 협의체)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협의체는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불참하고 의료계에서는 학술 단체인 대한의학회와 의대 학장 모임인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KAMC)만 참석하는 등 ‘반쪽 출범’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협의체의 운영 기한은 올해 말까지로, 다음 달 22~23일 전에 의미 있는 결과를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태도다. 하지만 박단 비대위원장은 협의체에 대해 ‘무의미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협의체가 첫발을 뗀 11일 SNS에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는 전공의와 의대생, 당사자 없이 대화나 하겠다는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다”며 “한 대표는 2025년 의대 모집 정지와 업무개시명령 폐지에 대한 입장부터 명확히 밝히시길 바란다”고 일갈했다. 이어 “눈치만 보며 뭐라도 하는 척만 하겠다면 한동훈의 ‘여야의정 협의체’ 역시 임현택 전 의협 회장의 ‘올바른 의료를 위한 특별위원회(올특위)’와 결국 같은 결말일 것”이라고 우려했다. 올특위는 의료계의 입장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의협 주도로 구성한 범의료계 특별위원회다. 전공의와 의대생이 해당 위원회에 불참하면서 파행 운영되다 지난 7월 해체됐다. 정부는 협의체서 의료계가 제안한 내용에 대해 “진정성 있게 검토하겠다”는 견해를 밝혔다. 지난 11일 협의체서 의료계는 한국의학교육평가원 자율성 보장, 추가 합격 제한 등을 통한 2025학년도 의대 선발 인원 축소 등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윤순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실장은 지난 14일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이하 중대본) 회의를 주재하면서 “마주 앉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만큼 활발한 대화와 소통을 통해 누적된 갈등을 해소하고 신뢰를 회복해 국민이 원하는 결과를 끌어낼 수 있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의협과 전공의 등 다른 의료계 단체의 참여를 호소했다. 박단 공개 지지 새 비대위원장 강경 투쟁이냐 VS 노선 변화냐 의료계 내부 상황은 크게 바뀌었지만 향후 상황은 여전히 ‘시계 제로(0)’ 상태다. 임 전 회장과 박단 비대위원장 간 갈등의 불씨도 여전히 살아있다.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공개적으로 요청하는 등 ‘(임 전 회장과)같이 갈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실제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요청하면서 “이해와 소통이 가능한 새로운 회장을 필두로 의협과 대전협 두 단체가 향후 상호 연대를 구축할 수 있길 기대한다”는 입장문까지 냈다. 임 전 회장의 탄핵안 가결 직후 박 비대위원장이 “결국 모든 길은 바른 길로”라는 내용의 SNS 글을 올리기도 했다. 문제는 임 전 회장이 박단 비대위원장을 상대로 반격을 진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임 전 회장은 탄핵 사흘 만에 닫았던 페이스북 계정을 다시 열고 “박단과 그 뒤에서 박단을 배후 조종해 왔던 자들이 무슨 일을 해왔는지 전 의사 회원들에게 아주 상세히 밝히겠다”며 박단 비대위원장을 저격하는 글을 올렸다. 그러면서 “의협 대의원회 비대위원장과 의협 회장 선거가 더 이상 왜 필요한가”라면서 “박단이 의협 회장 겸 비대위원장을 맡아 모든 권한과 책임하에 의료 농단을 해결하면 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지지해주셨던 모든 분에게 우선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며 “이유가 어떻든 회장 취임 전부터 탄핵하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자들에게 빌미를 주어 넘어간 것 자체가 제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또 의협의 근본적인 개혁의 첫걸음으로 의협 대의원회 폐지 등을 내용으로 하는 민법상의 사원총회를 개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원총회는 민법에 규정된 사단법인의 최고의사결정 기관이다. 의협 최고의결기구로 알려진 대의원총회보다 상위에 있고 정관의 규정으로 폐지할 수 없다. 사원총회는 이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나 총 사원 5분의 1 이상이 회의의 목적 사항을 제시해 청구하는 경우 소집될 수 있다. 반격 시작 내부 갈등? 올해 2월 시작된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이 10개월째로 접어들었다. 온갖 말이 오갔지만 되짚어보면 조금도 좁혀지지 않은 평행선 상황이 계속되는 모양새다. 정부와 의료계의 대치 상황이 길어질수록 ‘의료 붕괴’는 가시화되고 있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