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조세피난처' 통한 한국기업 역외탈세 실태

  • 김민석 ideaed@ilyosisa.co.kr
  • 등록 2012.08.02 14:33:26
  • 댓글 0개

탈세 목적 '검은돈' 890조원 해외에 은닉돼 있다!

[일요시사=김민석 기자] 탈세를 위해 해외에 은닉한 한국기업들의 '검은돈'이 890여조원에 달한다는 주장이 제기돼 충격이 가시질 않고 있다. 이는 2012년 대한민국 1년 예산인 325조원의 두 배를 웃도는 액수로 우리나라 총가계부채(1000여조원)과 비슷한 수준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천문학적인 세수가 새고 있어 탈세기업은 살찌지만 나라곳간은 비지 않을 수 없다. 이 주장은 영국의 '조세정의 네트워크'의 최근보고서에서 제기된 것으로 우리나라 기업이 조세피난처로 몰래 빼돌린 돈이 중국과 러시아에 이어 3위로 발표됐다. 한국기업들의 역외탈세(조세피난처를 이용해 탈세하는 행위) 실태를 살펴봤다.

해외 조세피난처에 숨겨진 한국의 비자금이 무려 7천7백90억 달러(한화 890여조원)에 달한다는 주장이 제기돼 그 여파가 오랫동안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조세피난처 반대운동을 펼치고 있는 영국의 시민단체인 '조세정의 네트워크'는 지난 22일 보고서를 통해 40여 년 간 전 세계 갑부들이 조세피난처(스위스, 룩셈부르크, 케이맨제도 등)로 빼돌린 돈이 21조달러(약 2경4000조원)에 달한다고 발표했다. 이는 미국과 일본의 한 해 국내총생산(GDP)을 합친 것과 맞먹는 엄청난 규모로 전 세계 총생산의 약 3분의 1에 해당한다. 그중 한국은 1970년대부터 2010년까지 해외 조세피난처로 빼돌린 자산이 총 7790억달러(약 888조4500억원)로 중국(1억1890억달러), 러시아(7980억달러)에 이어 3위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재정 위기 불러온
'조세포탈' 잡아라

조세피난처에서 이루어지는 역외탈세는 국내 법인이나 개인이 조세피난처 국가에 유령회사를 만든 뒤 그 회사가 수출입 거래를 하거나 수익을 이룬 것처럼 조작해 세금을 내지 않거나 축소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해외에서의 소득은 노출되기 어렵다는 점을 악용한 것으로 그 과정이 은밀한데다 수법도 첨단ㆍ지능화되고 있다.

한편 보고서를 작성한 제임스 헨리는 국제통화기금 IMF, 월드뱅크 WB, 국제결제은행 BIS 등의 자료를 참고했다고 밝혔다. 이어 조세포탈 적발분야의 최고권위자로 꼽히는 유펜 와튼스쿨의 사이먼 박 교수(한국명 박중석)의 연구성과를 기초로 했다고 설명했다. 사이먼 박 교수는 미국 국세청이 이전가격 조세포탈프로그램 개발을 맡길 정도의 뛰어난 전문가로 수년 전 조세의 이전가격 문제를 한국에서도 제기했다.

지난 2008년 세계적인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 주요 국가들은 늘어나는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 해외 모처로 빠져나간 갑부들의 검은돈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특히 세계 1위 경제국가인 미국은 한해 국내총생산(GDP)이 약 15조달러인데, 그 2배가 조세피난처에 은닉된 것으로 추정돼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이에 2008년 재정위기를 기점으로 하여 각 주요 국가들은 역외탈세 차단에 나서기 시작했다.


다음해 2009년 영국 런던에서 개최된 G20 정상회의에서는 조세피난처에 대한 제재조치를 위해 국제공조를 강화하는 선언문이 채택됐다. 이후 각국은 활발한 조세외교를 통해 조세조약 체결 및 정보교환 협정을 맺고 조세피난처에게 국제적 기준을 준수할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각국의 압박에 대표적 조세피난처이자 자금세탁처로 알려진 독일의 리히텐슈타인과 이탈리아의 산마리노가 무너지며 난공불락처럼 여겨졌던 '금융비밀주의'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정적인 한방은 스위스에서 터졌다. 스위스는 16세기부터 프랑스 왕가를 포함한 주요 귀족들을 상대로 은행업을 시작한 이래 은행 고객의 신분과 계좌정보는 철저하게 비밀을 지킨다는 원칙, 금융비밀주의를 고수하며 무려 500여 년을 철칙으로 삼아왔다. 그 결과 전 세계의 갑부들뿐 아니라 개발도상국의 독재자에서 마피아집단까지 스위스은행을 찾아, 말 그대로 '검은돈의 성역'이 되었다.

국내자금 '보물섬'으로 빼돌려 세금 피하고
장사가 될 만한 기업에 투자하여 이윤 얻고
이윤 발생하면 다시 보물섬으로 빼돌리고…

미국이 스위스은행을 상대로 칼을 뽑아 든 것은 지난 2009년, 미 재무부가 스위스 최대 은행 UBS가 미국 재산가들의 탈세를 도왔다는 정황을 잡고 고강도 세무조사를 진행, UBS에 7억8000만 달러라는 엄청난 벌금을 부과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미국 내 UBS 지점들을 모두 폐쇄하고 자산을 압류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며 UBS를 압박했다. 결국 UBS는 굴복하여 미국인 갑부 수천 명의 계좌정보를 미국에 제공했다. 이어 스위스 정부는 자국 은행법을 OECD 기준에 맞추기로 하면서 금융비밀주의와 작별을 고했다. 500여 년간 지켜온 철칙이 무너진 것이다.

현재에 이르러 OECD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조세피난처 국가 또는 지역은 존재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국제적 기준에 부합하는 조세피난처가 사라졌을 뿐, 여전히 탈법적 조세피난처는 존재하고 있으며 아직도 금융비밀주의라는 빗장을 굳건하게 걸고 있다. 현대판 보물섬이나 다름없는 조세피난처에 세계 각국의 갑부들이 어느 정도의 검은돈을 숨겨두고 있는지 명확한 통계가 없는 실정이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99%를 쥐어짜기보다 1%의 보물섬부터 없애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조세피난처를 통해 이루어지는 역외탈세만 잡아내도 각국에서 벌어지는 재정위기는 쉽게 극복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카리브해 동부에 위치한 브리티시 버진아일랜드(영국령)는 인구 2만5000명가량에 불과한 작은 섬나라이다. 하지만 버진아일랜드에는 수십만 개의 기업이 등록되어 있다. 바로 역외탈세 목적으로 의심되는 세계 주요국 대기업들의 자회사들로 버진아일랜드에는 이들 기업들의 자회사(페이퍼컴퍼니)를 관리해 주는 회사들로 넘쳐난다.

이곳 버진아일랜드에 우리나라 기업들도 다수 자회사를 세워 놓은 것으로 확인됐다. 국세청에 따르면 우리나라 기업들이 주로 이용하고 있는 조세피난처로는 버진아일랜드를 포함해 케이만제도(미국령), 홍콩 및 싱가포르 등인 것으로 밝혀졌다.


현대판 보물섬
'검은돈' 넘치는 62개국

우리나라 국세청과 관세청은 경제거래가 활발한 국가 중 조세피난처 역할을 하는 62개국을 우범국으로 지정해 관리해 오고 있다. 하지만 해당 국가 및 지역과의 정보교환협정이 맺어져 있지 않거나 정보교환협정이 체결됐음에도 정식 발효가 미뤄지고 있어 유용한 정보를 캐내기가 불가능해 사실상 방관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지난 25일 대기업 전문 분석사이트 '재벌닷컴'에 따르면 국내 30대 재벌그룹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국제 핫머니의 조세피난처로 지목한 국가나 지역에 설립한 해외법인이 47개사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어 재벌닷컴은 자산순위 30대 그룹의 해외법인(공기업 및 민영화 공기업 제외)을 조사한 결과 작년 말 기준으로 2224개로 집계됐다고 발표했다.

이 중 롯데, 삼성,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LG 등 15개 그룹은 OECD가 국제 핫머니의 조세피난처로 지목하고 있는 44개 국가 혹은 지역에 47개 해외법인의 주소를 두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룹별로는 롯데가 178개 해외법인 가운데 13개사를 조세피난처 지역에 두고 있어 30대 그룹 중 가장 많았다. 롯데는 버진아일랜드에 9개사, 케이만제도에 3개사, 모리셔스에 1개사 등의 해외법인을 가지고 있으며, 이들 해외법인은 모두 비금융 지주회사로 조사됐다. 이를 두고 롯데는 "롯데마트가 중국에 진출하면서 인수한 타임스와 롯데홈쇼핑이 중국사업을 위해 인수한 럭키파이, 호남석유화학을 인수했고 또다시 타이탄 등을 인수하여 기존 법인을 버진제도에 설립한 것일 뿐"이라고 반박했다.

현대차는 케이만제도에 투자전문회사 4개사와 버진아일랜드에 부동산개발회사 1개사를 소유하고 있고, 현대중공업은 마셜제도, 버뮤다, 모리셔스, 파나마, 케이만제도 등에 1개사씩을 두고 있다. LG는 파나마에 컨설팅회사 등 3개사와 마셜제도에 자원개발회사 1개사를 설립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현대는 파나마와 버진아일랜드에 해운업 관련 법인 3개사와 1개사를 각각 두고 있다.

삼성은 케이만제도에 음원유통업체 1개사, 버뮤다에 보험회사 1개사, 파나마에 해운업체 1개사 등 3개사를 갖고 있고, 한화도 케이만제도에 태양광 관련 지주회사 2개사와 버진아일랜드에 태양광투자회사 1개사 등 3개사가 있다.

국내 재벌기업
해외에 유령법인 없으면 바보?

미래에셋은 중남미지역에 위치한 바베이도스에 특수목적회사(SPC) 1개사와 케이만제도에 투자전문회사 1개사 등 2개사를, 동양은 파나마에 원유 및 천연가스채굴회사 1개사와 케이만제도에 제조업체 1개사를 갖고 있다.

이밖에 GS가 파나마에 임대업체 1개사, 한진이 키프로스에 판매대리업체 1개사, CJ가 버진아일랜드에 비금융 지주회사 1개사, 효성이 케이만제도에 변압기 제조업체 1개사, 동국제강이 파나마에 운송서비스업체 1개사, 한진중공업이 키프로스에 투자업체 1개사를 각각 가지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같이 조사대상 그룹이 조세피난처 지역에 보유하고 있는 47개 법인 가운데 비금융 지주업이나 자원개발업, 부동산개발 등 투자 관련 회사가 60%가 넘는 30개를 차지했으며, 제조업 관련 회사는 3개사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지난 24일 금융당국과 한국수출입은행의 발표에 따르면 1968년부터 지난 3월까지 우리나라 대기업 및 갑부가 조세피난처 35곳에 투자한 것으로 '확인된' 금액만 약 24조7800억원으로 조사됐다. 또 조세피난처에 설립된 국내기업의 페이퍼컴퍼니는 사상 최대인 약 5000개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됐다.

주요 투자 대상지는 싱가포르가 약 4조6600억원으로 가장 많고 말레이시아와 케이만제도가 각각 3조3700억원, 버뮤다 약 2조9000억원, 필리핀 약 2조8000억원 등이다. 이 기간 우리나라 국외투자 총액이 1966억달러(약 225조여원)인 점을 고려하면 전체 대외 투자액의 10% 이상이 조세피난처로 향한 것이다.


이어 관세청의 집계에 따르면 홍콩과 영국, 캐나다, 네덜란드, 케이만제도 등 대표적인 10개 조세피난처에 투자된 금액이 2007년 약 8조3000억원에서 2012년 약 14조5300억원으로 4년 새 약 6조 2000억원이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 세계 총생산 3분의 1, 우리나라 총가계부채와 근접한 액수
돈 주체 못하는 1%, 가난에 허덕이는 99% '부익부빈익빈' 가속

아울러 관세청이 적발한 국외 재산도피 및 자금세탁 사례도 증가했다. 적발된 재산도피는 2007년 13건 166억원에서 2010년 22건 1528억원으로 금액으로만 보면 10배가량 급증했고, 자금세탁은 6건 83억원에서 43건 924억원으로 11배나 늘었다.

이와 같은 조세회피 의혹에 대해 모든 그룹들은 일제히 반기를 들고 일어날 조짐이다. 특히 대선을 앞둔 정치권에서 '경제민주화' '재벌개혁'과 같은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는 상황에 나온 조사결과라 엎친 데 덮친 격이 되어 그룹이미지에 큰 타격이 오지 않을까 염려하는 눈치다.

일부 조세경제전문가들은 현재 확인된 숫자보다 더 많은 해외법인 존재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했다. 조세피난 국가에 진출한 30대 그룹의 '숨은 계열사'는 추적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최근 국세청도 역외탈세 조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난 6월 중순 국세청이 SK와 삼성물산, 금호석유화학의 역외탈세 실태조사를 위해 대표적 조세피난처 중 하나인 홍콩에 직원 6명을 극비리에 급파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세청은 이들 대기업이 홍콩 법인 등을 통해 비자금을 조성하는 등 역외탈세 혐의가 있을 것으로 보고 사전 조사에 집중하고 있다.


또한 스위스와 협의를 통해 개정한 한-스위스 조세 조약상 정보교환조항이 지난 25일부터 효력을 발휘했다. 이는 2010년 12월 정보교환조항이 담긴 개정 조세조약에 양국이 서명한 지 1년7개월 만이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 국세청은 스위스 은행에 예치된 한국인들의 계좌정보를 이름, 주소 등 인적사항 없이 계좌번호만 가지고도 정보제공 요청을 할 수 있게 됐다. 이를 통해 국세청 역외탈세 세무조사에 획기적 전기가 마련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인 재산가들에게 스위스는 더 이상 '세금천국'이 아니게 된 것이다.

국세청에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는 미국과 중국·일본·영국 등 77개국과 조세조약을 체결했다. 현재까지 조세정보교환협정이 체결된 조세피난처는 버뮤다, 사모아, 쿡 등 15개 국가 및 지역이지만 이 중에 쿡을 제외한 14개 국가 및 지역과 체결한 조세정보교환협정은 효력이 발효되지 않고 있다. 이에 정부는 이들 국가 및 지역과 맺은 협정의 효력이 하루라도 빨리 발효되도록 하겠다는 방침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사태 심각성 절감한 국세청

해외 세무조사단 파견

그밖에 우리나라는 싱가포르와 벨기에, 이탈리아, 룩셈부르크, 호주, 말레이시아, 오스트리아 등 8개 국가와 금융거래정보제공을 골자로 한 정보교환조항을 개정했다. 역외탈세 조사를 차일피일 미루다 발등에 불이 떨어지자 급하게 조치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보잉사와 씨티그룹사 등의 조세회피를 다룬 책인 <보물섬>의 저자 니콜라스 색슨은 "세법상 구멍은 막을 수 없다"고 말했다. 가장 큰 이유는 국내에서 벌어지는 탈루행위는 어떻게든 찾아낼 수 있으나 역외탈세는 국가공조, 정보수집이 어렵고 해외투자로 탈바꿈하는 등 교묘히 위장하는 경우가 많아 조사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큰 파문을 불러온 '조세정의 네트워크'의 조세피난보고서. 이를 두고 당분간 뜨거운 진실공방이 계속될 전망이다.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지르고 보는 정청래 두 번째 카드

지르고 보는 정청래 두 번째 카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대표가 스스로 리더십 도마 위에 올라섰다. 1인1표제 재추진과 조국혁신당과의 합당이라는 두 개의 승부수를 동시에 던지면서다. 양쪽에서 후폭풍이 몰아치는 형국이다. ‘자기 정치’ VS ‘당원의 뜻’이라는 명분과 명분이 거칠게 붙었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과 조국혁신당(이하 혁신당)의 합당 논의가 여전히 뜨거운 감자다. 지난달 22일 민주당 정청래 대표가 혁신당을 향해 “지방선거를 따로 치를 이유가 없다”며 손을 내밀었지만, 민주당의 반발과 ‘흡수 합당은 싫다’는 혁신당의 주장이 부딪히면서 합당 테이블조차 마련되지 못하고 있다. 중구난방 가쁜 숨만 합당 논의 초반부터 혁신당 측의 반발이 이어졌다. 혁신당 서왕진 원내대표는 최고위원회의서 “본격적인 통합 논의가 시작되기 전에 오해가 형성되는 것에 강력한 유감을 표한다. 통합은 뻔한 몸집 불리기가 아니라 새로운 희망을 제시하는 가치 연합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앞서 민주당 조승래 사무총장이 합당과 관련해 “민주당이라는 큰 생명체 내에서 혁신당의 DNA도 잘 섞이게 될 것”이라고 밝히자 이를 ‘흡수 합당’이라고 받아들인 것에 대한 유감 표명으로 풀이된다. 혁신당이 합당 논의를 중단해야 한다는 의견도 전했다. 서 원내대표는 MBC 라디오를 통해 “이미 민주당은 162명 거대 정당이고 (여기에) 혁신당 12명이 합쳐지는 것은 단순한 몸집 불리기”라며 “그 이상 의미는 없다”고 평가했다. 이어 “합당 논의 자체를 본격적으로 할 필요가 없다. 제안 방식이나 준비된 내용 자체가 없고, 오히려 지금 준비하고 있는 지방선거에 상당히 악영향이 있으니 당장 (논의를) 중단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합당 논의라는 것 자체가 불가피한데 우리 원칙과 기준에 맞게, 질서 있게 논의는 진행할 필요는 있다는 긍정적 입장도 상당히 있었다”고 설명했다. 민주당에서도 합당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지도부에서 친명(친 이재명)계로 불리는 이언주·황명선·강득구 최고위원은 합당 발표 다음 날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제대로 된 통합을 위해서라도 정청래식 독단은 이제 끝나야 한다”며 정 대표를 겨냥하고 나섰다. 이들은 “이번 합당 제안에 앞서 정 대표와 이재명 대통령 간 교감이 있었던 것처럼 언론 보도가 됐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이어 “당무는 당의 책임이고, 당이 결정해야 한다. 마치 대통령이 관여하는 것처럼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방식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며 합당 논의에 이 대통령을 끌어들인 것에 이의를 제기했다. 이들은 기자회견 말미에 ▲정 대표의 공식 사과 ▲독선적 당 운영에 대한 재발 방지 대책 마련 ▲합당 제안을 언제, 누구와, 어디까지, 어떻게 논의하였는지 등을 밝힐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합당·1인1표제, 쏟아지는 안건 “뭐부터 해결해야…” 여당도 혼란 이런 상황서 정 대표의 대표 공약인 ‘1인1표제’가 최종 관문인 당 중앙위원회(이하 중앙위) 표결에 다시 부쳐지면서 논란이 재점화할 전망이다. 당 대표 및 최고위원 선출 시 대의원과 권리당원의 표 행사 가치 비율을 현행 20대 1 이하에서 1대 1로 변경하는 것을 골자로 지난해 중앙위원회에서 재적위원 과반수를 채우지 못해 부결됐다. 정 대표가 압도적 당심으로 당선된 만큼 정치권 일각에서는 1인1표제 통과로 인한 권력 재편을 견제해왔으나 두 달 만에 또다시 날 선 공방이 예고된 것이다. 지난달 19일 당무위원회는 해당 안건 상정을 중앙위서 결정한 뒤 같은 달 22~24일 권리당원 투표 절차를 마무리했다. 1인1표제 안건에 대한 투표 결과 ▲찬성 85.3%(31만5827명) ▲반대 14.7%(5만4295명)로 집계됐다. 당은 이달 2일 중앙위원회를 개최해 당헌·당규 개정에 대한 안건을 투표로 부칠 예정이며 중앙위원 온라인 투표는 3일까지 진행된다. 권리당원 투표 결과가 발표되자 정 대표는 “당원들의 압도적 다수의 뜻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며 1인1표제 굳히기에 나섰다. 정 대표는 “당원들의 뜻을 받들어 민주당을 더 좋은 민주주의 정당으로 만들겠다”며 “당의 모든 의사와 진로는 당원들이 가라는 대로 가고 당원들이 하라는 대로 하겠다”고 설명했다. 민주당 조승래 사무총장도 페이스북에 “참여율은 지난번 16.81%에 비해 15% 가까이 높아졌고, 찬성률은 비슷하다. 압도적인 찬성 여론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며 힘을 실었다. 1인1표제를 놓고 갑론을박이 이어질 때마다 정 대표는 이 대통령을 방패처럼 소환했다. 정 대표는 “1인1표제는 당원이 주인 되는 정당, 당원주권정당, 당원주권시대 등 여러 가지 표현으로 이재명 당 대표 시절부터 3년여간 꾸준히 요구되고 논의했던 사안”이라고 설명했다. 이리 튀고 저리 튀고 이어 “당원과 대의원 1대 20 미만을 결정할 때도 많은 반대와 저항이 있었다. 그 당시에도 많은 논의가 있었다”며 “1인1표제는 논의할 만큼 논의했고 영남권 등 전략 지역 원외위원장들께서도 그 당시 어느 정도 이해하고 양해했던 사안으로 저는 기억하고 있다”고 밝혔다. 1인1표제는 이 대통령이 추진했던 사안인 만큼 민주당이 이를 반대할 명분이 없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민주당과 당원들은 정 대표가 충분한 논의 없이 중요한 사안을 본인 페이스대로 밀어붙인다는 것에 불만을 제기했다. 지난해 27표 차이로 1인1표제가 처음 부결됐을 당시 민주당 이언주 최고위원은 “과반에 가까운 상당수 최고위원이 우려를 표하고 숙의를 원했음에도 강행, 졸속 혹은 즉흥적으로 추진된 부분에 대해 유감”이라며 정 대표를 공개 지적하기도 했다. ‘자기 세력 강화’를 위해 합당 카드를 꺼내 들었다는 의심이 가라앉기도 전 1인1표제로 또다시 당을 흔들면서 반청(반 정청래) 정서가 퍼졌다. 이재명정부가 출범한 지 1년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여당이 흔들리자 정 대표의 진퇴를 물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합당 발표 이튿날 서울 여의도 민주당 당사 앞에선 당원들이 주도하는 합당 반대 집회가 열렸다. 이들은 ‘정청래 사퇴’ 등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고 “합당 반대”를 외쳤다. 민주당 일각에도 정 대표의 ‘졸속 추진’ 행보가 이어진다면 사퇴 요구 가능성을 열어두겠다는 이들이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정 대표의 모든 행동이 ‘자기 정치’ 프레임으로 귀결되면서 승부수가 자충수가 됐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에 정 대표는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라는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며 피는 꽃’ 전문을 자신의 SNS에 공유했다. 자신의 선택을 두고 당내 반발이 이어지자 우회적으로 심경을 밝힌 것으로 풀이된다. 이를 겨냥한 듯 강득구 최고위원 역시 자신의 SNS에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당원의 뜻은 독단으로 결코 꺾을 수 없나니, 흔들리는 것은 뿌리 없는 꽃뿐”이라며 저격 글을 게시했다. O? X? △도 필요 여의도 안팎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민주당은 혁신당과의 합당과 1인1표제 추진에 큰 이견이 없는 것으로 전해진다. 문제는 사전 논의 없이 진행된 점 등 정 대표의 독단적인 행동이 우려스럽다는 것이다. 민주당 김지호 대변인 역시 “당내 문제 제기는 합당 자체보다는 의견수렴 절차가 급작스럽게 진행된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정 대표가 당권을 쥐었을 당시 잡음은 예상됐으나, 일단 지르고 수습하는 예측 불허한 행동이 반복되면서 신뢰를 잃은 게 주요 원인으로 지목된다. 정 대표 취임 이후 ‘명청 갈등’ ‘당정 불협화음’ 등으로 민주당은 계속해서 흔들렸다. 최고위원들의 반발 역시 당에서도 정청래 체제에 대한 위험성에 어느 정도 공감대가 형성됐다는 근거로 해석된다. 당 대표 임기 종료까지 반년이 남았지만 정 대표의 연임 의혹은 여전한 만큼 갈등 역시 쉽게 봉합되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그동안 정 대표는 당원주권시대를 거듭 강조했지만 막상 중요한 사안은 독단으로 결정하면서 당 안팎으로 불만이 제기된 것으로 전해진다. “1인1표제로 당원 중심 원칙을 강화하자”면서 합당 등 중요한 사안을 대표 혼자 결정하는 건 모순이라는 설명이다. 혁신당과의 합당 제안에 당내 반발이 이어지자 민주당 수석대변인은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 당원들이 이 문제를 최종 결정할 것”이라며 진화에 나섰다. 박 수석대변인은 “(합당이라는) 당 대표의 제안은 정무적 판단과 그에 따른 정치적 결단의 영역”이라며 “그렇기에 앞으로 이런 문제에 대해 전 당원 토론, 투표 등 정해진 절차를 거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활발하게 당원의 의견을 묻는 그런 토론의 장을 마련하겠다”며 “당원주권시대에 걸맞게 당원의 뜻을 최종적으로 묻고, 최종 결정을 내리게 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말씀드린다”고 거듭 강조했다. 아울러 “당원이 합당하라면 하는 것이고 하지 말라고 하면 못 하는 것”이라고 부연했다. 그러나 정 대표가 논의를 띄우고 당원에게 ‘예’ ‘아니오’로만 의견을 묻는 행위가 당원주권정당의 취지에 어긋난다는 비판을 피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말로만 당원 주권 시대? “이제는 숙의 민주주의로” 이에 한 정치권 관계자는 “1인1표제의 경우 정 대표는 당원들의 찬성률이 압도적이었다고 말하지만 투표율은 저조했다. 이것이 무엇을 시사하는지 들여다 보지 못하고 숫자에만 매몰됐다”며 “이것을 당원주권정당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의문”이라고 꼬집었다. 이어 “현재 소수의 당원이 당의 여론을 이끌고 있다. 일반 국민의 시선에서 ‘나머지 당원들은 무책임하게 방관하느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과정을 보면 당 대표가 논의를 띄우고 ‘자, 여기에 O, X로만 투표해!’ 하는 식이니 당과 당원 간의 간극이 생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1인1표제와 혁신당과의 합당 모두 찬성 여론이 높다. 그럼에도 정 대표를 향한 반발은 거칠다. 결국 민주당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이 아니라 배의 키를 쥔 선장을 향한 불만이 표출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앞서 합당 방식에 반발한 민주당 최고위원들 역시 “정 대표의 선택적 당원주권”이라고 비판했다. 이들은 “대통합을 가로막는 정 대표의 독선과 비민주성을 강력하게 문제를 제기한다”며 “선출된 최고위원들이 의견조차 낼 수 없는 구조, 대표 결정에 동의만 강요하는 구조는 민주적 당 운영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가고자 하는 방향은 같지만 목적지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서 파열음이 나는 만큼 결국 정 대표의 리더십이 관건이다. 3대 개혁의 빠른 추진, 혁신당과의 합당을 통한 지방선거 승리, 이정부의 성공 등 각종 요구가 쏟아지면서 이를 한데 어우르는 ‘통합형 당 대표’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정 대표의 자기 정치 프레임이 가장 큰 걸림돌이다. 그동안 자기 정치 의혹이 숱하게 제기된 만큼 조 사무총장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가 당내 가장 큰 경쟁자인 한동훈 전 대표를 내치려고 하는 것은 당권을 계속 강화하거나 유지하기 위한 그야말로 자기 정치 아닌가”라며 “반면 정 대표는 경쟁자가 될 수 있는 조국 대표와 함께하자고 하는 것인데 이걸 자기 정치라고 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엄호에 나섰다. 민주당의 민주주의 체제에 경고등이 켜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모자이크 민주주의 평화 그룹 백왕순 대표는 <일요시사>를 통해 “숙의 민주주의의 부재”를 꼬집었다. 민주주의 제자리걸음 백 대표는 “1인 1표제가 맞냐 틀리냐 갑론을박이 이어지는데 당원주권시대에는 이 방법이 옳다. 다만 이득을 놓고 계파 간의 힘겨루기만 이어지니 문제가 풀리지 않는 것”이라며 “혁신당과의 합당도 마찬가지다. 통합하면 이기고 분열하면 진다. 그런데 이를 차기 당권 문제와 연결해 해석하니 복잡해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현재 대한민국은 숙의 민주주의가 아닌 절차 민주주의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찬반이 극명한 사안에 대해 쉽게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며 “당원이 직접 토론하고 의견을 내는 오프라인 공간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hypak28@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불안한 민주당 혁신당도 ‘흔들’ 합당이라는 중대한 사안을 놓고 조국혁신당이 자당 의원들 입단속에 나섰다. 혁신당 황운하 의원이 “민주당과 합당할 경우 혁신당 조국 대표가 통합한 당의 공동대표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경고한 것과 더불어 입조심을 당부한 것이다. 혁신당은 조국 대표가 즉각 황 의원의 이날 발언에 경고했다고 밝혔다. 혁신당 대변인실은 입장문을 통해 “혁신당 최고위는 이 문제(황 의원 발언)에 대해 논의하고, 이 같은 논의를 전혀 한 바가 없으며 매우 부적절한 발언이라고 지적했다”며 “조 대표 역시 강한 경고를 했음을 알린다”고 밝혔다. 이어 “혁신당은 공식적 기구를 통해 합당과 관련된 논의를 해왔으며 위와 같은 논의는 전혀 언급된 바가 없음을 분명히 밝힌다. 조 대표를 비롯한 혁신당 구성원 누구도, 민주당과 합당과 관련된 실무 논의를 진행한 바가 없다”고 강조했다. <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