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α’ 이춘재의 살인 지도

“내가 다 죽였다”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드디어 이춘재가 입을 열었다. 그가 입을 열 때마다 미제사건의 실마리가 나오고 있다. ‘자신이 했다고 자백한 사건만 14건에 이른다. 우리나라 3대 미제사건으로 꼽혔던 화성연쇄살인사건 말고도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던 사건들이 떠오르는 중이다. <일요시사>가 이춘재의 살인 행적을 뒤쫓았다.
 

▲ SBS 그것이 알고 싶다가 공개했던 화성연쇄살인사건 몽타주

화성연쇄살인사건은 개구리소년 실종사건’ ‘이형호 유괴사건과 함께 우리나라 3대 미제사건으로 꼽혔다. 지난 1986년부터 1991년까지 경기도 화성 일대서 여성 10명이 살해됐다. 전국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사건이지만 실마리는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2006410차 사건의 공소시효가 만료되면서 화성연쇄살인사건은 영구 미제사건으로 남는 듯했다.

화성 사건
33년 만에…

연극 <날 보러 와요>, 영화 <살인의 추억> 등 화성연쇄살인사건을 소재로 삼은 작품이 등장했다. SBS 시사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는 수차례에 걸쳐 화성연쇄살인사건에 대해 다뤘다. 사건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식지 않았지만 19914310차 사건 이후 28년간 범인의 윤곽은 오로지 몽타주로만 남은 상태였다.

그러다 지난달 18일 이후로 상황이 급반전됐다. 이날 오후 언론보도를 통해 화성연쇄살인사건 유력 용의자가 특정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동안 온라인 커뮤니티 등을 통해 쏟아져 나왔던 추측과 유력 용의자에 대한 궁금증이 게시판을 달궜다.

지난달 19일 반기수 경기남부지방경찰청 2부장은 브리핑을 통해 지난 715일 현장 증거 일부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감정 의뢰했다그 결과 현재까지 10건의 사건 중 3건의 현장 증거물서 검출된 DNA와 일치하는 대상자가 있다는 통보를 받고 수사 중에 있다고 발표했다.


경찰이 지난 8월 특정한 유력 용의자는 현재 부산교도소에 복역 중인 56세 이춘재. 이춘재는 19941월 청주시 자택서 처제를 강간, 살해 후 시신을 유기한 혐의로 검거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복역 중이었다. 화성연쇄살인사건 유력 용의자로 지목된 당시 그는 부산교도소서 20여년 넘게 1급 모범수였던 것으로 알려져 충격을 안겼다.

범행을 부인하던 이춘재는 지난 1일부터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이춘재의 DNA5·7·9차 사건 증거물서 이미 검출된 데 이어 4차 사건 증거물서도 나온 것으로 확인되면서 상황은 급물살을 탔다. 이춘재는 기존 화성연쇄살인사건 9건 외에도 추가로 5건의 살인을 저질렀다고 자백했다. 14건이다. 이뿐만 아니라 살인사건 외에도 성폭행과 성폭행 미수 범행을 30여건 저질렀다고 말했다.

당시 그가 자백한 모든 범행은 군대서 전역한 19861월부터 처제를 성폭행하고 살해한 혐의로 검거된 19941월까지 8년동안 벌어졌다. 범행 장소는 화성과 수원, 청주 등 3곳이다. 다만 이춘재가 털어놓은 모든 범행은 공소시효가 만료돼 처벌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미제사건 속속 수면 위로
“모두 내가 했다” 입 열어

묘한 기류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모방범죄로 알려졌던 8차 사건을 이춘재가 자신이 했다고 주장하면서다. 8차 사건은 범인이 검거돼 처벌까지 전부 이뤄진 상태기 때문에 이춘재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큰 파장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여중생이 피해자였던 8차 사건서 당시 경찰은 윤모씨를 검거했다.

윤씨는 재판 과정서 경찰의 가혹행위가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무죄를 호소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윤씨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여년을 복역한 뒤 2009년 가석방으로 출소한 상태다.

DNA 검출로 과학수사의 쾌거라고 고무됐던 경찰의 사기가 순식간에 추락했다. 게다가 윤씨의 검거, 자백 등의 과정서 경찰이 고문을 행했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부정적인 여론이 형성됐다.
 


지난 10일 이춘재가 8차 사건서 범인만 알 수 있는 유의미한 진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기남부지방경찰청 사건 수사본부는 이춘재의 8차 사건 자백이 구체적인지에 대한 취재진의 질문에 자백 진술 안에 의미 있는 부분이 있다진짜 범인이 아니면 알 수 없는 그런 진술을 끌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춘재가 그림을 그려가며 설명했다고 덧붙였다.

지난 15일 정례 브리핑서 경찰은 화성연쇄살인사건 8차 사건을 포함해 이춘재가 총 14건의 살인을 저지른 것으로 잠정 결론 내렸다. 화성연쇄살인사건 10건 모두와 추가로 자백한 4건 등이다.

경찰은 이춘재가 자백한 사건 14건에 대한 임의성, 신빙성이 높고 당시 현장 상황과 상당히 부합한다고 판단한다고 발표했다. 이중에는 30여년 전 9세 초등학생의 실종사건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이춘재를 화성연쇄살인사건의 피의자로 정식 입건한 상태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은 이미 공소시효가 모두 끝나 이춘재에 대한 입건이 처벌로 이어질 수는 없지만 향후 신상을 공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

모방범죄도
“내가 했다”

특정강력범죄의처벌에관한특례법에 따르면 범행수단이 잔인하고 중대한 피해가 발생한 특정강력 범죄사건이나 피의자가 그 죄를 범했다고 믿을 만한 충분한 증거가 있을 때, 또 국민의 알 권리 보장이나 피의자의 재범방지 및 범죄예방 등 공익을 위해 필요한 경우 피의자의 신상을 공개할 수 있다.

화성연쇄살인사건 10= 시작은 1986년까지 33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5년동안 화성시 태안과 정남, 팔탄, 동탄 등 태안읍사무소 반경 34개 읍·면에서 1371세 여성 10명이 강간·살해됐다.

스타킹이나 양말 등 피해자의 옷가지를 이용해 교살하거나 손으로 목을 졸라 살해하는 방식을 썼다. 버스정류장서 귀가하는 피해자 집 사이로 연결된 논밭이나 오솔길 등에 숨어 있다가 덮친 후 범행했다.

1차 사건은 1986915일에 태안읍 안녕리 목초지서 일어났다. 피해자는 71세 이모씨. 딸의 집에서 자고 나와 집으로 돌아가다가 살해됐다. 919일 발견 당시 하의가 벗겨진 상태였으며 손으로 목이 졸려 사망했다.

25세 박모씨가 두 번째 피해자였다. 1차 사건 이후 한 달 뒤인 1020일 태안읍 진안리 농수로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박씨는 맞선을 보고 집에 돌아가던 중 버스를 타러 가다 변을 당했다. 1차 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손으로 목이 졸렸다. 발견 당시 나체 상태였다.

198612월에는 2건이 사흘 간격으로 일어났다. 귀가 중이던 주부 권모(24)씨가 집 앞에서 피살됐다. 발견 당시 스타킹으로 양손이 결박된 상태였다. 스타킹으로 목이 졸려 숨졌다. 같은 달 14일에는 맞선을 보고 집에 돌아가던 중인 이모(21)씨가 살해됐다. 두 손이 묶였고 교살됐다. 정남면 관항리 농수로서 발견됐다.

해를 넘겨 19871월 여고생 홍모양이 살해된 채 발견됐다. 역시 두 손을 결박했고 양말로 재갈을 물렸다. 태안읍 황계리 논바닥서 발견됐다. 52일에는 태안읍 진안리 야산서 6차 사건이 일어났다. 29세 주부 박모씨가 남편을 마중 나갔다가 불귀의 객이 됐다. 시신 발견 당시 솔가지로 은닉된 상태였다.


5년간 10건
공포 도가니

팔탄면 가재리 농수로서 54세 주부 안모씨의 시신이 발견됐다. 19889월 일어난 7차 사건이다. 버스서 내려 귀가하던 중 범인의 덫에 걸렸다. 발견 당시 안씨는 블라우스로 양손이 결박된 채였다.

논란의 8차 사건은 피해자의 집에서 일어났다. 1988916일 태안읍 진안리의 한 집에서 여중생 박모(13)양이 잠을 자다가 피살됐다. 현장에 남아있던 모발을 증거로 198972525세 윤씨가 범인으로 검거됐다. 이춘재가 이 사건을 자신의 소행이라고 주장하기 전까지 모방범죄로 분류됐다.
 

▲ 화성연쇄살인사건을 다룬 영화 살인의 추억

9차 사건은 199011월에 일어났다. 태안읍 병점5리 야산서 김모(13)양이 스타킹으로 결박된 상태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피해자는 귀가 중이었다. 시신은 발견 당시 훼손된 상태였던 만큼 더 충격을 안겼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의 마지막 사건은 동탄면 반송리 야산서 일어났다. 69세의 피해자 권모씨는 버스서 내려 귀가 도중에 살해됐다. 발견 당시 하의가 벗겨진 상태였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은 10차에 이르기까지 범행의 수법과 대담성이 점차 진화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서 수년간 범행을 했음에도 꼬리를 잡히지 않은 점이 강력범죄에 대한 이춘재의 심리적 저항을 낮추고 대담성을 키워준 결과를 낳은 것으로 보인다그러다 남의 집에 들어가거나 친족인 처제를 살해하는 등 더욱더 과감한 수법을 벌이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추가 범행 4= 화성연쇄살인 외에 경찰이 밝힌 이춘재의 범행은 수원 여고생 살인사건, 화성 초등학생 실종사건, 청주 여고생 살인사건, 청주 주부 살인사건 등 4건이다. 미제로 남아있던 이 사건들은 전부 화성연쇄살인사건 기간 내 일어났다. 당시 포클레인 기사로 일했던 이춘재는 1991년 전후로 화성과 청주 공사 현장을 오가며 일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초등생 실종사건도 관여 의혹
공소시효 다 끝나 처벌 어려워

수원 여고생 살인사건은 실종사건으로 시작됐다. 19871224일 여고생이 어머니와 다투고 외출했다가 10일 뒤인 198814일 시신으로 발견됐다. 속옷으로 재갈이 물리고 손이 결박된 상태였다. 화성연쇄살인사건서 드러난 이춘재의 범행 수법과 유사하다. 범인 특유의 범행 인증, 즉 시그니처라고 한다. 이 때문에 당시에도 화성연쇄살인사건과의 연관성이 제기된 바 있다.

9세 초등학생이 피해자인 사건에도 이춘재가 관여한 것으로 드러났다. 화성 초등생 실종사건은 198977일 화성군 태안읍서 수업을 마치고 귀가하던 초등생 김모양이 학교 수업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 실종된 사건이다. 같은 해 12월 김양이 실종 당시 입고 나갔던 치마와 책가방이 화성군 태안읍 병점5리서 발견됐다.

화성연쇄살인사건 9차 사건 현장과 불과 30m 떨어진 지점으로 현재까지 시신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청주 여고생 살인사건은 1991127일 일어났다. 방적공장 직원이었던 17세 박모양이 청주시 복대동 택지조성 공사장 콘크리트관 속에서 발견됐다. 속옷으로 입이 틀어 막히고 양손이 뒤로 묶인 상태서 목 졸려 숨져 있었다. 역시 화성연쇄살인사건 피해자들과 비슷한 모습이다.

이춘재는 19913월 청주시 남주동서 발생한 주부 살인사건도 자신이 했다고 털어놓은 상태다. 29세의 피해자는 양손이 테이프에 묶여 있었고, 가슴이 흉기에 여러 차례 찔린 상태로 발견됐다. 당시 경찰은 범인이 단독주택에 침입해 피해자의 손을 묶고 목을 졸라 숨지게 한 것으로 보고 수사를 진행했지만 용의자를 특정하지 못했다.

▲ 이춘재와 용의자 몽타주

경찰은 화성연쇄살인사건을 비롯한 이춘재가 자백한 살인사건의 증거물에 대한 국과수의 DNA 분석과 과거 수사자료 등을 토대로 그의 혐의를 밝힌다는 방침이다. 특히 추가로 자백한 4건의 사건에 대해서는 기록이 일부만 남아 있는 상태라 지속적인 수사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춘재는 1994년 가출한 아내에 대한 증오심으로 처제를 잔혹하게 강간·살해한 혐의로 검거되기 전까지 범행을 저질렀다. 현재 14건의 살인사건, 30여건의 강간 및 강간미수 범행을 저질렀다고 자백한 상태다.

또 다른
미제사건도?

경찰은 이춘재가 자백한 40여건이 넘는 범행이 모두 성범죄와 연관된 만큼 범행 동기로 성도착증 가능성을 수사할 계획이라고 밝힌 상태다. 성도착증은 심리성적 장애의 하나로 성적 흥분을 경험하기 위해 이상 행동을 하는 것을 말한다. 가학증, 피학증, 소아기호증 등 30가지 이상의 유형이 있다.

이수정 교수는 YTN과의 인터뷰서 이춘재의 성집착은 점진적으로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여성이 동등한 인격체가 아닌 성적 노리개, 성폭력 대상 정도로 생각한 것 같다고 분석했다. 이어 잔혹한 살인 등 반복적인 범행은 자신의 성도착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행위인 것 같다고 덧붙였다.

 

<jsjajng@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8차 사건 범인 재심 준비 '20년 억울한 옥살이?'

이춘재의 살인 행각과는 별개로 8차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돼 20여년 동안 옥살이했던 윤씨의 행보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윤씨는 경찰의 고문과 가혹행위로 허위자백을 했다고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재심을 준비하고 있다.

재심 전문’ 박준영 변호사 돕기로

특히 삼례 나라슈퍼 강도치사 사건(1999)과 익산 약촌오거리 살인사건(2000)의 재심을 맡아 무죄로 이끌었던 박준영 변호사가 윤씨의 재심을 맡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관심을 모으고 있다.

박 변호사는 지난 15일, 경찰에 다시 수사기록에 대한 정보공개를 청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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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 협상’ 일본과 비교해보니⋯

‘관세 협상’ 일본과 비교해보니⋯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트럼프발’ 통상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앞서 못 박은 시한은 끝났다. 우리나라는 유예 기간이 끝나기 전날 타결했다. 이제 협상 결과를 두고 계산기를 두드려야 할 때다. 일본과 유럽연합(EU), 그리고 한국. <일요시사>가 세부 내용을 들여다봤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취임 전부터 각국에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미국을 상대로 돈을 번, 즉 대미 무역 흑자를 거둔 나라들이 표적이 됐다. 지난해 11월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부터 전 세계는 ‘트럼프발’ 통상 전쟁에 휘말렸다. 트럼프 대통령이 숫자를 외칠 때마다 세계 경제가 요동쳤다. 하루 전 극적 타결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 다소 늦게 통상 협상을 시작했다. 지난해 12월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지난 6월 조기 대선이 치러질 때까지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탄핵심판 등 대형 정치 이슈가 거듭되면서 미국과 협상을 하고 싶어도 테이블에 앉을 사람이 마땅치 않은 상태였다. 실제 한덕수 전 국무총리나 최상목 전 경제부총리 등이 협상에 나섰지만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이 새 정부가 해야 할 일이라고 제동을 걸었다. 또 한 전 총리의 대선 출마 선언, 최 전 부총리 탄핵안 상정 등의 상황이 겹치면서 미국과의 협상은 큰 진전 없이 시간만 흘렀다. 이후 이재명 정부가 출범했다. 우리나라는 좀처럼 미국 실무진과 접점을 찾지 못했다. 그 사이 트럼프 대통령은 이재명 대통령에게 ‘모든 한국산 제품에 대해 산업별 관세와는 별도로 25%의 일반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시한은 지난 1일로 못 박았다. 우리나라는 미국과 FTA 체결로 사실상 무관세 수준이었기에 관세 부과가 현실화하면 경제 전반에 타격이 불가피했다. 자동차나 반도체 등 핵심 수출 품목에 붙는 관세 외에도 비관세 장벽(관세 이외의 수단으로 무역을 제한하는 조치)을 허물라는 압박도 가해졌다. 쌀이나 소고기 등 농·축산물 시장 개방, 정밀 지도 반출,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증액 등이 협상 테이블에 오를 것으로 예상됐다. 국내 상황과 맞물려 쉽게 내주기 어려운 조건들이었다. 일·EU와 같은 15%로 막아 대미 투자는 3500억달러로 협상도 난항을 겪었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2+2 통상 협상을 하루 앞두고 출국하려다 미국 측의 취소로 불발하는 일이 일어났다. 앞서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부 장관이 방한을 닷새 앞두고 일정을 취소하기도 했다. 미국 고위급 인사들과의 만남이 잇따라 무산되면서 ‘한미 관계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 일본과 유럽연합(EU)이 차례로 미국과 협상을 타결하면서 불확실성은 더욱 커졌다. 특히 일본의 협상 결과가 공개되면서 우리나라가 최소한으로 맞춰야 할 기준이 생겨버렸다. 우리나라와 일본은 자동차 등 수출 품목이 일부 겹치기에 일본보다 관세가 높아지면 수출 경쟁력이 망가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22일 일본과 무역 협상을 완료했다고 발표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밝힌 일본산 수입품에 부과하는 상호관세는 15%다. 기존 25%에서 10%포인트 줄어들었다. 일본이 미국에 5500억달러(약 759조원)를 투자할 것이고 이 중 90%의 수익을 미국이 받게 된다고도 했다. 동시에 자동차와 농산물을 일부 개방한다는 조건도 달렸다. 지난달 27일에는 미국과 EU가 관세 협상을 타결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EU로부터 수입되는 모든 품목에 대해 일괄적으로 15%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미국산 에너지 7500억달러(약 1030조원) 구매 및 대미 투자 6000억달러(약 820조원) 확대 방안을 담은 ‘무역협정 틀’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일본과 EU의 협상 타결로 미국의 협상 전략이 윤곽을 드러냈다. 관세를 낮추는 조건으로 무엇을, 얼마나 내놓느냐가 관건이 된 것이다. 관심이 집중된 부분은 대미 투자액이었다. 애당초 통상 전쟁 자체가 타국이 얻는 대미 무역 흑자를 줄이겠다는 명목으로 시작된 터라 트럼프 대통령은 상대국에 대미 투자라는 일종의 ‘청구서’를 요구한 셈이다. 일본이 5500억달러, EU가 6000억달러를 미국에 각각 투자하기로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우리나라에 날아올 청구액에 관심이 쏠렸다. 협상 시한이 다가오면서 언론보도 등을 통해 3000억달러, 4000억달러 등의 추측이 난무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제멋대로’ 외교에 우리나라 협상팀이 휘둘리고 있다는 말도 나왔다. 쌀 소고기 지켰다는데 우리나라는 협상 시한을 하루 앞둔 지난달 31일 한국산 제품에 대한 상호관세를 25%에서 15%로 낮추는 내용을 골자로 협상을 타결했다. 일단 일본, EU와 동일한 수준으로 관세 인하를 이끌어낸 것이다. 관심을 모았던 자동차 관세율은 15%, 철강·알루미늄·구리는 기존 관세율(50%)을 유지하기로 했다. 또 반도체와 의약품 관세 부과 시 최혜국 대우도 약속받았다. 다른 나라보다 불리한 관세를 적용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부분도 일본, EU와 같은 합의 내용이다. 대통령실에 따르면 민감한 품목으로 분류됐던 쌀과 쇠고기 등의 개방은 하지 않는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은 농산물 전면 개방을 언급해 향후 변동 가능성을 지켜봐야 한다. 대미 투자액은 3500억달러(약 490조원)로 결정됐고 1000억달러(약 140조원) 상당의 액화천연가스(LNG) 또는 기타 에너지 제품을 수입하기로 했다. 김용범 정책실장은 “한국과 일본의 대미 무역 상황은 지난해 기준 각각 660억달러 흑자, 685억달러 흑자로 규모가 유사한 상황에서 일본보다 작은 규모인 3500억 달러 펀드를 조성하기로 했다”며 “기업이 주도하는 조선펀드 1500억달러를 제외하면 우리 펀드 규모는 2000억달러로 일본의 36%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번 합의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미국과 조선업 분야 협력을 확대하기로 한 것”이라며 “한미 조선협력펀드 1500억달러는 선박 건조, MRO(유지·보수·정비), 조선 기자재 등 조선업 생태계 전반을 포괄한다”고 덧붙였다. 우리나라 협상팀은 조선 협력을 내세운 게 협상 타결의 ‘키’였다고 자평했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 주미 한국대사관에서 브리핑을 하며 마스가(MASGA·Make American Shipbuilding Great Again) 프로젝트가 협상 타결에 가장 큰 기여를 했다고 밝혔다. ‘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뜻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 구호인 ‘매가(MAGA·Make America Great Again),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에서 따온 표현이다. 자동차는 관철 못 해 아쉬운 부분으로는 자동차 관세를 꼽았다. 이전까지 우리나라 자동차는 관세가 0%였다. 2.5%였던 일본과 비교해 근소하게 가격 경쟁력을 가졌다. 하지만 이번 협상 타결로 일본과 똑같은 15% 관세가 결정되면서 자동차 업계는 가격 경쟁력을 잃게 됐다. 우리나라 협상팀이 끝까지 자동차 관세 12.5%를 요구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모두 15%’라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재명 대통령은 “큰 고비를 하나 넘었다”며 “이번 협상으로 정부는 수출 환경의 불확실성을 없애고 미국 관세를 주요 대미 수출 경쟁국보다 낮거나 같은 수준으로 맞춤으로써 주요국들과 동등하거나 우월한 조건으로 경쟁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다”고 평했다. 협상 결과를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성공과 실패를 떠나 일단 ‘최악은 면했다’는 의견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협상 타결이 이뤄지기 전까지 유예 기간을 놓쳐 관세 25%를 맞을 수도 있다고 우려한 것에 비하면 나름 ‘선방했다’는 의견이다. 동시에 미국이 내민 청구서의 구체적인 부분을 더 살펴야 한다는 신중론도 존재한다. 일본 등은 트럼프 대통령의 협상 타결 발표와 실제 합의 내용이 다르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결정된 사항을 즉흥적으로 바꾸는 등 외교 과정에서 ‘오락가락’하는 면모를 보인 적이 여러 차례 있다.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불확실성을 극대화하는 협상 기술을 사용한다는 평이다. 정밀 지도·국방비 등 안보 이슈 백악관서 만나 대통령끼리 담판? 트럼프 대통령이 우리나라와의 협상 타결 내용을 발표하면서 언급한 정상회담이 ‘진짜’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그는 “한국이 투자 목적으로 상당한 금액을 추가 투자하기로 합의했다”면서 2주 내로 이재명 대통령과 백악관에서 정상회담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자리에서 투자액이 발표될 것이라고 했다. 추가 청구서가 나올 수 있다는 뜻이다. 이번 통상 협상에서 논의되지 않은 정밀 지도 반출 문제가 협상 테이블에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 김용범 정책실장은 지도 반출 등 안보 사안은 한미 정상회담에서 별도로 논의할 것으로 예상된다면서 “(지도 반출과 관련해) 우리가 계속 방어해왔다. 추가 양보는 없다”고 말했다. 미 무역대표부(USTR)는 지난 3월 <2025 국가별 무역 장벽 보고서>에서 정밀 지도 반출 제한을 한국과의 디지털 무역 장벽 중 하나로 지목했다. 우리나라 정부는 군사기밀 유출을 우려해 정밀 지도의 국외 반출을 막아왔다. 정밀 지도에 해외 기업이 가진 위성사진을 결합하면 국가 안보와 직결된 지도 정보로 완성될 가능성이 있다. 미국 정계와 IT업계는 정밀 지도를 반출해야 한다는 주장을 고수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협상에서는 다뤄지지 않았지만 정상회담의 의제로 오를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뜻이다. 주한미군 주둔 방위비 분담금, 국방비 문제도 거론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동맹국들에 국내총생산(GDP) 대비 5% 이상을 국방비 예산으로 잡으라고 압박했다. 우리나라에도 대선 후보 시절부터 방위비 분담금으로 100억달러를 내야 한다고 여러 차례 말하는 등 전방위로 요구한 바 있다. 추가 청구 나올까? 한미 정상회담은 이 대통령의 ‘외교 시험대’가 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이 대통령은 취임 직후 G7 정상회의에 참석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지 못했다. 나토 회의에는 이 대통령 대신 위성락 안보실장이 참석했다. 이번 정상회담이 ‘안보’ 회담이 될 가능성이 큰 상황에서 이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이 어떤 딜을 벌일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