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 모를’ LG화학의 두 얼굴

전 직장 동료 대상 소송 남발...총질 비난 받아

[일요시사 취재1팀] 김정수 기자 =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이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CEO 회동은 갈등 봉합의 기대를 낳았지만 결렬됐다. 다음 날 경찰은 SK이노베이션을 압수수색했다. 앞서 LG화학은 SK이노베이션을 고소한 바 있다. 압수수색 대상에는 SK이노베이션으로 이직한 전직 LG화학 직원들이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사실상 LG화학이 이들을 겨냥한 셈이다.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이 정면충돌하고 있다. 양사는 전기차 배터리 기술과 특허를 둘러싼 치열한 대결 양상을 보이고 있다. 갈등의 핵심은 LG화학 전직 직원들이 SK이노베이션으로 이직하면서 자사 배터리 기술을 유출했다는 것. 배터리 사업은 사업 특성상 인재풀이 한정적이다. 경력직 채용이 곧 ‘인재 유출’로 여겨지는 까닭이다. 업계 간 인력 유치 경쟁은 그만큼 뜨겁다.

정면충돌
언제까지?

올해 1월 SK이노베이션은 배터리 부문 경력직 채용에 나섰다. LG화학은 인재 이탈을 막기 위해 성과급을 마련하는 등 대비에 나섰다. 그러나 상당수 LG화학 직원들이 이직한 것으로 전해진다.

LG화학은 지난 4월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에 SK이노베이션의 셀·팩·샘플 등의 미국 내 수입 전면금지를 요청했다. 동시에 LG화학은 델라웨어주 지방법원에 비밀 침해금지 및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델라웨어주는 SK이노베이션의 전지사업 미국 법인이 있는 곳이다.

LG화학은 자사 전지사업본부 핵심인력 76명을 SK이노베이션이 2017년부터 가로챘다고 봤다. 특히 해당 인력 다수는 LG화학이 특정 자동차 업체와 진행하고 있는 차세대 전기차 프로젝트에 참여했다고 강조했다. SK이노베이션이 자사 핵심 인력을 대거 빼가면서 자동차 배터리 핵심기술까지 빼앗아 갔다는 주장이다.


LG화학은 전직 직원들이 SK이노베이션 입사지원 서류에 ‘배터리 양산 기술’ ‘핵심 공정 기술’ 등 주요 영업 비밀을 구체적으로 적시했다고 설명했다. SK이노베이션의 추가 채용이 LG화학 핵심인력을 대상으로 진행됐다는 것이다.

회동 하루 뒤 압색…화해 분위기 ‘찬물’
전 직원들 겨냥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

LG화학은 “이번 소송은 핵심기술과 지식재산권 보호를 위해 불가피한 조치”라며 “정당한 경쟁을 통한 건전한 산업 생태계 발전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SK이노베이션은 입장문을 통해 “국내 이슈를 외국서 제기해 국익 훼손 우려 등의 관점서 먼저 유감을 표한다”며 “배터리 사업은 투명한 공개채용 방식으로 국내외로부터 경력 직원을 채용한다. 경력직 이동은 당연히 처우 개선과 미래 발전 가능성 등을 고려한 당사자 의사에 따라 진행된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양사 갈등은 결국 맞소송으로 번졌다. SK이노베이션은 지난 6월 서울지방법원에 LG화학을 상대로 명예훼손에 따른 손해배상 청구 소송과 영업비밀 침해가 전혀 없었다는 내용의 채무부존재 확인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SK이노베이션은 10억원을 우선 청구했다. 이후 소송 과정서 구체적으로 손해를 조사, 손해배상액을 추가 청구하기로 했다.
 

▲ LG서산 배터리공장

SK이노베이션은 지난 2011년 LG화학을 상대로 특허권과 관련해 승소한 바 있다. LG화학은 당시 리튬이온 분리막 특허권을 침해당했다는 취지의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특허심판원과 서울중앙지법은 모두 LG화학의 패소를 결정했다.


SK이노베이션은 지난 3일 LG화학과 미국 법인 LG화학 미시간, LG전자를 국제무역위원회와 연방법원에 특허 침해로 제소했다.

윤예선 SK이노베이션 배터리 사업 대표는 “이번 제소는 LG화학이 지난 4월에 제기한 영업비밀 침해 건과는 무관하다”며 “핵심 기술 및 지적재산 보호를 위한 정당한 소송”이라고 밝혔다. 윤 대표는 “LG전자는 LG화학으로부터 배터리 셀을 공급받아 배터리 모듈과 팩을 생산해 특정 자동차 회사에 판매하고 있어 소송 대상에 포함됐다”고 설명했다.

배터리 전쟁
누워 침뱉기

LG화학은 즉각 반발했다. LG화학은 입장문을 통해 “LG화학의 특허 건수는 1만6685건인 반면, SK이노베이션은 1135건으로 14배 이상 격차를 보이고 있다”며 “SK이노베이션이 면밀한 검토를 통해 사안의 본질을 제대로 인지하고 이번 소송을 제기한 것인지 의문”이라고 받아쳤다.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 소송전’으로 이들 간 갈등의 골은 깊어져만 갔다. 업계 안팎에선 국내 배터리 산업 경쟁력 확보를 위해 주력사 간 갈등이 하루 빨리 해소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추석 이후 양사 CEO는 회동을 갖기로 해 이목을 끌었다. 서로의 입장과 상황을 설명하는 정도에 그칠 공산이 컸지만 이들의 만남에 거는 기대도 적지 않았다. 신학철 LG화학 부회장과 김준 SK이노베이션 사장은 지난 16일 서울 모처서 회동을 가졌다. 회동 결과를 두고 이목이 쏠렸다.

결과는 ‘결렬’이었다. 업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신 부회장과 김 사장은 서로의 입장 차이만 확인한 채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추후 회동 일자 역시 잡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 김준 SK이노베이션 사장

CEO 회동 바로 다음 날 경찰은 SK이노베이션을 압수수색했다. 화해 모드를 연출한 지 하루 만에 불이 붙은 셈이다.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는 것을 두고 여러 곳에서 우려를 표했다. 경찰의 압수수색이 CEO 회동 바로 이튿날 이뤄진 점을 두고 시기가 묘하다는 관측도 있었다.

서울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는 지난 17일, SK이노베이션 종로구 서린동 본사와 대전 대덕기술원을 압수수색했다.

LG 화학은 지난 5월 SK이노베이션을 서울지방경찰청에 ‘산업 기술유출 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 등으로 형사 고소했다. 압수수색은 이틀째 이어졌다. 경찰은 다음날인 18일, 충남 서산 배터리공장도 압수수색했다. 전날 압수수색 불가로 영장을 법원으로부터 다시 발부받은 뒤 이날 실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진흙탕 싸움
화해는 없나

경찰의 이날 압수수색으로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의 2차 회동 여부는 불투명할 전망이다.


LG화학은 압수수색에 대해 “이번 수사를 통해 경쟁사의 위법한 불공정행위가 명백히 밝혀지고, 선의의 경쟁을 통해 국가 배터리 산업의 경쟁력이 더욱 강화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SK이노베이션은 “일부 LG화학의 인력을 채용한 게 사실이고, 유감으로 생각한다”면서도 “워낙 지원자가 많았을 뿐 특정 인력을 겨냥해서 채용한 적은 없다”고 맞섰다.

SK이노베이션으로 이직한 전직 LG화학 직원들이 압수수색 대상이 된 것으로 전해지면서 논란이 일었다. LG화학이 자사 전직 직원을 사실상 정조준했다는 것이다.

일각에선 이직 직원을 소송전에 포함시키는 것을 두고 LG화학의 ‘길들이기’라고 지적한다. LG화학에 재직하고 있는 직원들과 이직을 준비 중인 직원들을 비롯해 이미 이직한 직원에게까지 압박으로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업계 안팎에선 개인까지 소송전에 포함시키는 것을 두고 진흙탕 싸움으로 번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LG화학은 과거 이직한 전직 직원들을 대상으로 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LG화학은 2017년 12월 SK이노베이션으로 옮긴 전기차 배터리 담당 핵심 직원 5명을 법원에 전직금지 가처분 소송을 냈다. LG화학은 이들의 SK이노베이션 이직을 기술유출로 봤다. 대법원은 지난 1월 영업비밀 유출 우려, 양사 간 기술 역량 격차 등을 모두 인정, 이례적으로 ‘2년 전직금지 결정’을 내렸다.

LG화학이 주장하고 있는 경쟁사의 인력 빼가기 등은 비단 SK이노베이션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특히 해외 배터리 업체가 국내 인력에게 보내는 러브콜과 그에 따른 기술유출 우려는 놀랄만한 수준이다. 배터리 인력 스카우트서 중국이 가장 적극적이다. 유럽 등지서도 숙련된 국내 인력에 대한 선호도가 높다.


빼가는 중국·스웨덴 그냥 두고
국내 기업 SK이노베이션만 시비

중국 헝다신에너지차는 전기차 배터리가 포함된 신에너지차 분야서 8000여명 규모의 글로벌 채용을 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 헝다신에너지차는 중국 최고 부호 쉬자인 헝다 그룹 회장이 미래 먹거리 발굴을 위해 올해 초 설립한 회사다. 채용 인력에 대한 처우는 업계 최고 수준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중국 배터리 업체 비야디(BYD)는 지난 2017년 국내 배터리 인력을 모집하기 위한 공고를 낸 바 있다. 비야디가 내세운 건 연봉 외에 추가로 성과급과 연말 보너스, 관용차, 자동차 구입 보조금, 1인용 숙소 지원 등으로 상당히 파격적이었다.
 

업계 등에 따르면 생산량 기준 세계 1위 배터리 업체인 중국 CATL은 국내 배터리 기업 인재들을 기존 연봉의 3배 수준을 제안하면서 영입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스웨덴 배터리 업체 노스볼트는 자사 인터넷 홈페이지에 “30여명 이상의 한국인과 일본인 기술자들이 일하고 있다”며 LG화학 인력을 스카우트했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LG화학이 SK이노베이션을 상대로 소송 제기 당시 LG화학 직원들은 익명 앱 블라인드서 ‘이직은 자의로 간 것’ ‘돈이 다가 아니다. 대우와 기업문화 차이가 크다’ 등의 냉소적 반응을 보인 바 있다.

업계 관계자들은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의 다툼이 계속되면서 인력 유출에 속도가 붙을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해외 배터리 업체들이 제시하는 급여나 처우 등은 국내 업체가 사실상 따라오기 어렵다. 인력 유출 방지를 위한 방법을 적극적으로 강구해야 할 시기에 국내 동종 업계 간 갈등은 오히려 인재 이탈 가능성을 높인다는 분석이다.

‘돈 때문 아냐’
‘이직은 자의’

LG화학 관계자는 <일요시사>와 통화서 “SK이노베이션으로 이직한 직원들과 SK이노베이션의 기술유출 범죄 정황이 드러났기 때문에 문제를 제기한 것”이라며 “피해를 입은 건 자사”라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해외 배터리 업체의 인재 유출 등과 관련해선 “해외 배터리 기업서도 기술유출이 발생하면 당연히 법적으로 대응한다”며 “해외기업에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SK이노베이션에만 대응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반박했다.


<kjs0814@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CEO 회동 불발, 두 회장이 나설까

신학철 LG화학 부회장과 김준 SK이노베이션 사장 간 회동이 불발되면서 회장 간 회동에 관심이 모인다. CEO 회동 하루 만에 경찰의 압수수색이 시작됐고, 추후 회동마저 안갯속이다.

양측의 대립이 계속된다면 벼랑 끝 상황까지 이어지는 건 시간문제라는 해석도 있다. 구광모 LG 회장과 최태원 SK 회장의 회동이 언급되는 까닭이다.

두 그룹 회장이 직접 만난다면 비교적 이른 시일 내에 합의를 볼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반면 회장 회동은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도 있다.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은 각각 LG그룹과 SK그룹 계열사이지만 양사 CEO가 적지 않은 결정권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배터리 전쟁 전면서 다투고 있기도 하다. 그룹 총수가 직접 나설 여지가 그 만큼 줄어든다는 해석이다.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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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구성원의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된 수장이 반년 만에 끌려 내려왔다. 막말에 가까운 강한 발언과 제멋대로인 행보가 탄핵을 불렀다. 강성 수장이 물러나면서 변화를 기대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대화의 문이 열릴 것인가, 더 높은 벽이 쌓일 것인가. 임현택 대한의사협회(이하 의협) 전 회장이 3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탄핵당했다. 지난 5월 취임 이후 6개월 만으로 의협 역사상 2번째, 최단기간 내 불명예 퇴진한 회장이 됐다. 첫 번째는 2014년 4월 임기 1년여를 앞두고 탄핵당한 노환규 전 회장이다. 두 번째 최단기간 의협은 지난 10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의협회관서 임시대의원총회를 열고 임 전 회장의 불신임안을 처리했다. 참석 의원 224명 가운데 170명(75.9%)이 찬성했다. 반대는 50명, 기권 4명이다. 전체 대의원 249명 가운데 224명(91.1%)이 표결에 참여했다. 의협 정관에 따르면, 회장 불신임안은 제적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출석하고, 출석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하면 가결된다. 지난 3월 임 전 회장은 선거서 유효 투표수 3만3084표 중 2만1646표를 받아 당선됐다. 65.43%의 압도적인 지지다. 의협 회장 선거는 정부의 의대 정원 증원 발표로 의정 갈등 수위가 높아지고 있을 무렵에 치러졌다. 전공의가 병원을 떠났고 정부가 ‘2000명’을 강조하던 시기였다. 의협 회원들은 강성 중의 강성으로 분류되는 임 전 회장에게 힘을 실었다. 임 전 회장의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갔던 것일까? 임 전 회장의 언행은 사사건건 도마 위에 올랐다. SNS에 올린 글, 공식 석상서 했던 발언 등이 막말 논란으로 번졌고, 단식투쟁 등의 행보는 ‘쇼’라는 비판을 받았다. 무엇보다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이하 대전협) 비대위원장과 갈등을 빚으면서 의료계 내부 분열을 조장한다는 지적이 뼈아팠다. 임 전 회장이 8개월 동안 보여준 모습은 고스란히 탄핵 사유가 됐다. 의협 회원 사이에서는 임 전 회장이 SNS로 막말과 실언을 해 의사단체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또 ‘임 회장이 전공의 지원금을 빼돌렸다’는 허위 비방 글을 올린 시도의사회 임원에게 고소 취하 대가로 1억원을 요구한 사실이 녹취록을 통해 알려져 논란이 불거졌다. 특정 인물에 대한 수위 높은 비판은 여론의 역풍을 불렀다. 장상윤 대통령실 사회수석을 겨냥해 “정신분열증 환자 같은 개소리”라고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가 환자를 비하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임현택, 6개월 만에 탄핵당해 막말 논란·의대 증원 못 막아 또 2021년 한 의사가 80대 환자에게 ‘맥페란’ 주사제를 투여한 뒤 부작용이 나타나 기소된 재판에 대해서도 도 넘는 발언을 쏟아냈다. 이른바 ‘맥페란 재판’ 항소심서 판사가 1심의 금고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해당 의사의 항소를 기각하자 “이 여자 제정신입니까?”라는 글을 SNS에 올린 것이다. 임 전 회장의 발언에 법원은 이례적으로 “재판장의 인격에 대한 심각한 모욕일 뿐 아니라 국민의 신뢰를 크게 훼손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행동”이라고 공개적으로 유감을 표명했다. 의대 정원 증원 집행정지와 관련해 기각·각하 결정을 내린 재판장이 ‘회유’받았을 것이라는 주장으로도 입길에 올랐다. 서울고등법원 재판부가 결정을 내린 다음 날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재판장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지난 정권에서는 고법 판사들이 차후 승진으로 법원장으로 갈 수 있는 그런 길이 있었는데 제도가 바뀐 다음에는 그런 통로가 막혀서 이분이 아마 어느 정도 대법관에 대한 회유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있다” 말했다. 서울고법은 법원 명의로 입장문을 내고 “해당 단체장의 아무런 객관적 근거가 없는 추측성 발언은 재판장의 명예와 인격에 대한 심대한 모욕”이라면서 “사법부 독립에 관한 국민의 신뢰를 현저히 침해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언사다.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고 밝혔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정부의 2025학년도 의대 증원을 막지 못한 점, 간호법 제정을 저지하지 못한 점이 탄핵 사유로 꼽혔다. 임 전 회장은 총회를 앞두고 의사 회원들에게 사과하고 페이스북 계정을 삭제하는 등 재신임을 호소했지만 반전은 없었다. 회장을 탄핵한 의협은 비대위원회 체제로 전환하고 지난 13일 새로운 회장 선거 전까지 단체를 이끌 비대위원장을 뽑았다. 그 결과 박형욱 대한의학회 부회장이 1차 투표서 총 유효 투표수 233표 중 123표(52.8%)를 얻어 과반으로 당선이 확정됐다. 임기는 내년 1월 차기 회장이 선출될 때까지다. 뒤늦게 호소했지만…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정부는 의료 파탄이란 시한폭탄을 장착해놨다”며 “정말 대화를 원한다면 정부는 먼저 시한폭탄을 멈춰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비대위원들의 합의에 기초해 입장과 행동을 결정할 것”이라며 “비대위 운영서 소외돼왔던 전공의들과 의대생들의 견해가 충분히 반영될 수 있게 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임 전 회장이 물러나고 새로운 비대위원장이 등장하면서 의협의 투쟁 방향에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커졌다. 일각에서는 의협의 이번 행보를 의정 갈등의 중요한 변곡점으로 보고 있다. 강성 회장을 필두로 정부와 강하게 대립했던 이전 모습서 벗어나 대화에 참여할 것이라는 의견과 이전보다 더 수위 높은 대정부 투쟁이 예상된다는 의견으로 갈리는 중이다. 후자의 배경에는 대전협이 있다. 앞서 박단 비대위원장 등 전공의 70여명은 전날 의협 대의원들에게 “비대위원장으로 박형욱 교수를 추천한다”는 메시지를 보내 공개 지지 의사를 드러냈다. 대의원회서도 박단 비대위원장의 공개 지지에 대해 경고하는 등 잡음이 일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대전협의 지지를 등에 업은 박형욱 비대위원장이 당선되면서 전공의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의협과 대전협의 공조가 본격화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문제는 양측의 교류가 정부와의 대화로까지 이어질 수 있느냐는 점이다.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당선 소감부터 정부의 태도 변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또 윤석열 대통령의 변화도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의정 갈등서 줄곧 선봉에 선 전공의들은 ‘의대 정원 증원 백지화’라는 요구사항서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인 적이 없다. 전공의의 행보는 의대생, 의대 교수 등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영향력 커진 전공의 단체 의료계가 전공의 중심으로 굴러가고 있는 셈이다. 실제 대전협은 지난 11일 출범했던 여야의정협의체(이하 협의체)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협의체는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불참하고 의료계에서는 학술 단체인 대한의학회와 의대 학장 모임인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KAMC)만 참석하는 등 ‘반쪽 출범’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협의체의 운영 기한은 올해 말까지로, 다음 달 22~23일 전에 의미 있는 결과를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태도다. 하지만 박단 비대위원장은 협의체에 대해 ‘무의미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협의체가 첫발을 뗀 11일 SNS에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는 전공의와 의대생, 당사자 없이 대화나 하겠다는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다”며 “한 대표는 2025년 의대 모집 정지와 업무개시명령 폐지에 대한 입장부터 명확히 밝히시길 바란다”고 일갈했다. 이어 “눈치만 보며 뭐라도 하는 척만 하겠다면 한동훈의 ‘여야의정 협의체’ 역시 임현택 전 의협 회장의 ‘올바른 의료를 위한 특별위원회(올특위)’와 결국 같은 결말일 것”이라고 우려했다. 올특위는 의료계의 입장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의협 주도로 구성한 범의료계 특별위원회다. 전공의와 의대생이 해당 위원회에 불참하면서 파행 운영되다 지난 7월 해체됐다. 정부는 협의체서 의료계가 제안한 내용에 대해 “진정성 있게 검토하겠다”는 견해를 밝혔다. 지난 11일 협의체서 의료계는 한국의학교육평가원 자율성 보장, 추가 합격 제한 등을 통한 2025학년도 의대 선발 인원 축소 등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윤순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실장은 지난 14일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이하 중대본) 회의를 주재하면서 “마주 앉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만큼 활발한 대화와 소통을 통해 누적된 갈등을 해소하고 신뢰를 회복해 국민이 원하는 결과를 끌어낼 수 있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의협과 전공의 등 다른 의료계 단체의 참여를 호소했다. 박단 공개 지지 새 비대위원장 강경 투쟁이냐 VS 노선 변화냐 의료계 내부 상황은 크게 바뀌었지만 향후 상황은 여전히 ‘시계 제로(0)’ 상태다. 임 전 회장과 박단 비대위원장 간 갈등의 불씨도 여전히 살아있다.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공개적으로 요청하는 등 ‘(임 전 회장과)같이 갈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실제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요청하면서 “이해와 소통이 가능한 새로운 회장을 필두로 의협과 대전협 두 단체가 향후 상호 연대를 구축할 수 있길 기대한다”는 입장문까지 냈다. 임 전 회장의 탄핵안 가결 직후 박 비대위원장이 “결국 모든 길은 바른 길로”라는 내용의 SNS 글을 올리기도 했다. 문제는 임 전 회장이 박단 비대위원장을 상대로 반격을 진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임 전 회장은 탄핵 사흘 만에 닫았던 페이스북 계정을 다시 열고 “박단과 그 뒤에서 박단을 배후 조종해 왔던 자들이 무슨 일을 해왔는지 전 의사 회원들에게 아주 상세히 밝히겠다”며 박단 비대위원장을 저격하는 글을 올렸다. 그러면서 “의협 대의원회 비대위원장과 의협 회장 선거가 더 이상 왜 필요한가”라면서 “박단이 의협 회장 겸 비대위원장을 맡아 모든 권한과 책임하에 의료 농단을 해결하면 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지지해주셨던 모든 분에게 우선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며 “이유가 어떻든 회장 취임 전부터 탄핵하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자들에게 빌미를 주어 넘어간 것 자체가 제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또 의협의 근본적인 개혁의 첫걸음으로 의협 대의원회 폐지 등을 내용으로 하는 민법상의 사원총회를 개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원총회는 민법에 규정된 사단법인의 최고의사결정 기관이다. 의협 최고의결기구로 알려진 대의원총회보다 상위에 있고 정관의 규정으로 폐지할 수 없다. 사원총회는 이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나 총 사원 5분의 1 이상이 회의의 목적 사항을 제시해 청구하는 경우 소집될 수 있다. 반격 시작 내부 갈등? 올해 2월 시작된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이 10개월째로 접어들었다. 온갖 말이 오갔지만 되짚어보면 조금도 좁혀지지 않은 평행선 상황이 계속되는 모양새다. 정부와 의료계의 대치 상황이 길어질수록 ‘의료 붕괴’는 가시화되고 있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