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미8군 군납 비리 추적

  • 박창민 기자 cmp@ilyosisa.co.kr
  • 등록 2017.02.13 09:29:37
  • 호수 110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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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격 미달인데 무사통과라고?

[일요시사 취재1팀] 박창민 기자 = 주한미군 제8군(이하 미8군)에 군납 비리가 감지됐다. 통상적인 미군의 입찰 참가 자격요건에 한참 못 미치는 업체가 선정돼서다. <일요시사> 취재 결과 이 업체가 회사 경력 등을 허위 작성한 의혹도 발견됐다. 편법으로 입찰했다가 낙찰된 의혹이 있는 업체에 국고(방위분담금)가 흘러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이 배후에 미8군 군수지원사령부에 근무했던 군무원의 그림자가 아른거린다.
 

2014년 상반기. 미8군은 ‘지게차 검사 및 수리(Inspect, Repair, Paint and Test of MHE)’ 공개입찰공고를 냈다. 충청권에 있는 H사(이하 H사)가 2014년 12월∼2015년 3월 사이에 이 입찰에 최종 낙찰됐다. 그런데 H사가 미8군 입찰 참가 자격 조건에 한참 미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낙찰됐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돈되는 사업
이상한 계약

주한미군의 입찰은 통상적으로 5년 이내에 2년 이상 미군과 계약한 경력이 있어야 한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복수의 주한미군의 계약서에 따르면 ‘Prime Offer’s Prior Experience : The offeror shall provide documents of at three years prior experience within the last five years (입찰 참여 업체는 최근 5년 이내에 2년 이상 미군과의 계약을 수행한 경력이 있어야 하며, 관련 문서를 근거로 제공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대부분 미군이 이 자격 요건을 준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군납 업계에선 “미군 입찰을 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며 “신생 업체가 미군의 일감을 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H사는 2014년 8월28일에 설립돼 입찰 당시 1년도 안 된 신생 법인이었다. 과거에 미군 일감을 수주했을 일은 만무하며, 입찰 참여 요건도 되지 않았던 셈이다. H사는 어떻게 미군 입찰에 낙찰받았을까. 


5년 내 2년 이상 미군 경력 필수
설립된지 1년도 안된 법인 낙찰

H사가 다른 지역서 미군 일감을 수주했던 동명법인의 경력을 도용했다는 의혹이다. 경기도권에도 동명법인의 H사가 있던 것으로 파악된다. 상호는 똑같지만 엄연히 다른 법인이다. 1977년에 설립됐으며, 1992년부터 2010년까지 인천의 미군 지게차 수리(Inspect, Repair, Paint and Test of MHE) 등을 도맡아 정비한 것으로 확인됐다.

경기도권 H사는 2010년에 계약을 따내 2014년 계약 만료로 미군의 일감을 수주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후 설립된 지 1년도 안 된 H사가 2014년 미8군의 지게차 입찰을 낙찰받았다. 이런 정황 때문에 H사가 고의로 경기도권 H사와 똑같은 법인명을 사용한 게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된다. 서울시 담당 공무원은 “동일한 관할 내에서, 동일한 사업 목적을 갖고 있을 때 동일한 상호는 불가능하다. 다만 관할 지역이 아닌 곳에서는 사용할 수 있다”고 답했다.

H사는 미8군 입찰에 낙찰될 당시 지게차 정비업을 위한 자격요건도 갖추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모든 지게차 정비업소는 ‘건설장비 및 기계 장치 수리업’ 필증을 관할 시청에 허가 및 등록해야 한다. 그런데 H사가 건설장비 및 기계 장치 수리업을 등록한 시기는 2015년 7월10일이다.

허술한 입
뻔뻔한 낙찰

다시 말해 미8군 입찰에 참여한 2014년에는 지게차 정비업을 할 수 없었던 시기다. 필증이 없던 시기에 영업을 했다면 엄연한 불법이다.

또 H사는 건설장비 및 기계 장치 수리업을 허가 및 등록받는 과정서 불법적으로 승인 받아 영업정지에 처할 위기에 놓여 있기도 하다.


건설장비 및 기계 장치 수리업 업체로 지정받으려면 정부가 고시한 리프트나 검차대, 도장 부스가 필수다. 관할 시청은 현장을 방문해 사업장이 허가 요건을 갖췄는지 직접 확인한다. 업체가 제출한 서류 등을 토대로 등록 기준에 적합한지 확인 후 이를 허가하는 구조다.

하지만 H사가 제출한 서류는 허위였으며, 검차대 등 공장시설 또한 다른 공장의 사진을 도용한 것으로 아산시청의 감사 결과 밝혀졌다.

아산시청은 지난 1월18일 “검차대가 첨부된 서류와 다름을 확인하는 등 일부 담당 공무원이 현장점검을 소홀히 한 부분이 발견됐다”며 “해당 공무원에 대한 징계를 진행할 예정이며, 위반에 따른 후속 조치를 이행할 것이다”고 밝혔다.

이런 정황 때문에 H사가 2014년 미군 지게차 수리 입찰을 낙찰받기 위해 법인을 급조한 게 아니냐는 의구심까지 드는 상황이다.
 

H사 입찰에 주한미군 군무원 출신이 관여했다는 의혹도 제기된다. H사 실질 소유주가 주한미군 제19원정지원사령부 계약 담당 군무원 출신인 A씨의 아들 B씨인 것으로 전해진다. 주한미군 사정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A씨는 오랫동안 주한미군 계약 담당 군무원으로 근무했다”며 “몇 개월 전에 퇴사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타 법인 경력
서류조작 의혹

H사의 대표는 K씨로 돼있다. 하지만 법인의 실질 소유주는 A씨의 아들 B씨라는 의혹이 있다. B씨는 부동산 임대업을 하는 T사를 운영한다. H사는 T사의 공장을 임차하고 있다. H사는 매달 500만원가량 T사에 임대료를 지급한다.

그런데 H사가 임대료 외에도 지속적으로 T사에 매달 300만∼500만원 사이의 돈을 입금한 것으로 드러났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T사 입출금 통장 내역을 보면 H사는 T사로 한 달에 최소 2∼3차례 돈을 입금했다. 2015년 5월부터 2016년 9월까지 H사가 T사로 입금한 금액은 총 1억8527만원인 것으로 나타났다. 상식적으로 임차인이 임대인에게 월세 외의 다른 돈을 지속적으로 입금한다는 점이 석연치 않다. T사와 H사가 사실상 A씨의 아들과 관련 됐을 거라는 추정이 가능한 대목이다.

미군 군무원 출신 아들이 뒷배?
불법 영업으로 자격 정지 위기

또 H사가 T사에 돈을 입금할 당시는 미8군의 일감을 수주한 시기와 겹친다. 미8군의 용역비가 T사로 흘러들어 갔다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런데 H사가 미8군의 용역비로 지급하는 돈은 국방부의 방위분담금(군수지원비) 명목으로 지급된다. 지게차 정비는 군수 부문이다.

미군서 용역 및 물자지원에 대해서 계약을 하고 국방부에 대금을 청구한다. 국방부는 내용 확인 후 용역을 제공한 업체에 대금을 지급하는 구조다. 편법으로 입찰에 낙찰된 의혹이 있는 회사에 국고가 흘러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혹에 대해 국방부와 미8군 관계자는 ‘사실 무근’이라는 입장이다. 국방부 한 관계자는 “미군 측에서 계약한 건이기 때문에 국방부서 개입할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미 8군 관계자 역시 “잘못된 업체라면 조사를 받아야겠지만 미8군이 답변할 문제는 아니다”고 말했다.

H사의 실질 소유주라는 의혹이 있는 B씨 역시 ‘사실무근’이라는 입장이다. B씨는 “H사는 나와 관계없는 회사다. 임차인일 뿐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누군가 음해를 하는 것 같은데 관련 내용에 대해 말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군 출신 개입
방위금 줄줄∼

국방위 소속 정의당 김종대 의원은 “방위비분담금 중 현물로 지급되는 군수지원은 미군이 사업선정, 업체선정 등 계약 과정을 모두 전담한다. 국방부로서는 대금 지급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통제가 불가능하다”며 “필요하다면 회계 감사를 해서 소중한 방위비분담금이 한미동맹에 기여할 수 있게 쓰이도록 해야 한다. 방위비분담금을 늘리는 것보다 제대로 쓰이도록 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말했다.


<cmp@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경유 빼돌리다…미군 군무원 비리


미군기지에 공급되는 수십억원 어치의 난방용 경유를 운송과정에 가로챈 탱크로리 운송기사와 관리자, 미군기지 군무원 등이 무더기로 경찰에 적발됐다.

지난해 경기남부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는 미군기지 난방용 경유의 양을 속이거나 값싼 경유를 대신 채워 넣는 수십억원상당을 가로챈 혐의(특수절도 등)로 운송기사 김모(46)씨 등 27명을 구속하고, 오모(40)씨 등 22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또 하청 운송업체 A사로부터 휴가비 등 명목으로 돈을 받고 입찰정보를 알려준 원청 물류업체 B사 직원 이모(43)씨에 대해 사전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김씨 등 35명은 2014년 12월부터 올해 5월까지 오산, 평택, 동두천, 의정부 소재 미군기지에 납품되는 경유 435만ℓ(60억원 상당)를 훔친 혐의를 받고 있다. 이들은 운송기사, GPS 감시조, 등유 준비조 등으로 역할을 분담, 운송기사들이 인천시 소재 저유소에서 탱크로리(2만ℓ)에 경유를 싣고 나오면 공모한 주유소나 공터 등으로 가서 경유를 빼낸 뒤 등유와 첨가제 등을 대신 넣는 수법으로 경유를 훔친 것으로 조사됐다.

처음에는 탱크로리 저장고 바닥에 남은 소량의 경유를 훔치던 이들은 급기야 탱크로리를 불법 구조변경해 유량계를 조작하거나 비밀격실을 설치하는 등의 방법으로 한번에 2만ℓ가운데 최대 1만6000ℓ를 훔치기도 했다.

이 같은 범행은 미군 부대에서 25년여간 유류 담당 업무를 맡아온 군무원이 뒷돈을 받고 범행을 방조했기에 가능했다.

오산 모 미군부대 소속 군무원 고모(57·구속)씨는 2014년 12월부터 올해 2월까지 운송기사들의 범행 때마다 60만원씩, 154차례에 걸쳐 1억여원을 받아 챙기는 대가로 김씨 일당의 경유 절도 사실을 눈감아 줬다. 경찰은 경유 절도 사건을 수사하던 중 B물류업체 임직원 5명이 A사 대표 이모(64)씨로부터 수천만원 상당의 향응을 받고 운송 재계약 과정에 편의를 제공한 사실도 확인, 배임수·증재 등 혐의로 입건했다.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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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길 유니버스’ 절대 불가능한 이유

‘전한길 유니버스’ 절대 불가능한 이유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에 입당한 한국사 강사 전한길씨가 국민의힘 행사에서 영향력을 과시하다가 큰 물의를 일으켰다. 전씨는 국민의힘에서 ‘보수의 김어준’을 꿈꾸는 것 같다. 전씨는 과연 김씨가 15년 동안 구축했던 영향력을 단번에 얻을 수 있을까? 국민의힘에 입당한 한국사 강사 전한길씨가 지난 8일, 대구 EXCO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전당대회 대구·경북지역 합동연설회에서 큰 물의를 일으켰다. 전씨는 지난 3월 창간한 <전한길뉴스> 소속 언론인 자격으로 참석했다. 선거판 난장판 하지만 전씨는 언론 취재의 한계를 넘어 반탄(탄핵 반대) 성향 후보들의 연설 도중 응원하면서 분위기를 띄웠다. 반대로 찬탄(탄핵 찬성) 성향 당 대표·최고위원 후보들이 연설할 때마다 “내부 총질” 혹은 “배신자” 등 원색 비난을 했다. 이날 김근식 최고위원 후보는 전씨를 직접 지칭해 “부정선거 음모론에 빠지고, 계엄을 계몽령이라고 정당화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같이 투쟁할 수 있겠느냐”면서 비난했다. 그러자 전씨는 김 후보에게 욕설하면서 자신의 지지자들을 격동시켰다. 찬탄 성향 조경태 당 대표 후보가 연설할 땐 자리에서 일어나 한 손을 들고 항의하는 등 지지자들의 조 후보 비난을 유도했다. 그러자, 찬탄 성향 일부 당원들이 전씨에게 물병을 던지면서 항의했다. 한 당원은 전씨에게 “난 20년 차 당원인데, 입당한 지 한 달밖에 안 된 당신이 왜 이런 난동을 부리느냐”고 따져 물었다. 국민의힘 지도부는 전씨의 전당대회 출입을 막기 위해 대의원이 아닌 일반 당원의 행사장 출입을 금지했다. 이어 전씨에 대한 징계 가능성도 내비쳤다. 그러자 전씨는 <전한길뉴스> 발행인 신분을 내세워 “언론 탄압”이라며 반발했다. 이처럼 전씨는 국민의힘 당원과 언론인이란 신분을 왕래하면서 국민의힘 전당대회에 개입하고 있다. 지난달 31일과 지난 7일엔 시사평론가 고성국씨 등과 함께 주최한 ‘자유 우파 유튜브 연합 토론회’에 각각 장동혁·김문수 당 대표 후보를 출연시켜 ‘면접’을 보는 위력을 국민의힘 내외에 과시했다. 특정 진영의 강경파를 대상으로 언론사·유튜브 채널 등을 운영하면서 힘을 과시하는 모델로는 방송인 김어준씨가 있다. 김씨는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의 친문(친 문재인) 강경파 성향 당원·지지자를 대상으로 라디오·유튜브 방송을 진행하면서 당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당 대표 후보들을 면접하는 형식은 김씨가 지난해 3월 자신의 유튜브 방송 ‘김어준의 다스뵈이다’에 민주당 총선 후보자였던 이언주·전현희 의원과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출연시켜 객석의 청중에게 큰절을 시킨 것과 비슷하다. 김씨가 지난 6월 기획·진행한 ‘더 파워풀’ 콘서트엔 ▲문재인 전 대통령 ▲민주당 정청래 대표 ▲김민석 국무총리 등 다수의 민주당 내 유력 정치인이 참석했다. 입당하자마자 영향력 과시 물의 당원·언론인 오가며 전대 개입 김씨는 지난 2011년 팟캐스트 방송 ‘나는 꼼수다’ 공동 진행자로 활동하면서부터 민주당에 대한 영향력을 키워왔다. 물론 김씨가 15년 동안 구축한 영향력을 전씨가 단기간에 얻긴 어렵다. 이 때문인지 전씨는 국민의힘에 입당하자마자 ‘10만 당원 양병설’ 등을 주장하면서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할 가능성을 내비쳤다. 하지만 국민의힘 전당대회에 출마하기 위해선 당비를 3개월 이상 납부하고, 연 1회 이상 교육을 받은 책임당원이어야 한다. 전씨는 지난 6월 온라인으로 입당했고, 당 대표 후보 등록일은 지난달 30일부터 단 이틀 동안이었다. 따라서 전씨는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할 수 없었다. 출마 길이 막힌 전씨는 전당대회에서 당원·언론인 신분을 교차하면서 자신을 따르는 당원들을 선동해 영향력을 과시하려고 한다. 하지만 전씨는 김씨가 민주당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과 주변 진영 전체를 둘러싼 질서는 20세기 초·중반에 활동했던 이탈리아 사회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이 갖는 틀과 비슷하다. 그람시는 “자본주의는 견고하게 발전할 것”이라는 대전제를 토대로 “언론·문화 등 각 분야에 진지를 구축해 참호전으로써 상대 세력을 약화해야 한다”는 사상을 정리했다. 각 분야에 구축한 진지는 결정적인 시기에 전개할 기동전의 전초기지 역할을 한다. 자본주의 구조가 뿌리내리면서 러시아 2월·10월 혁명과 같이 한순간에 모든 것을 뒤집는 혁명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그람시는 주도권 다툼으로써 체제 내 혁명을 추구하는 취지의 사상을 구체화했다. 우리나라에선 소련 해체가 가시화되던 1980년대 후반부터 기존 노동운동에 문화·예술운동을 접목하는 단체가 활동하는 등 각계에서 다른 방향의 노동운동을 전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민주당을 받치는 양대 축은 각계의 시민단체들과 진보 성향 매체들이다. 대규모 정치 이벤트가 진행될 땐 민주당 지원 사격을 맡으면서, 정치적 명분과 정당성을 구축·홍보하는 역할을 맡는다. 또 민주당에 인력을 공급하는 역할도 한다. 주요 선거 등 대규모 기동전이 필요한 상황에선 각자의 진지에서 일시에 뛰쳐나와 물량을 공급하는 식이다. 이 같은 구조를 상징하는 사람이 민주당 윤미향 전 의원이다. 정의기억연대 대표로 오랫동안 활동하던 윤 전 의원은 민주당을 통해 국회의원이 됐지만, 횡령 의혹이 유죄로 확정돼 의원직을 잃었다. 같은 당 추미애 의원 등 민주당 일각에선 윤 전 의원의 사면을 강하게 지지했고, 결국 8·15 광복절특사를 통해 사면·복권됐다. 민주당과 그람시 하지만 시민단체와 매체는 대중을 직접 동원하기가 어려운 데다, 매체는 언론 고유의 한계가 있다. 시민단체 역시 시민들의 참여가 부실하다는 핸디캡을 떠안을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도 존재해 왔다. 이 때문에 삼각 구조를 받쳐줄 또 하나의 하부 구조가 필요했다. 이 문제를 해결해준 사람이 바로 김씨였다. 김씨는 지난 1998년 ‘안티 <조선일보>’라는 깃발을 내걸고 <딴지일보>를 창간한 후 풍자·B급 정서·유머를 지향해오고 있다. 당시 <딴지일보>에선 포장마차에서 어묵을 찍어 먹는 용도로 내는 간장의 위생 상태를 취재해 기사화하거나 국가혁명당 허경영 명예대표의 대권 도전 과정을 풍자하는 등 ‘신선한 B급 정서’를 지향해 독자적인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한편으로 김씨에게 평생 따라다닐 놀림거리를 남겼다. 김씨가 <딴지일보>의 채무를 해결하기 위해 여성용 성인용품을 판매했고, 성인남녀의 만남을 중개하는 사이트를 개설했던 탓이다. 보수 성향 유권자들은 여전히 김씨를 비판하면서 당시의 전력을 함께 언급한다. 이후 김씨는 ▲황우석 박사 옹호 ▲영화감독 겸 코미디언 심형래씨 옹호 등 숱한 논란을 일으켰다. 특히 황 박사 옹호는 그럴 듯한 음모론을 제시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근거는 제시하지 않는 김씨의 특성과 깊이 맞물린다. 당시의 논란도 김씨에 대한 비판론을 형성하는 중심축이다. 그랬던 김씨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계기로는 크게 2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문재인 대통령 만들기’를 처음 시작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 공동 진행자 중 1명으로 활동했단 것이었다. 김씨는 당시 민주당 백원우 의원이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장에서 이명박 당시 대통령에게 거친 항의를 말리고 고개 숙여 사과하는 문 전 대통령을 주목했다. 이후 김씨는 문 전 대통령의 킹메이커를 자처했고, 이는 ‘나는 꼼수다’ 진행 이후 문 전 대통령의 대세론으로 이어졌다. ‘나는 꼼수다’는 김씨 특유의 B급 정서·음모론이 이명박정부에 대한 다양한 불만과 맞물려 대성했던 방송이었다. ‘나는 꼼수다’는 현재까지 이어지는 김씨의 성향을 구체화한 방송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해당 팟캐스트의 상징으로 통하는 “쫄지 마”는 여전히 회자된다. ‘나는 꼼수다’는 구체적인 사실관계 검증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명확한 당파성을 매개로 특정 정당·진영 사람들이 선호할 음모론과 괴담을 이미 밝혀진 사실관계와 섞어 전달하는 것에 집중했다. 진실과 거짓의 경계선을 적당히 왕래하면서 민주당 지지를 극대화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영웅과 악당들 이는 집단의식으로 연결됐고, 김씨에겐 거대한 영향력을, 민주당엔 거대한 지지 집단을 만들어줬다. 김씨는 ‘나는 꼼수다’를 통해 단순·명쾌한 이분 구도를 완성했다. 그를 선호하는 민주당 지지자의 정치관은 “보수진영이란 거대한 악에 맞서 싸운다”는 것이다. 이는 정의로운 주인공이 지구 정복을 노리는 악당의 무리에 맞서 싸우는 어린이용 만화의 서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울러 현재 민주당 핵심 지지 세대로 알려진 4050세대가 미국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선호하는 것과 연결해볼 수 있다. 이 세계관엔 초월적인 힘을 갖고 모든 생명체의 절반을 죽여 우주를 정화하려는 악당에 맞서는 영웅들이 등장한다. 이 세계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건은 지난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사건이었다. 이들에게 노 전 대통령 사망사건은 거대 악당과 싸워야 하는 당위성을 제공해주는 절대적인 명분이었다. 김씨가 이 사건에 주목하고, 상주로서 백 전 의원의 항의를 제지하던 문 전 대통령을 주목한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우리 고전문학 중 전설은 김씨의 평소 주장과 비슷한 서사 구조를 띠고 있다. 전설은 능력이 뛰어난 주인공이 현실의 한계에 좌절하고 무너지는 비극적인 구조를 취한다. 또 설득력을 부여해야 많은 사람에게 퍼질 수 있어서 실제 존재하는 지역·지명을 매개로 그럴듯하게 전개된다. 여기엔 각박한 현실을 바꿔줄 새로운 영웅의 출현을 기대하는 민중의 소망이 담겨있다. 그래서 조선시대엔 “정씨 성을 가진 영웅이 새 나라를 만들어 왕이 될 것”이란 취지의 예언서가 오랫동안 돌아다녔다. 김씨의 주장은 21세기판 전설이라고 할 수 있다. 김씨는 민주당과 주변 진영을 취약한 상황에서 거대한 악에 도전하는 영웅으로 묘사하고, 지지자들은 그 영웅담에 환호한다. 그러면서 “거대한 악에 맞서 싸우는 영웅을 또 잃을 수 없다”는 공감대를 공유한다. 그들은 “대통령을 지켜야 한다”는 같은 목표를 공유한다. 김씨는 ‘김어준 유니버스’ 혹은 ‘민주 유니버스’를 만들었고, 지지자들은 관객을 넘어선 참여자로서 희열과 보람을 느낀다. <한국일보>는 지난 2017년 이들의 세계관을 소개하면서 “대통령이 국민을 지켜야지, 왜 국민이 대통령을 지켜야 하느냐”고 비판했다. 완전히 다른 ‘B급 정서’ 카타르시스·도파민 차이 김씨는 ▲세월호 고의 침몰설 ▲천안함 피격 사건 관련 가짜 뉴스 살포 ▲코로나19 대구 확산설 등 주장을 이어가면서 지지자들에게 정치적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을 제공했다. 그들이 김씨를 통해 느낀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은 고스란히 민주당의 정치적 자양분이 됐다. 그래서 총선 출마 후보들은 김씨가 보는 앞에서 지지자들에게 큰절을 해야 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체포 대상 중 1명으로 김씨를 지목했던 것은 김씨에게 엄청난 이익이 됐다. 당시 계엄군은 김씨가 진행하는 유튜브 채널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 스튜디오 주변을 통제했다. 김씨는 지난해 12월13일 국회에서 “계엄군이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를 사살한 후 북한 소행으로 공작하려고 했다”면서 “정보 출처는 국내에 대사관이 있는 우방국”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그 우방국은 미국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지만, 미국은 국무부·주한미국대사관을 통해 이를 부인했다. 반면 민주당 최민희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김어준님’의 증언을 허구로 단정하고 비난부터 하는 것은 무모하다”고 주장했다. 국민의힘과 보수 세력은 민주당과 그 주변 세력처럼 정교한 조직체를 만들지 못했다. 보수 세력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스피커 역할은 전씨와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가 맡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김씨처럼 진영 전체를 들썩일 수 있는 정치적 유머 감각과 설득력을 갖추지 못했다.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을 제공하지도 못한다. 이 때문에 이들의 주장은 강경 보수 지지자들 외 국민 사이에서 웃음거리로 전락한 지 오래고, 국민의힘 내부서도 강하게 비판한다. 국민의힘이 지난 2022년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이겼을 당시엔 민주당에 비판적인 2030세대 남성과 6070세대를 아울러 민주당을 지지하는 4050세대와 2030세대 여성을 포위한다는 ‘세대포위론’ 전략이 제시됐다. 그러나 윤 전 대통령과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가 불화 끝에 결별하면서 이 연합은 얼마 가지 못해 해체됐다. 당시 승리를 주도했던 국민의힘 지지층은 이 대표 특유의 합리주의를 지지하는 젊은 유권자와 강경 보수를 지향하는 노년 유권자로 분열됐다. 전씨는 많은 공무원 제자를 거느린 유명 한국사 강사였다. 따라서 적절히 순화된 주장과 교묘하게 선정한 정치적 입지를 섞어서 정치 전면에 나섰더라면, ‘보수의 김어준’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전씨는 김씨와 달리 그럴듯한 이야기를 구성하고 유머를 섞는 능력을 보여준 적이 없다. 전씨의 옛 제자들은 그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절대로 정치 전면에 나서지 않는 김씨와 달리, 직접 국민의힘에 입당해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하려 하는 등 적당히 선을 긋지도 않는다. 정치인들이 알아서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큰절을 하게 만드는 김씨와 달리, 전씨는 스스로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해 전당대회서 눈에 띄는 행동을 했다. 전에겐 없는 것들 무엇보다 김씨가 “이 대통령을 능가하는 영향력을 가진 것 아니냐”는 설까지 나올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구축하기까지 15년이 걸렸단 사실도 제대로 통찰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결정적으로 국민의힘은 정치 구조를 통찰하지 못해 민주당이 장기간 공들여 구축한 정치 구조체를 갖추지 못했다. 그런데도 전씨는 ‘전한길 유니버스’ 제작을 멈추지 않는다. 과연 전씨는 ‘보수의 김어준’이 될 수 있을까?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