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재벌들 당한 슈퍼카 사기사건 비스토리

페라리 날리고 아닌척 숨겼다

[일요시사 취재1팀] 박창민 기자 = 재벌 슈퍼카 사기사건은 재계에 길이 남을 사건 중 하나다. 당시 이 사건의 피해자로 수많은 재벌 인사들이 거론되면서 온갖 구설에 올랐다. 잊혀진 사건이지만 지난 6월 이 사건에 대한 2심이 치러졌다. 결론부터 말하면 용두사미가 됐다. <일요시사>는 이 사건의 판결문을 토대로 그 내막을 취재했다.
 

재벌 슈퍼카 사기 사건의 피의자 이모씨는 한때 슈퍼카 딜러로 이름을 날렸다. 그가 ‘슈퍼카 광’으로 알려진 모 그룹 회장의 차를 직접 공수했기 때문이다. 복수의 양재동 자동차 딜러는 “이 그룹 회장의 슈퍼카 절반 이상이 이씨를 통해 샀다. 이씨는 그 회장이 차를 좋아하기 때문에 만난 유일한 일반인이었다”고 귀띔했다.

모 회장 차 수입
소문 나자 대박

이씨가 그룹 회장의 차를 수입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재벌 2·3세들과 연예인들의 차량 주문이 쏟아졌다. 당시 이 사건에 수많은 재벌 2∼3세들이 피해자로 엮인 이유다. 그런데 2008년 세계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이씨의 사업은 경영난에 빠지며 빚만 쌓여갔다.

온갖 사채를 끌어다 쓴 이씨는 결국 한계에 도달했다. 2010년 3월부터 고객이었던 재벌들에게 “(당신이) 타고 다니는 차를 판매하고, 그 대금으로 신차를 구입해라”며 “내가 차를 팔 수 있도록 우리 매장에 가져다 놓아라”라는 수법으로 차량과 열쇠 등을 받았다.

재벌들은 페라리, 람보르기니, 애스턴마틴 등 한 대에 수억원에 달하는 슈퍼카를 이씨에게 맡긴 것. 그런데 사정이 어려워진 이씨는 이 차량을 대부분 사채업자에게 담보로 맡겼다.


이씨가 경영난을 겪고 있다는 사실과 의뢰인들 차량을 사채업자에게 넘겼다는 소문이 퍼지자 재벌들은 운전기사 등 대리인을 통해 슈퍼카 회수 등을 시도했다. 여기서 몇 명은 차량 회수에 성공했지만 그렇지 못한 재벌들도 많았다.

이씨가 잠적하자 채권자들은 사기혐의로 그를 강남경찰서에 고소했다. 당시 피해 금액은 약 35억가량이었다. 경찰 수사가 시작되자 이씨는 2010년 11월 이탈리아로 도주한다. 그러다 이씨는 지난해 4월 인터폴 적색수배 대상으로 현지 경찰에 붙잡혀 국내로 송환됐다.

1심 5년→2심 2년 감형된 이유는?
피해사실 쉬쉬…비협조로 흐지부지

이후 재판은 속전속결로 이루어졌다. 지난해 12월4일 이씨는 사기 혐의(특정 경제 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 적용)로 서울지방법원으로부터 징역 5년 중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지난 6월9일 서울고등법원에선 이씨의 형량을 징역 2년으로 감형했다.

왜 이씨가 감형됐을까.

이걸 설명하기 전 피해 재벌들의 면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부분 대기업 재벌 2∼3세들이었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판결문에 따르면 대기업 L그룹의 3세 G씨와 전력기기 등을 생산하는 L사의 G 대표이사, 의류 제조업체 N사의 N 대표이사 등이 있다.

G씨의 경우 2010년 3월경 페라리458(4억5600만원)과 벤츠 스털링모스(22억1000만원) 등의 차량을 이씨에게 맡겼다가 총 26억가량 사기당했다. G 대표는 페라리458이탈리아(4억5000만원)와 시보레 콜벳ZRI(2억원 상당)을 이씨에게 맡겼다가 총 6억5000만원 가량을 사기당했다. N 대표는 페라리430(3억5000만원)과 페라리599(3억4000만원) 등의 차량을 이씨에게 맡겼다가 총 6억9000만원의 사기를 당했다. 이 외에도 피해 재벌들은 더 있다.


그런데 판결문을 분석한 결과 이들 재벌의 피해 사실에 대한 혐의는 ‘무죄’로 결론났다. 판결문에는 “피해자(재벌 및 연예인 10명)를 기망해 차량을 편취했다는 사실이 합리적인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증명되었다고 볼 수 없다”고 적시돼 있다.

재벌들 사기친
전대미문 사건

재판부는 “검사의 입증이 위와 같은 확신을 가지게 하는 정도에 충분히 이르지 못한 경우에는 비록 피고인의 주장이나 변명이 모순되거나 석연치 않은 면이 있는 등 유죄의 의심이 간다고 하더라도 피고인의 이익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한 마디로 검사가 수사를 잘하지 않았거나 못해서 이씨의 사기 혐의를 제대로 입증하지 못했다는 것. 세간의 주목을 받던 사건이었음에도 검사가 이씨의 사기행각을 제대로 입증하지 못한 것이다.

실제로 판결문에 나온 ‘증거의 요지’ 목록을 보면 재벌 피해자와 관련된 증거자료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한 마디로 사건은 용두사미가 됐다.
 

그렇다면 왜 수사기관에서 이씨가 재벌들에게 사기를 쳤다는 혐의를 입증하지 못했을까. <일요시사>는 당시 이 사건을 수사했던 검찰과 경찰에 이에 대해 물었지만 뚜렷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 대부분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수사한 사건이라 말할 수 없다”라는 답변뿐이었다.

혐의 입증 못해
재벌 사기 무죄

수사하지 못한 실마리는 복수의 자동차 딜러와 당시 사기를 당했던 재벌 오너 운전기사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복수의 슈퍼카 딜러 관계자에 따르면 당시 이 사건은 수사가 잘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유에 대해 양재동의 한 수입차업자는 “사기당한 재벌들이 경찰에 신고하지 않거나, 조사를 제대로 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어 “공소장에 나와 있는 재벌들은 그나마 수사기관 조사를 받았으니깐 있는 것이다. 사기 당한 재벌들은 실제로 더 있다”고도 했다.

그렇다면 이들 재벌이 사기를 당했음에도 조사를 받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씨에게 사기 당한 A그룹 오너의 운전기사로 7년간 일했던 관계자는 “재벌들이 끌고 다닌 슈퍼카들이 대부분 법인차량이거나 비자금으로 샀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어 “내가 모셨던 A그룹 오너가 산 차들도 대부분 법인차량이었다”며 “고 밝혔다.

재벌들과 자주 거래한 수입차 딜러 역시도 수십억원에 달하는 슈퍼카들은 대부분 법인차로 사거나 비자금으로 구매한다고 했다. 그는 “대부분 법인 리스차로 업무용으로 슈퍼카를 구매한다”고 귀띔했다. 그는 식품기업 P사의 사위에게 법인차로 벤틀리를 판매한 적이 있다.

이처럼 재벌들이 법인으로 슈퍼카를 사는 이유는 간단하다. 슈퍼카 유지비용이 비싸므로 법인에 비용처리를 하기 위해서다. 이런 식으로 재벌들이 법인으로 슈퍼카를 뽑아 타고 다니다 적발된 사례가 한두건이 아니다. 담철곤 오리온 회장과 이재현 CJ그룹 회장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수사기관 조사·진술 피해
직원 대리인으로 보내기도

기업 오너가 법인 돈으로 슈퍼카를 구입해 사적으로 유용하는 것은 엄연한 횡령·배임이다. 경찰조사를 받을 경우 슈퍼카의 명의가 어디로 돼 있는지 밝혀질 수밖에 없으며, 법인차를 이씨를 통해 팔려고 했다는 정황까지 드러나게 된다. 이런 복잡한 문제 때문에 재벌들이 사기를 당해도 손놓고 볼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판결문에 올라온 G 대표와 N 대표는 그나마 떳떳한(?) 사람인 것으로 추정된다. L사는 G 대표의 이 같은 피해 사실에 대해 ‘별 문제 없이 당시 사건이 잘 해결됐다’고 밝혔다. L사 관계자는 “회사 대표 개인 명의로 차량을 샀다. 사기당한 차량은 전량 회수했다”고 밝혔다. G 대표가 수사기관 조사를 받은 것에 대해서는 “내부적으로 검토한 결과 이와 관련해 조사를 받은 사실이 없다”고 답했다.

다만 취재결과 L사의 이런 답변은 앞뒤가 맞지 않은 구석이 있다. G대표가 수사기관 조사를 받은 적이 없다고 하지만 L사 직원이 G대표 대리인으로 경찰조사를 받았기 때문이다.

판결문 증거목록에 따르면 G대표를 대신해 손모씨가 대리인 조사를 받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손씨는 L사의 총무팀 직원인 것으로 확인됐다. G대표의 개인차량임에도 불구하고 회사 직원이 조사를 대신 받았다는 것이다.

피해 재벌 더 있다
신고 못하고 끙끙


N사는 N 대표의 사건과 관련해 당시 피의자와 합의를 봤다고 입장을 밝혔다. N사 관계자는 “당시 경찰 조사를 받았으며, (페라리430) 차량 1대는 돌려받았다. 두 번째 차는 계약금만 걸어 놓은 상태여서 합의를 봤다”며 “이들 차는 다 대표의명의였다”고 말했다.

현재 이씨에 대한 재판은 대법원 선고만 남았다. 사실상 슈퍼카 사기 사건은 끝났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 사건이 재벌들의 비협조로 맹탕이 됐다는 시각이 다분하다.
 

<min1330@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굴러다니는’ 법인 슈퍼카 실태

업무용 차량에 대한 과세 기준 강화로 법인용 차량 판매가 줄어들었지만 포르쉐를 포함한 초고가 슈퍼카들은 여전히 법인용 구매 비중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8월9일 기업 경영성과 CEO스코어(대표 박주근)에 따르면 올 상반기 법인용으로 판매된 수입차는 4만698대로 작년 동기 대비 15.8%(7637대) 감소했다. 지난 1월부터 업무용 차에 대한 과세기준이 강화되면서 사업자들이 고가 업무용 차 구입에 부담을 느낀 것이 감소 원인으로 풀이된다.

법인용 구매 비중이 가장 높은 브랜드는 롤스로이스로 상반기 판매된 30대 중 96.7%(29대)가 법인용이었다. 다음으로 벤틀리가 75.2%(121대)였고 람보르기니 72.7%(8대), 포르쉐 64.8%(1123대), 재규어 60.7%(957대), 랜드로버 53.2%(2926대) 등의 순이었다. 특히 롤스로이스와 람보르기니는 6개월간 전체 판매대수가 각 30대, 11대로 23개 수입 브랜드 중 두 자릿수 판매대수는 두 브랜드 뿐이었다.

롤스로이스는 30대 중 1대를 제외한 29대가, 람보르기니는 11대 중 8대가 법인용이었다. 법인용 구매 비중이 더 큰 브랜드의 경우 대표모델이 대부분 억대의 슈퍼카들이다. 롤스로이스의 경우 작년 출시된 롤스로이스 고스트 시리즈 2가 4억1000만∼4억8000만원에 달한다. 벤틀리 플라잉스퍼는 2억5700만∼3억4000만원, 람보르기니 우라칸 LP 580 22억9900만원, 포르쉐 911 카레라4 1억4420만∼1억6120만원, 재규어 플래그십 세단인 재규어 XJ 1억950만∼2억2670만원, 랜드로버 디스커버리4 8180만∼1억370만원 등이다.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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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길 유니버스’ 절대 불가능한 이유

‘전한길 유니버스’ 절대 불가능한 이유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에 입당한 한국사 강사 전한길씨가 국민의힘 행사에서 영향력을 과시하다가 큰 물의를 일으켰다. 전씨는 국민의힘에서 ‘보수의 김어준’을 꿈꾸는 것 같다. 전씨는 과연 김씨가 15년 동안 구축했던 영향력을 단번에 얻을 수 있을까? 국민의힘에 입당한 한국사 강사 전한길씨가 지난 8일, 대구 EXCO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전당대회 대구·경북지역 합동연설회에서 큰 물의를 일으켰다. 전씨는 지난 3월 창간한 <전한길뉴스> 소속 언론인 자격으로 참석했다. 선거판 난장판 하지만 전씨는 언론 취재의 한계를 넘어 반탄(탄핵 반대) 성향 후보들의 연설 도중 응원하면서 분위기를 띄웠다. 반대로 찬탄(탄핵 찬성) 성향 당 대표·최고위원 후보들이 연설할 때마다 “내부 총질” 혹은 “배신자” 등 원색 비난을 했다. 이날 김근식 최고위원 후보는 전씨를 직접 지칭해 “부정선거 음모론에 빠지고, 계엄을 계몽령이라고 정당화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같이 투쟁할 수 있겠느냐”면서 비난했다. 그러자 전씨는 김 후보에게 욕설하면서 자신의 지지자들을 격동시켰다. 찬탄 성향 조경태 당 대표 후보가 연설할 땐 자리에서 일어나 한 손을 들고 항의하는 등 지지자들의 조 후보 비난을 유도했다. 그러자, 찬탄 성향 일부 당원들이 전씨에게 물병을 던지면서 항의했다. 한 당원은 전씨에게 “난 20년 차 당원인데, 입당한 지 한 달밖에 안 된 당신이 왜 이런 난동을 부리느냐”고 따져 물었다. 국민의힘 지도부는 전씨의 전당대회 출입을 막기 위해 대의원이 아닌 일반 당원의 행사장 출입을 금지했다. 이어 전씨에 대한 징계 가능성도 내비쳤다. 그러자 전씨는 <전한길뉴스> 발행인 신분을 내세워 “언론 탄압”이라며 반발했다. 이처럼 전씨는 국민의힘 당원과 언론인이란 신분을 왕래하면서 국민의힘 전당대회에 개입하고 있다. 지난달 31일과 지난 7일엔 시사평론가 고성국씨 등과 함께 주최한 ‘자유 우파 유튜브 연합 토론회’에 각각 장동혁·김문수 당 대표 후보를 출연시켜 ‘면접’을 보는 위력을 국민의힘 내외에 과시했다. 특정 진영의 강경파를 대상으로 언론사·유튜브 채널 등을 운영하면서 힘을 과시하는 모델로는 방송인 김어준씨가 있다. 김씨는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의 친문(친 문재인) 강경파 성향 당원·지지자를 대상으로 라디오·유튜브 방송을 진행하면서 당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당 대표 후보들을 면접하는 형식은 김씨가 지난해 3월 자신의 유튜브 방송 ‘김어준의 다스뵈이다’에 민주당 총선 후보자였던 이언주·전현희 의원과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출연시켜 객석의 청중에게 큰절을 시킨 것과 비슷하다. 김씨가 지난 6월 기획·진행한 ‘더 파워풀’ 콘서트엔 ▲문재인 전 대통령 ▲민주당 정청래 대표 ▲김민석 국무총리 등 다수의 민주당 내 유력 정치인이 참석했다. 입당하자마자 영향력 과시 물의 당원·언론인 오가며 전대 개입 김씨는 지난 2011년 팟캐스트 방송 ‘나는 꼼수다’ 공동 진행자로 활동하면서부터 민주당에 대한 영향력을 키워왔다. 물론 김씨가 15년 동안 구축한 영향력을 전씨가 단기간에 얻긴 어렵다. 이 때문인지 전씨는 국민의힘에 입당하자마자 ‘10만 당원 양병설’ 등을 주장하면서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할 가능성을 내비쳤다. 하지만 국민의힘 전당대회에 출마하기 위해선 당비를 3개월 이상 납부하고, 연 1회 이상 교육을 받은 책임당원이어야 한다. 전씨는 지난 6월 온라인으로 입당했고, 당 대표 후보 등록일은 지난달 30일부터 단 이틀 동안이었다. 따라서 전씨는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할 수 없었다. 출마 길이 막힌 전씨는 전당대회에서 당원·언론인 신분을 교차하면서 자신을 따르는 당원들을 선동해 영향력을 과시하려고 한다. 하지만 전씨는 김씨가 민주당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과 주변 진영 전체를 둘러싼 질서는 20세기 초·중반에 활동했던 이탈리아 사회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이 갖는 틀과 비슷하다. 그람시는 “자본주의는 견고하게 발전할 것”이라는 대전제를 토대로 “언론·문화 등 각 분야에 진지를 구축해 참호전으로써 상대 세력을 약화해야 한다”는 사상을 정리했다. 각 분야에 구축한 진지는 결정적인 시기에 전개할 기동전의 전초기지 역할을 한다. 자본주의 구조가 뿌리내리면서 러시아 2월·10월 혁명과 같이 한순간에 모든 것을 뒤집는 혁명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그람시는 주도권 다툼으로써 체제 내 혁명을 추구하는 취지의 사상을 구체화했다. 우리나라에선 소련 해체가 가시화되던 1980년대 후반부터 기존 노동운동에 문화·예술운동을 접목하는 단체가 활동하는 등 각계에서 다른 방향의 노동운동을 전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민주당을 받치는 양대 축은 각계의 시민단체들과 진보 성향 매체들이다. 대규모 정치 이벤트가 진행될 땐 민주당 지원 사격을 맡으면서, 정치적 명분과 정당성을 구축·홍보하는 역할을 맡는다. 또 민주당에 인력을 공급하는 역할도 한다. 주요 선거 등 대규모 기동전이 필요한 상황에선 각자의 진지에서 일시에 뛰쳐나와 물량을 공급하는 식이다. 이 같은 구조를 상징하는 사람이 민주당 윤미향 전 의원이다. 정의기억연대 대표로 오랫동안 활동하던 윤 전 의원은 민주당을 통해 국회의원이 됐지만, 횡령 의혹이 유죄로 확정돼 의원직을 잃었다. 같은 당 추미애 의원 등 민주당 일각에선 윤 전 의원의 사면을 강하게 지지했고, 결국 8·15 광복절특사를 통해 사면·복권됐다. 민주당과 그람시 하지만 시민단체와 매체는 대중을 직접 동원하기가 어려운 데다, 매체는 언론 고유의 한계가 있다. 시민단체 역시 시민들의 참여가 부실하다는 핸디캡을 떠안을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도 존재해 왔다. 이 때문에 삼각 구조를 받쳐줄 또 하나의 하부 구조가 필요했다. 이 문제를 해결해준 사람이 바로 김씨였다. 김씨는 지난 1998년 ‘안티 <조선일보>’라는 깃발을 내걸고 <딴지일보>를 창간한 후 풍자·B급 정서·유머를 지향해오고 있다. 당시 <딴지일보>에선 포장마차에서 어묵을 찍어 먹는 용도로 내는 간장의 위생 상태를 취재해 기사화하거나 국가혁명당 허경영 명예대표의 대권 도전 과정을 풍자하는 등 ‘신선한 B급 정서’를 지향해 독자적인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한편으로 김씨에게 평생 따라다닐 놀림거리를 남겼다. 김씨가 <딴지일보>의 채무를 해결하기 위해 여성용 성인용품을 판매했고, 성인남녀의 만남을 중개하는 사이트를 개설했던 탓이다. 보수 성향 유권자들은 여전히 김씨를 비판하면서 당시의 전력을 함께 언급한다. 이후 김씨는 ▲황우석 박사 옹호 ▲영화감독 겸 코미디언 심형래씨 옹호 등 숱한 논란을 일으켰다. 특히 황 박사 옹호는 그럴 듯한 음모론을 제시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근거는 제시하지 않는 김씨의 특성과 깊이 맞물린다. 당시의 논란도 김씨에 대한 비판론을 형성하는 중심축이다. 그랬던 김씨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계기로는 크게 2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문재인 대통령 만들기’를 처음 시작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 공동 진행자 중 1명으로 활동했단 것이었다. 김씨는 당시 민주당 백원우 의원이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장에서 이명박 당시 대통령에게 거친 항의를 말리고 고개 숙여 사과하는 문 전 대통령을 주목했다. 이후 김씨는 문 전 대통령의 킹메이커를 자처했고, 이는 ‘나는 꼼수다’ 진행 이후 문 전 대통령의 대세론으로 이어졌다. ‘나는 꼼수다’는 김씨 특유의 B급 정서·음모론이 이명박정부에 대한 다양한 불만과 맞물려 대성했던 방송이었다. ‘나는 꼼수다’는 현재까지 이어지는 김씨의 성향을 구체화한 방송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해당 팟캐스트의 상징으로 통하는 “쫄지 마”는 여전히 회자된다. ‘나는 꼼수다’는 구체적인 사실관계 검증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명확한 당파성을 매개로 특정 정당·진영 사람들이 선호할 음모론과 괴담을 이미 밝혀진 사실관계와 섞어 전달하는 것에 집중했다. 진실과 거짓의 경계선을 적당히 왕래하면서 민주당 지지를 극대화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영웅과 악당들 이는 집단의식으로 연결됐고, 김씨에겐 거대한 영향력을, 민주당엔 거대한 지지 집단을 만들어줬다. 김씨는 ‘나는 꼼수다’를 통해 단순·명쾌한 이분 구도를 완성했다. 그를 선호하는 민주당 지지자의 정치관은 “보수진영이란 거대한 악에 맞서 싸운다”는 것이다. 이는 정의로운 주인공이 지구 정복을 노리는 악당의 무리에 맞서 싸우는 어린이용 만화의 서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울러 현재 민주당 핵심 지지 세대로 알려진 4050세대가 미국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선호하는 것과 연결해볼 수 있다. 이 세계관엔 초월적인 힘을 갖고 모든 생명체의 절반을 죽여 우주를 정화하려는 악당에 맞서는 영웅들이 등장한다. 이 세계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건은 지난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사건이었다. 이들에게 노 전 대통령 사망사건은 거대 악당과 싸워야 하는 당위성을 제공해주는 절대적인 명분이었다. 김씨가 이 사건에 주목하고, 상주로서 백 전 의원의 항의를 제지하던 문 전 대통령을 주목한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우리 고전문학 중 전설은 김씨의 평소 주장과 비슷한 서사 구조를 띠고 있다. 전설은 능력이 뛰어난 주인공이 현실의 한계에 좌절하고 무너지는 비극적인 구조를 취한다. 또 설득력을 부여해야 많은 사람에게 퍼질 수 있어서 실제 존재하는 지역·지명을 매개로 그럴듯하게 전개된다. 여기엔 각박한 현실을 바꿔줄 새로운 영웅의 출현을 기대하는 민중의 소망이 담겨있다. 그래서 조선시대엔 “정씨 성을 가진 영웅이 새 나라를 만들어 왕이 될 것”이란 취지의 예언서가 오랫동안 돌아다녔다. 김씨의 주장은 21세기판 전설이라고 할 수 있다. 김씨는 민주당과 주변 진영을 취약한 상황에서 거대한 악에 도전하는 영웅으로 묘사하고, 지지자들은 그 영웅담에 환호한다. 그러면서 “거대한 악에 맞서 싸우는 영웅을 또 잃을 수 없다”는 공감대를 공유한다. 그들은 “대통령을 지켜야 한다”는 같은 목표를 공유한다. 김씨는 ‘김어준 유니버스’ 혹은 ‘민주 유니버스’를 만들었고, 지지자들은 관객을 넘어선 참여자로서 희열과 보람을 느낀다. <한국일보>는 지난 2017년 이들의 세계관을 소개하면서 “대통령이 국민을 지켜야지, 왜 국민이 대통령을 지켜야 하느냐”고 비판했다. 완전히 다른 ‘B급 정서’ 카타르시스·도파민 차이 김씨는 ▲세월호 고의 침몰설 ▲천안함 피격 사건 관련 가짜 뉴스 살포 ▲코로나19 대구 확산설 등 주장을 이어가면서 지지자들에게 정치적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을 제공했다. 그들이 김씨를 통해 느낀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은 고스란히 민주당의 정치적 자양분이 됐다. 그래서 총선 출마 후보들은 김씨가 보는 앞에서 지지자들에게 큰절을 해야 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체포 대상 중 1명으로 김씨를 지목했던 것은 김씨에게 엄청난 이익이 됐다. 당시 계엄군은 김씨가 진행하는 유튜브 채널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 스튜디오 주변을 통제했다. 김씨는 지난해 12월13일 국회에서 “계엄군이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를 사살한 후 북한 소행으로 공작하려고 했다”면서 “정보 출처는 국내에 대사관이 있는 우방국”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그 우방국은 미국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지만, 미국은 국무부·주한미국대사관을 통해 이를 부인했다. 반면 민주당 최민희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김어준님’의 증언을 허구로 단정하고 비난부터 하는 것은 무모하다”고 주장했다. 국민의힘과 보수 세력은 민주당과 그 주변 세력처럼 정교한 조직체를 만들지 못했다. 보수 세력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스피커 역할은 전씨와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가 맡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김씨처럼 진영 전체를 들썩일 수 있는 정치적 유머 감각과 설득력을 갖추지 못했다.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을 제공하지도 못한다. 이 때문에 이들의 주장은 강경 보수 지지자들 외 국민 사이에서 웃음거리로 전락한 지 오래고, 국민의힘 내부서도 강하게 비판한다. 국민의힘이 지난 2022년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이겼을 당시엔 민주당에 비판적인 2030세대 남성과 6070세대를 아울러 민주당을 지지하는 4050세대와 2030세대 여성을 포위한다는 ‘세대포위론’ 전략이 제시됐다. 그러나 윤 전 대통령과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가 불화 끝에 결별하면서 이 연합은 얼마 가지 못해 해체됐다. 당시 승리를 주도했던 국민의힘 지지층은 이 대표 특유의 합리주의를 지지하는 젊은 유권자와 강경 보수를 지향하는 노년 유권자로 분열됐다. 전씨는 많은 공무원 제자를 거느린 유명 한국사 강사였다. 따라서 적절히 순화된 주장과 교묘하게 선정한 정치적 입지를 섞어서 정치 전면에 나섰더라면, ‘보수의 김어준’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전씨는 김씨와 달리 그럴듯한 이야기를 구성하고 유머를 섞는 능력을 보여준 적이 없다. 전씨의 옛 제자들은 그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절대로 정치 전면에 나서지 않는 김씨와 달리, 직접 국민의힘에 입당해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하려 하는 등 적당히 선을 긋지도 않는다. 정치인들이 알아서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큰절을 하게 만드는 김씨와 달리, 전씨는 스스로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해 전당대회서 눈에 띄는 행동을 했다. 전에겐 없는 것들 무엇보다 김씨가 “이 대통령을 능가하는 영향력을 가진 것 아니냐”는 설까지 나올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구축하기까지 15년이 걸렸단 사실도 제대로 통찰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결정적으로 국민의힘은 정치 구조를 통찰하지 못해 민주당이 장기간 공들여 구축한 정치 구조체를 갖추지 못했다. 그런데도 전씨는 ‘전한길 유니버스’ 제작을 멈추지 않는다. 과연 전씨는 ‘보수의 김어준’이 될 수 있을까?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