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희팔 사건 연루 의혹> ‘전설의 주먹’ 조창조는 누구?

시라소니 이후 맨손싸움 1인자

[일요시사 취재1팀] 박창민 기자 = 희대의 사기꾼과 전설의 주먹이 한 배를 탔다. 검찰은 수조원대 유사수신 사기범 조희팔의 범죄수익금 일부가 주먹계 대부 조창조에게 흘러간 정황을 포착했다. 조희팔 측의 자금 가운데 일부가 조창조가 관여하는 사업체로 흘러간 정황을 잡은 데 따른 것이다. 이 같은 의혹이 불거지면서 조창조가 새삼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다.

조창조는 한 마디로 낭만이었다. 칼과 조직 없이 맨손으로 최고봉에 올라 주먹 세계를 평정한 이력 때문일 것이다. 조폭 세계에서 시라소니(이성순)와 김두한, 신상사(신상현)를 잇는 대표적인 원로 주먹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이 때문에 그는 ‘맨손 결투를 고수한 마지막 낭만파’로 불린다.

싸움의 달인

조창조는 1938년 평양에서 태어나 광복 직후 8세 때 월남했다. 서울 종로서 초등학교를 다니다가 강원, 부산 등을 거쳐 대구에 정착했다. 이후 조창조는 대구에서 6·25 전쟁을 맞았다. 조창조는 월남과 전쟁통에 학교를 늦게 진학했다. 같은 학년 친구들보다 세 살 많았다.

그의 주먹 신화는 중학교 때부터 시작됐다. 조창조는 가방에 권투 글러브를 넣고 다니며 방과 후 적당한 상대를 불러내 판을 벌렸다고 한다. 당시 대륜중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입학 경쟁률이 7대1이나 될 정도로 ‘공부 깨나 하는’ 학교였다. 타고난 싸움꾼인 그의 존재는 돋보였다. 전교생 중에 그를 모르는 학생이 없었을 정도였다.

당시 싸움 잘하는 학생을 일본 말로 ‘어깨’를 뜻하는 ‘가다’로 불렸다. 조창조는 당시 ‘누가 세다’라는 얘기만 들리면 만사 제치고 달려갔다. 학교로 쳐들어가 상대를 불러내 장소를 가리지 않고 싸움판을 벌였다. 대구 시내 중·고등학교의 이름난 ‘가다’들이 그의 주먹에서 나가 떨어졌다고 한다.


조창조는 운동에 천부적인 소질이 있었다. 초등학생 때 육상을 했고, 중·고등학생 때는 권투와 씨름, 유도를 배웠다. 도장에도 다녔지만 혼자 집에서 연습을 많이 했다. 고1 때는 태권도를 연마했다. 고등학생 때 조씨는 체격이 큰 편이었다. 그때의 키가 지금의 키(176㎝)다. 반에서 셋째였다. 체중은 72㎏. 한국 남자 평균 체중이 42㎏이던 시절이었다.

다단계 수익금 일부 흘러간 정황 포착
희대의 사기꾼-전국구 둘이 무슨 관계?

고교 시절 대구 일대를 평정한 조창조는 유도 특기생으로 홍익대에 입학했다가 그가 속했던 법정학부가 폐지되자 중퇴했다. 이후 대구로 내려간 조창조는 2년 후 다시 상경해 염천시장에 터전을 잡았다. 권투선수 출신인 정기복을 만나면서 그의 싸움 실력은 한 차원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1960년대 초반 서울 주먹계는 큰 조직들의 와해 또는 약화로 일시적인 공백기를 맞았다. ‘깡패 소탕’을 내세운 군사정권의 강한 압박 탓이었다. 1950년대를 풍미했던 1세대 주먹들이 거의 다 퇴장했다. 염천시장에 자리 잡은 조창조가 주먹계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바로 그 무렵이었다.

그는 상인협회 경비과장으로 시장 내 이권 싸움을 정리하는 일을 맡았다. 가락시장의 모체라 할 만한 염천시장에는 농수산물이 풍부해 전국 각지의 건달이 몰렸다. 특히 쓰리꾼이라 불리던 소매치기와 거지가 많았다. 싸움이 자주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조창조는 하루에 보통 2∼3회 싸웠다.

1대 1 싸움의 낭만이 남아 있던 시절이었다. 염천시장에서 조창조는 숱한 싸움을 치렀다고 한다. 국가대표 레슬링선수였던 A씨와의 대결이 대표적인 사례. A씨는 장신에 80㎏이 넘는 거구였다. 시장 상인들이 호각세를 점치던 이 싸움에서 조창조가 무릎 올려치기로 상대를 가볍게 눕혀버렸다.

그는 염천시장 일대를 장악한 뒤 무교동 호남 조직의 후견인 노릇을 하기도 했다. 당시 무교동 조직의 서열은 조창조-정학모-오종철-은석-조양은 순이었다. 좌장은 오종철이었고, 조양은이 행동대장 격이었다.


그러던 중 1975년 1월2일 사보이호텔사건이 일어난다. 조양은이 주축으로 한 신진 호남세력이 사보이호텔에 있던 신상사파를 기습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주먹사에서 신상사파 몰락과 함께 호남파 득세의 계기가 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상경한 신진 호남세력 주도
조양은이 큰 형님으로 모셔

정치권과 주먹의 관계는 악어와 악어새로 비유한다. 조창조도 예외는 아니었다. 1987년 대선 때 노태우 후보의 사조직인 태림회에서 활동했다. 조창조는 1987년 대선 때 조직원과 함께 노태우 후보를 경호했다. 이 때문에 광주 유세에서 시민들이 던진 돌을 맞았다고 한다.

1991년 조창조는 경북 김천관광호텔 살인사건에 휘말려 구속됐다. 1990년 이 호텔 오락실의 상무가 칼에 찔려 죽었다. 범인이 잡혔는데, 조창조의 동생들 중 한 명인 S씨 밑에 있던 사람이었다. 검찰은 조창조가 S씨에게 지시해 일어난 사건으로 봤다. 그가 검거된 것은 1991년 12월. 법원은 징역 8년을 선고했다. 그는 대법원까지 올라가며 무죄를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007년 조창조의 칠순 잔치에는 전국의 폭력 조직원 2000여명이 하객으로 참석해 화제를 모았다. 이날 경찰은 전설적인 조폭의 생일잔치에 행여 불상사가 발생할까 하루 종일 동향을 파악하며 분주히 움직였다.

2011년 생일잔치에는 왕년의 조직 폭력배들이 한자리에 모여 또다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당시 대구 북구의 한 오리 음식점에서 그의 생일잔치가 열렸다. 대구 동성로파, 향촌동파 등을 포함, 대구 인근 경북 포항시, 경남 마산시 등지의 폭력조직 두목과 고문 등 50대 이상의 원로급 조직폭력배 50여명이 그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참석했다.

한편 대구지검은 지난 5월12일 “조희팔 측의 범죄수익금 중에서 수억원이 수도권과 경남 지역에서 조창조가 관여하는 재개발 사업체 등으로 흘러간 정황이 있어 자금 규모, 유입 경로, 사용처 등을 집중 조사 중”이라고 밝혔다.

대구지검에서 진행된 참고인 조사에서 조창조는 범죄와의 연관성을 부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6년에서 2008년 사이 조희팔 측 자금 일부가 지인 등 주변 사업체에 들어왔지만 법적으로 문제없는 투자금이었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대구지검은 지난해 10월 조희팔의 ‘오른팔’ 강태용씨를 중국에서 붙잡고 주변 인물들의 계좌를 들여다보다 그의 주변으로 조희팔 측 자금이 흘러간 자료를 확보했다.

낭만파 원로

검경과 조창조 지인들의 말을 종합하면 그가 당초에는 조희팔을 직접적으로 알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 2004년에서 2008년 사이 조희팔이 유사수신 사업을 할 때 지인들에게 조창조를 소개해 달라고 부탁해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검찰은 조창조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자금 전달 경로를 확인하기 위해 주변인·가족까지 차례로 조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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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김건희 일가 연루 의혹 ‘선라이즈F&T’ 주주명부 공개

[단독] 김건희 일가 연루 의혹 ‘선라이즈F&T’ 주주명부 공개

갈수록 증폭되는 평택 논란 이제야 공개된 소소한 흔적 쉽게 거두지 못하는 의심 의미심장 세력 교체 과정 [일요시사 취재1팀] 양동주 기자 = 소문이 어느덧 사실처럼 인식되고 있다. 명확한 물증이 없는 가운데 파편적인 의혹이 덧씌워진 양상은 좀처럼 바뀌지 않고 있으며, 흐름을 파악할 만한 유의미한 흔적이 이제야 겨우 나왔을 뿐이다. 증폭된 의혹 뒤편에서 여전히 진실은 빼꼼히 잘 보이지 않는다. 2010년 9월 설립된 ‘선라이즈에프앤티’는 황해경제자유구역에 자리 잡은 유일한 농산물 가공 업체로, 그간 심심치 않게 밀수 의혹을 받아왔다. 가공 목적으로 수입한 농산물을 가공 없이 시중에 유통시켜 엄청난 차익을 봤다는 꼬리표가 뒤따랐다. 의혹하는 눈초리 선라이즈에프앤티가 취급했던 대다수 농산물이 고관세 품목이라는 점은 이 같은 의혹을 부채질했다. 그간 선라이즈에프앤티는 ▲녹두 ▲콩나물콩 ▲다대기(혼합양념) ▲생강 ▲마늘 ▲참깨 ▲팥 ▲서리태 등 높은 세율이 붙는 고관세 품목을 주로 수입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한 예로 콩나물콩의 경우 그대로 들여와 국내에 유통하면 487% 관세가 부과되지만, 콩나물 재배 목적으로 수입하면 27%만 반영된다. 평택세관에 몸담았던 다수의 전직 세관공무원이 기업 출범 및 운영에 관여했다는 점도 선라이즈에프앤티를 부정적으로 보게 만들었다. 심지어 선라이즈에프앤티 이사진에 포함됐던 특정 세관 출신 임원이 한때 다이아몬드 밀수 사건에 이름이 오르내린 사례도 존재한다. 수년 전부터는 김건희씨 일가와 선라이즈에프앤티를 동일선상에서 바라보는 경향이 강해졌다. 선라이즈에프앤티의 밀수 의혹을 수차례에 걸쳐 제기했던 공익 제보자 이성열씨가 재판에 연루되는 과정에서 김건희씨의 모친인 최은순씨가 거론됐던 게 이 같은 흐름에 불을 지핀 형국이다. 이런 가운데 정치평론가인 장성철 공론센터 소장이 최근 ‘평택항’을 언급하자, 김건희씨 일가와 선라이즈에프앤티 간 연관성은 사실처럼 받아들여질 정도가 됐다. 장 소장은 SBS라디오 <김태현의 뉴스쇼>가 운영하는 유튜브 방송에 출연해 김건희씨 일가의 수상한 물건 수입 의혹과 관련한 이야기를 전했다. 장 소장은 “최은순씨가 주인으로 있는 농수산물 수입업체에서 이상한 것을 들고 오려고 하다가 걸려서 (김건희) 오빠와 김건희씨가 그것을 무마시키려고 여러 가지 이상한 (일들을 했다고 한다)”며 “어떤 물건인지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부적절한 물건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고 말했다. 급기야 선라이즈에프앤티의 폐업이 알려지자, 의혹은 그야말로 걷잡을 수 없이 커진 양상이다. 선라이즈에프앤티는 국세청 사업자 과세 유형 조회 결과 지난 10일자로 폐업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폐업자로 조회된 지난 10일은 김건희 특검법이 공포된 시기와 맞물린다. 물론 꾸준히 의혹이 제기된 것과 별개로, 김건희씨 일가와 선라이즈에프앤티 간 연관성을 입증할 만한 확실한 단서는 없는 상황이다. 특히 주주명부가 지금껏 외부에 공개되지 않았다는 게 의혹과 진실을 구분 짓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일요시사>가 최초 입수한 주주명부는 간접적으로나마 의문을 풀 수 있는 열쇠로 작용할 여지를 남긴다. 의문 해소 첫 단추 2022년 10월 작성된 ‘카리나에프앤티(선라이즈에프앤티에서 2020년 9월 상호 변경) 주주명부’를 검토한 결과 주주는 총 17명, 발행주식은 91만8400주(1주당 5000원)로 확인됐다. 2010년 9월 자본금 5억원으로 설립된 선라이즈에프앤티는 수차례 증자를 거쳤고, 해당 시기에 자본금을 45억9200만원으로 늘린 상태였다. 일단 주주명부에서는 김건희씨 일가의 이름을 찾을 수 없다. 대신 경영권 교체 과정이나마 엿볼 수 있을 뿐이다. 법인 등기와 주주명부를 교차 검증한 결과를 토대로 추정하면, 표면상 선라이즈에프앤티 지배 세력은 ‘전직 세관공무원(설립~2018년 중순)→지엔티에이치(~2020년 중순)→킴스에O엔O(~2022년 초순)→동OO앤에스(~2025년 6월)’ 순으로 변경된 흐름이다. 첫 번째 경영권 교체는 ‘펀딩하이 연체 사건’과 함께 발생했다. 펀딩하이는 중국·동남아시아에서 농산물을 수입하는 업체에 돈을 빌려 주고, 투자자들에게 15% 이상 수익을 보장하는 펀딩 상품으로 인기를 끌던 P2P 업체였다. 그러나 펀딩하이는 2018년 6월20일 ‘마늘 시즌2-17차(모집 금액 3억원, 차주 승리산업)’ 펀딩 상품의 연체를 시작으로 ▲세척 당근 시즌2-18차(모집금액 5억원, 차주 지엔티에이치) ▲김치 펀딩 2차(모집금액 1억2000만원, 차주 상아농산) ▲번데기 펀딩 1차(모집금액 1억8000만원, 차주 월량완코리아) 등에서 차주의 투자금 상환 실패를 알렸다. 연체 금액은 ▲지엔티에이치 29억원 ▲승리산업 33억원 ▲상아농산 11억8000만원 ▲월량완코리아 1억8000만원 등 총 75억6000만원에 달했다. 급기야 펀딩하이는 연체율 100%를 찍은 채 영업을 중단했다. 상환 실패 이후 차주 사이에 관련성이 드러났다. 지엔티에이치와 승리산업에서 대표이사였던 윤석호씨는 두 회사 지분을 각각 60%, 100% 보유 중이었다. 또한 월량완코리아 사내이사로도 등재돼있었다. 연체가 발생한 직접적인 사유는 선라이즈에프앤티를 대상으로 한 지분 투자였다. 지엔티에이치는 펀딩받은 금액을 농산물을 들여오는 데 쓰지 않고,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을 매입하는 데 활용한 것으로 뒤늦게 확인됐다. 이를 계기로 지엔티에이치는 2018년 6월경 주식 16만1400주를 확보한 선라이즈에프앤티 최대주주로 올라섰다. 지엔티에이치가 지배력을 확보한 이후 선라이즈에프앤티 임원 명단에 변화가 목격됐다. 선라이즈에프앤티 초창기부터 함께했던 사내이사와 부친에 이어 회사에 몸담았던 대표이사를 대신해 지엔티에이치가 끌어들인 얼굴들이 등기임원 자리를 꿰찼다. 정작 지엔티에이치는 연체 발생 넉 달 후인 2018년 10월 보유 중이던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을 ‘란릉현래보식품유한공사’에 넘겼다. 펀딩하이 투자자들과의 소송전이 불거지자 중국에 본거지를 둔 우군에 주식을 양도한 모양새였다. 거듭되는 교체 수순 두 번째 경영권 교체는 ‘킴스에O엔O’ 측이 선라이즈에프앤티의 주체로 올라서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충청권에 본적을 둔 킴스에O엔O는 2022년 10월 기준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 10만8200주를 확보한 것으로 확인됐다. 킴스에O엔O 대표이사의 친인척이 보유한 주식 13만2800주를 합산하면 우호 주식은 24만주 안팎이다. 기존 지엔티에이치 측 우호 세력(란릉현래보식품유한공사 16만1400주+마송재 3만주)과 비교해 5만주 가까이 격차를 벌린 셈이다. 킴스에O엔O 측이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을 대량 매입한 시기는 2020년 중후반으로 추정된다. 이 무렵 선라이즈에프앤티 등기임원 구성이 크게 요동쳤다는 점을 통해 짐작 가능한 사안이다. 실제로 지엔티에이치가 지배력을 발휘하던 2018년 7월 대표이사에 선임됐던 김정일 대표는 2020년 3월 해임됐다. 2018년 9월 취임했던 또 다른 대표이사 역시 당해 10월을 넘기지 못한 채 사임했다. 공석이 된 주요 등기임원 자리는 킴스에O엔O 측 인물로 채워졌다. 킴스에O엔O 대표이사가 2020년 10월 선라이즈에프앤티 대표이사로 취임했고, 해당 시기에 사외이사, 감사 등 등기임원 전원이 새 얼굴로 교체됐다. 킴스에O엔O에 이어 지배 세력으로 등장한 곳은 식료품 제조업을 영위하는 동OO앤에스였다. 이 회사는 2022년 10월 기준 주주명부에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 41만주(지분율 44.64%)를 보유한 단일 최대주주로 등재돼있다. 여기에 우호 세력(글로O포O 1만주+김성수 2만주+김종봉 788주)의 주식을 합산하면 지분율은 50%에 육박한다. 동OO앤에스는 사실상 선라이즈에프앤티를 인수하고자 만든 업체로 비쳐질 여지를 남긴다. 2022년 2월 출범 당시 자본금 10억원짜리였던 동OO앤에스는 불과 두 달 만인 2022년 4월14일 자본금을 21억원으로 두 배 이상 키웠다. 공교롭게도 동OO앤에스가 설립 이후 8개월 사이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 41만주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투입한 금액은 총 20억5000만원이었다. 이는 동OO앤에스 자본금 21억원이 선라이즈 주식 41만주를 매입하는 데 쓰였을 가능성에 주목하게 만든다. 게다가 선라이즈에프앤티는 기존 61만8400주였던 발행주식을 2022년 4월22일 91만8400주로 30만주 확대했다. 동OO앤에스가 자본금을 21억원으로 확충한 지 8일 만이다. 선라이즈에프앤티가 발행주식을 30만주 늘린 덕분에 동OO앤에스는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주식 41만주를 확보한 형국이다. 동OO앤에스가 선라이즈에프앤티를 지배하는 위치로 올라설 무렵에 선라이즈에프앤티 임원 구성은 또 한 번 바뀌었다. 동OO앤에스 대표이사가 사내이사, 글로O포O 대표이사가 사외이사에 이름을 올렸고, 김성수 대표이사가 신규 선임됐다. 이후 김성수 대표는 선라이즈에프앤티 폐업 전까지 자리를 지킨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되짚어보는 연결고리 한편 일각에서는 김건희씨 일가에서 선라이즈에프앤티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면 그 시기는 지엔티에이치 측이 지배력을 상실한 이후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나마 킴스에O엔O 혹은 동OO앤에스와의 연관성이 높다고 보는 것이다. 한 경찰 관계자는 “김건희씨 일가에서 선라이즈에프앤티에 관여한 직접적인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만약 영향력을 행사했다면 그 시기를 2021년 이후로 특정해볼 수 있을 것”이라며 “항간에 떠도는 마약 적발 여부는 2022년 근방으로 얘기가 오가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heaty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