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스러진 달 (28)역할 분담

마지막 만찬을 즐기다

소설가 황천우는 지금까지 역사소설 집필에 주력해왔다. 역사의 중요성, 과거를 알아야 현재를 알고 또 미래를 올바르게 설계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이 과정에서 ‘팩션’이란 장르를 만들어냈다. 팩트와 픽션, 즉 사실과 소설을 혼합하여 교육과 흥미의 일거양득을 노리기 위함이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의심의 끈을 놓지 않은 사건을 들추어냈다. 필자는 그 사건을 현대사 최고의 미스터리라 칭함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바로 1974년 광복절 행사 중 발생했던 영부인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이다.

호룡이 석원의 손을 잡았다.

“우리는 그저 자네만 믿네.”

두 사람이 침묵을 지키며 가기를 잠시 석원으로서는 엄두도 내지 못할 그야말로 화려한 음식점 앞에 차가 멈추어 섰다. 이어 음식점 종업원으로 보이는 듯한 남자가 차문을 열고 맞이하자 뒤따라 아리따운 아가씨가 나서 두 사람을 안내했다.

안내 받아 도착한 룸에 들어서자 차주선이 반갑게 맞이했다. 석원이 급히 다가가 허리를 90도 가량 꺾어 인사했다.

“오늘 퇴원했다지.”

“위원님 덕분입니다.”

“그동안 병원에 입원하면서 생활하느라 상당히 노고 많았네. 그래서 특별히 이 자리를 마련하였다네.”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석원이 고개 숙여 예의를 표하자 차주선이 봉투를 내밀었다.

“그동안 가족과 떨어져 지내느라 마음고생 심했을 터인데 이번에 함께 여행이라도 다녀오도록 하게나. 그렇다고 긴장은 풀지 말고.”

두툼한 봉투를 앞에 두고 석원이 호룡의 눈치를 살피며 망설였다. 그를 살핀 호룡이 차주선의 시선을 의식하며 애써 눈짓을 주었다. 그러자 석원이 다시 고개 숙이고 조신하게 봉투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말이야.”

차주선이 석원을 은근한 눈빛으로 주시했다.

“이 자리가 파한 다음 특별한 선물을 준비했는데 그리 알고 이 자리에서는 그저 마음껏 들도록 하게나.”

“위원님, 무슨 선물인지 말해주실 수 없습니까?”


“이보게, 이 부장. 문 군에게 주는 선물인데 왜 자네가 알려 하는가. 여하튼 이 자리에서 시시콜콜 일 이야기는 하지 말고 그저 한 달 간의 피로를 쭉 풀어내는 자리가 되도록 하세.”

차주선의 힐책 아닌 힐책에 호룡이 표정을 머쓱하게 위장하고는 부러운 시선으로 석원을 주시했다. 그러기를 잠시 후 본격적으로 음식이 들어오고 이어 미모가 출중한 아가씨들이 들어왔다.

술잔이 오고가고 오래지 않아 술기운으로 인해 분위기가 질펀하게 변해갔다. 한순간 차주선이 자리 파할 것을 암시하자 이호룡은 물론 문석원의 표정에 아쉬운 감이 역력하게 묻어나오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에 아랑곳하지 않은 차주선이 자리를 파하고 밖으로 나가자 고급 승용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문 군 타게나.”

석원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내 선물 준비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니 일단 타게.”

선물이라는 소리에 잠시 전 상황이 생각났는지 석원이 고개 숙여 예를 표하고 차에 자리 잡았다. 이어 차가 미끄러지듯이 음식점을 빠져나가 도쿄 중심가의 한 호텔로 향했다.

호텔에 도착하자 기사가 메모지 한 장을 건넸다. 물론 한 룸의 번호였다. 호기심에 한껏 들떠 자꾸만 메모지를 살피며 가기를 잠시 후 메모지에 기재된 룸 앞에 멈추어 섰다. 그동안 마신 술이 만만치 않건만 자꾸 마음이 움츠려들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배에 힘을 주고 벨을 누르자 잠시 후 문이 열리면서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를 보는 순간 석원의 호흡이 일시적으로 멈추어진 듯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서 와요, 석원 군. 내 차 위원께 신신당부하여 이 자리를 마련하였어요.”

석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우물거리자 여인이 석원의 팔을 잡고 안으로 끌어들였다.

“지도원 동‥‥‥.”

영웅인가 테러리스트인가
'거사' 위한 준비 착착


석원이 어느 정도 정신이 돌아와 말을 한다고는 했는데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다.

“오늘 밤은 그냥 영란이라 불러줘요.”

여인, 영란의 손에 이끌려 룸에 들자 테이블 위에 샴페인과 함께 간단한 요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갑작스런 상황 변화에 석원의 술기운이 송두리째 사라진 듯 여전히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이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얼마나 공들였는지 아세요?”

“너무 과분합니다, 지도원 동무.”

이번에는 끝까지 말을 이었다. 그를 살피며 영란이 천천히 글라스에 술을 따라 석원에게 건네고 저 역시 한 잔 들어 침대로 이동했다.

“우리 민족의 영웅이 이렇게 소심할 줄이야.”

마치 조롱하듯이 웃으며 내뱉은 영란이 손을 뻗었다. 더 이상 수세에 몰려서는 안 되겠다 생각한 석원이 잔을 들고 영란이 안내하는 침대로 다가가 바로 곁에 자리 잡았다.

“석원 씨, 한동안 제대로 사람 생활 못했다고 들었어요. 그러니 우리 모든 거 잊고 마셔요.”

말을 마침과 동시에 가볍게 잔을 부딪친 영란이 슬그머니 석원의 입술에 키스했다. 그 순간 잠시 동안 사라졌던 술기운이 급격하게 밀려오는지 석원의 가운데에서 기운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석원이 급히 잔을 비워내자 마시는 시늉만 했던 영란이 자신의 잔과 석원의 잔을 침대 한구석에 내려놓고 한 손으로 석원의 목을 껴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꿈틀거리기 시작한 석원의 가운데를 슬그머니 만졌다.

영란의 행동에 석원의 코에서 정체 모를 뜨거운 기운이 영란의 얼굴로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영란이 그를 느끼며 자세를 낮추자 석원의 바지가 뚫어질 듯한 모습이 시선에 들어왔다. 그 부분을 슬쩍 손으로 비벼대던 영란이 몸을 일으켜 석원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하고 자리에서 벗어나 석원의 빈 잔을 채워 가져왔다.

“오늘 밤 내내 석원 군의 사랑을 받고 싶어.”

촉촉이 젖어든 영란의 목소리에 석원의 어깨도 가운데처럼 한껏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를 의식하며 잔을 건네는 영란의 허리를 낚아채듯 끌어당겼다. 이어 잔을 치우고 품에 들어온 영란을 으스러져라 껴안으며 거친 숨을 뿜어냈다.

“가만히 있어봐.”

영란이 가볍게 석원을 밀치고 옷을 벗기 시작했다. 석원의 목으로 마른 침이 넘어가면서 목젖이 심하게 꿈틀거렸다. 전라로 변한 영란이 이번에는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는 석원의 옷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벗기기 시작했다.

석원이 순간을 참을 수 없었던지 혹은 영란의 행위를 도와주기라도 함인지 스스로 옷을 벗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순식간에 전라의 모습으로 바뀌자 석원이 야수의 본능을 드러내 영란을 안아 들어 침대에 가지런히 눕혔다.

“석원 씨, 가만.”

영란이 자신의 위에서 벌겋게 달아오른 석원의 어깨를 살며시 밀치며 석원의 몸 위에 자리했다.

“가만히 있어. 내가 석원 씨를 가질 테니.”

영란이 그윽한 시선으로 석원의 얼굴을 주시하기를 잠시 석원의 귀를 시작으로 혀로 아울러 입술로 말하기 시작했다. 순간순간 석원의 몸이 움찔움찔거렸다.

“어땠어, 석원 씨.”

짧지 않은 시간 깊은 나락으로 떨어졌던 석원의 귀에 달콤한 음악이 들려왔다.

“지도원 동무, 이런 기분 처음입니다.”

순간 영란이 얼굴을 찡그리며 석원의 가운데를 힘차게 감아쥐었다. 석원의 입에서 자연스레 신음이 흘러나왔다.

“지도원 동무라 부르지 말고 영란이라 부르라 했잖아.”

“정말 그래도‥‥‥.”

영란이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으로 치워 놓은 잔을 가져와 석원에게 건네고 가볍게 잔을 부딪쳤다.

“그런데 정말 좋았어?”

“그걸 말씀이라고 해요. 태어나서 이런 기분 처음이에요.”

“나도 이런 기분 처음이야. 사랑을 나누는 일이 이렇게 좋은 건지 지금까지 정말 몰랐어. 그런데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석원이 차마 답을 못하자 영란이 고개 숙인 석원의 가운데를 살살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영란의 기교 혹은 석원의 마음속에 있던 영란에 대한 호기심 탓인지 오래지 않아 언제 그랬느냐는 듯 서서히 기지개켜기 시작했다.

“아마도 영웅과 함께 사랑을 나누기 때문에 더욱 흥분되고 그래서 더욱 맛있는 건지도 모르겠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석원이 차마 대답을 못하자 영란이 손 대신 입을 그곳으로 가져갔다. 이어 입과 이빨로 공략하자 석원의 귀에 그저 영웅이라는 단어만 윙윙거렸다.

동일이 사무실에서 시계를 바라보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던 중에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자신 또래의 날카롭게 생긴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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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