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14주년 특별기획<2>여의도 입성 14년차 국회의원 현주소

‘어리바리’새내기 지금은 여의도 ‘주물럭주물럭’


정계에는 올해로 14돌을 맞은 <일요시사>와 동년배인 중견 정치인들이 많다. 1996년 당시 15대 총선을 통해 생애 첫 금배지를 달고 국회에 입성한 이들이 그 주인공이다. 등장 당시 ‘조연’에 지나지 않았던 이들은 현재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정계의 ‘주연’으로 성장했다. 이제 여의도는 이들이 내뱉은 말 한마디에 술렁일 정도다. 지난 시간 굴곡진 삶을 견디고 거물급 인사로 성장한 정계 주요 인사들의 정치 여정을 되돌아봤다.


‘어르신’ 등에 업고 ‘조연’에서 ‘주연’ 고속성장
14년 정치인생… 말 한마디에 ‘웃다가 울다가’

    
15대 총선이 치러진 1996년은 여의도에 ‘새내기’ 의원들이 대거 등장한 때다. 90년대 ‘3김시대’로 대변됐던 정치권 세력은 15대 총선을 기준으로 세대교체 바람이 불면서 혈기 왕성한 신인들이 다량 수혈됐다. 실제 당선된 국회의원 299명 중 46%인 137명이 초선의원일 정도다.

‘파릇파릇’ 새내기
“의젓하게 자랐네”

 
하지만 이들의 등장이 ‘혈혈단신’ 이뤄진 것은 아니다. 당시 정치권 최대 영향력을 자랑했던 ‘3김(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 김종필 전 총재)’의 든든한 후원이 성장의 밑거름으로 작용했다. 특히 YS(김영삼 전 대통령)와 DJ(김대중 전 대통령)의 러브콜은 신인 정치인들에게는 ‘핑크빛’ 미래에 대한 보장과 같았다. 15대 초선의원들 앞에 유독 ‘포스트 ○○○’, ‘○○○ 수제자’ 등의 수식어가 많은 까닭도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1996년 정계 큰 어른들의 든든한 지원을 받고 성공적으로 국회에 자리매김한 대표 인사들은 누굴까. 최근 원내지휘봉을 잡게 된 김무성 한나라당 신임 원내대표가 그 중 하나다. 김 원내대표는 YS가 야당 총재이던 시절 그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한 후 15대 총선을 통해 국회에 첫 입성했다. YS의 ‘정치적 수제자’로 불린 김 원내대표는 이후 16·17대까지 내리 3선에 성공하며 당내 중진의원으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그의 운세가 늘 상승곡선을 그린 것은 아니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후보의 대책본부 조직총괄본부장을 맡아 ‘친박계 좌장’으로 꼽혔던 그는 이듬해 18대 총선에서 ‘보복공천’의 희생양이 됐다. 그는 당을 떠나 무소속 출마를 감행했다. YS는 김 원내대표의 후보 선거사무실을 직접 찾아 그에 대한 사랑을 표현했다.

YS는 이 자리에서 “전국적인 인물이 된 김 의원은 앞으로 대통령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며 지지를 호소했다. 결국 자신의 텃밭이었던 부산에서 4번째 금배지를 가슴에 매단 그는 당당히 한나라당으로 복귀했다. 김 원내대표의 정치적 역경은 이뿐만이 아니다. 그는 당 원내대표직을 두고 3번이나 고배를 마셔야했다.

앞서 2006년 1월과 7월 두 차례 원내대표 경선에 도전했지만 이재오 의원과 김형오 의원에게 잇따라 패했다. 지난해 5월엔 친이계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원내대표직에 추대됐지만 박 전 대표의 반대로 무산됐다. 김 원내대표는 지난 4일, ‘3전4기’ 도전 끝에 당 의원 만장일치로 신임 원내대표에 선출되는 영광을 안게 됐다.

김 원내대표의 정치적 역경만큼이나 굴곡진 시간을 견뎌 낸 국회입문 ‘동기’가 있다. 홍준표 한나라당 의원이다. 홍 의원은 1993년 서울지방검찰청 검사로 재직하면서부터 정치권의 끊임없는 러브콜을 받았다. 1995년 사직 후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던 그는 당시 14대 대통령이었던 YS의 권유를 받고 정치에 입문했다. 신한국당에 입당한 그는 15대 총선에 출마, 서울 송파구 갑에서 승리를 거두며 정치인생을 걷게 됐다.

YS·DJ 내민 손
거물급 성장 발판

하지만 기쁨도 잠시. 1999년 선거법 위반으로 벌금형을 선고받고 의원직을 상실하는 고초를 겪었다. 이를 계기로 2000년 2월 탈당을 선언하기도 했던 그는 다행히 2001년 서울 동대문구 을 선거구 보궐선거를 통해 복귀, 건재함을 자랑했다. 이후 17·18대 국회의원에 연이어 당선된 홍 의원은 한나라당 클린정치위원회 위원장, 국회 환경노동위 위원장 등을 지냈고, 2008년엔 한나라당 원내대표직을 맡아 정치권의 ‘주연’으로 자리매김했다.

홍 의원은 이제 당 대표직에 도전하겠다는 의지를 확고히 하고 있다. 김영선 국회 정무위원장(한나라당)도 15대 총선 당시 YS의 공천장을 받아 정계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이들 중 한 사람이다. 김 위원장은 당시 이재오, 김문수, 홍준표, 이윤성, 맹형규 등과 함께 공천을 받아 국회 배지를 달았다. 일각에선 김 위원장의 등장을 두고 ‘YS의 아들인 현철씨의 추천을 받았다’, ‘추미애(당시 새천년민주당) 의원에 대한 반격 카드로 영입됐다’ 등의 설이 나왔다.

이유야 어찌됐든 당시 초선의원이었던 김 위원장은 14년의 지난 시간동안 당 안팎으로 화려한 기록을 줄줄이 남기며 중진의원으로 성장했다. 여의도 입성 이전 변호사와 시민사회활동을 거친 김 위원장은 과거 경험을 살린 적극적인 당정 활동으로 15대 국회 최우수 의원에 뽑히는 영예를 안았다. 이후에도 그는 한나라당 ‘여성 최초 대변인’이라는 타이틀을 얻었고, 2004년엔 최고위원에 선출되기도 했다.
 
DJ ‘러브콜’ 받고 ‘승승장구’ 추미애·천정배 
YS 발탁된 파워인사 김무성·김영선·홍준표


2006년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잔여 임기동안 당 대표를 지내기도 했다. 비록 24일간의 임시직이었지만 그는 이 기간 동안 적극적인 행보로 자신의 이름을 국민들에게 각인시키는데 성공했다. 또한 그는 대표직을 승계하자마자 곧바로 ‘정치적 스승’인 YS를 찾아 감사인사를 전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6년간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을 맡았고, 최근에는 국회 정무위원장까지 역임하며 화려한 이력을 이어가고 있다.

4선의원인 김 위원장은 이제 국회에서도 한참 ‘고참’에 속한다. 그녀 위로는 6선의원인 홍사덕·정몽준 의원과 5선의원인 김형오·이상득 의원 등이 있을 뿐이다. 김 위원장이 YS의 후광을 입었다면 추미애 국회 환경노동위원장(민주당)은 DJ의 후광으로 성장한 대표 인사다. 판사 출신의 추 위원장은 1996년 DJ의 적극적인 권유로 정치에 입문했다. 정계에 여성정치인 영입 바람이 거세게 부는 와중에 DJ가 고심 끝에 내놓은 히든카드였던 것이다.

덕분에 대구 태생으로 경상도의 ‘딸’인 김 위원장이지만 민주당의 텃밭인 전라도에서도 높은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 김 위원장은 15대 총선 당시부터 ‘포스트 DJ’로 불리며 성공가도를 달렸다. DJ 정부시절엔 행정자치부 장관 등 정부 요직인사에 수차례 노미네이트됐고, 노무현 전 대통령으로부터는 ‘차기 대권주자’로 꼽히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2002년 대선 마지막 명동유세에서 “우리에게 정동영, 추미애가 있다”며 공개적으로 추 위원장을 대권주자로 지목했었다. 하지만 ‘승승장구’하던 그에게도 시련은 찾아왔다. 노무현 정부 수립 후 당 분열에도 열린우리당이 아닌 민주당을 지켰던 그는 몇 달 뒤 ‘탄핵 역풍’을 맞았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낙선하고 만 것. 이후 미국 유학길에 올랐던 그는 2006년 8월말 귀국했다.

2년의 시간을 와신상담한 그는 2007년 대통합민주신당 17대 대통령선거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으며 재기의 발판을 다졌고, 이듬해 18대 총선을 통해 민주당으로 복귀했다. 지난해 8월 국회 환경노동위원장에 선출된 김 위원장은 최근 ‘노동법 파문’ 등으로 당내 입지가 흔들리고 있지만 여전히 차기 대권의 유력 인물로 손꼽히고 있다.

민주당내 비주류로 분리되는 천정배 의원도 이 당시 정치권에 발을 들인 인물이다. 인권변호사 출신인 천 의원은 일찍부터 정치권의 러브콜을 받았다. 하지만 때를 기다렸던 천 의원은 국민회의 창당을 추진하던 DJ의 부름에 응해 15대 총선을 거쳐 국회에 입문했다. 천 의원은 이후 빠른 속도로 명성을 얻었다. 1997년 국민회의 정책위원회 부의장을 거쳐 2000년엔 민주당 수석원내부총무를 역임했다. 2002년 대선에서 노 전 대통령을 적극 지지했던 그는 대선 이후 열린우리당의 창당을 주도하기도 했다.

넘어지고 일어서고
역경 딛고 주연 ‘우뚝’

곧바로 2004년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자리를 꿰찬 천 의원은 이를 계기로 국회 ‘거물’ 인사로 우뚝 섰다. 그는 이듬해 6월 법무부 장관에 임명되면서 다시 한 번 세간에 명성을 넓혔다. 2007년 열린우리당을 탈당한 그는 18대 총선에서 다시 민주당 소속의원으로 출마, 4선의원이 됐다.

2009년 한나라당의 미디어법 강행처리에 불만을 품고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기도 했던 그는 지난 1월 복귀한 뒤 당 내 비주류의 핵심으로 고속성장 중이다. 일각에선 천 의원이 지방선거 직후 치러질 차기 전당대회에서 당권 획득을 목표로 세를 모으고 있다는 해석이 대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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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김건희 일가 연루 의혹 ‘선라이즈F&T’ 주주명부 공개

[단독] 김건희 일가 연루 의혹 ‘선라이즈F&T’ 주주명부 공개

[일요시사 취재1팀] 양동주 기자 = 소문이 어느덧 사실처럼 인식되고 있다. 명확한 물증이 없는 가운데 파편적인 의혹이 덧씌워진 양상은 좀처럼 바뀌지 않고 있으며, 흐름을 파악할 만한 유의미한 흔적이 이제야 겨우 나왔을 뿐이다. 증폭된 의혹 뒤편에서 여전히 진실은 빼꼼히 잘 보이지 않는다. 2010년 9월 설립된 ‘선라이즈에프앤티’는 황해경제자유구역에 자리 잡은 유일한 농산물 가공 업체로, 그간 심심치 않게 밀수 의혹을 받아왔다. 가공 목적으로 수입한 농산물을 가공 없이 시중에 유통시켜 엄청난 차익을 봤다는 꼬리표가 뒤따랐다. 의혹하는 눈초리 선라이즈에프앤티가 취급했던 대다수 농산물이 고관세 품목이라는 점은 이 같은 의혹을 부채질했다. 그간 선라이즈에프앤티는 ▲녹두 ▲콩나물콩 ▲다대기(혼합양념) ▲생강 ▲마늘 ▲참깨 ▲팥 ▲서리태 등 높은 세율이 붙는 고관세 품목을 주로 수입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한 예로 콩나물콩의 경우 그대로 들여와 국내에 유통하면 487% 관세가 부과되지만, 콩나물 재배 목적으로 수입하면 27%만 반영된다. 평택세관에 몸담았던 다수의 전직 세관공무원이 기업 출범 및 운영에 관여했다는 점도 선라이즈에프앤티를 부정적으로 보게 만들었다. 심지어 선라이즈에프앤티 이사진에 포함됐던 특정 세관 출신 임원이 한때 다이아몬드 밀수 사건에 이름이 오르내린 사례도 존재한다. 수년 전부터는 김건희씨 일가와 선라이즈에프앤티를 동일선상에서 바라보는 경향이 강해졌다. 선라이즈에프앤티의 밀수 의혹을 수차례에 걸쳐 제기했던 공익 제보자 이성열씨가 재판에 연루되는 과정에서 김건희씨의 모친인 최은순씨가 거론됐던 게 이 같은 흐름에 불을 지핀 형국이다. 이런 가운데 정치평론가인 장성철 공론센터 소장이 최근 ‘평택항’을 언급하자, 김건희씨 일가와 선라이즈에프앤티 간 연관성은 사실처럼 받아들여질 정도가 됐다. 장 소장은 SBS라디오 <김태현의 뉴스쇼>가 운영하는 유튜브 방송에 출연해 김건희씨 일가의 수상한 물건 수입 의혹과 관련한 이야기를 전했다. 갈수록 증폭되는 평택 논란 이제야 공개된 소소한 흔적 장 소장은 “최은순씨가 주인으로 있는 농수산물 수입업체에서 이상한 것을 들고 오려고 하다가 걸려서 (김건희) 오빠와 김건희씨가 그것을 무마시키려고 여러 가지 이상한 (일들을 했다고 한다)”며 “어떤 물건인지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부적절한 물건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고 말했다. 급기야 선라이즈에프앤티의 폐업이 알려지자, 의혹은 그야말로 걷잡을 수 없이 커진 양상이다. 선라이즈에프앤티는 국세청 사업자 과세 유형 조회 결과 지난 10일자로 폐업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폐업자로 조회된 지난 10일은 김건희 특검법이 공포된 시기와 맞물린다. 물론 꾸준히 의혹이 제기된 것과 별개로, 김건희씨 일가와 선라이즈에프앤티 간 연관성을 입증할 만한 확실한 단서는 없는 상황이다. 특히 주주명부가 지금껏 외부에 공개되지 않았다는 게 의혹과 진실을 구분 짓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일요시사>가 최초 입수한 주주명부는 간접적으로나마 의문을 풀 수 있는 열쇠로 작용할 여지를 남긴다. 2022년 10월 작성된 ‘카리나에프앤티(선라이즈에프앤티에서 2020년 9월 상호 변경) 주주명부’를 검토한 결과 주주는 총 17명, 발행주식은 91만8400주(1주당 5000원)로 확인됐다. 2010년 9월 자본금 5억원으로 설립된 선라이즈에프앤티는 수차례 증자를 거쳤고, 해당 시기에 자본금을 45억9200만원으로 늘린 상태였다. 의문 해소 첫 단추 일단 주주명부에서는 김건희씨 일가의 이름을 찾을 수 없다. 대신 경영권 교체 과정이나마 엿볼 수 있을 뿐이다. 법인 등기와 주주명부를 교차 검증한 결과를 토대로 추정하면, 표면상 선라이즈에프앤티 지배 세력은 ‘전직 세관공무원(설립~2018년 중순)→지엔티에이치(~2020년 중순)→킴스에O엔O(~2022년 초순)→동OO앤에스(~2025년 6월)’ 순으로 변경된 흐름이다. 첫 번째 경영권 교체는 ‘펀딩하이 연체 사건’과 함께 발생했다. 펀딩하이는 중국·동남아시아에서 농산물을 수입하는 업체에 돈을 빌려 주고, 투자자들에게 15% 이상 수익을 보장하는 펀딩 상품으로 인기를 끌던 P2P 업체였다. 그러나 펀딩하이는 2018년 6월20일 ‘마늘 시즌2-17차(모집 금액 3억원, 차주 승리산업)’ 펀딩 상품의 연체를 시작으로 ▲세척 당근 시즌2-18차(모집금액 5억원, 차주 지엔티에이치) ▲김치 펀딩 2차(모집금액 1억2000만원, 차주 상아농산) ▲번데기 펀딩 1차(모집금액 1억8000만원, 차주 월량완코리아) 등에서 차주의 투자금 상환 실패를 알렸다. 연체 금액은 ▲지엔티에이치 29억원 ▲승리산업 33억원 ▲상아농산 11억8000만원 ▲월량완코리아 1억8000만원 등 총 75억6000만원에 달했다. 급기야 펀딩하이는 연체율 100%를 찍은 채 영업을 중단했다. 상환 실패 이후 차주 사이에 관련성이 드러났다. 지엔티에이치와 승리산업에서 대표이사였던 윤석호씨는 두 회사 지분을 각각 60%, 100% 보유 중이었다. 또한 월량완코리아 사내이사로도 등재돼있었다. 거듭되는 교체 수순 연체가 발생한 직접적인 사유는 선라이즈에프앤티를 대상으로 한 지분 투자였다. 지엔티에이치는 펀딩받은 금액을 농산물을 들여오는 데 쓰지 않고,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을 매입하는 데 활용한 것으로 뒤늦게 확인됐다. 이를 계기로 지엔티에이치는 2018년 6월경 주식 16만1400주를 확보한 선라이즈에프앤티 최대주주로 올라섰다. 지엔티에이치가 지배력을 확보한 이후 선라이즈에프앤티 임원 명단에 변화가 목격됐다. 선라이즈에프앤티 초창기부터 함께했던 사내이사와 부친에 이어 회사에 몸담았던 대표이사를 대신해 지엔티에이치가 끌어들인 얼굴들이 등기임원 자리를 꿰찼다. 정작 지엔티에이치는 연체 발생 넉 달 후인 2018년 10월 보유 중이던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을 ‘란릉현래보식품유한공사’에 넘겼다. 펀딩하이 투자자들과의 소송전이 불거지자 중국에 본거지를 둔 우군에 주식을 양도한 모양새였다. 두 번째 경영권 교체는 ‘킴스에O엔O’ 측이 선라이즈에프앤티의 주체로 올라서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충청권에 본적을 둔 킴스에O엔O는 2022년 10월 기준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 10만8200주를 확보한 것으로 확인됐다. 킴스에O엔O 대표이사의 친인척이 보유한 주식 13만2800주를 합산하면 우호 주식은 24만주 안팎이다. 기존 지엔티에이치 측 우호 세력(란릉현래보식품유한공사 16만1400주+마송재 3만주)과 비교해 5만주 가까이 격차를 벌린 셈이다. 킴스에O엔O 측이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을 대량 매입한 시기는 2020년 중후반으로 추정된다. 이 무렵 선라이즈에프앤티 등기임원 구성이 크게 요동쳤다는 점을 통해 짐작 가능한 사안이다. 실제로 지엔티에이치가 지배력을 발휘하던 2018년 7월 대표이사에 선임됐던 김정일 대표는 2020년 3월 해임됐다. 2018년 9월 취임했던 또 다른 대표이사 역시 당해 10월을 넘기지 못한 채 사임했다. 쉽게 거두지 못하는 의심 의미심장 세력 교체 과정 공석이 된 주요 등기임원 자리는 킴스에O엔O 측 인물로 채워졌다. 킴스에O엔O 대표이사가 2020년 10월 선라이즈에프앤티 대표이사로 취임했고, 해당 시기에 사외이사, 감사 등 등기임원 전원이 새 얼굴로 교체됐다. 킴스에O엔O에 이어 지배 세력으로 등장한 곳은 식료품 제조업을 영위하는 동OO앤에스였다. 이 회사는 2022년 10월 기준 주주명부에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 41만주(지분율 44.64%)를 보유한 단일 최대주주로 등재돼있다. 여기에 우호 세력(글로O포O 1만주+김성수 2만주+김종봉 788주)의 주식을 합산하면 지분율은 50%에 육박한다. 동OO앤에스는 사실상 선라이즈에프앤티를 인수하고자 만든 업체로 비쳐질 여지를 남긴다. 2022년 2월 출범 당시 자본금 10억원짜리였던 동OO앤에스는 불과 두 달 만인 2022년 4월14일 자본금을 21억원으로 두 배 이상 키웠다. 공교롭게도 동OO앤에스가 설립 이후 8개월 사이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 41만주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투입한 금액은 총 20억5000만원이었다. 이는 동OO앤에스 자본금 21억원이 선라이즈 주식 41만주를 매입하는 데 쓰였을 가능성에 주목하게 만든다. 게다가 선라이즈에프앤티는 기존 61만8400주였던 발행주식을 2022년 4월22일 91만8400주로 30만주 확대했다. 동OO앤에스가 자본금을 21억원으로 확충한 지 8일 만이다. 선라이즈에프앤티가 발행주식을 30만주 늘린 덕분에 동OO앤에스는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주식 41만주를 확보한 형국이다. 동OO앤에스가 선라이즈에프앤티를 지배하는 위치로 올라설 무렵에 선라이즈에프앤티 임원 구성은 또 한 번 바뀌었다. 동OO앤에스 대표이사가 사내이사, 글로O포O 대표이사가 사외이사에 이름을 올렸고, 김성수 대표이사가 신규 선임됐다. 이후 김성수 대표는 선라이즈에프앤티 폐업 전까지 자리를 지킨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되짚어보는 연결고리 한편 일각에서는 김건희씨 일가에서 선라이즈에프앤티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면 그 시기는 지엔티에이치 측이 지배력을 상실한 이후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나마 킴스에O엔O 혹은 동OO앤에스와의 연관성이 높다고 보는 것이다. 한 경찰 관계자는 “김건희씨 일가에서 선라이즈에프앤티에 관여한 직접적인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만약 영향력을 행사했다면 그 시기를 2021년 이후로 특정해볼 수 있을 것”이라며 “항간에 떠도는 마약 적발 여부는 2022년 근방으로 얘기가 오가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heaty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