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에…' 팍팍 쓰는 기업들 백태

IMF보다 어렵다지만…두꺼워지는 재벌 지갑

[일요시사 경제1팀] 한종해 기자 = 우리나라의 소비자 심리지수가 60개국 중에서 59위를 기록했다. 30대 그룹 대부분도 지금 경제 상황에 대해 "글로벌 금융위기 때보다 더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한국 경제에 장기 불황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 하지만 기업들의 배당·실적·임금을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불황이라면서 그들만의 잔치를 벌인 기업들은 한둘이 아니다.

글로벌 정보분석 기업인 닐슨이 지난해 4분기 세계 60개국의 소비자를 대상으로 지출 의향 등을 물었더니 우리나라의 소비자 심리지수는 60개국 중에서 59위를 기록했다.

한국은행의 '1월 소비자 동향 조사'에 따르면 소비자 심리지수는 지난해 9월(107)부터 3개월 연속 떨어지다가 지난달 102로 1포인트 상승하며 하락세가 진정됐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 직후 기록한 소비자 심리지수(104) 수준에도 못 미치는 수치다.

부진 예측 뒤엎는
대기업 실적 개선

기업들이 한국 경제를 바라보는 인식도 비슷하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최근 30대 그룹을 대상(1개 그룹 무응답)으로 '2015 투자·경영 환경 조사'를 실시한 결과 24개 그룹(82.8%)이 '구조적 장기 불황이 우려된다'고 답했다. 절반이 넘는 그룹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비교해 현 경영 환경이 '더 나쁘다'고 답했다. 44.8%에 해당하는 13곳은 경제 회복 시기가 '2017년 이후'라는 부정적인 전망을 내놨다.

올해 예상 투자규모를 묻는 질문에는 41.4%가 작년과 비슷한 수준이 될 것이라고 답했고 24.1%는 작년보다 줄 것이라고 응답했다.


이처럼 너도나도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다르다. 연초부터 발표되고 있는 기업들의 배당, 실적, 임금 수치를 보면 '그들만의 잔치'를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부진할 것이라는 업계의 예측과 달리 지난 한해 대체로 양호한 실적을 올린 기업들이 많았다. 특히 한진그룹의 약진이 눈에 띈다.

에프엔가이드에 따르면 한진그룹 주력계열사 대한항공은 2013년 4분기 영업이익 178억원에서 지난해 4분기 영업이익은 1305억원으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여기에 3년 연속 영업손실을 기록하던 한진해운은 4년 만에 흑자를 달성했다. 지난해 매출은 전년 대비 10.3% 감소한 8조6548억원을 기록했으나 영업이익은 1435억원이다. 한진그룹의 지난해 4분기 영업이익은 280%가량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전년 동기에 비해 36%나 줄어든 영업이익을 기록한 삼성전자 때문에 고전이 예상됐던 삼성그룹의 경우, 삼성카드, 삼성증권, 삼성생명, 호텔신라, 크레듀 등 타 계열사 실적 개선으로 그나마 '선방'한 것으로 나타났다. 현대차와 기아차 영업이익이 각각 전년 대비 7.6%, 23% 하락한 현대자동차그룹 또한 현대제철과 현대건설의 선전으로 작년과 비슷한 수준의 영업이익을 올릴 것으로 예상된다.

SK그룹도 SK이노베이션 부진을 SK하이닉스가 보완해 줬다. SK이노베이션은 지난해 4600억원대 영업손실을 냈다. 하지만 SK하이닉스는 지난해 매출액 17조1256억원, 영업이익 5조1095억원을 기록하며 또 한번 최대 매출액과 영업이익 기록을 갈아치웠다. 당기순이익도 전년 동기보다 46% 증가했다.

배당금 총액 전년 대비 61% 증가
100억 이상 배당 부자 최소 20명

LG그룹은 LG전자, LG디스플레이, LG이노텍이 선전하면서 LG화학의 부진을 메꿨다. CJ그룹도 CJ헬로비전과 CJ E&M의 부진에도 불구하고 CJ제일제당과 CJ대한통운의 실적 향상을 이끌어 내며 전체적으로는 성장했다.


포스코그룹은 3조원대 매출을 회복했다. 포스코그룹의 지난해 매출은 전년(61조865억원) 대비 5.2% 증가한 65조984억원으로 나타났으며 영업이익은 3조2135억원으로 전년 대비 7.3% 증가했다.

기업들의 실적 선방을 방증하듯이 올해 역시 '배당 잔치'가 벌어졌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지난해 12월1일부터 올해 2월5일까지 2014년도 배당총액은 10조2751억원으로 전년 같은 기간에 비해 3조9025억원(61%)이 증가했다. 현금배당을 공시한 상장법인도 253개로 전년 같은 기간보다 113개(80%) 늘었다.
 

유가증권시장 상장법인 중 배당을 공시한 기업은 전년 86개에서 145개로 증가했고 배당금 총액은 6조1989억원에서 9조8774억원으로 늘어났다. 코스닥 상장법인 중 배당을 공시한 곳은 전년 54개 사에서 108개로 증가했고 배당금 총액은 1737억원에서 3977억원으로 집계됐다.

가장 많은 배당금을 지급한 기업은 삼성전자로 배당금 총액은 전년보다 40.5% 증가한 2조9246억원으로 집계됐다. 삼성전자는 보통주 1주당 배당금을 1만3800원에서 1만9500원으로 41.3% 늘렸다. 삼성화재해상보험은 주당 2750원에서 4500원으로 63.6%늘렸으며 배당금 총액은 1202억원에서 1988억원으로 65.4% 늘었다. 삼성카드도 2013년 700원에서 2014년 300원(42.9%)이 증가한 1000원을 배당해 배당금 총액 1154억원(전년 808억원)을 기록했다.

배당금을 큰 폭으로 확대한 주요 대기업을 살펴보면 ▲현대자동차(1950원→3000원, 53.8%) ▲기아자동차(700원→1000원, 42.9%) ▲동부화재해상보험(1000원→1450원, 45%) ▲SK C&C(1500원→2000원, 33.3%) 등으로 나타났다.

전년도 주당 600원을 배당한 포스코와 4000원을 배당한 LG화학, 1000원을 배당한 LG, 2500원을 배당한 SK는 올해 같은 금액을 배당하기로 했다. 전년도 배당을 하지 않았던 SK하이닉스는 올해 주당 300원 배당으로 배당금 총액 2184억원을 기록했으며, 역시 배당을 하지 않았던 LG디스플레이도 올해 500원을 배당, 총 1789억원을 배당하기로 했다.

배당 공시 기업
86개→145개

100%가 넘는 배당금 총액 증가율을 나타낸 기업은 엔씨소프트(472.4%)와 메리츠종금증권(108.7%), 아이마켓코리아(100%), 호텔신라(132.5%), 삼성생명(109.5%) 등이다.

코스닥시장에서는 동서가 전년보다 9.1% 증가한 596억원을, GS홈쇼핑이 119.3% 증가한 480억원을, 파라다이스가 56.6% 증가한 428억원을 배당했다.

주요 금융지주사들과 시중은행들도 '배당 잔치'를 벌이고 있다. 지난해 배당을 실시하지 않았던 우리은행은 올해 은행권 내 가장 큰 규모인 5000억원의 배당을 계획 중이다. 올해 3월 초 열리는 이사회에서 최종 배당액을 확정할 계획이다. 주당 배당금은 700~750원 사이로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신한금융지주는 전년도 650원에서 46.2% 증가한 950원의 배당을 실시키로 결정했다. 배당성향(순이익 대비 배당 총액)은 21.6%로 전년(16.2%)에 비해 크게 확대됐다. 

지난해 주당 500원을 배당했던 KB금융지주는 올해 780원씩 배당하기로 했다. 배당성향은 15.1%에서 21.5%로 증가했다. 꾸준히 배당성향을 늘려오던 하나금융지주와 IBK기업은행도 적극적으로 배당을 확대할 것으로 보인다.


기업들이 배당을 늘리면서 100억 이상 '배당 부자'들도 속속 나오고 있다. 재벌닷컴과 금융투자업계 분석 결과 2014년 배당금을 100억원 이상 받게 되는 대기업 주주는 16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에 배당 규모를 발표하지 않은 기업을 포함하면 배당부자는 최소 20명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기업 호실적 소식 잇달아
경영진 임금도 속속 올려

2014년 가장 많은 배당금을 받는 기업인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으로, 지난 2013년 1079억원에서 2014년 1758억원으로 63% 증가했다.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도 지난 2013년 495억원에서 2014년 649억원으로 31% 늘었다. 2014년 120억원의 배당금을 받았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올해 79.5% 늘어난 216억원의 배당금을 받게 됐다.

이밖에 ▲최태원 SK그룹 회장(2013년 배당금 286억원→2014년 배당금 330억원 증감률 15.4%) ▲홍라희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155억원→217억원, 39.9%) ▲서경배 아모레퍼시픽그룹 회장(155억원→205억원, 32.2%) ▲정몽진 KCC그룹 회장(131억원→168억원, 28.6%) ▲김남호 동부제철 부장(94억원→144억원, 53.3%) ▲김상헌 동서 고문(126억원→135억원, 7.2%) ▲김석수 동서식품 회장(110억원→120억원, 9.3%) ▲이재현 CJ그룹 회장(118억원→119억원, 0.3%)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91억원→109억원, 19.6%) ▲최태원 회장의 동생인 기원씨(79억원→105억원, 33.3%) ▲구광모 LG 상무(86억원→105억원, 22.6%) 등이 100억원 이상의 배당금을 받게 됐다. 구본무 LG그룹 회장(192억원)과 구본준 LG전자 부회장(137억원)은 배당 액수가 전년과 동일했다.

기업의 근간이 되는 직원들의 상대적 박탈감은 더욱 커졌다. 매출 1조원 이상 대기업 등기임원들은 직원들보다 13배 많은 연봉을 타갔다. 기업분석 전문업체 한국CXO연구소는 2013년 기준 국내 1500대 기업 등기임원 보수의 적정성을 분석한 결과를 내놨다.

매출 1조원이 넘는 대기업 등기임원의 1인 평균 보수는 8억2276만원으로 1인 당 평균 6121만원을 받은 직원들보다 7억6155만원이 높았다. 매출 1000억원 미만 중소기업에서 등기임원과 직원의 보수 격차는 4.8배에 불과했다.


1500대 기업 중 등기임원과 직원 보수가 5배 미만인 기업이 795개사로 절반을 넘었으며 15배 이상 차이가 나는 기업은 109개사에 불과했다. 매출 1조원 이상 대기업 때문에 연봉이 크게 차이가 난다는 얘기다.

등기임원과 직원의 평균 보수 격차가 가장 큰 기업은 SK이노베이션으로 70.4배에 달했다. 그 다름은 오리온(68.7배), 삼성전자(65.9배), 현대백화점(53.5배), SK(55.7배), 메리츠화재(55.5배), 코데즈컴바인(49.6배), 이마트(54.9배), SK C&C(47.2배), 에이블씨엔씨(45.5배)순이다.

불황 비웃는 기업
4분기 깜짝 실적

금액 순으로 등기임원 1인 평균 보수가 가장 높은 기업은 삼성전자로 65억8900만원이다. 2위는 50억2150만원이 지급된 SK, 3위는 47억2988만원이 지급된 SK이노베이션이 차지했다. 그 뒤를 현대백화점(33억7433만원), SK C&C(31억8033만원), 메리츠화재(27억9555만원), 삼성물산(25억3566만원), 삼성중공업(24억900만원), 오리온(23억9100만원), SKC(23억8133만원)가 이었다.

CXO연구소는 "대체로 국내 상장기업에서는 15배가 기준이 될 수 있다는 분석결과를 얻었다"며 "등기임원이 직원보다 15배 이상 받아가면 '과하다'고 볼 수 있다는 의미"라고 전했다.

<han1028@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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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번진 핵잠 나비효과

일본에 번진 핵잠 나비효과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한미 정상회담 팩트시트가 공개되자, 가장 큰 화제가 된 미국의 핵잠수함 건조 승인에 대해 “문구가 추상적이어서 모호하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이에 자극 받은 일본도 핵잠수함 도입을 준비하고 있다. 핵잠수함 건조를 현실화하지 않으면 “일본에 핵 보유 빌미를 제공하고, 고이즈미 신지로 방위상의 국내 정치용으로 활용하게 했다”는 비판이 제기될 가능성이 있다. 지난달 29일 진행된 한미 정상회담에서 타결된 한미 관세·안보 협상 팩트시트(공동 설명자료)가 지난 14일 공개됐다. 가장 큰 논란은 핵 추진 잠수함(이하 핵잠수함) 관련 합의 문구였다. 산 너머 산 구체성 없다 팩트시트를 통해 확인되는 핵잠수함 건조와 관련해선 “구체성이 없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팩트시트에 따르면, 미국은 ▲한국 민간·해군의 원자력 프로그램 ▲한미 원자력 협정에 부합하고 미국의 법적 요건을 준수하는 범위 내에서 한국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민간 우라늄 농축·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로 귀결될 절차 등을 지지한다. 이어 한국의 핵잠수함 건조를 승인하고, 한국과 조선 사업 요건 진전·연료 조달 방안 등을 포함해 긴밀히 협력한다. 미국은 한국의 핵잠수함 건조와 관련해 지지·승인·협력할 뿐이다. 이를 두고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같은 날 브리핑에서 “한미 정상의 논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에서 건조하는 게 전제였다”며 “우리 핵잠수함을 미국에서 건조하는 방안은 거론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반면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같은 날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며 “국내 건조 장소 합의는 팩트시트에 담기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기자들 앞에서 한국의 핵잠수함 건조 승인을 발표하면서 “필라델피아 조선소에서 건조될 것”이라며 “미국 조선업이 곧 대대적인 부활을 맞이할 것”이라고 말했다. 핵잠수함이 건조되려면, 산적한 현안을 모두 해결해야 한다. 팩트시트엔 건조 장소가 적시되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필라델피아 조선소를 명시해 발표했기 때문에, 미국이 순순히 양보할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같은 회담 결과를 두고 양국의 주장이 엇갈리는 자체가 논란이 되고 있다. 민간 우라늄 농축·사용 및 핵연료 재처리엔 ▲한미 원자력 협정 부합 ▲미국의 법적 요건 준수 ▲한국의 평화적 이용 등 단서가 붙는다. 기술 이전 과정에도 많은 난관이 기다리고 있다. 핵잠수함 보유국은 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중국·인도 등 6개국이다. <로이터통신>은 지난달 30일 “미국이 핵잠수함 기술을 공유한 사례는 1950년대 최우방국 영국과 협력한 사례밖에 없다”고 보도했다. <AP통신>은 “미국의 핵잠수함 기술은 미군이 보유한 가장 민감하고 철저히 보호돼온 기술”이라며 “가까운 동맹인 영국·호주와 체결한 핵잠수함 협정에서도 직접 기술 관련 내용은 포함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우리에겐 우라늄 농축·재처리 기술이 없어서 미국으로부터 핵연료를 공급받는 방안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하지만 연료 공급 장소·방식은 팩트시트에 명시되지 않았다. 연료 공급 방법을 확보하지 못하면, 핵잠수함을 만드는 의미가 없다. 핵잠 건조 추상적인데 “고정밀지도 내놔” 발 빠르게 비핵 3원칙 수정하려는 일본 미국의 법률 개정 절차도 거쳐야 한다. 미국 원자력법은 ‘미국이 다른 나라와 군사적 목적의 원자력 협력을 하려면, 원자력 협정을 체결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한미 원자력 협정을 개정한 후 미국 상원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국제 무기 거래 규정도 상원의 동의를 얻어 개정해야 한다. 원자력 협정 개정이 팩트시트에 포함되지 않은 것에 대해선 “미국 에너지부의 반대 때문”이란 지적도 있다. 미국 일각에서 “한국이 자체 핵무장을 할 수도 있다”는 우려를 한단 것이다. 일각에선 “핵잠수함 건조 여부는 확정되지 않았는데, 우리는 미국에 고정밀지도를 넘겨야 하는 상황이 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팩트시트엔 ‘망 사용료·온라인 플랫폼 규제를 포함한 디지털 서비스 관련 법·정책에 있어 미국 기업이 차별당하거나 불필요한 장벽에 직면하지 않도록 보장할 것을 약속한다’는 내용이 있다. 또 “위치·재보험·개인정보에 대한 것을 포함해 정보의 국경 간 이전을 원활하게 할 것을 약속한다”는 내용도 있다. 미국 빅테크 기업들은 온라인플랫폼의 ▲자사 우대 ▲끼워팔기 ▲멀티호밍 제한 등을 막는 내용이 담긴 우리의 온플법 제정을 반대했다. 팩트시트를 따르면, 미국 빅테크 기업에 대한 규제가 어려워진다. 아울러 우리는 구글·애플이 요청하는 1:5000 축척 고정밀지도 국외 반출 요청을 수용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정부는 애플이 요청한 지도 반출 여부를 다음 달에, 구글의 요청은 내년 2월 결정할 예정이다. 팩트시트에 게재된 합의 사항대로라면, 애플·구글의 요청을 수용해야 할 가능성이 크다. 국민의힘 박성훈 수석대변인은 지난 15일 논평을 통해 팩트시트 속 위험요소를 조목조목 지적했다. 박 대변인은 “정부는 ‘농·축산물 개방은 없다’고 말해 왔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대로 농·축산물 개방 문구가 포함됐다”고 주장했다. 이어 “망 사용료·온라인 플랫폼 규제·고정밀 지도 반출 등 대한민국의 디지털 주권과 직결된 사안까지 미국의 요구를 반영해 슬그머니 끼워 넣었다”고 비판했다. 이어 “반도체 관세에 대해서도 ‘다른 나라보다 불리하지 않게 한다’는 모호한 문구만 있다”며 “경쟁국 대만과 비교해 어떻게 적용할지 등 구체적인 내용은 팩트 시트에 담기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250억달러(약 36조7183억원) 규모의 미국산 군사 장비를 5년 동안 구매하고, 주한미군에 대해 330억달러(약 48조4682억원)를 포괄적으로 지원하면, 천문학적인 재정 부담을 떠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핵잠수함 건조 과정은 결코 쉬운 과정이 아니라서 장밋빛 전망만 내세울 때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고정밀지도 반출 가능성 실제로 일각에선 “핵잠수함 건조가 실현되기까지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해서 실질은 아직 불투명하다”며 “선언이 지나치게 앞섰다”는 지적이 나온다. 문제는 핵잠수함 나비효과가 일본으로 번졌단 점이다. 미국이 우리의 핵잠수함 건조를 승인하자, 일본 정치권도 크게 술렁였다. 고이즈미 신지로 방위상은 지난 12일,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미국·중국은 이미 핵잠수함을 갖고 있고, 지금은 핵잠수함을 보유하지 않은 한국·호주가 앞으로 보유하게 된다”며 “일본의 억지력·대응력을 강화하려면, 전고체·연료전지·원자력 등 다양한 동력원에 대해 폭넓게 논의하는 게 당연하다”고 말했다. 일본은 1967년 사토 에이사쿠 당시 총리가 선언했던 비핵 3원칙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비핵 3원칙은 “핵무기를 만들지도, 가지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는 선언이다.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는 일찍부터 핵무기 반입 금지 방침 완화를 주장했다. 기하라 미노루 관방장관도 같은 날 “현 시점에선 재검토 여부를 단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자유민주당(이하 자민당)은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다카이치 총리는 국회 연설에서 “내년 중 3대 안보 문서 개정을 위해 검토를 개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의 3대 안보 문서는 ▲국가안보 전략 ▲국가방위 전략 ▲방위력 정비 계획 등을 말한다. 여기엔 비핵 3원칙이 모두 포함돼있다. 일본은 이미 지난 2022년 “반격 능력을 보유하고, 장거리 미사일 전력을 향상한다”는 내용을 3대 안보 문서에 포함했다. 묘한 것은 미국의 핵잠수함 건조 승인이 일본 국내 정치구도까지 뒤흔들 가능성이 있단 것이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다카이치 총리가 선출될 당시 라이벌이었다. 지난달 4일 진행된 자민당 총재 선거 1차 투표에서 다카이치 총리는 183표(31.1%)를 얻었고, 고이즈미 방위상은 164표(27.8%)를 얻었다. 결선투표에선 다카이치 총리가 185표(54.3%)를, 고이즈미 방위상은 156표(45.7%)에 머물렀다. 하마터면 다카이치 총리는 자민당 총재·총리로 선출되지 못할 뻔했다. 고 아베 신조 전 총리의 후계자로 통하는 다카이치 총리에 반발한 공명당이 지난달 10일 자민당과의 연정에서 탈퇴했기 때문이다. 당시 공명당 사이토 데쓰오 대표는 고이즈미 방위상에 대해선 “정치자금 규제와 관련된 공명당의 처지를 이해하고 있었다”면서 호평했다. 고이즈미 방위상도 “지금까지 정책 실현에 대해 힘써 주신 것에 대해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고 화답했다. 미일 협력 중국 견제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달 20일 기적적으로 일본유신회와의 각외 협력 형태의 연립 정권 구성에 합의했다. 각외 협력은 연립 정권 구성엔 합의하지만, 내각엔 참여하지 않는 형태를 말한다. 일본유신회가 제시한 조건은 ▲오사카 부수도 지정 구상 수용 ▲국회의원 정원 10% 감축 ▲기업·단체 후원 폐지 ▲평화 헌법 개정 ▲방위력 강화 등이었다. 자민당과 다카이치 총리는 이를 모두 수용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달 21일 내각을 출범시키면서 고이즈미 방위상을 임명했다. 가장 큰 정치적 의미는 ‘당내 정적 포용’이었다. ‘방위 관련 경력·경험이 전혀 없는 고이즈미 방위상을 임명해 기회를 제공한다’는 의미가 있다. 정반대의 의미를 강조하는 해석도 있다. “방위 관련 경력·경험이 없는 고이즈미를 현안이 산적한 방위성 장관으로 임명해 자멸을 유도한다”는 취지의 해석이다. 고이즈미 방위상에게 주어진 현안은 ▲미일 방위 협력 재조정 ▲자주적 방위력 강화 ▲후텐마 미군 기지 이전 ▲방위 장비 수출 운용지침 폐지 등이다. 이중 미일 방위 협력 재조정은 ‘중국 견제’라는 미국·일본의 공통 이해관계로부터 시작됐다. 일본은 군사력을 강화해 더 광범위한 지역에서 역할을 맡으려고 한다. 미국은 일본의 적극적인 역할을 통해 더 효율적으로 중국을 견제할 수 있다. 문제는 돈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일본에 “방위비를 GDP(국내총생산)의 3.5%로 증액하라”고 요구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달 28일 진행된 미일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방위비 증액·방위력 강화 방침을 설명했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다음 날 피트 헤그세스 미국 국방부 장관을 만나 “방위비를 올리겠다”고 말했다. 이어 일본 정부는 오는 2028년 3월까지 방위비를 GDP의 2%까지 늘리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에서 방위 정책과 관련해 국내 정세와 가장 민감하게 맞물려 고이즈미 방위상을 곤란하게 할 사안이 있다. 바로 후텐마 미군 기지 이전이다. 일본 오키나와현 소재 후텐마 기지는 기나완시 시가지 한복판에서 시 면적의 1/4을 차지하고 있다. 후텐마 기지는 1945년 건설됐고, 일본에서 크고 작은 논란을 일으켰다. 오키나와현의 주민 중 상당수는 미군의 범죄와 소음 피해 등을 이유로 기지 이전을 요구하고 있다. ‘팩트시트’ 고이즈미 날개 다나 견제 압박 와중에 뜻밖의 호재 지난 2004년엔 후텐마 기지 소속 헬리콥터가 오키나와국제대학에 추락하는 등 사고도 여러 번 발생했다. 오키나와가 일본에 편입된 시점은 1879년이었다. 1945년부터 1972년까진 미국의 지배를 받았다. 따라서 오키나와에선 반미 감정이 강하고, 자민당 지지율이 낮은 편이다. 후텐마 기지와 관련해서도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섬 내 나고시 헤노코 이전을 추진했지만, 오키나와 현·주민의 반대가 강해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지난 2023년엔 다마키 데니 현지사가 방위성이 신청한 비행장 설계 변경 신청을 승인하지 않고 공사 중단을 요구했다. 후텐마 미군 기지 이전은 일본의 역사적 맥락과 맞물려 수십년 넘게 해결되지 못한 사안이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주도하는 중국 견제를 위한 새 안보 질서와 맞물려 고이즈미 방위상에게 정치적 압박을 가할 수도 있다. 아베 전 총리는 지난 2019년 고이즈미 방위상을 환경상으로 발탁했다. 이 임명에 대해선 “고이즈미 방위상의 정치적 무게를 키우면서도, 문제가 발생하면 그를 정치적으로 낙마시킬 수도 있다”는 평가가 나왔다. 고이즈미 방위상의 아버지인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는 퇴임 이후 강력한 원자력 발전소 폐지론자가 됐다. “아버지의 활동이 아들의 정치적 미래를 흐리게 할 수 있어 고이즈미 방위상을 견제하는 묘수”란 평가도 있었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기후 변화 문제는 펀하고, 쿨하고, 섹시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등 적당히 괴상한 발언을 하는 등 바보 행세를 하면서 견제를 피했다. 한동안 일본에선 고이즈미 방위상이 진짜로 바보인지, 바보인 척 연기를 하는지 장난 섞인 논쟁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이후 고이즈미 방위상은 이시바 시게루 전 총리·고노 다로 전 외상과 연합해 이시바 내각 탄생에 큰 공을 세웠다. 이어 농림수산상으로서 쌀값 폭등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했다. 지난 2023년엔 자민당 내 정치자금 문제가 불거지자, 조기 의회 해산 및 총선거 진행을 적극적으로 제안한 후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다. 당시 자민당은 중의원 과반에 미달하는 의석을 얻었다. 하지만 일각에선 “더 큰 패배를 당하기 전에 적절한 시점에서 중의원 해산을 건의했다”며 긍정적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방위상 취임 이후엔 어떻게 구 아베파·아소파의 견제를 피할 것인지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미국이 우리의 핵잠수함 건조를 승인한 사안은 고이즈미 방위상에게 견제 수위를 낮추면서 자민당·내각의 협조를 얻을 수 있는 뜻밖의 호재로 다가왔다. 고이즈미 방위상이 일본의 핵잠수함 도입을 주도한다면, 유력한 차기 총리 후보가 될 수도 있다. 견제 회피 일거양득 우리의 핵잠수함 도입 추진이 일본 정치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사안이 된 것이다. 만약 핵잠수함 도입 추진이 불확실해지면, 이재명정부는 이 때문에 더욱 큰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일본의 군비 증강에 빌미를 제공하고, 고이즈미 방위상의 정치적 미래를 위한 발판을 제공한 것”이란 비판이 따라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핵잠수함 나비효과는 이렇게 일본으로 번졌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