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위장 계열사’ 실태

중소기업인 척…일감 가로채고 나몰라

[일요시사 경제1팀] 한종해 기자 = 위장계열사를 이용해 중소기업의 일감을 가로채오던 대기업과 중견기업이 무더기로 적발됐다. 19개 기업이 설립해 우회 경영해 온 곳으로 드러난 중소기업은 26개에 이른다. 이들은 2년간 1000억원이 넘는 규모의 사업 물량을 따냈다.

중소기업청이 '중소기업자 간 경쟁제품' 시장에 참여 중인 3만924개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실태조사를 실시해 삼표, 유진기업, 케이씨씨홀딩스, 썅용양회공업 등 19개 기업이 설립한 26개 위장중소기업을 적발했다고 지난 28일 밝혔다. 26개 '무늬만' 중소기업이 지난 2년간 공공입찰에서 따낸 금액만 1014억원(2013년 474억원, 2014년 540억원)에 이른다.

중기청장이 중소기업자 간 경쟁제품으로 지정하면 정부 등 공공기관의 조달계약 입찰 시 대기업과 중견기업은 참여할 수 없다. 현재 중소기업자 간 경쟁제품으로 지정돼 있는 제품은 가방, 책상, 의자 등 207개 제품이다.

케이씨씨홀딩스
476억원 '꿀꺽'

업종별 위장 중소기업의 분포는 소프트웨어 개발 업종이 26개 중 9개(35%)로 가장 많았고, 레미콘(27%), 전기전자(15%), 아스콘(8%), 기계(8%) 등의 순이었다. 주요 위장 방식으로는 지분을 30% 이상 보유하면서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경우가 31%로 가장 많았으며, 중소기업의 납입자본금을 초과하는 금액을 지급보증하거나 모기업 주요 임원이 위장 중기의 대표나 임원을 겸임하는 사례도 많았다.

기업별로 보면 가장 많은 금액의 납품계약을 따낸 곳은 케이씨씨홀딩스다. 케이씨씨홀딩스는 IT전문기업 케이씨씨정보통신에서 인적분할된 지주회사로 중견기업이다. KCC그룹과는 별개 회사다. 케이씨씨정보통신은 매년 시스템통합사업과 하드웨어 납품 등을 통해 공공 조달시장에서 수백억원대 계약 실적을 올렸지만 2012년 소프트웨어산업진흥법 개정으로 20억원 미만의 소프트웨어 개발사업에 참여할 수 없게 됐다.


케이씨씨홀딩스는 시스원을 통해 475억5000만원의 납품계약을 따냈다. 시스원 지분 19.92%를 보유해최대주주에 올라 있는 이상훈 대표이사는 케이씨씨홀딩스의 지분 8.25%를 보유한 등기임원이기도 하다. 시스원 2대 주주(11.78%)인 이주용 전 케이씨씨정보통신 회장도 케이씨씨홀딩스의 지분 3.67%를 보유하고 있다. 이 대표이사는 이 전 회장의 아들이다.

시스원와 케이씨씨홀딩스와의 관계는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에서 더 자세하게 드러난다. 전자공시에 따르면 시스원은 케이씨씨정보통신을 포함해 관계사인 ㈜시스웨어, 케이씨씨시큐리티, 케이씨씨모터스, 시스원테크놀러지, 케이씨씨홀딩스 등을 통해 지난해 전체 매출액 603억원의 5.63%에 해당하는 34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2012년에는 전체 매출액 475억원 중 42억원(8.84%)이 관계사와의 거래를 통해 나왔다. 관계사들도 시스원을 통해 2012년과 2013년 각각 10억원, 13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케이씨씨홀딩스에 이어 위장 납품 금액 규모 2위에 오른 삼표는 가장 많은 위장 중소기업이 적발됐다. 삼표는 지난 2013년에도 4개의 위장 중소기업이 적발되면서 논란이 됐지만 1년 사이 오히려 위장 중소기업 수를 늘렸다. 적발된 회사는 알엠씨, 유니콘(대전공장, 공주공장), 남동레미콘(광주공장, 연천공장) 등 5개사다. 이 회사들은 모두 정도원 삼표그룹 회장 일가가 최대 출자자로 참여해 지배력을 갖고 있다.

먼저 골재, 레미콘 및 콘크리트제품의 제조와 판매를 주요 사업으로 영위하고 있는 알엠씨의 최대주주는 정 회장의 아들 정대현(70%) 삼표 전무다. 나머지 30%의 지분도 특수관계인이 보유하고 있다. 유니콘도 정 회장 일가가 지분 100%를 보유하고 있으며 남동레미콘은 정 전무가 주식 전량을 보유하고 있다. 특히 유니콘은 555억원의 금융권 차입금에 대해 삼표로부터 지급보증을 지원받고 있다. 또한 알엠씨는 삼표가 아니면 종속에 의문이 드는 상황이다. 알엠씨는 2012년 매출의 48%가량을 삼표 계열사를 통해 올렸으며 2011년에는 50%가 넘는 매출이 삼표 계열사에서 나왔다.

삼표는 이들 중소기업을 통해 252억원어치의 레미콘 물량을 공공시장에서 따냈다. 삼표는 지난 2013년에도 알엠씨 청원공장, 건양레미콘, 보명레미콘, 세종레미콘 등 4개의 위장 중소기업이 중소기업청에 의해 적발된 바 있다.

19개 기업 26개 중기 운영하다 적발
2년 1000억대 부당이득…과태료 0원

2013년 삼표와 함께 위장 중소기업을 통해 공공조달시장 낙찰을 받았다가 적발된 전과가 있는 유진기업도 관계사인 남부산업의 화성공장과 아산공장 두 곳을 통해 88억원5000만원어치의 아스콘 일감을 수주했다.


남부산업의 지분 구조를 보면 유경선 유진그룹 회장이 60%를 보유해 최대주주 자리에 올라 있으며 유 회장의 셋째 동생인 유창수 유진그룹 부회장과 넷째 동생인 유순태 EM미디어 대표가 각각 20%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등 유 회장 일가가 모든 지분을 갖고 있다.
 

이어 쌍용양회공업의 ㈜화창산업(59억9000만원), 고려노벨화약의 ㈜산양(49억6000만원) 등의 순으로 규모가 컸다.

쌍용양회공업은 지난 2013년 국회 산업통상자원 위원회 추미애 의원이 입수한 쌍용레미콘 평택공장의 임대차 계약서에 따르면 화창레미콘과 광양레미콘, 서군레미콘 등 6곳을 통해 공공 조달시장에 참여한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한화그룹과 함께 국내 산업용 화약시장을 복점하고 있는 고려노벨화약은 산양의 지분 49%를 보유하고 있다. 나머지 51%의 지분은 최칠관 고려노벨화약 회장과 특수관계인이 보유하고 있다. 최칠관 회장은 고려노벨화약 지분 35%를 보유한 최대주주다. 2대 주주(30%)는 최 회장의 아들 최경훈 사장. 그 뒤를 최 회장의 부인 차양자씨(20%), 동생 최팔관씨(15%)가 잇고 있다. 최씨는 산양의 대표이사다.

위장 중소기업 2곳이 적발된 팅크웨어와 다우데이타는 각각 3억6000만원, 55억7000만원의 입찰을 따냈다.

지분 갖거나
임원 하거나

팅크웨어는 비글과 파워보이스를 통해 공공 입찰시장에 참여했다. 팅크웨어는 비글의 지분 48.5%를, 파워보이스의 지분 12.5%를 보유하고 있다. 팅크웨어 등기임원인 강정규씨는 비글과 파워보이스 감사를 겸직하고 있으며 역시 등기임원인 김대현씨는 양사 사내이사에 올라 있다.

다우데이타는 미래테크놀로지와 다우인큐브가 위장 중소기업으로 조사됐다. 다우데이타는 미래테크놀로지 지분 48%와 다우인큐브 지분 49.32%를 보유 중이다.

나머지 12곳의 기업은 위장 중소기업 1곳을 통해 적게는 수백만원에서 많게는 8억9000만원까지 중소기업자간 경쟁제품 입찰에 참여했다.

오텍의 오텍캐리어냉장유한회사(8억9000만원), 한글과컴퓨터의 MDS테크놀러지(7억4000만원), 멜파스의 엔엘티테크(4억2000만원), 건설화학공업의 강남아이텍(3억5000만원), 네패스의 네패스엘이디(3억1000만원), 서울가든의 ㈜비지에이치코리아(1억6000만원), 대동공업의 한국체인공업(6000만원), 이케이맨파워의 클루엠(1000만원) 등이다. 유텍솔루션의 인지모바일솔루션과 고아정공의 코아룩스, 대유에이텍의 대유네트웍스, 에넥스의 ㈜엔텍의 납품 규모는 1000만원 미만이다.

이들 회사는 등기임원이 위장 중소기업 임원을 겸하거나 모기업이 최대지분을 보유하는 등의 방법으로 위장 중소기업을 지배해 왔다.

일부 기업들은 "억울하다"는 반응이다. 특히 쌍용양회는 해명자료까지 발표하며 크게 반발하고 있다. 쌍용양회는 중소기업청의 '쌍용양회가 위장 중소기업인 화창산업을 내세워 60억원에 이르는 정부 공공입찰 프로젝트를 가로챘다'는 주장에 대해 "화창산업은 중소기업청에서 언급한 여타 회사들과 달리 쌍용양회의 지분참여, 임원겸임 등이 전혀 없는 별개의 독립회사"라며 "쌍용양회는 단지 화창에 공장부지를 임대해 주었을 뿐이다"고 반박했다.


보도자료 발표
"억울하다" 해명

또한 "시멘트 제조회사인 쌍용양회는 레미콘 회사인 화창산업과 업종이 중복되지 않는 경우여서 화창은 공공조달 시장을 통해 적법하게 납품했다"며 "중소기업청에서 지적한 60억원을 모두 법 위반이라고 볼 수 없다"고 설명했다.

이어 "사실관계에 어긋나는 잘못된 보도자료 배포로 인해 회사 이미지 훼손과 신인도 하락 등 회복불능의 피해를 입었다"며 "이와 관련해 명예훼손 등에 따른 민사 및 행정소송 등 법적 구제조치를 검토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다른 기업과 달리 쌍용양회공업의 전자공시 보고서에서는 화창산업과의 연관 관계를 찾아볼 수 없다. '계열회사 등의 현황' '주주에 관한 사항' '특수관계자와의 거래 내역' 등에서도 화창산업이라는 기업은 등장하지 않는다. 화창산업 또한 비상장회사이기 때문에 상세 내역을 확인하기 힘든 상황이다.

한글과컴퓨터 측도 공식입장을 밝히고 해명에 나섰다. MDS테크놀로지를 통해 매출을 올려왔다는 의혹을 산 한글과컴퓨터는 "2012년 1월 중견기업이 된 이후 20억원 미만의 공공사업에는 전혀 참여하고 있지 않다"며 "중소기업으로 위장해 중소기업자간 경쟁제품 공공조달 입찰에 참여한 사실이 없다"고 전했다.

업체들 "법적대응" 강력 반발
솜방망이 처벌로 악순환 반복


또 "한컴이 지난해 5월23일 인수한 MDS테크놀로지가 기존에 진행해오던 공공조달 사업을 지속적으로 해오던 과정에서 법률개정에 따른 중견기업인 한컴과의 관계로 인해 '중소기업자간 경쟁시장 공공입찰 제한 대상'에 포함된 것"이라며 "MDS테크놀로지가 이를 2개월 가량 인지하지 못한 채 진행한 업무로 인해 생긴 오해"라고 해명했다.

팅크웨어 측도 "비글과 파워보이스의 연구개발 부문에 투자한 것이지 두 곳을 통해 공공입찰을 하려고 투자한 것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중소기업청은 위장 중소기업을 공공 조달시장에서 즉각 퇴출시키고, 중소기업 확인서를 허위 또는 거짓으로 발급받은 기업은 검찰에 고발할 계획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실효성은 없을 것이라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중소기업청은 2013년에도 36개 위장 중소기업을 적발하는 등 2011년 중소기업기본법이 신설된 이후 위장 중소기업에 대한 논란은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항상 적발에 그칠 뿐 단 한 차례도 위장 중소기업에 대한 과태료가 부과되거나 행정상 불이익을 주는 등의 실질적인 제재조치는 이뤄진 적이 없다.

추미애 의원이 지난 2013년 공공 조달시장에서 위장 중소기업으로 확인된 기업과 관련 있는 대기업도 공공시장의 입찰 참여를 제한하는 '중소기업제품 구매촉진 및 판로지원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지만 대·중견기업까지 공공조달 시장 입찰 참여를 제한하는 것은 지나친 규제라며 기획재정부가 반대하고 있어 이 법안은 1년이 넘도록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회 법안소위에 계류 중이다.

얼마를 챙기던
벌금 3000만원

업계 관계자는 "위장 중소기업 발생을 사전에 방지하거나 수위 높은 제재조치가 이뤄지지 않을 경우에는 위장 중소기업 사례가 지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현행법 상 위장 중소기업을 설립해 공공조달 시장에 불법 참여한 혐의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475억5000만원의 부당이득을 취한 케이씨씨홀딩스의 계열사 시스원이 검찰에 고발 조치 되어 벌금 최대액이 적용된다고 하더라도 이득액의 0.06%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han1028@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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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구성원의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된 수장이 반년 만에 끌려 내려왔다. 막말에 가까운 강한 발언과 제멋대로인 행보가 탄핵을 불렀다. 강성 수장이 물러나면서 변화를 기대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대화의 문이 열릴 것인가, 더 높은 벽이 쌓일 것인가. 임현택 대한의사협회(이하 의협) 전 회장이 3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탄핵당했다. 지난 5월 취임 이후 6개월 만으로 의협 역사상 2번째, 최단기간 내 불명예 퇴진한 회장이 됐다. 첫 번째는 2014년 4월 임기 1년여를 앞두고 탄핵당한 노환규 전 회장이다. 두 번째 최단기간 의협은 지난 10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의협회관서 임시대의원총회를 열고 임 전 회장의 불신임안을 처리했다. 참석 의원 224명 가운데 170명(75.9%)이 찬성했다. 반대는 50명, 기권 4명이다. 전체 대의원 249명 가운데 224명(91.1%)이 표결에 참여했다. 의협 정관에 따르면, 회장 불신임안은 제적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출석하고, 출석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하면 가결된다. 지난 3월 임 전 회장은 선거서 유효 투표수 3만3084표 중 2만1646표를 받아 당선됐다. 65.43%의 압도적인 지지다. 의협 회장 선거는 정부의 의대 정원 증원 발표로 의정 갈등 수위가 높아지고 있을 무렵에 치러졌다. 전공의가 병원을 떠났고 정부가 ‘2000명’을 강조하던 시기였다. 의협 회원들은 강성 중의 강성으로 분류되는 임 전 회장에게 힘을 실었다. 임 전 회장의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갔던 것일까? 임 전 회장의 언행은 사사건건 도마 위에 올랐다. SNS에 올린 글, 공식 석상서 했던 발언 등이 막말 논란으로 번졌고, 단식투쟁 등의 행보는 ‘쇼’라는 비판을 받았다. 무엇보다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이하 대전협) 비대위원장과 갈등을 빚으면서 의료계 내부 분열을 조장한다는 지적이 뼈아팠다. 임 전 회장이 8개월 동안 보여준 모습은 고스란히 탄핵 사유가 됐다. 의협 회원 사이에서는 임 전 회장이 SNS로 막말과 실언을 해 의사단체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또 ‘임 회장이 전공의 지원금을 빼돌렸다’는 허위 비방 글을 올린 시도의사회 임원에게 고소 취하 대가로 1억원을 요구한 사실이 녹취록을 통해 알려져 논란이 불거졌다. 특정 인물에 대한 수위 높은 비판은 여론의 역풍을 불렀다. 장상윤 대통령실 사회수석을 겨냥해 “정신분열증 환자 같은 개소리”라고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가 환자를 비하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임현택, 6개월 만에 탄핵당해 막말 논란·의대 증원 못 막아 또 2021년 한 의사가 80대 환자에게 ‘맥페란’ 주사제를 투여한 뒤 부작용이 나타나 기소된 재판에 대해서도 도 넘는 발언을 쏟아냈다. 이른바 ‘맥페란 재판’ 항소심서 판사가 1심의 금고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해당 의사의 항소를 기각하자 “이 여자 제정신입니까?”라는 글을 SNS에 올린 것이다. 임 전 회장의 발언에 법원은 이례적으로 “재판장의 인격에 대한 심각한 모욕일 뿐 아니라 국민의 신뢰를 크게 훼손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행동”이라고 공개적으로 유감을 표명했다. 의대 정원 증원 집행정지와 관련해 기각·각하 결정을 내린 재판장이 ‘회유’받았을 것이라는 주장으로도 입길에 올랐다. 서울고등법원 재판부가 결정을 내린 다음 날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재판장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지난 정권에서는 고법 판사들이 차후 승진으로 법원장으로 갈 수 있는 그런 길이 있었는데 제도가 바뀐 다음에는 그런 통로가 막혀서 이분이 아마 어느 정도 대법관에 대한 회유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있다” 말했다. 서울고법은 법원 명의로 입장문을 내고 “해당 단체장의 아무런 객관적 근거가 없는 추측성 발언은 재판장의 명예와 인격에 대한 심대한 모욕”이라면서 “사법부 독립에 관한 국민의 신뢰를 현저히 침해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언사다.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고 밝혔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정부의 2025학년도 의대 증원을 막지 못한 점, 간호법 제정을 저지하지 못한 점이 탄핵 사유로 꼽혔다. 임 전 회장은 총회를 앞두고 의사 회원들에게 사과하고 페이스북 계정을 삭제하는 등 재신임을 호소했지만 반전은 없었다. 회장을 탄핵한 의협은 비대위원회 체제로 전환하고 지난 13일 새로운 회장 선거 전까지 단체를 이끌 비대위원장을 뽑았다. 그 결과 박형욱 대한의학회 부회장이 1차 투표서 총 유효 투표수 233표 중 123표(52.8%)를 얻어 과반으로 당선이 확정됐다. 임기는 내년 1월 차기 회장이 선출될 때까지다. 뒤늦게 호소했지만…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정부는 의료 파탄이란 시한폭탄을 장착해놨다”며 “정말 대화를 원한다면 정부는 먼저 시한폭탄을 멈춰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비대위원들의 합의에 기초해 입장과 행동을 결정할 것”이라며 “비대위 운영서 소외돼왔던 전공의들과 의대생들의 견해가 충분히 반영될 수 있게 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임 전 회장이 물러나고 새로운 비대위원장이 등장하면서 의협의 투쟁 방향에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커졌다. 일각에서는 의협의 이번 행보를 의정 갈등의 중요한 변곡점으로 보고 있다. 강성 회장을 필두로 정부와 강하게 대립했던 이전 모습서 벗어나 대화에 참여할 것이라는 의견과 이전보다 더 수위 높은 대정부 투쟁이 예상된다는 의견으로 갈리는 중이다. 후자의 배경에는 대전협이 있다. 앞서 박단 비대위원장 등 전공의 70여명은 전날 의협 대의원들에게 “비대위원장으로 박형욱 교수를 추천한다”는 메시지를 보내 공개 지지 의사를 드러냈다. 대의원회서도 박단 비대위원장의 공개 지지에 대해 경고하는 등 잡음이 일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대전협의 지지를 등에 업은 박형욱 비대위원장이 당선되면서 전공의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의협과 대전협의 공조가 본격화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문제는 양측의 교류가 정부와의 대화로까지 이어질 수 있느냐는 점이다.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당선 소감부터 정부의 태도 변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또 윤석열 대통령의 변화도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의정 갈등서 줄곧 선봉에 선 전공의들은 ‘의대 정원 증원 백지화’라는 요구사항서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인 적이 없다. 전공의의 행보는 의대생, 의대 교수 등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영향력 커진 전공의 단체 의료계가 전공의 중심으로 굴러가고 있는 셈이다. 실제 대전협은 지난 11일 출범했던 여야의정협의체(이하 협의체)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협의체는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불참하고 의료계에서는 학술 단체인 대한의학회와 의대 학장 모임인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KAMC)만 참석하는 등 ‘반쪽 출범’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협의체의 운영 기한은 올해 말까지로, 다음 달 22~23일 전에 의미 있는 결과를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태도다. 하지만 박단 비대위원장은 협의체에 대해 ‘무의미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협의체가 첫발을 뗀 11일 SNS에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는 전공의와 의대생, 당사자 없이 대화나 하겠다는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다”며 “한 대표는 2025년 의대 모집 정지와 업무개시명령 폐지에 대한 입장부터 명확히 밝히시길 바란다”고 일갈했다. 이어 “눈치만 보며 뭐라도 하는 척만 하겠다면 한동훈의 ‘여야의정 협의체’ 역시 임현택 전 의협 회장의 ‘올바른 의료를 위한 특별위원회(올특위)’와 결국 같은 결말일 것”이라고 우려했다. 올특위는 의료계의 입장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의협 주도로 구성한 범의료계 특별위원회다. 전공의와 의대생이 해당 위원회에 불참하면서 파행 운영되다 지난 7월 해체됐다. 정부는 협의체서 의료계가 제안한 내용에 대해 “진정성 있게 검토하겠다”는 견해를 밝혔다. 지난 11일 협의체서 의료계는 한국의학교육평가원 자율성 보장, 추가 합격 제한 등을 통한 2025학년도 의대 선발 인원 축소 등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윤순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실장은 지난 14일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이하 중대본) 회의를 주재하면서 “마주 앉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만큼 활발한 대화와 소통을 통해 누적된 갈등을 해소하고 신뢰를 회복해 국민이 원하는 결과를 끌어낼 수 있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의협과 전공의 등 다른 의료계 단체의 참여를 호소했다. 박단 공개 지지 새 비대위원장 강경 투쟁이냐 VS 노선 변화냐 의료계 내부 상황은 크게 바뀌었지만 향후 상황은 여전히 ‘시계 제로(0)’ 상태다. 임 전 회장과 박단 비대위원장 간 갈등의 불씨도 여전히 살아있다.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공개적으로 요청하는 등 ‘(임 전 회장과)같이 갈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실제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요청하면서 “이해와 소통이 가능한 새로운 회장을 필두로 의협과 대전협 두 단체가 향후 상호 연대를 구축할 수 있길 기대한다”는 입장문까지 냈다. 임 전 회장의 탄핵안 가결 직후 박 비대위원장이 “결국 모든 길은 바른 길로”라는 내용의 SNS 글을 올리기도 했다. 문제는 임 전 회장이 박단 비대위원장을 상대로 반격을 진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임 전 회장은 탄핵 사흘 만에 닫았던 페이스북 계정을 다시 열고 “박단과 그 뒤에서 박단을 배후 조종해 왔던 자들이 무슨 일을 해왔는지 전 의사 회원들에게 아주 상세히 밝히겠다”며 박단 비대위원장을 저격하는 글을 올렸다. 그러면서 “의협 대의원회 비대위원장과 의협 회장 선거가 더 이상 왜 필요한가”라면서 “박단이 의협 회장 겸 비대위원장을 맡아 모든 권한과 책임하에 의료 농단을 해결하면 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지지해주셨던 모든 분에게 우선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며 “이유가 어떻든 회장 취임 전부터 탄핵하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자들에게 빌미를 주어 넘어간 것 자체가 제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또 의협의 근본적인 개혁의 첫걸음으로 의협 대의원회 폐지 등을 내용으로 하는 민법상의 사원총회를 개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원총회는 민법에 규정된 사단법인의 최고의사결정 기관이다. 의협 최고의결기구로 알려진 대의원총회보다 상위에 있고 정관의 규정으로 폐지할 수 없다. 사원총회는 이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나 총 사원 5분의 1 이상이 회의의 목적 사항을 제시해 청구하는 경우 소집될 수 있다. 반격 시작 내부 갈등? 올해 2월 시작된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이 10개월째로 접어들었다. 온갖 말이 오갔지만 되짚어보면 조금도 좁혀지지 않은 평행선 상황이 계속되는 모양새다. 정부와 의료계의 대치 상황이 길어질수록 ‘의료 붕괴’는 가시화되고 있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