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가는' 욕설 방송 천태만상

  • 최현경 mw2871@naver.com
  • 등록 2013.12.02 14: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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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놓고 욕하는 대담무쌍 프로그램들

[일요시사=사회팀‘삐∼’ 부적절한 단어가 나올 때 ‘삐’처리하던 방송이 이제는 대놓고 욕을 한다. 가족들과 함께하는 저녁시간에 방영되는 드라마부터 아이돌이 출연하는 예능 프로그램까지 늘어가는 ‘욕설 방송’에 시청자들은 불쾌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지난달 20일 MBC <우리 결혼했어요>(이하 <우결>)가 욕설 논란에 휩싸였다. 앞선 19일 여자 가수 그룹 에이핑크의 손나은과 가상 부부로 출연하는 남자 가수 그룹 샤이니 태민은 가을데이트를 하는 모습이 방송됐다.

태민은 평소 속마음을 표현하지 않는 손나은의 진심을 알아보기 위해 몰래 카메라를 준비했고, 석고로 손 모양을 뜨는 과정에서 일부러 “불편하다”며 짜증을 냈다. 태민의 차가운 행동에 서운함을 느낀 손나은은 개인 인터뷰에서 이내 속상했던 마음을 고백하며 눈물을 흘렸다.

<우결> 제작진 출연자에 “개xx구만”
편집 없이 그대로 전파…실수? 의도?

방송 이후 <우결> 홈페이지 게시판에는 이들의 미방분 영상이 올라왔다. 문제는 손나은의 속마음 인터뷰 도중 울음을 터트리는 장면에서 들리는 “개xx구만?”이라는 욕설이 화근이었다. 욕설을 들은 누리꾼들이 온라인에 문제의 욕설 부분만 편집된 영상을 올리면서 실시간으로 해당 방송이 검색되자, 제작진은 홈페이지 게시판에 해명글을 게재했다.

제작진은 “(욕설을 한) 목소리 주인공에게 확인한 결과 악의를 가지고 태민씨를 욕한 게 아니었다”며 “손나은씨의 속마음 인터뷰를 하는 동안 나은씨가 너무 갑작스럽게 울음을 터트려 평소 친하게 지내던 여자 스태프가 나은씨를 위로하다 무의식 중에 그런 말을 했다”고 입장을 밝혔다.


이에 시청자들은 “위로로 욕을 하다니” “스태프 하차하고 프로그램 내려라” 등의 반응을 보이며 욕설 자체에 대한 사과없이 ‘편집의 문제’로만 치부해 변명하기 급급한 제작진들의 공식사과문과 징계를 요구하고 있다.




<우리 결혼했어요>는 가상으로 결혼한 남녀 연예인들의 부부생활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으로 2008년 명절 특집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시작해 단독 편성됐다. 당시 20~30대로부터 큰 인기를 얻으며 많은 스타커플들을 양성한 <우결>은 세계판이 제작되는가 하면 중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예능 프로그램으로 성장했다.

위로차원 한 말이
“개xx” 라고?

On style <도전! 슈퍼모델 코리아4>도 욕설과 비방이 편집되지 않은 채 고스란히 방송돼 비난을 받았다.

<도전! 슈퍼모델 코리아4>는 3차례의 심사에 거쳐 최종 도전자를 선발해 패션잡지의 표지모델, 화장품 모델의 기회를 주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다. 지난 10월 출연자 정하은은 같은 방을 쓰게 된 황현주에게 “너 착한 척 하는 것 같아. 그런 거 재수없어. 너 존x 싸가지 없다. 뒤지기 싫으면 닥치고 있어. 존x 짜증나니까. 너 내가 싫어하는 행동을 네가 한다고 말했지? 내 말 흘려서 듣냐”며 욕을 했다.

정하은의 욕설 방송을 접한 시청자들은 평소 사이가 좋지 않은 두 사람을 붙여 욕설이 오갔음에도 이를 여과 없이 방송을 내보내는 제작진의 불순한 의도를 의심했다. 이에 제작진은“서먹한 두 사람이 한 공간에서 솔직한 마음을 터놓기 바랐다”고 해명했다.

며칠 뒤 푸켓을 방문해 다른 도전자들과 야자타임 시간을 가진 정하은은 “나를 싫어하는 이유가 궁금하다”는 황현주의 질문에 “평소 나를 의식하고 따라한다고 생각해 불편했다”고 답했다.


이후 Top5 선발에서 탈락한 정하은은 황현주를 찾아가 “내가 너를 오해했던 부분도 있는 것 같아서 말을 해야지 했는데 이제는 말할 기회도 없다”며 사과하는 모습을 보였다. 욕설논란으로 정하은과 함께 네티즌들의 관심을 모은 황현주는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를 통해 “정하은을 따로 만나 사과를 받았다”고 고백했다.

시청률 노린
꼼수 아니냐

반면 SBS <런닝맨>은 실수로 출연진의 욕설을 편집하지 않은 채 방송해 곤혹을 겪었다. 지난 7월 14일 중국 상해에서 개최한 SBS <런닝맨> ‘아시안 드림컵 출전권 레이스’ 편에 축구 선수 박지성과 여자 가수 그룹 에프엑스의 설리가 게스트로 출연했다.

런닝맨 멤버인 유재석, 김종국, 하하, 이광수는 드림컵 출전선수로, 나머지 멤버 지석진, 개리, 송지효, 설리는 실내에서 경기에 임한 멤버들을 응원했다. 이 때, 제작진이 출연자 김종국과 지동원 선수가 선발로 앞섰다는 소식을 전하는 장면에서 설리는 ‘차오xx’라고 말했다. ‘차오xx’는 중국 현지에서 상대방의 부모님을 조롱하는 의미의 수위높은 욕설로 알려져 있다.

욕설 장면이 전파를 타면서 논란이 되자, 설리의 소속사인 SM엔터테이먼트는 “촬영 현장에서 스태프와 출연진이 중국어를 주제로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의도없이 따라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러자 네티즌들은 “모르면 아예 말을 하지 말았어야지” “다른 나라 연예인이 씨x이라고 욕하고 잘 몰랐다고 하면 괜찮겠냐”며 비난하는가 하면 일부 네티즌들은 욕설 부분을 편집하지 않은 채 내보낸 제작진의 잘못을 지적하기도 했다.

이에 <런닝맨> 조효진PD는 “방송에 포함된 설리의 중국어 욕설은 미리 알지 못했다”며 “중국어라고 하더라도 확인을 안한 건 우리 잘못이다. 편집했어야 하는 부분인데 실수였다. 앞으로 절대 이런 일이 없도록 노력하겠다”고 사과의 뜻을 밝히고 해당 방송의 ‘다시 보기’ 서비스를 즉각 중단시켰다. <런닝맨> 측은 이후 다시 보기 서비스에서 문제의 장면을 삭제했다.

앞선 3월에는 설리와 같은 소속사인 남자 가수 그룹 샤이니 온유가 ‘손가락 욕’으로 논란이 됐다.
지난 3월 18일 MBC <윤하의 별이 빛나는 밤에>에는 11개월 만에 정규 앨범 3집을 발표하고 타이틀 곡 ‘드림걸’로 활동 중이던 샤이니가 출연했다. 당시 ‘보이는 라디오’가 진행되고 있어 출연진들의 모습이 인터넷으로 중계되고 있었다.

방송 이후 한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에는 ‘샤이니 온유 손가락 욕’이라는 제목의 글과 얼굴이 드러나지 않은 누군가 손가락 욕을 하고 있는 장면이 캡처된 사진들이 게재됐다.

<도전…> 출연자 대화 여과 없이 노출
가족과 보기 민망…불편한 시청자들

당사자의 얼굴이 방송에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손가락 욕을 한 당사자의 소매부분이 노출되면서 누리꾼들은 같은 의상을 입은 온유를 의심했다.

문제의 장면은 DJ인 가수 윤하가 샤이니를 소개하기 전 온유가 멤버들과 장난치는 과정에서 한 행동으로 밝혀졌다. 다음날 온유의 소속사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이유야 어찌됐건 잘못된 행동이었다. 온유가 손가락 욕을 한 것에 대해 반성 중이다. 주의하겠다”며 사과의 입장을 밝혔다.

고의성의 유무를 알 수 없는 예능 프로그램과 달리 일부 드라마는 극중 인물들의 ‘감칠 맛 나는 욕 연기’ 때문에 논란이 되고 있다.

평균 8%가 넘는 높은 시청률을 자랑하며 인기를 누리고 있는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94> 또한 지나친 욕설로 시청자들의 비난을 받아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이하 방통심의위)으로부터 제재받았다.


<응답하라 1994>는 복고 감성을 자극해 지난해 인기몰이를 한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97>에 이어 스무살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그린 드라마다.

욕설 논란의 문제는 극중 인물 중 경상남도 삼천포 출신의 삼천포(김성균 분)가 룸메이트인 전라남도 순천 출신의 해태(손호준 분)와 사투리를 쏟아내며 싸우는 장면에서 “눈깔 확 뽑아다가 깍두기랑 오독오독 씹어볼랑까”라고 하는 장면이었다. 방송 전부터 특별판으로 제작된 이들의 욕배틀은 23만 회의 조회수를 기록하며 호기심을 자극했지만 일부 시청자들로부터 쓴소리를 들었다. 

‘욕설’이 있어야
드라마가 재밌다

주인공 성나정(고아라 분)이 하숙집 오빠 쓰레기(정우 분)가 여자친구의 가슴을 만졌다는 말에 “변태xx, 저질, 색마”라는 등의 욕설을 퍼붓는 장면 또한 문제가 됐다.

방송 이후 <응답하라 1994>의 일부 시청자들로부터 “해당 욕설은 방송에서 부적절하다”는 민원을 받은 방통심의위는 지난달 20일 드라마의 사투리 욕설 등에 대한 심의를 진행했고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 제27조, 제51조인 ‘품위유지’와 ‘방송언어’ 위반으로 권고조치를 내렸다. 이에 일부 시청자들은 “욕을 해야 재밌는데”라며 아쉬운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최근 개연성없는 스토리 전개, 연장 방송 등 ‘막장 드라마’로 뭇매를 맞고 있는 MBC 드라마 <오로라 공주>도 욕설 자막 논란으로 거센 비난을 받기도 했다.

지난 9월 <오로라 공주>에는 극중에서 제작된 드라마 ‘알타이르’의 마지막 촬영 후 뒤풀이하는 장면이 나왔다. 이날 오로라(전소민 분)에게 마지막 하이라이트 장면을 빼앗기고 기분이 상한 박지영(정주영 분)이 노래방에서 드라마 제작진인 윤해기(김세민 분)가 막춤을 추자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장면에서 속마음이 말풍선으로 표현됐다. 말풍선에는 ‘하이구, ㅈㄹ이 풍년이에요’라는 자막이 등장했다. 해당 장면이 본 시청자들은 방송이후 게시판에 “공중파 일일드라마가 맞냐” “황당하다”며 가족들과 저녁식사를 하는 시간대에 방영되는 드라마에서 욕설 자막이 삽입된 것에 대한 불쾌함을 드러냈다.


<오로라 공주>는 앞선 6월에도 오로라가 남자 주인공 오창석을 향해 비아냥거리는 속마음이 말풍선으로 표현됐다. 오창석이 다른 여자와 노래를 부르는 장면에서 “ㅈㄹ을 떨어요” “놀고들 ㅈㅃㅈㄴ”라는 오로라의 생각이 자막으로 등장해 지난 8월 방통심의위의 제재를 받고 “저속한 표현 등에 법규를 지키겠다”며 사과문을 내보내기도 했다.

극중 학생 입서
‘새x∼’‘지x∼’

스타배우들의 출연과 흥미로운 소재로 올해 인기를 끈 SBS 드라마 <너의 목소리가 들려>는 속물 국선전담변호사 장혜성(이보영 분)과 사람의 마음을 읽는 초능력 소년 박수하(이종석 분), 바른 생활 사나이 차관우(윤상현 분)가 만나며 벌어지는 사건들을 흥미진진하게 그린 드라마다.

지난 6월 12일에 방영된 <너의 목소리가 들려>는 국선변호사 장혜성이 살인미수로 기소된 고등학생 고성빈(김가은 분)의 변호를 맡아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을 보여줬다. 

고등학생 신분의 피의자 고성빈이 피해 여학생과 대면하는 장면에서 “저 xx 끝까지, 야 이xx야, 뭐라고 xx리는지 면상을 보고 말겠다” 등의 욕설을 내뱉었다. 강도가 심한 욕설은 무음으로 방영됐으나 일부 욕이 그대로 전파를 탔다.

지난 7월 18일에 방송에는 주인공 장혜성이 회의 중에 자신을 위협한 살인마 민준국(정웅인 분)이 다시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고 “민준국 소가 새끼를 낳으면 송아지고 개가 새끼를 낳으면 너다. 민준국 이 나쁜 xx야. 나 이제 너 하나도 안 무서워. 너 따위한테 겁 안 먹어. 꺼져버려”라고 욕설을 퍼부어 드라마 관련 검색어로 ‘욕’이 오르기도 했다.


최현경 기자 <mw2871@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 

‘배째라 방송’ 1등은?

경고 받고도 ‘나몰라라’

지난 7월 최민희 민주당 의원은 종편사업자가 방송통신위원회에 제출한 제재조치 이행결과 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출연자의 막말·저질 발언이나 선정적인 발언에 대한 제재가 이뤄졌음에도 해당 종편들이 출연자에 대해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출연자로 인해 가장 많은 제재조치를 받은 종편은 ‘채널A’로 모두 10건의 ‘제재’를 받았으나 6건이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채널A는 지난해 11월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이 <박종진의 쾌도난마>에 출연해 “더티(dirty)한 작당”  “애송이 같은 아마추어” 등의 표현으로 ‘주의’조치를 받았으나 아무런 조치가 없었다. 이에 최민희 측은 “오히려 윤 전 대변인은 2주 뒤인 채널A <이언경의 세상만사>에 출연해 ‘후보단일화는 막장드라마’ ‘후보단일화 TV토론은 사기꾼 같은 이야기’라고 말해 선거방송심의에서 ‘경고’ 제재를 받았다”고 비판했다.

지난 6월에는 시사평론가 이봉규가 <박종진의 쾌도난마>에 출연해 특정 후보에 대한 지지와 비난을 표해 ‘주의’조치를 받았다. 이에 채널A는 이봉규에게 ‘구두경고와 1개월 출연정지’ 조치를 내렸으나 지난 2월 이후 3차례에 걸쳐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한 이봉규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 안철수 후보에 대한 막말 발언으로 또다시 ‘경고’조치 받았다. 채널A는 출범 당시 제출한 사업계획서에 ‘방송언어 순화 계획’의 일환으로 ‘막말 방송 3진 아웃제 실시’를 내세웠으나 제대로 시행되고 있지 않았다. ‘3진 아웃제’는 방통위나 자체 심의규정 등을 연간 3회 이상 위반한 출연자를 해당 프로그램에서 퇴출시키는 제재방법이다.

 

저속한 용어 <SNL 코리아> ‘경고’
욕먹고 억울한 김구라

방송인 김구라는 욕 때문에 억울하다고 말해 눈길을 끌었다. 김구라는 지난달 13일 MBC <라디오스타>에서 후배 개그맨인 맹승지가 동료 개그맨인 정명옥을 언급하자 “내가 <SNL 코리아>에서 정명옥에게 욕을 먹는 연기를 했다”며 “억울하다”고 언급했다.

지난 8월 <SNL 코리아>는 ‘김구라의 말싸움 대행서비스, 일오xx에 x팔x팔’코너에서 “이 펠리컨같이 생긴 xx야, 니가 왜 xx이야, 이 xx야. 니 하관이 풍년이다. 이 개xx야. 이 풍년 xx야”, “이 또라이 같은 x아. 이런 거지같은 x을 봤나” “이런 싸가지 없는 개xx, x놈의 개 호로xx를 봤나, x팔 x끼, 턱주가리를 주먹으로 날려버리기 전에 똑바로 해. 개x끼, 이 마징가 x끼야”라고 언급하는 장면 등을 삐음으로 처리해 방송했다.

방통심의위는 회의를 열어 지나친 욕설과 저속한 용어 사용 등의 이유로 <SNL 코리아>를 ‘경고’ 조치했고, 이 사실이 일부 매체에 ‘SNL 김구라편 지나친 욕설’ ‘욕설, 비속어 SNL 김구라편 경고’ 등의 제목으로 보도됐다. 이에 김구라는 “사람들이 나 때문에 프로그램이 징계를 받은 걸로 안다”며 “사실 정명옥이 내게 한 욕 연기 때문에 징계를 먹은 것”이라고 해명했다.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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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장동혁 옹립의 정치학

‘벼랑 끝’ 장동혁 옹립의 정치학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구 친윤(친 윤석열)계 핵심으로 분류됐던 윤한홍 의원이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를 강하게 비판했다. 하지만 장 대표는 흔들리면서도 흔들리지 않는다. 이들의 공개 갈등엔 ‘옹립의 정치학’이 숨어 있다. 특정 세력이 정변을 일으키거나 지도자 교체를 시도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지도자 옹립이다. 그 과정에서 정치적 정당성·생존 본능이 적절하게 조화해야 한다. 그래서 복잡한 조건이 가미된다. 지도자 옹립을 위한 조건으로는 대체로 ▲적절한 상징성 ▲새 기득권이 될 주도 세력과의 조화 ▲지도자의 약한 권력 의지 등을 들 수 있다. 아무나 못 갖는 지도자 조건 이 중 가장 어려운 숙제는 ‘지도자의 약한 권력 의지’라고 할 수 있다. 새 지도자가 자신의 정치적 의지를 강하게 밀어붙이면, 새 기득권 세력과의 충돌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새 지도자는 자신의 생존을 도모해야 한다. 생존 본능은 강한 권력 의지로 연결된다. 자신만의 새로운 비전을 실천하려는 정치적 의지가 강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자신을 옹립한 주도 세력과 마찰한 사례는 역사적으로 빈번하다. 왕은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고, 귀족은 이를 막으려고 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왕과 귀족은 끊임없이 정치적 다툼을 벌였다. 이 때문에 많은 왕이 교체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옹립된 지도자는 대체로 권위가 약하다. 옹립된 지도자는 지배 질서가 규정한 정통성이 약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옹립되는 과정 자체가 지도자로선 주도 세력에게 빚을 진 격이 되는 사례도 많다. 조선 태종은 정변을 일으켜 아버지를 몰아낸 후 즉위했다. 태종은 태조의 다섯 번째 아들이었다. 적장자 승계를 중시하는 유교 질서에선 도저히 후계자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태조는 막내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는 악수를 뒀고, 사병을 혁파하려고 했다. 새 질서를 왕이 직접 부정하는 사태가 발생했고, 기득권 세력의 기반을 침범하려고 한 것이다. 태종은 적장자 대접을 받던 형 정종을 세자·왕으로 옹립한 후 형의 양자로서 왕위를 승계해 질서를 지키는 모양새를 갖췄다. 제1차 왕자의 난에서 주축은 주도 세력이 동원한 사병이었는데, 태종은 이들에게 빚을 진 셈이다. 하지만 그는 주도 세력 중 상당수를 정계에서 일시 퇴출시킨 후 사병을 혁파했다. 자신과 왕조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안전판을 확실하게 확보한 것이다. 경제적 이권까지 거둬들이려고 해선 생존을 담보할 수 없다. 태종은 공신들이 저지르는 각종 비행을 적당한 선에서 눈감아줬다. 태종의 킹메이커 하륜은 도성 안에 조성된 신덕왕후의 능이 이장되자, 주변의 좋은 땅을 선점하기 위해 사위들을 동원했다. 하륜에겐 지금도 유능한 신하·부정부패의 상징이란 평가가 함께 따라다닌다. 조선 중종도 형 연산군 폐위 이후 옹립된 임금이었다. 엉겁결에 왕위에 올라 큰 빚을 졌기 때문에 중종은 공신들을 통제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핵심 공신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했다. 이후 중종은 조광조·김안로 등 대리인을 내세웠다가 토사구팽하는 정치술을 반복했다. 너무 유능해도, 너무 무능해도 안 된다 출마설 도는 주호영·윤한홍의 장 직격 조광조 일파는 중종이 한밤중에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숙청됐다. 김안로는 아들의 초례가 예정된 날 체포됐다. 주도 세력으로선 왕이 너무 유능하거나 정치에 밝으면 곤란하다. 그렇다고 너무 무능하거나 막 나가도 안 된다. 지나치게 막 나가서 폐위된 대표적인 왕은 고려 충혜왕이었다. 충혜왕은 아버지 충숙왕이 양위해서 즉위했다. 당시 고려 왕은 원나라 사신이 하루아침에 폐위해 귀양을 보낼 수 있을 정도로 권위가 없었다. 고려 친원파의 권력은 왕보다 더 강했다. 그리고 고려엔 원나라 제2황후 기황후의 오빠 기철이 있었다. 고려 왕은 정상적으로 즉위하더라도 원나라·친원파가 사실상 인준해야 왕 노릇을 할 수 있었다. 즉위하는 임금마다 옹립된 지도자나 다름없었다. 충혜왕은 즉위 후 아무나 성폭행하는 기행을 저질렀다. 성폭행 대상 중엔 서모 경화공주도 있었다. 이 사실은 원나라 사신에게도 알려졌다. 결국 충혜왕은 폐위돼 귀양 가던 중 사망했다. 한편으로 충혜왕은 폭력배들을 자신의 측근 세력으로 양성한 후 권문세족이 독점하던 유통구조 개선을 통해 재정을 확충하려고 했다. 아울러 권문세족의 사유지를 혁파하려 하는 등 이들의 경제기반을 뒤흔들려고 했다. 충혜왕이 폐위된 결정적인 계기는 기철의 건의였다. 원나라는 기철의 건의를 받아들여 충혜왕을 폐위했다. 충혜왕은 폐위되던 순간 사신으로부터 발길질을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주도했던 12·3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국민의힘 의원 25명은 사과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 대부분은 소장파 성향의 초·재선 의원들이었다. 이들은 지난 1년 동안 꾸준히 당에 비상계엄 관련 사과와 당의 혁신을 요구했기 때문에 딱히 특별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원조 친윤’ 중 1명으로 평가받는 국민의힘 3선 윤한홍 의원이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에게 비상계엄 관련 사과를 요구한 것은 이례적이었다. 윤 의원은 지난 5일 진행된 국민의힘 ‘이재명정권 6개월 국정평가 회의’ 도중 장 대표에게 “윤 전 대통령과의 인연과 골수 지지층의 손가락질을 다 벗어던지고, 계엄 굴레에서 벗어나자”고 요구했다. 이어 “국민의힘은 비상계엄이 잘못됐단 인식을 아직도 못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계엄을 벗어던지고, 국민께 어이없는 판단의 부끄러움을 사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 앞에서 사과 요구 이는 장 대표가 지난 3일 비상계엄에 대해 사과하지 않고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려던 계엄이었다”고 주장한 것에 대한 반박이었다. 장 대표는 이날 윤 의원의 비판을 들은 후 고개만 살짝 숙인 채 굳은 표정을 유지했다. 국민의힘 6선 주호영 국회부의장도 장 대표를 강하게 비판했다. 주 부의장은 지난 8일 대구 지역 언론인과의 정책토론회 중 장 대표를 일컬어 “자기 편을 단결시키는 과정을 밟다가 중도가 도망간다면 잘못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장 대표는 ‘12월3일까진 지켜봐 달라’고 말했고, 그 이후엔 민심에 따르는 조치가 있을 거라고 기대했지만, 그런 말을 하지 않아서 당내 반발이 많다”고 강조했다. 주 부의장은 “윤 전 대통령은 폭정을 거듭하다가 탄핵당했다”며 “비상계엄도 김건희 여사 특검을 막으려던 것이 아닌가 짐작만 할 뿐”이라는 등 윤 전 대통령도 강하게 비판했다. 주 부의장과 윤 의원은 광역자치단체장 선거 출마 가능성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주 부의장은 이날 대구시장 출마 가능성에 대해 “준비는 많이 해왔고, 이른 시일 안에 의견을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윤 의원은 지난 2021년 경남도지사 출마 의사를 내비쳤다가 입장을 선회했던 바 있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지난 2월 공개한 명태균씨의 전화 통화 녹취엔 “윤 전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윤 의원의 경남도지사 출마를 막았다”는 취지의 대화가 공개됐다. 지방선거를 약 6개월 앞두고 있는 시점이었다. 주 부의장처럼 출마 가능성을 암시한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지방선거는 국회의원에게는 매우 중요한 정치적 이벤트다. 국회의원이 지역구에서 이익을 거두는 방법엔 ▲지역구 내 지방선거 공천 ▲중앙정치에 지역 이해관계 반영 등이 있다. 지방선거에선 국회의원이 공천·조직 동원 등에 행사하는 영향력이 절대적이다. 민주당 이상헌 의원은 기초의원 공천 대가로 수천만원을 받은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징역형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현재 항소심 재판을 받고 있다. 새누리당(현 국민의힘) 박순자 전 의원도 기초의원 공천 대가로 수천만원을 받은 혐의가 유죄로 인정돼 지난 3월 징역형을 확정받았다. 힘 못 쓰는 2가지 이유 국민의힘 대표를 지냈던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는 지난 2월 <일요시사>와 만나 “국민의힘은 김종인 선거대책위원장·이준석 대표 체제 외엔 선거에서 이겨본 적이 없다”고 단언했다. 실제로 국민의힘은 지난 2016년 이후 지난 2022년 대선·지방선거 외엔 참패를 거듭했다. 국민의힘이 선거에서 힘을 못 쓰는 이유로는 크게 2가지가 거론된다. 하나는 자체적으로 선거 후보를 양성하는 게 아니라, 선거가 임박해 외부 명망가를 데려와 주요 선거 후보로 옹립하는 특성이다. 다른 하나는 영남·강원 등 핵심 텃밭에 자리 잡아 중앙정치보다 지역구 기반 다지기에 집중하는 정치인 집단이다. 세간에선 이들을 일명 ‘언더 찐윤’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선거 참패가 이어지면, 중앙정치에 끼칠 수 있는 영향력도 줄어든다. 영향력이 줄면, 지역의 이익을 중앙정치에 반영하기 어렵다. 국회의원이 지역구에서 이익을 거둘 방법·영향력을 모두 잃는다는 것은 언더 찐윤 의원들에게 매우 치명적이다. 아무리 중앙정치·전국 단위 선거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정당이 정권 획득 가능성이 아예 없는 수준으로 추락하는 것은 매우 곤란하다. 그 정당에 소속된 국회의원과 이해관계를 교환해야 할 이유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21세기 이후 국민의힘에서 배출한 대선후보는 ▲한나라당 이회창 전 총재 ▲이명박·박근혜·윤석열 전 대통령 ▲홍준표 전 대구시장·김문수 전 고용노동부 장관 등이다. 이들의 대체적인 공통점은 ▲전국적 인지도 ▲정치적 상징성 ▲낮은 당 장악력 등이다. 대선 출마 당시 “당 장악력이 낮다”는 평가를 받지 않았던 대선후보는 이 전 총재·박 전 대통령밖에 없었다. “당 장악력이 낮다”는 명제는 국민의힘 친윤계 의원들에게 매우 중요했다. 당 장악력이 높은 대통령·대권주자는 의원들과 굳이 이익을 주고받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언더 찐윤 성향 의원들은 국민의힘 유승민 전 의원·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국민의힘 안철수 의원·이 대표 등 수도권에 기반해 중도 공략 의지가 강한 정치인과의 불화가 잦다. 이들과 이해관계·성향·기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른 것이 많아서 당권을 다투거나 알력이 있을 가능성도 큰데, 결국 화합하기 어렵다. 살기 위해 충돌하는 장 VS 친윤 “우리끼리 총구 안 돼” 의견 고수 언더 찐윤 의원들이 언론 노출을 꺼리는 성향도 ‘당 장악력이 낮은 적절한 대권주자’를 선호하는 현상과 맞물린다. 언더 찐윤의 관점으로 보자면, 윤 전 대통령은 자멸해서 사라졌다. 한 전 대표·안 의원은 수도권 엘리트 성향이 강하다. 지난 8월 당 대표 선거에 출마했던 국민의힘 조경태 의원은 언더 찐윤 성향 의원들을 청산 대상으로 지목했다. 이런 상황에서 두드러진 사람이 바로 장 대표였다. 장 대표는 정치 경력이 짧으면서도 한 전 대표와 결별한 이력이 있다. 지난 2월엔 백봉신사상을 수상할 정도로 신사적 이미지도 강했다. 국민의힘 내 강성 보수 성향 당원들은 장 대표를 선택했다. 이후 장 대표는 범보수 대권주자로 주목받았다. 코리아정보리서치가 지난 6일부터 이틀 동안 전국 만 18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범보수 차기 대선후보 적합도 여론조사에서도 21.3%의 지지를 얻어 1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장 대표에겐 정치적 기반이 없다. 대권주자에게 필요한 것은 독자적인 정치 기반이다. 대선에 출마하지 않더라도, 독자적인 정치 기반이 없으면 정치 생명을 길게 유지할 수 없다. 장 대표는 장외집회 개최 위주로 정치활동을 이어갔다. 장외집회에선 이재명 대통령을 강하게 비난하는 강성 발언을 주로 내놨다. 국민의힘 양향자 최고위원은 지난달 29일 대전 장외집회에서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불법이었고, 국민의힘은 그 불법을 방치했다”고 주장했다가 강경 보수 성향 당원의 비난을 받았다. 장 대표와 국민의힘 김민수 최고위원은 국민의힘을 강경 보수의 길로 이끄는 ‘투톱’이다. 그런데 지방선거를 6개월 앞둔 시점이기 때문에 둘 사이에 충돌이 일어난다. 지방선거는 이들의 정치적 삶과 죽음을 좌우할 가능성이 있다. 장 대표와 국민의힘 의원들이 충돌하는 결정적인 지점은 살고자 하는 의지다. 윤 의원이 장 대표를 비판했다는 사실은 “국민의힘 구 친윤계가 장 대표를 통제불능으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으로 연결된다. 강경 보수 성향이 짙어지면, 선거의 캐스팅보트로 인식되는 중도층의 선택을 받지 못한다. 친윤계 의원들에겐 당과 개인의 이익이 모두 줄어드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조 의원은 지난 8월 <일요시사>와 만나 “강경 보수 성향 유권자들의 선택지는 어차피 국민의힘밖에 없다”면서 중도 공략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것이 지방선거를 6개월 앞두고, 친윤계 의원들이 장 대표를 강하게 비판한 이유와 맞물릴 가능성이 크다. 장 대표의 실질적 임기는 지방선거 결과에 달렸다. 따라서 장 대표에게 주어진 시간은 6개월 정도다. 장 대표는 이 안에 강경 보수 세력을 자신의 독자적인 기반으로 삼으려 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옹립하는 세력과 옹립되는 수장은 각자의 삶과 죽음이 걸려 있어 긴장 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 장 대표에 대해선 “국민의힘, 나아가 보수 진영의 진정한 1인자가 될 만한 기반이 부족하다”는 다수의 분석이 나온다. 장 대표와 친윤계의 이해관계는 여기서 엇갈릴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남은 6개월 빠듯한 시간 새누리당 정옥임 전 의원은 지난 9일 CBS 라디오 <박재홍의 한판승부>에 출연해 “주 부의장은 신중한 사람이지만 현실감각이 굉장히 빠르다”며 “장 대표는 화장을 지운 여자의 얼굴처럼 다 보여줘서 장 대표 체제 종언은 이제 뚜껑만 열리면 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장 대표에게 남은 시간은 불과 6개월이다. 부족한 것은 결국 시간이다. 하지만 장 대표는 윤 의원·주 부의장의 비판에 “우리끼리 총구를 겨눠선 안 된다”며 “싸워야 할 대상은 이재명 독재정권”이라고 반박했다. 장 대표는 흔들리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흔들리지 않고 있다. 장 대표와 구 친윤계는 과연 타협점을 찾을 수 있을까?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