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운관 마담뚜' 시대별 중매프로그램 변천사

  • 최현경 mw2871@naver.com
  • 등록 2013.09.30 14:2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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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지 않는 인기 ‘TV 속 사랑쟁탈전’

[일요시사=사회팀‘이 세상 사랑없이 어이 살 수 있나요∼다른 사람은 몰라도 사랑없이 난 못 살아요’라는 노랫말처럼 사랑을 찾는 이들이 많다. 사랑에 목마른 청춘남녀를 위해 ‘중매쟁이’가 된 방송들. 데이트 상대부터 결혼 상대까지 소개해주는 기특한 방송들이 있다.




적극적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젊은이들을 보며 “요즘 애들은 창피한 줄도 모른다”고 말하지만 과거에도 자신의 짝을 찾는 젊은이들은 많았다. 방송계는 이런 젊은 싱글남녀의 애정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팔을 걷어부치고 ‘중매쟁이’를 자처했다. 70년대부터 시작한 중매 프로그램들은 시대에 따라 다양한 시도를 하며 90년대에 이르면서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수많은 중매 프로그램에서 일회성으로 끝나는 ‘보여주기식 사랑’에 익숙해진 시청자들은 짜고치는 고스톱이라는 의심을 떨쳐버리지 못하면서도 TV 속 사랑쟁탈전에 눈을 떼지 못했다. 이제는 중매 프로그램이 외모와 화려한 스펙만을 중요시하는 프로라는 오명에 따가운 시선을 받고 있지만, 건전한 데이트를 권장했던 과거 중매 프로그램의 첫 등장은 뜻밖의 재미와 신선함을 주었다.

처음엔 건전
갈수록 노골

중매 프로그램의 원조는 MBC <청춘만세>다.

77년 1월에 시작한 <청춘만세>는 남녀 각각 3명씩 출연해 대화하며 데이트 상대를 선택하는 프로그램으로 개그계의 명콤비였던 곽규석과 구봉서가 사회를 맡으며 중매역할을 했다.


당시 <청춘만세>의 지석원PD는 “완고한 시청자들의 꾸지람이나 듣지 않을까”라고 걱정했지만 시청자들로부터 ‘이색적인 프로’라는 호평을 받으며 인기를 얻었다.

<청춘만세>는 건전한 교제의 장으로 인식되면서 1200명이 넘는 남녀가 출연신청을 해 평균 경쟁률이 22:1이 될 정도로 치열했다. 최종적으로 데이트가 결정된 커플에게는 5만원의 상금이, 결정되지 못한 출연자들에게는 각각 2만 오천원 상당의 기념품이 주어졌다.

인기에 힘입은 <청춘만세>는 지방에 거주하는 시청자들의 요청에 따라 부산을 시작으로 전국 주요도시 및 인근 지방에서도 촬영을 했다. 한 주에 남녀 총 6명이 출연하는데 한 지방촬영에서는 남자 72명, 여자 59명이 지원해 출연자를 선정하는데 고심하기도 했다.

전국의 미혼 남녀의 관심을 모은 <청춘만세>는 대학교 축제시즌인 4월이 되면 파트너를 찾는 대학생들의 출연이 느는가 하면, 대학시절 미팅으로 만났던 남녀가 연락이 끊긴 후 <청춘만세>를 통해 재회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90년대부터 우후죽순…6개월 기다려야 출연
짜고 치는 고스톱서 리얼 프로젝트로 변화

1978년 11월 <청춘만세>가 탄생시킨 한 커플이 결혼하며 “우리를 맺어준 MBC에 감사하며 우리의 행복은 MBC가 증인이 돼 지켜줄 것”이라고 감사의 뜻을 표현했다. 프로그램 방송 후 2년여 만의 처음있는 기쁜 소식에 <청춘만세> 제작진은 축하화환을 보내고 당시 프로그램의 사회자였던 최우철 아나운서가 결혼식의 사회를 맡았다.

당시 보수적인 연애관과 맞서 ‘청춘’인 남녀를 엮어주는 <청춘남녀>가 성공하며 89년 MBC <청춘 데이트>가 뒤를 이었다. <청춘 데이트>는 1명의 여성과 4명의 남성이 출연해 상대를 선택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단순한 싱글남녀의 만남에서 시작된 <청춘 데이트>는 오락 위주의 방송이 되며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어내지 못했다. 버튼을 누르는 선택과정 또한 “남성을 상품화한다”며 비윤리적인 방송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에 더해 한 프로에서 결혼을 포기해야 하는 농촌총각들의 어려운 상황이 방송되며 <청춘 데이트>를 향한 비판이 거세졌다.

이 같은 질타 때문인지 그 해 9월 <청춘 데이트>는 ‘농촌총각 50, 도시처녀50’이라는 특집방송을 시작으로 프로그램의 개편을 감행했다.

처음에는 도시여성의 계산적인 질문에 농촌총각들이 압도당한다며 진지하지 못하다는 평을 받았다. 이후 기존의 버튼선택에서 출연자들의 가정과 직장, 생활모습을 소개하고 상대방과의 대화를 통해 짝을 선정하는 방식으로 변경되며 인간적인 중매 프로그램으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청춘 데이트>는 프로그램을 통해 결혼한 5쌍의 커플에게 예식장 비용과 2박 3일간의 제주도 신혼여행 경비를 지원하며 ‘농촌총각 구제하기’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그러나 도시 여성들의 저조한 참가율로 프로그램의 제작에 어려움이 많았던 <청춘 데이트>는 1990년 10월을 마지막으로 폐지됐다.

인기 만큼
논란도 많아

90년대부터 특정 프로그램을 일정기간동안 선보인 후 좋은 반응을 얻는 프로그램을 정규 편성하는, 일명 파일럿 프로그램이 많아졌다.

그 시작은 94년 처음 방송한 MBC <사랑의 스튜디오>다. ‘사랑의 작대기’로 유명한 <사랑의 스튜디오>는 적극적으로 데이트 상대를 찾는 젊은 남녀로부터 인기를 얻었다.

처음에는 출연자 섭외에 난조를 겪었던 제작진들의 ‘괜찮은 후보 찾기’ 노력으로 수준있는 출연자들의 섭외가 많아져 <사랑의 스튜디오>의 인기는 나날이 높아졌다.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쓴 출연자부터 회사의 든든한 지원을 받은 출연자까지 다양한 사연을 가진 출연자들은 최종 선택을 하기 전까지 총 3차례에 걸쳐 자신을 표현했다.

이후 학력, 외모 등을 갖춘 수준높은 출연신청자가 많아지며 신청하고 최소 6개월을 기다려야 출연할 수 있었다. 치열한 경쟁 탓에 출연자의 부모가 몰래 뒷돈을 건내거나 울며 제작진을 협박하는 등 웃지 못할 에피소드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오랜 기간 동안 방송한 탓인지 짝을 찾기 위한 출연자들의 꼼수(?)에 대비한 제작진의 출연진 숨기기 노하우 또한 다양했다. 당시 촬영장을 설명한 한 기사에 따르면 “상대방 출연자와 마주칠 것을 우려한 제작진의 철저한 계산 때문에 녹화 전까지는 화장실조차 제작진의 허락을 받고 가야 할 만큼 엄격히 격리되어 있다”고 했다.

2001년 10월, 7년 동안 1432쌍의 남녀가 출연하고, 총 47쌍의 결혼 커플을 만든 <사랑의 스튜디오>는 시청률이 10%의 낮은 시청률로 막을 내렸다. 이에 MBC 홈페이지 게시판에는 “장수 프로그램이 사라지는 것이 안타깝다”며 “청춘남녀를 위한 새로운 프로그램을 만들어 달라”는 시청자들의 의견이 많았다.


원조 77년 MBC <청춘만세> 
건전한 데이트 상대 선택

일반인들이 참여하는 중매 프로그램이 많았던 90년대 초반과는 달리 90년대 후반부터는 일반인과 연예인을 함께 출연시키는 중매 프로그램들이 생겨났다.

99년 2월에 방송된 SBS <남희석·이휘재의 멋진 만남>이 그 중 하나다. 개그맨 이휘재와 남희석이 진행한 <멋진 만남>은 한 명의 일반인 여성이 출연하여 두 MC와의 이색 데이트를 한 후 최종적으로 한 명의 MC를 선택하는 방식이다. 잘생긴 외모와 재치있는 입담으로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두 MC와 데이트를 하기 위해 출연 신청하는 여성이 매주 100명을 넘으며 시청률 30%에 육박하는 등 많은 인기를 끌었다.




<멋진 만남>의 담당 PD는 당시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을 소개하는데 부끄러움이 없어진 세태 변화와 남녀간의 사랑이라는 원초적 재미가 상승작용을 일으키고 있다”며 프로그램의 인기비결을 밝혔다.

방송 6개월 만에 MBC의 <사랑의 스튜디오>에 출연한 여성이 <멋진 만남>에 중복 출연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출연자의 중복출연 경위와 사과의 글을 게재하며 제작진의 잘못을 인정한 <사랑의 스튜디오>와 달리 <멋진 만남>은 해명조차 하지 않아 시청자에게 비난을 받았다.

이후 20%로 시청률이 떨어지며 2000년 9월부터 남희석·이휘재 대신 가수 이지훈, 홍경민, 배우 이동건이 <멋진 만남>을 진행했지만 한 달 만에 막을 내렸다.


신인스타 등용문
시나리오 의혹도

이후 연예인과 일반인의 만남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프로그램은 2000년 방송한 KBS <산장미팅 장미의 전쟁>다. <산장미팅 장미의 전쟁>은 KBS <1박2일>의 나영석PD가 조연출한 프로그램으로 많은 여성들의 로망인 남자 연예인들이 출연하며 인기를 끌었다.

<산장미팅 장미의 전쟁>은 가수 이민우, 이지훈, 이성진 등이 출연해 일반인 여성과 짝을 이뤄 게임을 하고 선택을 받지 못한 출연자들은 산장을 떠나는 방식이다. 출연자들이 장미로 중간 선택을 하고 진실게임을 통해 속마음을 이야기하는 등 이성 앞에서 솔직하고 진지한 출연자의 모습에 반전까지 더해진 최종 선택은 재미를 더했다.

하지만 <산장미팅 장미의 전쟁>은 외모가 걸출한 여성 출연자들이 일반인이 아닌 연예인 지망생이거나 무명연예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연예인 입문 프로그램’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또한 선택받기 위해 경쟁이 치열해지는 출연자들과 탈락자 선정 시 한 사람을 지목해 탈락 이유를 말하는 방식이 왕따를 조장하는 비인간적인 방식이라는 비판도 적지 않았다.

결국 매주 바뀌는 상대마다 사랑을 표현하는 남자 연예인들과 인위적인 방식으로 인해 <산장미팅 장미의 전쟁>은 1년여 만에 시청자들의 외면을 받고 폐지됐다.

결혼 전제 SBS <짝>
외모와 스펙 부각

2005년 시작한 MBC <좋은 사람있으면 소개시켜줘>는 개그맨 박수홍과 박경림이 진행을 맡아 일반인 여성 1명과 남성 4명과의 만남을 주선한 프로그램이다. 게임을 통해 상대를 탐색하는 과거 프로그램들과 달리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줘>는 출연자들의 대화로 이루어졌으며 국내 최초로 여성 출연자의 어머니가 함께 등장했다.

기존 프로그램에서도 출연자 어머니가 출연하는 경우는 있었으나 방청객에서 눈빛으로만 응원하는 정도였다. 그에 반해 <좋은 사람있으면 소개시켜줘>는 사위감을 찾는 어머니에 초점이 맞춰졌다.

‘중매쟁이’ 방송의 결정판이라는 평을 받은 <좋은 사람있으면 소개시켜줘>는 ‘대한민국 최고의 신랑감’들이 등장했다.

그러나 의사, 사업가 혹은 대기업에 종사하는 소위 엘리트급의 스펙을 갖춘 남성 출연자들의 등장과 어머니의 결정에 따른 소극적인 출연여성의 모습들로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지 못했다.

당시 해당 프로의 진행자였던 박경림이 한 남성 출연자와 교제 1년여 만에 결혼하며 프로그램을 통해 유일하게 결혼에 성공한 사례가 됐다.

진행자 빠지고
“알아서 해!”

지난 2011년 3월 첫 방송된 SBS <짝>은 수많은 논란에도 나름 장수하고 있는 중매 프로그램이다. 지금까지 120회 방송을 거치며 총 650명이 넘는 남녀가 출연했다.

전형적인 중매 프로그램들과 달리 결혼을 전제로 하는 <짝>은 기존 프로그램들의 핵심인 유희적인 요소를 없앴다. 또한 남녀 출연자들을 엮는 역할을 사회자 없이 출연 당사자들의 몫으로 넘겼다.

10명이 넘는 일반인 싱글남녀가 6박7일동안 <애정촌>이라는 특정장소에서 함께 생활을 하며 자신의 데이트 상대를 찾는다. 도시락 선택, 데이트권 등 주어진 기회 외에 출연자들의 호감을 표현하는 방식은 자유다.

또 돌싱이나 노총각·노처녀 특집으로 출연자의 나이가 20∼30대 초반이 다수였던 중매 프로그램의 암묵적인 규칙도 무너뜨리며 많은 싱글 남녀에게 연애의 기회를 주고 있다.

<짝> 돌싱특집에 출연했던 한 남성 출연자는 “사실 이혼 후 속된 말로 ‘이번 생은 망했구나’ 싶었다”며 “다시는 사랑을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짝’에 출연하며 나의 인생이 아직 반이나 남았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잊고 있던 사랑의 설렘과 희망을 되찾았다”며 <짝>의 가치를 입증했다.

허나 남자는 스펙, 여자는 외모를 중요시하는 불변의 진리를 증명하는 듯한 출연자 선정부터 출연자들의 홍보 목적의 출연이나 사생활이 드러나며 프로그램의 ‘진정성 여부’가 연일 논란이 되고 있다.
 
최현경 기자 <mw2871@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소개팅으로 뜬 스타들

지성과 결혼한 이보영, 과거에…

본문/얼마 전 지성과의 결혼으로 화제를 모은 배우 이보영은 <사랑의 스튜디오>에 출연한 경험이 있다. 2002년 22살의 나이로 서울여자대학교 국문학과에 재학중이던 그는 여자 3번으로 출연하며 한 남성출연자와 커플이 성사됐다. 이후 방송에서 출연 당시를 “제일 핫 했을 때다”라고 고백했지만 네티즌은 “얼굴이 달라진 것 같다”는 반응을 보였다.

2000년 미스코리아 경기 미 출신으로 SBS 드라마 <하늘이시여>를 통해 이름을 알린 배우 윤정희 또한 <산장미팅 장미의 전쟁>에 출연하며 얼굴을 알렸다. 윤정희는 <산장미팅 장미의 전쟁> 1기로 출연하며 가수 이민우와 파트너가 되어 뽀뽀를 하는 등 적극적인 태도로 관심을 모았지만 4주 만에 탈락했다.

이후 한 예능프로에 출연해 “(이민우) 팬들이 어떻게 제 메일을 아셨는지 저한테 메일을 보내셨어요. 제목이 ‘언니 좋아요’, ‘언니 팬이에요’라고 적힌 메일이 와서 기쁜 맘으로 메일을 열어봤더니 ‘왜 꼬리쳐?’, ‘네가 뭔데?’라고 이민우 팬들이 보낸 비방메일이었다”며 당시 일반인이었던 그는 그마저도 신기했다고 고백했다.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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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년 만에 해체’ 검찰 분해 전조

‘78년 만에 해체’ 검찰 분해 전조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검찰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 한때 정부의 ‘칼’ 역할을 맡아 위세를 떨쳤던 검찰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면서 우리나라는 또 한 번 가보지 않은 길을 가게 됐다. 검찰청이 완전히 폐지되기까지 유예기간은 1년. 검찰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살펴봤다. 검찰은 새 정부가 출범할 때마다 그 쓰임새가 달라졌다. 개혁의 도구로 이용되기도 했고 개혁의 대상으로 전락한 적도 있다. 칼로 쓰이면서 동시에 고쳐야 할 기관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정부도 검찰의 존재 자체를 지우진 못했다. 견제 기관을 만들어 권한을 축소한 적은 있지만 ‘폐지’를 가시화한 적은 없었다는 뜻이다. 대통령 의지 당이 화답? 지난달 26일 검찰청을 폐지하고 기획재정부를 분리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정부조직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개정안에 따라 검찰청은 설립 78년 만에 문을 닫게 됐다. 검찰청 업무 중 수사는 중대범죄수사청(이하 중수청), 기소는 공소청이 맡는다. 중수청은 행정안전부 장관, 공소청은 법무부 장관 소속으로 정해졌다. 검찰청 폐지와 중수청·공소청 설치에는 1년 유예기간을 두기로 했다. 지난달 30일 개정안이 국무회의에서 의결되면서 검찰청 폐지는 내년 10월로 정해졌다. 내년 10월1일에 법률안이 공포되고 이튿날인 10월2일 중수청·공소청이 설치되는 것이다. 문재인정부가 검찰의 권한을 줄이는 방향으로 검찰개혁을 본격화한 데 이어 이재명정부에서 검찰 폐지를 결정하면서 진보 정부의 숙원이 이뤄졌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은 이정부 출범 직후부터 검찰청을 폐지하겠다는 뜻을 드러냈다. 검찰의 수사‧기소 업무를 분리하고 수사권 등은 신설 기관으로 이관하겠다는 게 주요 내용이었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가 취임한 이후부터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정 대표는 당 대표 선거 전부터 “추석 전 처리”를 공공연하게 말해왔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국무회의에서 “검찰이 되도 않는 것을 기소해 무죄를 받고 나면 면책하려고 항소하고, 상고하면서 국민한테 고통을 주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 “형사소송법에 ‘10명의 범인을 놓쳐도 1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면 안 된다’는 말이 있다”며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 무죄추정의 원칙(으로 하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혹시 무죄거나 무혐의일 수 있으면 기소하지 말라는 것”이라며 “(검찰이) 마음에 안 들면 기소해서 고통을 주고 자기 편이면 죄가 명확한데도 봐주면서 기준이 다 무너졌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정성호 법무부 장관에게 “1심이 무죄라고 했는데 (검찰이) 무조건 항소해서 유죄로 바뀌면 타당한가”라며 “검찰이 1심에서 무죄 난 사건을 항소해서 유죄로 바뀔 가능성이 얼마나 되나”라고 물었다. 정부조직법 개정안 통과 내년 10월 폐지 확정돼 정 장관이 ‘5% 정도’라고 답하자 이 대통령은 “95%는 무죄를 한 번 더 확인하기 위해서 항소심으로 생고생한다는 말”이라며 “나중엔 무죄는 났는데 집안이 망했다, 이거 윤석열 대통령이 한 말 아닌가”라고 했다. 또 “국가가 왜 이리 국민한테 잔인한가”라며 “인류 수천년 역사에서 경험으로 정한 역사가 있다. 의심스러우면 피고인 이익으로 하라는 것”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검찰청 폐지를 바라보는 정치권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린다. 검찰개혁을 숙원으로 여겼던 여권에선 일제히 ‘환영’의 뜻을 보였다. 반면 국민의힘은 민주당의 ‘일방 독주’라고 비판했다. 실제 정부조직법 개정안은 국민의힘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퇴장하면서 민주당 주도로 표결이 진행됐다. 민주당 박수현 수석대변인은 정부조직법 개정안 본회의 의결 직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김대중 대통령님에게 사형을 구형했고 노무현 대통령님을 죽음으로까지 내몰았던 정권의 칼, 검찰은 이제 사라졌다”며 “역사적인 날이다. 검찰청이 78년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고 말했다. 박 대변인과 함께 기자간담회를 진행한 민주당 한정애 정책위의장은 “78년이라는 세월 사이 우린 여러 번에 걸친 개혁의 후퇴, 개혁의 좌절을 맛보기도 했다”며 “이제는 그 길을 다시 가지 않겠다고 하는 개혁 의지가 제대로 발현된 정부조직법”이라고 개정안을 평가했다. 표결에 불참한 국민의힘은 강하게 반발했다. 국민의힘 최보윤 수석대변인은 “이재명정권이 끝내 검찰청을 없앴다. 이는 간판을 바꾼 문제가 아니라 국민을 지켜주던 마지막 사법 안전망을 무너뜨린 폭거”라며 “가장 먼저 피해를 보는 건 사회적 약자”라는 내용의 논평을 냈다. 그러면서 “그 공백은 가장 약한 곳에서부터 드러난다. 아동 학대, 장애인 대상 범죄, 노인 학대 사건은 피해자가 말문을 열기 어렵고 증거는 금세 사라진다”며 “예전에는 빠진 단서를 보완하고 잘못된 수사를 되돌릴 두 번째 기회가 있었지만 이제 그 문이 닫혔다”고 비판했다. 검사들은 집단 반발 하루아침에 조직이 사라지게 된 검찰 내부는 참담한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다. 노만석 검찰총장 직무대행은 정부조직법 개정안에 위헌 소지가 있다는 입장이다. 노 대행은 지난달 29일 검찰 구성원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78년간 국민과 함께해 온 검찰이 충분한 논의나 대비 없이 폐지되는 현실에 총장 직무대행으로서 매우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고 토로했다. 이어 “헌법상 명시된 검찰을 법률로 폐지하는 것은 위헌 소지가 있다”고 밝혔다. 역대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들도 정부조직법 개정안이 “명백한 위헌”이라면서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제기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들은 “헌법은 89조에서 검찰총장 임명에 대해, 또한 제12조와 제16조에서는 검사의 영장 청구권에 대해 명백히 규정하고 있다”며 “이런 규정은 헌법의 삼권분립의 원칙에 따라 정부의 준사법기관인 검찰청을 둔다는 것을 명백히 한 것이므로 이를 폐지하는 것은 위헌”이라고 설명했다. 검사들 사이에서도 동요가 상당한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이정부 1호 법안인 3대 특검법을 통해 발동한 특검에 파견된 검사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 상황이다. 법조계에 따르면 현재 3대 특검팀에는 110명의 검사와 99명의 검찰 수사관이 파견돼있다. 김건희 특검팀에는 40명, 내란 특검팀과 채 상병 특검팀에는 각각 56명, 14명의 검사가 근무하고 있다. 김건희 특검팀과 내란 특검팀에 파견된 검사 수를 보면 웬만한 일선 검찰청 검사 정원 규모와 비슷한 수준이다. 이 가운데 김건희 특검팀에 파견된 검사들이 “검찰청으로 복귀하겠다”고 요청한 사실이 드러났다. 정부조직법 개정안의 국회 통과, 국무회의 의결에 대한 집단 반발로 해석된다. 위헌 주장 헌재 가나 검사들은 지난달 30일 민중기 특검에게 입장문을 제출했다. 입장문에는 정부여당의 검찰개혁 핵심은 ‘수사와 기소의 분리’ ‘검찰의 직접 수사 금지’인데 특검에 검사들이 남는 건 모순이라는 취지의 내용이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여권이나 시민사회 단체 등에서는 ‘자업자득’이라는 의견도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검찰이 정권의 입맛에 따라 칼을 휘두르면서 현재 상황을 자초했다는 지적이다. 권력의 방향에 따라 태도를 달리하는 검찰에게 수사권과 기소권을 동시에 줄 수 없다는 의지가 이번 정부조직법 개정안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다는 설명이다. 실제 진보 정부에서는 오랜 시간 검찰의 권한을 축소하는 방향으로 개혁을 시도해 왔다. 본격화된 것은 문정부 때부터지만, 그 시발점은 김대중·노무현정부 때라고 봐야 한다. 검·경 수사권 조정,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이하 공수처) 설립 등 검찰개혁의 핵심 방안들은 다 그 시기에 나왔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의 검찰개혁은 실패했다. 검찰의 반발이 대단했고 당시 정치권에 대한 전방위적인 수사를 진행하면서 이들의 위세도 엄청났다. 실질적인 검찰개혁이 이뤄진 건 문정부 들어서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검찰개혁에 대한 목소리가 커졌고 국민 여론도 정부에 힘을 더했다. 문정부에서 검찰은 ‘적폐 청산’의 칼로 기능하면서 동시에 개혁 대상으로 지목됐다. 검·경 수사권 조정이 이뤄졌고 공수처가 출범했다. 문제는 검찰개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내부 출혈이 상당했다는 점이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박근혜정부에서 국가정보원 댓글 수사 이후 한직으로 좌천돼있던 윤석열 전 대통령을 서울중앙지검장, 검찰총장으로 연이어 영전시켰다. 진보 정부의 숙원 노·문 거쳐 결말 이는 향후 문정부를 뒤흔들었던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 간의 갈등, 윤 전 대통령의 대선 출마, 당선 등의 불씨가 됐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관련 의혹이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 문 전 대통령의 지지율을 떨구기도 했다. 조 전 장관의 뒤를 이어 취임한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은 윤 전 대통령과 정면으로 출동했다. ‘추·윤 대전’이라는 표현이 1년 내내 언론에 오르내릴 정도였다. 이 과정에서 검찰개혁은 흐지부지됐다. 법안이 급하게 처리되면서 ‘누더기’라는 지적이 잇따랐고 우여곡절 끝에 출범한 공수처는 제대로 된 성과를 내지 못했다. 특정 사건에 대한 수사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등을 두고 기관끼리 갈등을 빚는 일도 일어났다. 경찰에 수사가 몰리면서 재판이 지연되는 일도 벌어졌다. 문정부의 검찰개혁을 ‘반쪽짜리’라고 평가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이후 이정부는 아예 검찰청을 없애겠다는 뜻을 품고 임기를 시작했다. 대선후보 때는 물론 윤석열정부 시기 내내 ‘사법 리스크’에 시달렸던 이 대통령은 검찰에 대판 비판적인 시각을 줄곧 드러낸 바 있다. 그리고 이 대통령의 뜻은 민주당을 거쳐 법안을 통해 실현됐다. 물론 과제는 산적해 있다. 당장 보완수사권 문제를 두고 이견이 있고 중수청과 공소청을 어떻게 운영할지 세밀하게 구상되지 않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검찰은 보완 수사권을 존치해 달라고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검사가 경찰의 기록만 갖고 기소 여부를 판단하면 부실 기소, 불기소 남발 등으로 국민에게 피해가 돌아갈 수 있다는 게 주장의 배경이다. 또 검찰에 집중된 권한을 분산하기 위해 개혁을 진행했지만, 이 과정에서 또 다른 기관이 비대해지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실제 일각에서는 이름만 다른 ‘검찰’이 나타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검찰이 정권의 칼로 기능했던 것처럼 다른 이름의 ‘칼’이 등장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걱정이다. 산적한 과제 후폭풍 남아 검찰은 꽤 오랜 시간 외줄 위에 서 있던 상황이다. 이정부가 그 줄을 끊으면서 검찰은 사라질 운명에 처했다. 검찰에 대한 경고는 늘 있었고 전조도 뚜렷했다. 이제 후속조치를 두고 정치권은 물론 사회가 시끄러워질 전망이다. 검찰 해체가 가져올 후폭풍은 국민에게 언제쯤 닿을 것인가.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