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금 국감 피한 노소영 철면피 이중행보 막전막후

  • 김성민 기자 smk1@ilyosisa.co.kr
  • 등록 2025.03.24 13:58:59
  • 호수 15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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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이 부를 땐 줄행랑
행사엔 곱게 나타났다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 = 국회 국정감사에 불출석한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이 서울 예술상 시상자로 나섰다. 앞서 노 관장은 법제사법위원회로부터 국회증언감정법 위반 혐의로 고발당했다.

노소영 관장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이하 법사위)로부터 고발당하면서 ‘노태우 비자금’에 대한 압박 수위가 높아지고 있다. 검찰은 노태우 비자금 고발에 대해 조사 중이며 정치권서도 주시하고 있는 만큼 비자금 불법 은닉 여부 등이 차차 밝혀질 것으로 예상된다.

뻔뻔한
등장 신

노 관장은 지난 19일 오후 서울 중구 국립극장 하늘극장서 개최한 ‘제3회 서울 예술상’ 시상자로 나섰다. 국감 불출석 후 잠적한 노 관장은 지난해 10월 해외 행사 참석차 캐나다로 출국한 것으로 알려져 비판을 받아왔다.

시상식서 노 관장은 오세훈 서울시장과 만나 악수를 하는 등 밝은 모습을 보였다. 이날 노 관장은 최태원 SK그룹 회장과의 이혼소송 과정서 등장한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메모가 여러 사회적 해석을 낳고 있다는 기자의 물음에 “답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라며 “곧 시간이 올 것”이라고 밝혔다.

출처 확인이 어려운 규모의 돈이 유입된 정황에 관해 묻자 “그러게요”라며 답변을 회피했다. 다만 노 관장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곧 의견을 내겠다”고 전했다.


노 관장은 지난해 국회 법사위 국정감사 증인으로 동생인 노재헌 동아시아문화센터 원장과 함께 채택됐다. 그러나 불출석 사유서 없이 국감장에 출석하지 않아 국회증언감정법 위반 혐의로 지난달 21일 서울남부지검에 고발됐다.

‘노태우 비자금’은 최 회장과 노 관장의 이혼소송 항소심서 제기됐다. 당시 재판 과정서 노 관장은 어머니인 김옥숙 여사가 ‘맡긴 돈’이라며 남긴 메모와 50억원짜리 약속어음 6장이 찍힌 사진 등을 증거로 제시하며 “부친(노태우) 자금 300억원이 선경(현 SK)에 들어갔다”고 주장했다.

항소심 재판부(부장판사 김시철)는 지난해 5월 노 관장의 주장이 인정된다면서 재산 분할액 1조3808억원과 위자료 20억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이에 SK가 자금 유입 사실을 완강히 부인하면서 이혼소송이 비자금 환수 국면으로 전환되는 양상이다.

노 관장은 아버지의 비자금 카드를 꺼내 소송서 대승한 듯 보였으나, 비자금 불법 은닉 혐의 등으로 3건의 고발이 접수돼 검찰 수사를 받게 됐다.

노 관장을 고발한 군사정권범죄수익 국고환수추진위원회(환수위)는 이혼소송 항소심을 맡은 김시철 서울고법 가사2부 부장판사를 탄핵하라고 주장했다. 특히, 노 관장과 김 부장판사의 특수 관계가 드러나면서 ‘재판부 쇼핑’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이혼 소송 중 불거진 노태우 검은돈 의혹
국회 호출에 잠적 후 유유히 시상식 참석

재산분할 판결을 이끈 김 부장판사의 부친 고 김동환 변호사는 과거 ‘5·18 특별법’ 반대 등을 통해 노 전 대통령을 미화한 인물로 알려졌다.


노 관장에게 승기를 건넨 김 부장판사의 부친 김 변호사는 노태우의 경북고 1년 후배다. 김 변호사는 소비자 권익을 위해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친 변호사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동시에 노태우를 옹호한 인물이기도 했다.

김 변호사는 노 전 대통령과 전두환씨가 결성한 정치 군벌인 ‘하나회’가 광주 사태를 일으킨 후 탄생한 5공화국 때부터 국가정책 자문위원, 선관위원, 공정거래위원, 소비자보호위원 등을 지냈다. 본격적으로 노 전 대통령이 집권한 6공화국 들어서는 대통령이 직접 임명하는 KBS 이사도 맡게 된다.

당시 김 변호사는 5·18 책임 문제로 곤경에 처한 노태우를 방어하는 최전방에 나섰다. 5·18 특별법은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허위 사실을 유포한 자를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1995년 12월호 <한국논단>에 김 변호사는 ‘5·18 특별법 안 된다. 위험한 발상 5·18 특별법’이란 제목의 기고를 하게 된다. <한국논단>은 1989년에 창간돼 2014년까지 발행된 극우 성향 월간 시사지다. 5·18 특별법은 광주 사태를 일으킨 하나회 일당을 처벌하자며 국민 대다수가 원하는 법이었는데, 김 변호사는 이 법의 제정을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또 노 관장의 변호를 맡으면서 최 회장에 관한 허위 사실을 유포한 혐의로 검찰에 송치된 이상원 변호사는 김옥숙 여사의 고종사촌인 박철언 전 정무장관 사위다. 박철언은 노 전 대통령의 빈소를 지켰으며, 같은 경북고등학교 동문이다.

이 변호사의 부인 박지영은 미래회 현 회장이자 박 전 장관의 큰딸로, 노 관장과는 6촌 관계다. 노 관장의 미래회는 노태우의 하나회처럼 겉으로는 봉사를 내세우고 있다. 최근 한미약품 경영권 분쟁에 언급된 임주현 한미약품 그룹 부회장과 김방은 예화랑 대표가 소속됐던 단체다.

당당하게
황당 행보

취재를 종합하면, 노 관장 이혼소송에 연관된 법조계 인맥은 노 전 대통령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재판부는 비자금 실체에 관한 심리도 하지 않은 채 노 관장 측의 주장만 받아들이면서 재산분할 판결을 냈다. 서울중앙지검은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과 관련해 접수된 고발 사건을 범죄수익환수부에 배당한 상태다.

환수위는 김 여사를 검찰에 고발하기도 했다.

환수위는 지난 14일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이혼사건 항소심 판결서 김 여사의 메모가 등장했는데, 이는 김 여사가 노 전 대통령의 이른바 ‘노태우 비자금’을 은닉하고 관리해 왔다는 명백한 증거”라면서 “김 여사는 남편인 고 노태우 전 대통령의 이른바 ‘노태우 비자금’으로 알려진 범죄수익을 은닉하고 관리해온 범죄자”라고 강조했다.

환수위에 따르면 김 여사가 노태우 비자금을 관리하는 은닉 공범이라는 주장은 꾸준히 제기돼왔다. 노태우정부 시절에도 김 여사와 관련해 “김옥숙 여사가 별도로 비자금을 여러 비밀 계좌에 넣어두고 관리한다”는 소문이 줄을 이었다는 게 환수위 측 설명이다.

환수위 측은 “범죄수익 은닉 공모는 분명한 불법행위고 그 범죄수익이 전직 대통령의 천문학적인 비자금이라면 이는 매우 심각한 중범죄”라며 “김 여사의 딸인 노 관장은 항소심 재판서 ‘김옥숙의 메모’ 2개를 공개했는데, 김 여사가 1998년 4월과 1999년 2월에 작성한 이 메모에는 비자금 용처가 나타나 있다. 이는 김 여사가 비자금의 실질적인 주인 노릇을 한 증거”라고 강조했다.


언뜻 장부처럼 작성된 해당 메모에는 노 전 대통령이 조성한 비자금이 누구에게 얼마가 전달됐는지 뿐만 아니라 여러 곳으로 뿌려진 돈 중 일부의 회수 예정 날짜까지 자세히 적혀 있다. 김 여사가 이런 메모를 적었다는 것은 그가 비자금의 실질적인 주인 노릇을 한 ‘비자금 관리자’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게 환수위의 설명이다.

환수위는 고발장에 “김영환 의원은 지난해 10월25일 ‘비자금 없다던 노태우 공익법인 ‘동아시아문화센터’를 통해 6공 비자금 꼼수 상속’이라는 제목으로 보도자료를 내고 김옥숙의 수상한 자금에 대해 사정 당국의 조사가 필요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면서 “김영환 의원은 당시 국세청 공시 시스템을 분석한 결과를 바탕으로 노태우 전 대통령 일가의 편법 상속 수단으로 지목되는 ‘동아시아문화센터’의 비정상적 운영 실태를 지적했다”고 명기했다.

고개 빳빳
‘입꾹닫’

김 의원은 지난해 10월 노태우 일가의 비자금 은닉과 관련해 “국내에서는 현금성 보험 가입(차명계좌 활용), 노재헌의 공익법인 악용 등의 수법이 활용, 해외에서는 조세피난처에 10개의 페이퍼컴퍼니 설립을 통한 비자금 은닉이 의심된다”고 밝힌 바 있다.

이어 “지난해 10월8일 법제사법위원회의 국정감사(법무부)서 정청래 위원장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김옥숙은 차명으로 관리되던 자금 등을 동원해 두 차례에 걸쳐 농협공제(현 농협생명)의 ‘새천년새저축공제’라는 유배당저축성보험(공제)에 210억원을 가입했다”며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서진 등 8인의 차명계좌가 활용됐었고, 김 여사는 2007년 검찰 및 국세청 조사를 받았으며 해당 진술서가 공개됐다”고 말했다.

김 의원은 국세청, 검찰 등 사정기관을 겨냥해 “이는 명백한 조세포탈 및 금융실명제 위반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김 여사를 비롯한 노태우 일가가 처벌을 받았다는 기록은 드러난 것이 없다”며 봐주기 의혹을 제기했다.


김 여사는 추징금을 낼 여력이 없고 생활을 유지하기도 어렵다고 호소했으나, 실제로는 노재헌이 이사장으로 있는 공익법인 ‘동아시아문화센터’에 2016년부터 2021년까지 6년에 걸쳐 총 147억원을 출연했다.

환수위는 “노태우 일가가 보유한 거액의 불법 비자금이 다양한 수단으로 상속·증여되고 있다는 단서들이 나타나고 있다”면서 “‘상속세 및 증여세법’에 따르면 공익 목적 사업 등 의무 이행을 제대로 하지 않은 공익법인은 상속세나 증여세를 부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탈세 혐의로 수사해 처벌할 수 있다”고 철저한 진상 조사를 촉구했다.

‘재판부 쇼핑’으로 1조원 판결
세금 먹은 미술관 영리단체로?

최근 노 관장은 그동안 비영리기관으로 운영해온 아트센터 나비를 영리화하겠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동안 대규모의 혈세를 받으면서 연간 평균 46일만 전시회를 진행하는 등 방만 운영을 하다가, 영리화에 나서는 것에 대한 의구심이 나온 것이다.

지난 10일 업계에 따르면 아트센터 나비는 지난 2019년부터 2023년까지 5년간 정부로부터 약 34억원의 보조금을 받았다. ▲2019년 9억4104만원 ▲2020년 7억8197만원 ▲2021년 7억8978만원 ▲2022년 5억5469만원 ▲2023년 3억3785만원을 정부로부터 지원받았다.

정부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지난 5년간 전시활동은 연평균 46일에 불과했다. 특히 지난 2020년에는 15일, 2022년에는 14일에 그쳤다. 지난 5년간 투입된 정부 보조금과 실제 전시활동이 이뤄진 기간을 보면 하루 전시에 약 1500만원이 들어간 셈이다.

국가 지원금을 받아온 아트센터 나비는 적자를 기록했다. 지난 5년간 아트센터의 누적 적자는 48억원으로, 2019년 200억원 수준이었던 자산은 2023년 말에는 145억원으로 55억원(27.5%) 감소했다.

재계에서는 방만한 재정 운용이라는 지적이 제기됐다. 특히 아트센터 나비가 미술관 본연의 활동보다는 금융투자에 집중했다는 비판이다.

실제로 지난 2022년에는 금융평가손실 및 외환차손익으로 약 8억원, 2023년에는 6억원의 손해를 봤다. 보유 중이던 현금자산은 2022년 80억7800만원 규모서 2023년 6억5000만원으로 감소했고, 단기금융상품(고위험 투자 가능성이 있는 자산)은 같은 기간 10억원에서 69억9200만원으로 불어났다는 점도 비판 대상이다.

한편, 노 관장은 지난 2월 문화포럼 강연자로 나서 아트센터 나비의 영리화에 대해 언급했다. 노 관장은 “그동안 예술과 기술을 갖고 할 것은 다 했다”며 “아트센터 나비도 비영리기관에서 영리기관이라는 새 영역으로 넘어가려 한다. 돈을 벌며 할 수 있는 일을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각종 의혹
수사는?

견실한 운영을 하지 못했던 아트센터 나비가 영리화로 전환하는 것은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일각에서는 국민 세금과 공공재가 개인의 이익으로 전환된다는 점에 대해서 우려를 표한다. 나비의 방만 운영에 대한 의혹은 비서의 횡령 사건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노 관장은 2019년 입사한 비서가 5년간 20억원 이상의 자금을 횡령했다고 고소했다. 당시 재판 과정서 해당 비서는 노 관장을 사칭해 재무 담당자에게 상여금을 지급하라고 요청했는데 별다른 절차 없이 송금됐다. 이로 인해 아트센터 나비의 관리부실, 감시 부재의 상황을 보여준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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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