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님까지…’ 한일시멘트 사정 칼바람 내막

  • 김성민 기자 smk1@ilyosisa.co.kr
  • 등록 2023.11.30 13:35:38
  • 호수 145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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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에 국세청도 달려들었다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 = 한일시멘트가 ‘오너가 주가조작’ 의혹과 서울지방국세청 특별세무조사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주로 비자금 조성 등에 관한 혐의가 있을 시 투입되는 조사4국이 나섰기 때문이다. 업계에선 주식 시세조종으로 재판 중인 허기호 한일홀딩스 회장 때문이라는 시각이 다분하다. 다만, 국세청은 “상세히 들여다보기 위함”이라며 말을 아꼈다.

시멘트업계에 따르면 국세청이 한일시멘트를 상대로 세무조사에 착수,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국세청은 지난달 말, 국세청 조사4국 요원들을 서울 서초구 한일시멘트 본사 등에 투입해 관련 자료 등을 확보했다. 국세청은 2018년부터 2022년까지의 회계연도를 대상으로 세무조사를 진행한 것으로 전해졌다.

엎친 데 
덮쳤다 

조사 대상 시기를 놓고 봤을 때 2018년 한일시멘트 지배구조 개편 전후 과정 등을 살펴볼 것이라는 관측도 제기된다. 한일시멘트는 2018년 인적 분할 이후 존속법인인 한일홀딩스(구 한일시멘트)와 한일시멘트로 나뉜다. 당시 지배구조 개편을 통해 지주사가 한일시멘트서 한일홀딩스로 전환한 것이다.

이번 세무조사 대상에는 한일시멘트의 주요 계열사와 거래처 등도 포함됐다. 업계에선 내부거래 과정서 발생할 수 있는 탈세 여부를 들여다볼 것으로 바라봤다. 세무조사 대상에는 한일시멘트뿐 아니라 지주사인 한일홀딩스, 한일인터내셔널, 한일L&C(구 한일건재) 등이 포함된 것으로 확인됐다.

한일시멘트 그룹의 거래처로 알려진 J사, S사 등 관련사도 함께 세무조사에 들어간 것으로 파악됐다. 


국세청이 거래처인 J사와 S사를 특정해 동시 세무조사에 나선 배경도 이목을 끌었다.

일각에선 국세청이 한일시멘트 그룹과 거래처 간 부당거래 정황을 파악했다는 해석도 나온다. 유통·도소매 업체인 J사는 지난해 10월 기준 사원 수 1명, 2021년 매출액은 81억원, 당기순이익은 6억원 규모다. 2008년 4월 한일산업 대리점권 계약을 맺는 등 한일그룹의 거래처 중 하나다.

한일홀딩스(구 한일시멘트) 공시자료에 따르면 허 회장은 지난 2017년 3월31일 J사가 보유한 한일시멘트 주식 3만7727주를 시간외거래로 매입해 회사 지분율을 늘린 바 있다.

2002년 1월 설립된 S사는 화물자동차 운송주선업체다. 특이점은 현 한일시멘트 감사인 장모씨가 2014년부터 2018년까지 S사 대표를 지냈다는 점이다. 한일시멘트 계열사의 감사보고서에 따르면 세무조사 대상 계열사는 특수관계자 거래 비중이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 회사 전체 매출 중 특수관계자 비중은 최소 40%대서 최대 90%대에 육박했다.

한일홀딩스의 지난해 매출 400억7137만원 중 특수관계자로부터 벌어들인 매출은 382억8574만원으로 95.5%에 달했다. 이 중 261억원은 계열사로부터 벌어들인 배당수익으로 파악됐다.

탈세? 비자금? 내부거래?
조사4국 투입 탈탈 털어 

한일홀딩스는 계열사 등에서 벌어들인 배당이익의 상당 부분을 허 회장과 친족 등 주주에게 배당 명목으로 지급한 것으로 나타났다. 허 회장과 친족 지분 비중을 볼 때 지난해에만 150억원이 넘는 배당금이 허 회장과 그 일가에 지급된 것으로 추정된다.


허 회장의 지분은 지배구조 개편 직전인 2017년 말 10%서 지배구조 개편 후인 2018년 말 30%로 3배가량 급증했다. 지배구조 개편 후 허 회장이 그룹 승계 자금 마련을 위한 안정적 수익구조가 만들어졌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한일홀딩스의 배당액은 지배구조 개편 직전인 2017년 124억8600만원에 불과했다. 그러다 2018년 지배구조 개편 후 증가세를 보였다. 지난해 배당액은 246억6500만원으로 지주사 전환 전보다 배로 급증했다. 한일홀딩스는 2019년 별도 기준 614억원의 순손실을 기록했는데 배당액은 오히려 늘어나 137억8700만원이 주주에게 돌아갔다.

허기호 회장은 한일홀딩스 최대주주로 지분 31.23%를 보유, 그룹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허 회장은 허정섭 한일시멘트 명예회장의 장남이자, 고 허채경 선대회장의 장손이다. 허 명예회장은 16.33%의 지분을 갖고 있다. 다른 친족인 허정미 3.08%, 허동섭 2.74%, 허남섭 2.68%, 허기준 1.57%, 허기수 1.15%, 허서연·허서희 0.94% 등 허 회장 일가가 60% 이상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상태다.

특히 그룹 최상위 지배사인 한일홀딩스는 전체 매출의 90% 이상을 계열사에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일홀딩스는 한일시멘트 60.9%, 한일인터내셔널·한일L&C 100%의 지분을 가지고 있다. 먼저 한일인터내셔널의 지난해 매출은 4478억원이다. 이 중 특수관계자 거래가 2459억원으로 54.9%에 달했다.

심각한
이중고

한일시멘트와 한일현대시멘트로부터 각각 1389억원, 1070억원의 매출이 발생한 것이다. 

한일L&C는 지난해 매출 954억원 중 41.7%인 398억원이 한일시멘트 등 특수관계자로부터 발생했다. 한일시멘트, 한일현대시멘트로부터 각각 386억원, 11억원이 발생했다. 지난해 한일L&C는 한일시멘트 206억원, 한일현대시멘트 22억원, 한일홀딩스 3억원 등 특수관계자로부터 총 232억원의 매입거래도 있었다.

이번 세무조사가 탈세, 비자금 조성 등에 관한 기획 세무조사라는 의혹이 제기된 이유는 다양하다. 허 회장과 임원 등이 주가조작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는 점도 거론됐다. 허 회장은 한일시멘트와 HLK홀딩스의 합병 과정서 주가를 인위적으로 조작한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앞서 한일시멘트는 2018년 1월 한일시멘트를 분할존속회사인 한일홀딩스(투자사업 부문)와 분할 신설회사인 한일시멘트(시멘트, 레미콘, 레미탈 사업 부문 등)로 인적분할을 결정했다. 같은 해 7월 인적분할이 이뤄졌다. 

이어 2020년 5월14일 한일현대시멘트의 모회사인 HLK홀딩스와 한일시멘트의 합병 과정서 합병 법인의 지분율을 높이기 위해 한일시멘트 주가를 인위적으로 낮춘 혐의를 받는다. 2018년 8월 12만원대였던 한일시멘트 주가가 합병 당시인 5월 8만원대로 30% 넘게 빠졌다.

주가 하락으로 한일시멘트 합병 비율은 실제 기업가치보다 하락했다.

합병된 HLK홀딩스는 한일홀딩스의 100% 자회사로, 허 회장 소유다. 한일시멘트 기업가치가 낮아질수록 합병이 성사된 이후 허 회장이 수장으로 있는 한일홀딩스의 지분율이 커지는 것이다.


앞서 허 회장은 한일홀딩스 산하의 두 회사를 합쳐 수직계열화하겠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합병 비율은 한일시멘트 1대 HLK홀딩스 0.5024632였다. 검찰은 당시 지주회사인 한일홀딩스가 이 과정을 통해 한일시멘트 최대주주로 올라서게 된 것으로 봤다.

수사당국은 한일시멘트 주가가 떨어짐에 따라 주주들에게 막대한 손해를 끼친 점도 지적했다.

거래처도 조사
부당거래 파악

업계에선 한일시멘트 재무 상태 악화를 무시하고 합병을 추진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허 회장이 주가조작을 한 것이 사실로 밝혀지면 사적 목적을 위해 회사의 재무 건전성을 내팽개친 꼴이다. 

이번 재판 관련 수사는 금융감독원 자본시장특별사법경찰(특사경)이 2020년 7월 한일시멘트, 한일홀딩스, 허 회장 자택 등에 대한 압수수색을 진행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특사경은 K증권사 지점에서 한일시멘트 관계자의 거래 내역 등도 확보한 것으로 전해졌다.

조사 과정서 허 회장은 초등학교 동창생 안모씨의 계좌로 한일시멘트 주식을 차명거래한 것으로 확인됐다. 명의를 빌려준 안씨는 수사기관에 “지주회사 전환 과정서의 경영권 확보”라는 거래 목적을 구체적으로 진술했다가, 법정에서는 “추정한 것을 사실처럼 말했다”며 번복했다.


서울남부지법 형사14부(재판장 장성훈 부장판사)는 지난 8월24일 오후 자본시장법 위반 등 혐의로 기소된 허 회장 등 6명에 대한 속행공판을 열고, 안씨에 대한 증인 신문을 진행했다. 의료보건 관련 제품을 생산하는 중소기업의 대표 안씨는 사석서 만난 허 회장으로부터 부탁을 받아 계좌를 개설해줬다고 증언했다.

안씨는 “증인은 허기호 피고인이 ‘믿을만한 차명계좌가 필요하다. 아무나 할 수는 없고 재산 규모도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명의를 빌려줬다고 수사기관에 진술했는가”라는 검찰의 물음에 “네”라고 답했다.

그는 “뭔가 말 못할 사정이 있는 돈이라고 추정했다. 회사 측에서 계좌개설에 필요한 서류나 정보를 요청해왔고 제가 들어줘 계좌를 개설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계좌개설 이후 통장, 카드, 인증서, 비밀번호 등을 회사 측에서 관리했다. 발생한 세금은 회사 관계자가 사후에 정산해줬다”고 말했다.

검찰에 따르면, 안씨의 차명계좌에는 2010년 3월23일부터 6월17일까지 28회에 걸쳐 3억2000여만원이 입금됐다. “어떤 주식이 거래됐는가”라는 검찰의 물음에 안씨는 “한일시멘트 주식만 사는 것으로 봤다”며 “구체적인 거래 과정을 눈여겨보지는 못했다”고 답했다.

허기호 회장 시세조종 의혹 수사
초등 동창과 주식 차명거래 포착

검찰은 “증인은 수사기관서 ‘한일시멘트 주식을 사는 것을 보고 경영권을 위한 지분 문제인가 보다. 자금의 출처를 증명하지 못하니 차명으로 하는구나 생각했다’고 진술했는데 맞는가”라고 물었다. 이에 안씨는 “대기업 경영자는 자신의 지분을 늘리거나 우호 지분을 확보하는 게 일반적이다 보니 그런 취지라고 상식적으로 추론해 진술한 것”이라고 말했다.

안씨는 사후에 회사로부터 차명계좌를 돌려받은 뒤 직접 한일시멘트 주식을 거래하기도 했다. 그가 2018년 8월21일부터 9월7일까지 거래한 한일시멘트 주식은 6250주로, 거래액은 9억1400여만원이었다. 안씨는 2019년 5월22일 6250주를 8억3000여만원에 블록딜 매도(일괄매각)했다.

안씨는 “허기호로부터 ‘네가(차명계좌를) 관리하는 게 좋겠다’고 들었고 수용했다. 주식을 매수한 경위는 (공동피고인인)김모씨로부터 ‘갖고 있는 돈으로 한일시멘트 주식을 매수해달라’는 요청을 듣고서”라고 말했다. 

안씨가 언급한 김씨는 한일홀딩스 전무이자 계열사인 한일인터내셔널의 대표다. 안씨는 “한일시멘트 측에서 안내해주는 대로 집행만 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안씨는 한일시멘트 주식거래 사실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던 것과 달리 배경 설명은 모호하게 답변했다.

안씨의 진술 번복에 검찰은 진술조서를 직접 제시하며 캐묻기도 했다. 안씨의 금융감독원 진술조서에는 ‘지분구조는 모르지만 아버지(허정섭 명예회장) 성격이 유해요. 삼촌(허동섭·허남섭 명예회장) 등 아버지 형제간 지분 정리가 안됐다. 아버지 지분을 받는 것도 돈이 들어가니 홀딩스로 투자받아 정리한다’고 적혀 있었다.

이에 안씨는 “그때는 그렇게 답변한 게 맞지만 제 생각을 말한 것 같다”며 “숙부님들 지분이 많아서(경영권 확보가) 어려울 수 있겠구나 짐작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다음 기일 또 다른 증인 김씨에 대한 증인 신문을 끝으로 본격적인 피고인 신문에 돌입한다. 2021년 11월 시작된 조 회장의 형사재판은 올해를 넘길 전망이다. 공판기일이 3주서 1달을 주기로 열리는 데다, 검찰이 피고인별 약 2시간의 신문 시간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앞서 2021년 4월 수사를 마무리한 특사경은 검찰에 기소 의견으로 사건을 송치했다. 검찰은 같은 해 11월 이들을 재판에 넘겼다. 한일시멘트 측은 재판서 관련 혐의를 부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뭔가 말 못할
사정 있는 돈?

허 회장은 주식 보고 의무 위반 관련 혐의만 인정하고 시세조종 혐의는 부인했다. 당시 허 회장 측 변호인은 “주식 보고 의무 위반과 관련한 혐의만 인정하고 나머지는 모두 부인한다”고 밝혔다.

한일시멘트 측은 이번 세무조사에 관한 확대 해석을 삼가달라고 했다. 한일시멘트 관계자는 <일요시사>와 통화서 “세무조사는 맞다. 조사에 성실히 응할 것”이라며 “재판과 세무조사를 결부시키는 언론 보도는 흠집 내기를 위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로서는 자세한 내용을 파악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smk1@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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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