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양동주 기자 = 현대엘리베이터 경영권을 사이에 둔 물밑 경쟁이 다시 점화되는 분위기다. 외국계 자본의 공세를 현 경영진이 효율적으로 대처하는 양상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현 경영진에 가해질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는 형국이다.
과거 국내 최대 기업집단이었던 현대그룹은 자동차와 중공업이 떨어져 나간 것을 계기로 내리막을 걸었고, 급기야 중견기업으로 사세가 쪼그라들었다. 그나마 더 이상 외형이 축소되지 않고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현대엘리베이터의 활약 덕분이었다.
계속된 악연
현대엘리베이터는 현대그룹을 떠받치는 캐시카우나 마찬가지다. 현대엘리베이터는 지난해 매출 2조1293억원을 거뒀고, 국내 승강기 시장 점유율은 40%대에 달한다.
현대엘리베이터의 우월한 업계 위상과 안정적인 실적은 타 기업이 현대엘리베이터에 관심 갖는 이유로 작용했다. 특히 글로벌 업계 2위인 쉰들러홀딩AG(이하 쉰들러)는 최근 들어 의미심장한 움직임을 연달아 보여줬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쉰들러와 현대그룹이 처음부터 악연은 아니었다. 2003년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은 정상영 KCC 명예회장과 경영권 분쟁을 벌일 당시 쉰들러에 엘리베이터 사업부를 매각하는 LOI(인수의향서)를 체결했다. 엘리베이터 사업부를 넘기면 현 회장의 경영권 방어를 돕겠다는 제안 때문이었다.
그러나 공시 위반으로 정 회장에 지분매각 명령이 떨어지면서 현 회장의 경영권을 위협하는 세력은 사라졌고, 쉰들러와 맺었던 LOI도 파기됐다.
2006년 쉰들러는 KCC로부터 현대엘리베이터 지분 25.5%를 매입하며 단숨에 2대 주주로 올라섰다. 당시 현대엘리베이터에 대한 적대적 인수·합병(M&A) 가능성이 제기됐지만, 쉰들러는 현대엘리베이터 경영진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표명하면서 논란을 일단락시켰다.
이후 한동안 잠잠했던 쉰들러는 2014년경 현 회장 측과 날 선 대립각을 세우며 전면전에 돌입했다. 이 무렵 현대엘리베이터는 현대상선 경영권 방어를 위해 금융사들과 파생금융상품 계약을 체결했는데, 금융사 인수 가격보다 현대상선 주가가 떨어질 경우 손실 보전을 해주겠다는 조항이 삽입돼있었다.
공교롭게도 해운 경기가 나빠지면서 주가가 연일 추락했고, 쉰들러는 이를 문제 삼아 현 회장 등을 핵심 경영진을 상대로 주주대표소송을 제기했다.
잊을 만하면 계속되는 공세
언제까지?… 깊어지는 고민
9년간 이어진 소송은 최근에서야 일단락됐다. 지난 3월 대법원은 현 회장에게 배상금 1700억원과 지연이자를 지급하라며 쉰들러의 손을 들어줬다. 이 무렵 증권가에서는 배상금을 토대로 추가 지분을 확보해 지분율을 끌어올릴 수 있을 것으로 점쳤다.
하지만 현 회장은 발빠르게 대처했다. 현 회장은 자신이 보유한 현대엘리베이터 주식 320만주(지분율 7.83%)를 담보로 내놨고, 여기에 현대네트워크가 보유한 현대엘리베이터 주식 433만주(10.61%)까지 담보로 금융권에서 2300억원을 끌어왔다.
이렇게 되자 쉰들러는 지분매각이라는 카드를 꺼냈다. 지난 6월19일부터 23일 사이 현대엘리베이터 주식 9만119주를 약 39억원에 처분했고 지난달 19일부터 25일 사이에도 5차례에 걸쳐 주식 14만1927주를 털어내는 데 성공했다. 연이은 주식 매각으로 올해 1분기 기준 15.71%였던 쉰들러의 지분율은 15.34%로 내려앉았다.
쉰들러는 주식 매각 사유를 ‘투자자금 회수’라고 내세웠다. 다만 업계에서는 현대엘리베이터 경영권 확보 전략 차원으로 해석하고 있다. 단기적으로 주식을 매각해 주가를 낮추고, 향후 현대엘리베이터 주식 매수에 나설 거란 계산이다.
실제로 쉰들러의 연이은 주식 매각은 현대엘리베이터 주가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 상황이다. 주식 매각 소식이 전해진 직후였던 지난달 27일 현대엘리베이터 주가는 종가(4만950원) 기준으로 5% 가까운 낙폭을 보였던 게 대표적이다.
쉰들러의 주식 매각에 현 회장 측은 주식 매입으로 맞서고 있다. 현대엘리베이터는 지난 6일, 300억원 규모의 자기주식 취득 신탁계약을 체결했다고 공시했다. 현대엘리베이터의 자사주 취득은 올해 들어 두 번째다. 앞선 지난 5월에도 11월까지 1000억원 규모의 자사주 취득 계획을 밝히며, 현재까지 235만4981주를 확보했다.
이번 자사주 확보로 최대주주인 현 회장의 현대엘리베이터 지분율도 확대된다. 지난 4월 기준 현 회장의 보유 지분율은 26.57%였지만, 이번 자사주 취득을 통해 실질 지배력은 30%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반복되는 수순
다만 쉰들러가 주식 매각을 계속할 경우 현 회장 측의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앞서 배상금 납부 차원에서 현대네트워크가 지난 4월 현대엘리베이터 주식을 담보로 대출받을 때 금리는 연 12%였고, 현 회장은 본인이 보유한 지분 약 320만주를 담보로 연대보증을 섰다. 막대한 이자비용도 문제거니와 현대엘리베이터 주가가 떨어졌을 때 이 주식의 담보 능력이 축소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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