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김민주 기자 = “나는 기억이 안 난다. 그때는 나도 어렸다. 철없을 때였지 않냐.” 표예림씨에게 초·중·고 12년간 학교폭력을 가한 가해자의 말이다. 철이 없으면 때려도 되는 걸까? 가해자는 끝까지 표씨에게 “모른다”고만 할 뿐 사과하지 않았다.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주인공 문동은(송혜교 역)은 고등학생 때 학교폭력을 가한 가해자 네 명에게 복수를 계획하고, 그 복수는 결국 성공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학교폭력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알리는 것 자체도 힘들다.
학창 시절
전체가…
학교폭력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세상에 알리는 것은 자신의 힘들었던 과거를 알리는 일이다. 이 일의 주인공인 표예림씨 역시 피해 사실을 알리는 데 무려 8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올해 28세인 표씨는 스스로를 ‘학교폭력 생존자’라고 지칭한다.
그는 처음 SNS에 자신이 당한 학교폭력 고발 영상을 올리며 자신의 신상공개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한 이유가 뭘까? “대체 왜 나를 괴롭혔어?”라는 질문에 대한 학교폭력 가해자의 대답과 현재 학교폭력 피해를 받고 있거나 고소를 준비하는 사람을 위해 법 개정을 하고 싶어서다.
공부하거나 친구랑 노는 데 정신없어야 하는 학창 시절. 하지만 표씨는 달랐다. 가해자들을 피해 어디로 도망갈지, 어떻게 하면 학교에서 도망칠 수 있을지 고민하기 바빴다.
이는 표씨가 지난달 10일 ‘12년간 당한 학교폭력에 관한 청원’이라는 제목의 국회 국민동의청원서에 상세히 올라와 있다. 표씨가 올린 국민동의청원서는 지난 19일 오전 5만명 이상의 동의를 받아 위원회 회부 기준 동의 수 100%를 달성한 뒤 종료됐다.
표씨는 경상남도의 한 지역에서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졸업했다. 현재 그는 학창 시절에 겪은 학교폭력 후유증으로 ▲대인관계 어려움 ▲불안 장애 ▲불면증 ▲우울증으로 정신과에서 1년 넘게 치료 중이다.
25세에는 담낭절제술을 받았고, 26세엔 맹장 절제술, 27세엔 대낭용종 제거술 등의 수술을 받았다. 또 지금까지도 원인 불명의 복통을 앓고 있다.
그가 용기를 낸 것도 드라마 <더 글로리> 덕분이다. 표씨는 “나와 같은 피해자가 생기지 않기 위해 청원을 신청했다. 학교폭력은 소아 성폭행과 같이 2차 가해가 두려워 스스로 말하기 어렵다. 또 피해를 당한 만큼 치유되는 데 시간이 걸려 즉각 신고도 힘들다. 난 12년 동안 학교폭력에 노출됐지만, 법이 정한 공소시효는 최대 10년”이라고 전했다.
표씨는 국민동의청원서에 학교폭력 신고의 어려움과 문제를 밝혔다. 그러면서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학교폭력을 당했는지도 밝혔다.
12년 학교폭력 피해 사실 알려
공소시효 늘리기 위한 목소리
표씨가 당한 괴롭힘은 ▲집단 따돌림 ▲폭행 ▲특수폭행 ▲상해 ▲특수상해 ▲모욕 ▲갈취 등이다. 2005년부터 2009년까지 표씨가 다녔던 초등학교 학급은 전원이 55명이었는데, 이 중 표씨가 지목한 가해자는 무려 30명에 달했다.
중학교 시절인 2009년부터 2012년 전원 96명 중 가해자는 47명, 여자고등학교를 다녔던 2012년부터 2015년에 학급 전원 84명 중 가해자가 43명이라고 지목했다. 이 중 직접적인 학교폭력 가해자는 17명이다. 나머지는 간접적인 가해자로 분류된다.
학교폭력을 당할 때 표씨는 ‘누가 이걸 해결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저 ‘그냥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가해 학생들에게 “나를 왜 괴롭히냐”고 물으면 “내성적이라서”라고 답했다. 괴롭히는 데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담임교사에게 피해 사실을 말해도 도움받지 못했다. 오히려 “너가 친구들하고 잘 못 어울리기 때문”이라는 반응만 돌아왔다.
표씨는 국민동의청원서를 올리는 것 외에도 자신이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에 ‘학교폭력의 공소시효 폐지를 건의합니다’라는 제목의 영상을 올렸다. 13분46초 분량의 영상에는 표씨가 가해자 중 한 명으로 지목한 A씨와의 통화 녹취록이 담겼다.
“당한 것
다 기억”
A씨는 “궁금한 건 물을 수 있지 않냐. 모든 방관자에게 어떠한 책임도 묻지 않고 진술자 모두의 익명성을 보장하겠다. 만약 어길 시 어떠한 민형사적 책임을 지겠다”는 각서의 내용을 읊었다. 이어 “이걸 안 지키면 네가 법적 책임을 받는 게 맞냐”고 물었다.
이에 표씨는 “아직 그 진술서를 적은 친구들은 아무한테도 얘기한 적 없다. 내 부모님이나 애인한테도 얘기 안 했다. 나는 익명성을 보장한 것이다. 피해를 보지 않았는데 내가 왜 그 책임을 져야 하느냐”고 답했다.
A씨는 계속 “안타까워서 그렇다. 너가 어떠한 민형사상 법적 책임을 져도 괜찮은 거지?” “진술서의 익명성을 보장 못한 것 맞지?” 등의 질문으로 회유했다.
이어 “너가 자꾸 다른 애들한테 연락한 것도 다 알고 있다. 드라마(<더 글로리>) 보고 선을 넘는다는 말이 너무 많다. 진짜로 너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라고 했다. 표씨가 마지막으로 “그때 왜 때렸느냐”고 묻자, A씨는 “나도 모른다”고 말을 흐렸다.
표씨는 녹취 파일 재생이 종료된 후 “어떤가. 이게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사과하는 모습이라고 생각되나”며 답답함을 호소했다.
이어 “할 수 있는 건 청원밖에 없다. 세상이 바뀌어야 저 아이들이 진심으로 내게 미안하다고 얘기할 것이다. 부디 귀찮다고 넘기지 마시고 3분만 시간 내서 의견을 내달라”고 말했다.
표씨 동기들은 표씨가 학교폭력을 당했다는 말에 힘을 실어줬다. MBC <실화탐사대>에 표씨 동기가 익명으로 출연해 “화장실에서 가해자들이 예림이의 머리채를 잡고 변기통에 머리를 집어넣는 장면을 봤다. 예림이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자 더 괴롭혔다. 단순히 친구끼리 치는 장난이 아닌 ‘폭력’이었다”고 증언했다.
본격적인 폭로 역시 표씨 동창생의 역할이었다. 유튜브 채널 ‘표예림동창생’에는 ‘학교폭력 가해자들의 신상을 공개합니다’라는 영상이 올라왔다.
여전히
잘살아
이 영상에는 1명의 피해자와 4명의 가해자가 등장한다. 유튜버는 “예림이는 아직도 고통받으며 사는데 가해자는 잘 살고 있다. 나는 더 이상 예림이의 아픔을 무시할 수 없어 익명의 힘을 빌려 가해자에 대한 신상을 공개하려 한다”고 밝혔다.
먼저 가해자의 졸업사진이 공개됐다.
유튜버는 “이들은 예림이 어깨를 일부러 부딪치며 넘어뜨리고 옷에 더러운 냄새가 뱄다고 욕설과 폭행을 했다. 이들은 예림이를 폭행했지만 아직까지 아무런 처벌 없이 잘 있다”며 “왕따를 주도했던 남○○은 현재 육군 군무원으로 근무 중이다. 친구, 동료와 놀러 다니며 행복하게 사는 중”이라고 폭로했다.
이어 “임○○ 역시 남자친구와 행복하게 잘살고 있다. 가해자 최○○은 이름을 개명해 새 삶을 살고 있다. 장○○은 현재 미용사로 근무 중이다. 12년 동안 한 사람을 괴롭힌 가해자는 여전히 잘살고 있다”며 영상이 끝난다.
2분6초 분량인 짧은 영상의 조회수가 544만회(4월20일 기준)다. 영상을 올린 지 6일 만에 만든 기록이다. 댓글 반응도 뜨거웠다. “나는 외국인이다. 첫 소식을 BBC news서 읽었다. 예림씨 너무 고생했다” “동창생님 용기에 감사드린다. 나 또한 학교폭력 피해자다.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 당했다. 가해자는 나한테 왕따를 시켰고 명예훼손 및 패륜적 농담까지 들었다”는 댓글이 남겨졌다.
이 중에는 가해자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는지 계속 지켜볼 거라는 댓글 반응도 있었다.
가해자 신상이 밝혀지자,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 중 한 명이 근무하던 A 헤어숍서 가해자가 해고됐다. 표씨의 가해자라고 알려진 이들의 신상이 공개되자 프랜차이즈인 A 헤어숍이 빠르게 조치한 것이다.
해당 헤어숍은 누리꾼들로부터 별점 테러를 받으면서 이미지가 크게 실추됐다. 지난 19일 가해자의 직장으로 알려진 A 헤어숍에 따르면, 헤어숍은 지난 18일 가해자로 지목된 직원을 계약해지 조치했다.
가해자 실명·사진 공개 파문
“친구도, 담임도 모두 방관자”
A 헤어숍은 입장문을 통해 “사건을 인지하고 확인된 즉시 이번 학교폭력 가해자로 명명된 직원을 계약해지 조치했다. 추후 본사 차원에서 브랜드 이미지 손실에 대한 별도의 조치를 진행하고 있다. 우리 매장은 해당 직원으로 피해 보고 있는 다른 직원들과 매장에 대해 법적 자문하고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단연코 학교폭력 사실을 알았다면 채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력서와 자격증으로 면접을 보고 직원을 채용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가해자를 깊게 살펴보지 못한 점 후회하고 죄송하다”면서도 “하지만 무분별한 악플과 매장에 장난전화는 자제 부탁드린다. 우리는 학교폭력을 당한 뒤 감내한 피해자 표예림씨를 적극 지지한다. 앞으로 어떠한 일이 있어도 적극 지지할 것을 표명한다”고 전했다.
이런 상황임에도 여전히 가해자는 뻔뻔하다. 지난 19일 가해자 중 한 명이 표씨에게 연락을 취했다. 표씨는 먼저 가해자의 연락을 받기 전 인스타그램 다이렉트 메시지(DM)로 “너는 내게 할 말이 없니”라고 묻자, 가해자는 “미안하다”고 간단하게 답했다.
이어 표씨는 가해자에게 핸드폰 번호를 알려줘 진심 어린 사과를 받으려 했다. 유튜브에 공개된 통화 녹음 내용에서 가해자는 “솔직히 네게 했던 짓이 다 기억은 안 나지만 조금 심했던 건 기억한다. 미안하다”고 말했다.
이에 표씨는 떨리는 목소리로 “너를 포함해서 그 애들이 한 대씩 때린 그 한 대 때문에 난 아직까지 힘들다. 고통을 받았다”며 “난 세세하게 기억한다. 방과후 수업부터 중학교 3학년때까지. 너가 사람이니”라고 물었다.
가해자는 “기억이 안 난다. 그때는 나도 어렸다. 철없을 때였지 않냐”며 발뺌했다. 그러자 표씨는 “철없고 어리고 미안하다 말하면 그렇게 행동해도 되나? 뺨치고, 머리치고, 다리 때리고 그렇게 해도 돼느냐?”고 묻자, 가해자는 “다리는 때린 적 없다”며 적반하장 태도를 보였다.
가해자가 표씨에게 보인 태도는 사과가 아니다. 신상이 공개되도 가해자는 표씨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하지 않았다.
사과는?
"모른다”
지난 19일 표씨는 자신의 유튜브 채널을 통해 “제 청원은 이제 국회 위원회에 회부될 것이며, 이후 모든 과정을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모든 분께 감사 인사를 전한다. 정말 저는 스스로도 너무 운이 좋고 세상엔 착한 분들이 이렇게 많다는 걸 느꼈다. 감사한 마음을 담아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으로 국민 여러분께 감사 인사를 전하려고 한다. 다시 한번 제 목소리를 들어 주시고 같이 연대해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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