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현실판 ‘더 글로리’ 표예림

  • 김민주 기자 alswn@ilyosisa.co.kr
  • 등록 2023.04.24 10:09:11
  • 호수 14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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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학폭 생존자입니다”

[일요시사 취재1팀] 김민주 기자 = “나는 기억이 안 난다. 그때는 나도 어렸다. 철없을 때였지 않냐.” 표예림씨에게 초·중·고 12년간 학교폭력을 가한 가해자의 말이다. 철이 없으면 때려도 되는 걸까? 가해자는 끝까지 표씨에게 “모른다”고만 할 뿐 사과하지 않았다.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주인공 문동은(송혜교 역)은 고등학생 때 학교폭력을 가한 가해자 네 명에게 복수를 계획하고, 그 복수는 결국 성공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학교폭력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알리는 것 자체도 힘들다.

학창 시절
전체가…

학교폭력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세상에 알리는 것은 자신의 힘들었던 과거를 알리는 일이다. 이 일의 주인공인 표예림씨 역시 피해 사실을 알리는 데 무려 8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올해 28세인 표씨는 스스로를 ‘학교폭력 생존자’라고 지칭한다. 

그는 처음 SNS에 자신이 당한 학교폭력 고발 영상을 올리며 자신의 신상공개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한 이유가 뭘까? “대체 왜 나를 괴롭혔어?”라는 질문에 대한 학교폭력 가해자의 대답과 현재 학교폭력 피해를 받고 있거나 고소를 준비하는 사람을 위해 법 개정을 하고 싶어서다.

공부하거나 친구랑 노는 데 정신없어야 하는 학창 시절. 하지만 표씨는 달랐다. 가해자들을 피해 어디로 도망갈지, 어떻게 하면 학교에서 도망칠 수 있을지 고민하기 바빴다. 


이는 표씨가 지난달 10일 ‘12년간 당한 학교폭력에 관한 청원’이라는 제목의 국회 국민동의청원서에 상세히 올라와 있다. 표씨가 올린 국민동의청원서는 지난 19일 오전 5만명 이상의 동의를 받아 위원회 회부 기준 동의 수 100%를 달성한 뒤 종료됐다.

표씨는 경상남도의 한 지역에서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졸업했다. 현재 그는 학창 시절에 겪은 학교폭력 후유증으로 ▲대인관계 어려움 ▲불안 장애 ▲불면증 ▲우울증으로 정신과에서 1년 넘게 치료 중이다.

25세에는 담낭절제술을 받았고, 26세엔 맹장 절제술, 27세엔 대낭용종 제거술 등의 수술을 받았다. 또 지금까지도 원인 불명의 복통을 앓고 있다.

그가 용기를 낸 것도 드라마 <더 글로리> 덕분이다. 표씨는 “나와 같은 피해자가 생기지 않기 위해 청원을 신청했다. 학교폭력은 소아 성폭행과 같이 2차 가해가 두려워 스스로 말하기 어렵다. 또 피해를 당한 만큼 치유되는 데 시간이 걸려 즉각 신고도 힘들다. 난 12년 동안 학교폭력에 노출됐지만, 법이 정한 공소시효는 최대 10년”이라고 전했다.

표씨는 국민동의청원서에 학교폭력 신고의 어려움과 문제를 밝혔다. 그러면서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학교폭력을 당했는지도 밝혔다.

12년 학교폭력 피해 사실 알려
공소시효 늘리기 위한 목소리

표씨가 당한 괴롭힘은 ▲집단 따돌림 ▲폭행 ▲특수폭행 ▲상해 ▲특수상해 ▲모욕 ▲갈취 등이다. 2005년부터 2009년까지 표씨가 다녔던 초등학교 학급은 전원이 55명이었는데, 이 중 표씨가 지목한 가해자는 무려 30명에 달했다.


중학교 시절인 2009년부터 2012년 전원 96명 중 가해자는 47명, 여자고등학교를 다녔던 2012년부터 2015년에 학급 전원 84명 중 가해자가 43명이라고 지목했다. 이 중 직접적인 학교폭력 가해자는 17명이다. 나머지는 간접적인 가해자로 분류된다.

학교폭력을 당할 때 표씨는 ‘누가 이걸 해결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저 ‘그냥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가해 학생들에게 “나를 왜 괴롭히냐”고 물으면 “내성적이라서”라고 답했다. 괴롭히는 데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담임교사에게 피해 사실을 말해도 도움받지 못했다. 오히려 “너가 친구들하고 잘 못 어울리기 때문”이라는 반응만 돌아왔다. 

표씨는 국민동의청원서를 올리는 것 외에도 자신이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에 ‘학교폭력의 공소시효 폐지를 건의합니다’라는 제목의 영상을 올렸다. 13분46초 분량의 영상에는 표씨가 가해자 중 한 명으로 지목한 A씨와의 통화 녹취록이 담겼다.

“당한 것 
다 기억”

A씨는 “궁금한 건 물을 수 있지 않냐. 모든 방관자에게 어떠한 책임도 묻지 않고 진술자 모두의 익명성을 보장하겠다. 만약 어길 시 어떠한 민형사적 책임을 지겠다”는 각서의 내용을 읊었다. 이어 “이걸 안 지키면 네가 법적 책임을 받는 게 맞냐”고 물었다.

이에 표씨는 “아직 그 진술서를 적은 친구들은 아무한테도 얘기한 적 없다. 내 부모님이나 애인한테도 얘기 안 했다. 나는 익명성을 보장한 것이다. 피해를 보지 않았는데 내가 왜 그 책임을 져야 하느냐”고 답했다.

A씨는 계속 “안타까워서 그렇다. 너가 어떠한 민형사상 법적 책임을 져도 괜찮은 거지?” “진술서의 익명성을 보장 못한 것 맞지?” 등의 질문으로 회유했다. 

이어 “너가 자꾸 다른 애들한테 연락한 것도 다 알고 있다. 드라마(<더 글로리>) 보고 선을 넘는다는 말이 너무 많다. 진짜로 너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라고 했다. 표씨가 마지막으로 “그때 왜 때렸느냐”고 묻자, A씨는 “나도 모른다”고 말을 흐렸다.

표씨는 녹취 파일 재생이 종료된 후 “어떤가. 이게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사과하는 모습이라고 생각되나”며 답답함을 호소했다.

이어 “할 수 있는 건 청원밖에 없다. 세상이 바뀌어야 저 아이들이 진심으로 내게 미안하다고 얘기할 것이다. 부디 귀찮다고 넘기지 마시고 3분만 시간 내서 의견을 내달라”고 말했다.

표씨 동기들은 표씨가 학교폭력을 당했다는 말에 힘을 실어줬다. MBC <실화탐사대>에 표씨 동기가 익명으로 출연해 “화장실에서 가해자들이 예림이의 머리채를 잡고 변기통에 머리를 집어넣는 장면을 봤다. 예림이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자 더 괴롭혔다. 단순히 친구끼리 치는 장난이 아닌 ‘폭력’이었다”고 증언했다.


본격적인 폭로 역시 표씨 동창생의 역할이었다. 유튜브 채널 ‘표예림동창생’에는 ‘학교폭력 가해자들의 신상을 공개합니다’라는 영상이 올라왔다.

여전히 
잘살아

이 영상에는 1명의 피해자와 4명의 가해자가 등장한다. 유튜버는 “예림이는 아직도 고통받으며 사는데 가해자는 잘 살고 있다. 나는 더 이상 예림이의 아픔을 무시할 수 없어 익명의 힘을 빌려 가해자에 대한 신상을 공개하려 한다”고 밝혔다.

먼저 가해자의 졸업사진이 공개됐다.

유튜버는 “이들은 예림이 어깨를 일부러 부딪치며 넘어뜨리고 옷에 더러운 냄새가 뱄다고 욕설과 폭행을 했다. 이들은 예림이를 폭행했지만 아직까지 아무런 처벌 없이 잘 있다”며 “왕따를 주도했던 남○○은 현재 육군 군무원으로 근무 중이다. 친구, 동료와 놀러 다니며 행복하게 사는 중”이라고 폭로했다.

이어 “임○○ 역시 남자친구와 행복하게 잘살고 있다. 가해자 최○○은 이름을 개명해 새 삶을 살고 있다. 장○○은 현재 미용사로 근무 중이다. 12년 동안 한 사람을 괴롭힌 가해자는 여전히 잘살고 있다”며 영상이 끝난다. 


2분6초 분량인 짧은 영상의 조회수가 544만회(4월20일 기준)다. 영상을 올린 지 6일 만에 만든 기록이다. 댓글 반응도 뜨거웠다. “나는 외국인이다. 첫 소식을 BBC news서 읽었다. 예림씨 너무 고생했다” “동창생님 용기에 감사드린다. 나 또한 학교폭력 피해자다.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 당했다. 가해자는 나한테 왕따를 시켰고 명예훼손 및 패륜적 농담까지 들었다”는 댓글이 남겨졌다.

이 중에는 가해자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는지 계속 지켜볼 거라는 댓글 반응도 있었다. 

가해자 신상이 밝혀지자,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 중 한 명이 근무하던 A 헤어숍서 가해자가 해고됐다. 표씨의 가해자라고 알려진 이들의 신상이 공개되자 프랜차이즈인 A 헤어숍이 빠르게 조치한 것이다.

해당 헤어숍은 누리꾼들로부터 별점 테러를 받으면서 이미지가 크게 실추됐다. 지난 19일 가해자의 직장으로 알려진 A 헤어숍에 따르면, 헤어숍은 지난 18일 가해자로 지목된 직원을 계약해지 조치했다.

가해자 실명·사진 공개 파문
“친구도, 담임도 모두 방관자”

A 헤어숍은 입장문을 통해 “사건을 인지하고 확인된 즉시 이번 학교폭력 가해자로 명명된 직원을 계약해지 조치했다. 추후 본사 차원에서 브랜드 이미지 손실에 대한 별도의 조치를 진행하고 있다. 우리 매장은 해당 직원으로 피해 보고 있는 다른 직원들과 매장에 대해 법적 자문하고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단연코 학교폭력 사실을 알았다면 채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력서와 자격증으로 면접을 보고 직원을 채용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가해자를 깊게 살펴보지 못한 점 후회하고 죄송하다”면서도 “하지만 무분별한 악플과 매장에 장난전화는 자제 부탁드린다. 우리는 학교폭력을 당한 뒤 감내한 피해자 표예림씨를 적극 지지한다. 앞으로 어떠한 일이 있어도 적극 지지할 것을 표명한다”고 전했다. 

이런 상황임에도 여전히 가해자는 뻔뻔하다. 지난 19일 가해자 중 한 명이 표씨에게 연락을 취했다. 표씨는 먼저 가해자의 연락을 받기 전 인스타그램 다이렉트 메시지(DM)로 “너는 내게 할 말이 없니”라고 묻자, 가해자는 “미안하다”고 간단하게 답했다.

이어 표씨는 가해자에게 핸드폰 번호를 알려줘 진심 어린 사과를 받으려 했다. 유튜브에 공개된 통화 녹음 내용에서 가해자는 “솔직히 네게 했던 짓이 다 기억은 안 나지만 조금 심했던 건 기억한다. 미안하다”고 말했다.

이에 표씨는 떨리는 목소리로 “너를 포함해서 그 애들이 한 대씩 때린 그 한 대 때문에 난 아직까지 힘들다. 고통을 받았다”며 “난 세세하게 기억한다. 방과후 수업부터 중학교 3학년때까지. 너가 사람이니”라고 물었다. 

가해자는 “기억이 안 난다. 그때는 나도 어렸다. 철없을 때였지 않냐”며 발뺌했다. 그러자 표씨는 “철없고 어리고 미안하다 말하면 그렇게 행동해도 되나? 뺨치고, 머리치고, 다리 때리고 그렇게 해도 돼느냐?”고 묻자, 가해자는 “다리는 때린 적 없다”며 적반하장 태도를 보였다. 

가해자가 표씨에게 보인 태도는 사과가 아니다. 신상이 공개되도 가해자는 표씨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하지 않았다.

사과는?
"모른다”

지난 19일 표씨는 자신의 유튜브 채널을 통해 “제 청원은 이제 국회 위원회에 회부될 것이며, 이후 모든 과정을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모든 분께 감사 인사를 전한다. 정말 저는 스스로도 너무 운이 좋고 세상엔 착한 분들이 이렇게 많다는 걸 느꼈다. 감사한 마음을 담아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으로 국민 여러분께 감사 인사를 전하려고 한다. 다시 한번 제 목소리를 들어 주시고 같이 연대해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alswn@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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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사이더’ 정청래 인싸 플랜

‘아웃사이더’ 정청래 인싸 플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국회에서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대표의 독주가 이어지고 있다. 당원의 명령인 개혁을 완수하기 위한 질주다. 당의 ‘아웃사이더’였던 그가 당을 휘어잡기까지 수많은 당원이 등을 밀어줬다. 비주류에서 주류 ‘인싸’로 자리 잡기 위한 정 대표의 다음 스텝이 주목된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정청래 대표의 행보가 매섭다. 윤석열정부에서 막힌 과제를 해치우는 동시에 공약이었던 각종 개혁을 빠르게 완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정 대표는 같은 당 박찬대 의원보다 덜 알려졌다는 평이 나오지만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이하 법사위) 위원장으로서 보여준 ‘사이다’ 면모가 주목받으면서 강성 지지층의 환호를 받았다. 정청래가 걸어온 길 비주류였던 그가 당 대표가 되기까지의 여정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21대 국회 때는 이재명 대표 체제에서 수석 최고위원을 지냈고, 22대 국회에선 법사위원장으로서 국민의힘에 호통을 치며 유튜브 단골 주제가 됐다. 당시 정 대표는 국민의힘이 반대하는 쟁점 법안을 밀어붙이고 상대편 의원과 대립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인기를 끌었다. 그동안 정 대표는 언론 대신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유튜브 등 SNS를 통해 지지자와 직접 소통해 왔다. 민주당 박찬대 의원보다 주목도가 떨어진다는 평이 나오지만 팬덤 정치에 최적화된 모습을 보여줬다. 정 대표는 최근에도 자신을 둘러싼 의혹과 청-명 프레임에 대해 직접 입장을 밝혔다. 그는 SNS에 ‘언론의 자유와 횡포 그리고 언론의 게으름의 관성’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조국 전 대표의 사면·복권을 놓고 일부 언론에서 ‘정청래 견제론’을 말한다.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근거 없는 주장일뿐더러 사실도 아니다. 상식적인 수준에서 바로 반박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이어 “정청래는 김어준이 밀고, 박찬대는 이재명 대통령이 밀었다는 식의 가짜 뉴스가 이 논리의 출발”이라며 “어심이 명심을 이겼다는 황당한 주장, 그러니 정청래가 이재명 대통령과 싸울 것이란 가짜 뉴스에 속지 말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그러면서 “이재명 대통령과 각을 세울 일이 1도 없다. 당정대가 한 몸처럼 움직여 반드시 이재명정부를 성공시킬 생각이 100(이다)”이라고 덧붙였다. 계파 갈등 프레임이 씌워질 조짐이 보이자 이를 사전에 차단한 것으로 풀이된다. 정 대표의 정치적 뿌리를 따지자면 친노(친 노무현)에 가깝다. 그러나 문재인 전 정부서는 친문(친 문재인), 이재명 대표 체제에서는 친명(친 이재명)으로 분류되는 등 계파색이 비교적 옅은 편이다. 1989년 미국 대사관저 점거 농성을 주도한 혐의로 2년형을 선고받은 등 학생 운동권 출신이지만, 대표 운동권인 민주당 86 그룹과의 친분을 공개적으로 과시하지 않았다. 따라서 정 대표는 당의 주류보다 비주류에 가깝다는 게 여의도에 떠도는 평이다. 친문? 친명? 오히려 ‘계파 청산파’ “잘못된 586 문화 배운 97도 청산” 전당대회가 한참이던 당시 한 민주당 의원은 “사석에서 만난 정 의원은 아주 뚝심 있는 사람이었다. 박찬대 의원은 특유의 재치로 호감을 얻는 편이라면 정 의원은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할 말은 제대로 하는 캐릭터”라며 “그래서 계파를 분류하기 어려운 것 같다. 나만의 길을 가는 것 같으면서도 한번 정한 길은 꺾지 않고 걷는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오히려 정 대표는 ‘계파 청산’을 외치는 인물이다. 그는 당 대표 후보이던 당시 “국민께서 비판하시는 586의 운동권 문화는 청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라디오에 출연해서는 “계파는 당을 좀먹는 독약”이라며 강도 높게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정파와 노선은 필요하지만, 계파는 없어져야 한다. 저 스스로 계파에 가입하지 않고, 그런 데서도 저는 안 불러준다”고 말했다. 이어 “저는 586의 질서, 운동권의 수직적 관계가 싫었다. 그런 분들과 몰려 다니는 게 너무 비생산적”이라며 “586의 안 좋은 문화를 따라 배운, 너무 빨리 늙어버린 97 세대들의 그런 것도 청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 대표가 민주당의 수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당원들의 요구를 파악해 발 빠르게 움직였기 때문이다. 8·2 전당대회에서 정 대표는 당선 이후 “이 대통령이 대통령이 된 것은 민주당 주류가 바뀌었단 뜻이고, 민주당에서 정청래가 대표가 됐다는 것은 당의 주인인 당원들이 당의 운명을 결정하는 시대가 왔다는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해석했다. 이날 전당대회를 “예전에는 당원들이 국회의원 눈치를 봤지만, 이제는 국회의원들이 당원 눈치를 봐야 하는 지극히 정상적인 ‘민주당의 민주화’가 드디어 그 깃발을 높이 든 8·2 전당대회”라고 자평하기도 했다. 이처럼 정 대표를 탄탄히 받쳐주는 건 여의도 인맥이 아닌 당원이었다. 정 대표는 이들을 대주주 삼아 힘을 키워 주류로 자리 잡고 있다. 최근에는 당원권에 힘을 쏟으며 역사상 처음으로 ‘평당원 최고위원’ 선출을 시도하는가 하면 당원 주권 정당 실현을 강조하기 위해 ‘대의원 1인1표제’를 띄우기도 했다. 대의원 1인1표제는 당원들의 권한을 대폭 향상하는 방안이다. 정 대표는 지난 18일 열린 국회 당원주권 정당특위 출범식에서 “10년 넘게 당원주권정당, 1인1표를 주장해 왔지만, 아직까지도 열리지 않았다”며 “헌법에서 얘기하고 있는 평등 선거가 민주당에서도 구현이 될 수 있도록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3대 개혁 풀가동 이어 “대한민국 헌법에는 평등 선거가 명시돼있고, 많은 선거에서 1인1표가 행사되지만 유독 더불어민주당에선 누구는 1표, 누구는 17표를 행사한다”며 “헌법적으로 보나 상식적으로 보나 매우 부끄러운 일”이라고 지적했다. 이재명정부가 국민주권시대를 강조하는 만큼 이에 발맞추기 위해서라도 민주당은 권리당원의 권리를 보장하고 상징적인 ‘1인1표’ 시대를 반드시 열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밖에도 정 대표는 당헌·당규 개정을 비롯한 ▲평당원 선출 준비 지원 ▲연말 당원 콘서트 지원 등을 약속했다. 당원의 힘이 커질 수록 정 대표의 정치적 입지도 넓어진다. 정 대표는 연일 국민의힘 때리기에 집중하며 당원으로부터 지지를 받았고, 민주당의 목표로 3대 개혁 완수를 내걸었다. 이는 비주류였던 자신의 정체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전략으로도 읽힌다. 이 대통령이 ‘사이다’ 발언으로 당권까지 올랐다면 정 대표는 각종 특위를 띄우며 거침없는 개혁가의 모습을 굳히겠다는 것이다. 정 대표는 강성 지지층의 요구에 따라 검찰개혁에 속도를 내고 있다. 검찰청을 폐지하는 대신 가칭 중대범죄수사청(중수청)과 공소청을 신설하는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다음 달 국회 본회의에서 처리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정 대표는 지난달 21일 의원총회에서 이 대통령과 당 지도부의 만찬 회동을 언급하며 “검찰청 폐지, 공소청·중수청 설립을 담은 정부조직법을 9월 내 본회의에서 처리하자고 당과 대통령실이 입장을 같이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그는 “약속드린대로 추석 귀향길 뉴스에서 ‘검찰청은 폐지됐다’ ‘검찰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는 기쁜 소식을 국민 여러분께 전해드릴 수 있도록 당에선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신임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된 추미애 의원 역시 “법사위원장 선출은 검찰과 언론, 사법개혁 과제를 완수하라는 국민의 명령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며 전폭적으로 힘을 실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위원회도 속속들이 들어섰다. 우선 민주당은 ‘국민주권 검찰정상화 특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정 대표는 출범식 및 1차 회의에 참석해 “지금의 시대적 과제는 내란 종식, 내란 척결, 이정부 성공에 있다”며 “가장 시급히 해야 할 개혁 중 개혁이 검찰개혁”이라며 “개혁도 골든타임을 놓친다면 저항이 거세져서 좌초되고 말 것이기 때문에 시기가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특위의 주요 과제로는 ▲수사·기소 완전 분리 ▲국민 주권 실현 및 민생 뒷받침 등을 제시했다. 새로운 구심점 이어 언론개혁특별위원회를 출범시키고 언론 보도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추석 전까지 도입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는 언론의 허위·조작 보도에 대해 피해자에게 손해액의 최대 5배 배상을 의무화하는 법적 장치다. 언론뿐만 아니라 ‘유튜버’도 포함하는 안이 논의되는 것으로 전해진다. ‘국민중심 사법개혁특별위원회’도 출범했다. 정 대표는 “대법관의 증원과 추천 방식을 변경하는 내용의 사법개혁안을 추석 전까지 처리하겠다”고 밝혔다. 구석구석 눈도장을 찍기 위한 지역별 공략에도 나섰다. 지난 21일 호남발전특별위원회를 출범시키고 “다들 대한민국 민주화에 대해서 호남이 기여한 바가 지대하다는데, 국가는 ‘호남을 위해서 무엇을 했는가’에 대한 답을 이제 할 때가 되지 않았나”라고 꼬집었다. 정 대표는 “호남만 발전시키면 되겠느냐”며 영남발전특위도 띄웠다. 이는 내년 6월에 있을 지방선거를 대비해 대구·경북 등의 표밭을 다지기 위함으로 풀이된다. 광폭 행보를 보이는 정 대표를 구심점으로 신흥 세력이 탄생할 것이란 관측이 제기된다. 정 대표는 계파 정치와 거리를 두겠다고 거듭 밝혔지만, 권력자의 주변에 사람이 모이는 것은 당연하다는 해석이다. 정 대표의 편에 선 동료 의원들에게도 시선이 쏠린다. 전당대회에서 정 대표를 공식적으로 지지했거나 개혁 선봉에 함께 섰던 의원 등이다. 정 대표가 당권 도전을 선언한 국회 기자회견장에는 장경태·최기상·문정복·임오경·양문석 의원 등이 자리했다. 여의도 이야기를 종합하면, 정 대표는 ‘당원 중심 정당’ 철학에 부합하는 인사로 장 의원을 꼽았다. 현재 장 의원은 평단원 최고위원 선출 절차를 위한 특위위원장을 맡고 있다. 최민희 의원은 정 대표를 공개 지지한 인물이다. 당시 정 대표가 수박 논란에 휩싸였을 당시 최 의원은 “심하게 비난받는 정청래 후보를 지켜보면 짠하다”며 “비난에도 역비난하지 않고 여전히 유쾌·상쾌하게 선거운동하는 정 후보를 격하게 지지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이 밖에도 한민수·김영환·이성윤 의원은 경선 유세 현장에 함께하며 힘을 실어줬다. 왼쪽으로 붙는 민주당…좁아지는 공간 강성 지지층 등에 업고 개혁가의 길로 개혁가의 길을 걷는 정 대표의 존재감이 커지자 일각에서는 조기 대선을 거치며 ‘중도 보수론’으로 넓혀놨던 민주당의 정치 공간이 다시 좁아지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정 대표의 강경한 태도가 민주당의 기조가 된다면 야당과의 협치는 기대하기 어렵다는 평이다. 실제 정 대표는 “악수는 사람하고만 한다”며 국민의힘을 척결 대상으로 대하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16주기 추모식에서 정 대표는 국민의힘 송언석 비상대책위원장(이하 비대위원장)과 악수는커녕 인사조차 나누지 않았다. 송 비대위원장 역시 적대감을 드러내면서 그야말로 ‘국회 빙하기’ 시대가 열렸다. 여당인 민주당은 좌우를 넓게 아우르는 정당이 돼야 앞으로 다가올 선거에서 유리한 구도를 유지할 수 있다. 지금처럼 국민의힘이 보수로서 역할을 하지 못할 때 왼쪽은 조국혁신당, 진보당 등에 맡겨둔 채 중도 보수를 자처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당원의 힘으로 대표가 된 만큼 그는 개혁을 완수하기까지 지금과 같은 태도를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민주당 상임고문단도 “집권여당은 당원만 바라보고 정치를 해선 안 된다”며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정세균 전 국무총리는 당 상임고문단 간담회에서 “정당의 주인은 당원이어야 한다는 데 공감한다”면서도 “우리 국민은 당원만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고 밝혔다. 문희상 전 국회의장도 “내란의 뿌리를 뽑기 위해 전광석화처럼, 폭풍처럼 몰아쳐 처리하겠다는 대목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과유불급이다. 의욕이 앞서 결과를 내는 게 지리멸렬한 것보다는 훨씬 나으나, 지나치면 안 된다”고 조언했다. 또 다른 민주당으로 민주당 사정을 잘 아는 한 관계자는 “‘포스트 이재명’ ‘이재명 키즈’가 아닌 새로운 인물이 나타나야 한다”고 조언했다. 정 대표가 민주당의 새로운 길을 열어야 당이 계속해서 순환하는 등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어 “민주당의 주류는 강성 지지층이다. 당원이 당을 좌지우지하는데 그들의 숫자가 얼마가 되든 목소리가 커 여론을 만드는 것”이라며 “이 주류의 흐름에 올라탄 사람이 정 대표다. 이 대통령이 대표이던 때와는 다른 모습의 민주당을 보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hypak28@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아직 남은 정 견제 세력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대표가 SNS에 올렸다 곧바로 삭제한 게시글이 화제다. 민주당은 지난달 19~20일 양일간 경주를 찾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준비 상황을 점검했는데 정 대표가 마치 천마총 금관을 쓰고 있는 듯한 착시 사진이 문제가 된 것이다. 정 대표가 금관을 직접 착용한 것은 아니지만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 “이재명 대통령의 시에 왕 노릇을 한다” “벌써 왕인 것처럼 군다” 등 거친 비판이 쏟아졌다. 현재 해당 사진은 삭제됐지만 8·2 전당대회 때 불거진 박찬대 의원과의 앙금이 아직 남은 게 아니냐는 뒷말이 나온 이유다. <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