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일요시사 대기획> 법의학으로 본 죽음의 격차 ④최초 확인한 이주노동자 부검률

‘내국인 5배’ 돈벌러 와서 조용히 저 세상으로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다. 일할 때는 ‘우리 직원’이지만 사고가 나면 ‘남의 나라 사람’이 된다. 없으면 현장이 마비될 정도로 의존도가 높지만 막상 드러날라 치면 내쫓아 버리기 일쑤다. ‘코리안 드림’을 꿈꿨던 이주노동자는 먼 타국 땅에서 소리도 없이 스러져 차가운 부검대 위에 오른다. 

2020년 12월20일 경기도 포천의 한 농장 기숙사에서 캄보디아 여성 이주노동자 속헹씨가 숨진 채 발견됐다. 속헹씨가 머물던 비닐하우스 숙소는 난방이 가동되지 않아 영하 16도의 강추위에 무방비로 노출된 상태였다. 포천이주노동자센터 대표인 김달성 목사는 당시 속헹씨의 사인을 ‘동사(저체온증)’로 추정했다. 

타국서
쓸쓸하게

속헹씨는 2016년 4월 비전문취업(E9) 비자로 한국에 입국해 포천의 채소농장에서 4년 넘게 일했다. 고용허가제에 따라 비전문취업 비자를 받은 이주노동자는 최장 4년10개월까지 일할 수 있다. 속헹씨는 지난해 1월 프놈펜(캄보디아의 도시)으로 출국하기 위해 비행기 표를 끊어둔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비행기 대신 부검대에 올랐다. 

변사사건이 일어났을 때 검시를 할 수 있는 권한은 검사에 있다(형사소송법 제222조). 이때 검시(檢視)는 변사자 또는 변사의 의심이 있는 사체를 포함한 현장 상황 등 모든 것에 관해 조사하는 일을 말한다. 법률적인 관점에서 정확한 사인을 밝히기 위한 수사기관의 행위다. 

의학적 관점에서의 검시(檢屍)는 검안과 부검으로 나뉜다. 검안은 사체를 손상하지 않고 외표를 살피는 행위고 부검은 사체를 해부하는 행위다. 검안으로 정확한 사인 규명이 이뤄지지 않을 때 부검을 진행한다. 부검은 그 목적에 따라 사법부검·행정부검·병리부검 등으로 나뉘는데 한국은 사체와 범죄의 연관성을 규명하는 사법부검이 대부분이다.


형사소송법 제139조(검증)는 ‘법원은 사실을 발견함에 필요한 때는 검증을 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동법 제140조(검증과 필요한 처분)는 ‘검증을 위해 신체의 검사, 사체의 해부, 분묘의 발굴, 물건의 파괴, 기타 필요한 처분을 할 수 있다’고 돼있다.

‘평온하지 못한 죽음’ 많아
사망 관련 자료 거의 없어

동법 제173조(감정에 필요한 처분)도 ‘감정에 관해 필요한 때에는 법원의 허가를 얻어 사체의 해부를 할 수 있다’고 했다. 

부검의 법률적 근거를 살펴보면 ‘검증’ ‘감정’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검증은 법률적 정의로 ‘법관이나 수사관이 자기의 감각으로 어떤 대상의 성질이나 상태 따위를 인식해 증거를 조사’하는 것을 말한다. 감정은 ‘재판에 도움을 주기 위해 그 분야의 전문가가 의견과 지식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 한국에서 부검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범죄에 연루돼 순탄치 못한 죽음을 맞았다는 의미와 일정 정도 닿아있다. 니시오 하지메 일본 효고의과대학 법의학교실 주임교수는 저서 <죽음의 격차>에 “내가 매일 대면하는 사람은 병원에서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는 (이른바)‘평온한 죽음’을 맞이하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저술했다.

한국에서 한 해에 발생하는 변사자 수는 3만명 전후로 추산된다. 2020년 사망자 수가 처음으로 30만명을 넘어섰다. 2020년 기준 전체 사망자의 약 10%가 변사인 셈이다. 이 가운데 8000~9000명이 부검대에 오른다. 경찰과 의사의 검안, 검사의 검시를 거쳐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하 국과수) 법의관 앞에 놓이는 사람들이다.

범죄 연루
부검 대상


국과수에 따르면 2020년 부검 건수는 8813건이다. 2016년 8046건, 2017년 8538건, 2018년 8530건, 2019년 8566건 등 한 해 평균 8500건을 부검했다. 사망자 대비 법의부검률(법의부검 시행 수/사망자 수)은 2.9~3%, 변사자 대비 법의부검률(법의부검 시행 수/변사자 수)은 23~24%다.

국과수 등을 통해 공개된 법의부검률은 내국인, 즉 한국 국적을 가진 사람을 대상으로 산출한 결과다. 그렇다면 외국인 부검률은 어떨까. 결론부터 말하면 외국인 부검 관련 자료는커녕 사망 관련 자료도 구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국과수 감정관리시스템 역시 2015년에 이르러서야 외국인 체크란이 생겼다. 

지난 7월1일 경주화백컨벤션센터에서 ‘포스트 코로나 다시 시작하는 기초의학’을 주제로 제29회 기초의학 학술대회가 열렸다. 이날 ‘안전사고’를 주제로 진행한 대한법의학회 프로그램에서 이주노동자 부검 현황과 관련한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박종필 연세대 법의학과 조교수와 김기하 조교의 ‘이주노동자의 법의부검에 대한 고찰’ 연구다.

김 조교는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이주노동자의 유입이 시작됐고 그 수가 점차 증가하고 있다. 이주노동자의 출입과 체류가 증가하면서 한국 사회에 한 구성원으로 자리 잡고 있지만 이들에 관한 법의부검을 비롯한 사망원인 통계 분석은 이뤄지지 않아 현황 파악이 어려운 실정”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한국 법의부검 중 이주노동자(미등록 이주노동자 포함)의 부검 현황을 조사하고 연도별 부검률, 사망원인 및 사망의 종류에 대해 분석했다”고 밝혔다. 

절차 문제?
위험 노출?

이주노동자 부검과 관련해 유의미한 통계가 발표된 건 이번 연구가 처음이다. 박 교수와 김 조교는 이주노동자 사망자 수와 법의부검 시행 수로 법의부검률을 산출했다. 앞서 이들은 외국인과 이주노동자의 기준을 명확히 하기 위해 UN에서 사용하고 있는 이주노동자 개념을 사용했다.

UN의 국제이주노동자권리협약에 따르면 이주노동자는 ‘그 사람이 국적국이 아닌 나라에서 유급활동에 종사할 예정이거나 이에 종사하고 있거나 또는 종사해온 사람’이다. 이 기준에 따라 ▲외국 국적으로 취업활동이 가능한 체류 자격의 종류를 소지한 사람 ▲20세 이상 취업활동을 목적으로 입국한 사람 ▲취업비자 외 경제적인 목적으로 일하는 경우로 이주노동자를 정의했다. 

<일요시사>가 박 교수와 김 조교가 기초의학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이주노동자 부검 관련 자료를 단독으로 입수했다. 연구 자료에 따르면 이주노동자 부검률은 내국인 부검률과 비교해 최소 4.6배, 최대 6배까지 높았다. 이주노동자가 사망 이후 부검대에 오르는 비율이 내국인에 비해 높다는 뜻이다. 

2016년 이주노동자 사망자 수는 2469명이고 이 가운데 336명(13.6%)을 부검했다. 2017년 17.3%(435명/2515명)로 치솟은 부검률은 2018년 16.4%(425명/2587명), 2019년 17.3%(462명/2670명), 2020년 17.4%(495명/2843명)를 기록했다. 

세부 내용 따라 격차 커질 수도
위험한 환경 노출로 죽음 위기↑


박 교수는 “이주노동자가 사망할 경우 내국인과 비교해 그 절차가 복잡하다. 수사 후 그 결과를 해당 대사관이나 본국에 있는 가족에게 전달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불필요한 오해나 시행착오를 줄이기 위해 원칙대로 하다 보니 내국인은 넘어갈 건도 부검하게 되는 경우가 있어 부검률이 높게 나타났다고 보는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또 사망 당시 이주노동자가 처해있던 상황이 법의부검의 대상이 된 경우가 많았을 가능성이 있다. 사고사나 산업재해, 타살 등 내국인도 일반적으로 부검을 하는 사례에 높은 빈도로 노출돼있기 때문에 부검률이 높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목하는 지점은 후자”라고 말했다. 

박 교수는 이주노동자 부검률이 현재 연구 결과보다 더 높게 나타날 수도 있다고 밝혔다. 추락했거나 가격당하는 등 물리적 손상이 아닌 직업병이나 직업성 질환은 산출 과정에서 산업재해가 아니라 질병으로 제외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부검률이 내국인과 비교해 5배 넘게 높다는 점은 세부적으로 분석하면 더 큰 차이를 보일 수 있다는 의미다. 

여기에 연령대가 20~60대에 집중돼있는 이주노동자의 특성도 눈여겨볼 부분이다. 내국인 사망자 연령별 분포를 보면 신생아나 노인 등 아주 어리거나 고령일 때 생을 마감하면 부검을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주노동자는 신생아나 고령층이 많지 않다. 연령대의 양 가장자리가 없는 상황에서도 부검률이 상당한 수준인 셈이다. 

앞뒤 빼고도
더 높았다


특히 20~40대 등 내국인의 경우 사망률이 낮은 연령대로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이주노동자의 부검률이 더 높게 나타날 수 있다. 또 내국인 20~40대의 사망원인 1위가 극단적 선택인 반면, 이주노동자의 경우 사고사나 타살의 비율이 높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내국인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이주노동자 주변에 ‘죽음의 위기’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jsjang@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이주노동자 법의부검 연구 박종필 연세대 의과대학 조교수·김기하 조교 인터뷰

“외국인 사망 자료 없다”

지난 9월20일 연세대 의과대학 본관에서 ‘이주노동자의 법의부검’에 대해 연구 중인 박종필 법의학과 조교수와 김기하 조교를 만났다.

이들은 지난해 3월부터 본격적인 연구에 돌입해 지난 7월1일 경주화백컨벤션센터에서 열린 ‘기초의학 학술대회’에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다음은 박 교수·김 조교와의 일문일답.

-연구를 시작한 계기는.

▲의과대학 학생 때부터 이주노동자라는 특정 계층에 관심이 있었다. 그 관심을 이어오다가 법의학자가 된 뒤 부검을 하는 과정에서 외국인 특히 이주노동자를 자주 접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를 실제로 확인해 보고 싶다는 생각에 연구를 시작하게 됐다.(박종필)

-자료는 어떻게 수집했는지.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본원과 지역사무소, 한국법의의원, 경북대 등에서 부검 자료를 받았다. 이중에서 이름 등을 통해 외국인을 선별했다. 재외동포 등 이름으로 구분이 어려운 때는 부검장부를 확인, 크로스체크를 진행해 누락률을 낮추려고 노력했다.(김기하)

부검하다 자주 접하지만…

-연구 과정에서 어려웠던 점이 있다면.

▲외국인 사망 자료가 정말 없다. 법의부검률을 사망자 수 대비가 아니라 변사자 수 대비로 산출하려 했는데 기관에서 외국인 변사자에 대한 개념이나 분류 자체가 전혀 안 돼있었다. 이 자료가 없다 보니 법무부에서 받은 총 외국인 사망자를 분모로 해 부검률을 낼 수밖에 없었다.(김기하)

-유의미한 결과가 나왔는데. 

▲결과는 유의미하게 나온 게 맞는데 디테일한 부분에서 문제가 있다. 내국인 전체 사망자 수는 통계청에서, 외국인 사망자 수는 외교부나 법무부를 통해 확보했다. 문제는 외교부나 법무부에서 이(사망자 수) 통계를 어떻게 산정하는지를 알 수 없었다는 점이다. 통계의 불확실성이 있어 이 결과에 대해 어디까지 의미 부여를 해야 될 지 조심스러운 부분이 분명히 존재한다.(박종필)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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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구성원의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된 수장이 반년 만에 끌려 내려왔다. 막말에 가까운 강한 발언과 제멋대로인 행보가 탄핵을 불렀다. 강성 수장이 물러나면서 변화를 기대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대화의 문이 열릴 것인가, 더 높은 벽이 쌓일 것인가. 임현택 대한의사협회(이하 의협) 전 회장이 3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탄핵당했다. 지난 5월 취임 이후 6개월 만으로 의협 역사상 2번째, 최단기간 내 불명예 퇴진한 회장이 됐다. 첫 번째는 2014년 4월 임기 1년여를 앞두고 탄핵당한 노환규 전 회장이다. 두 번째 최단기간 의협은 지난 10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의협회관서 임시대의원총회를 열고 임 전 회장의 불신임안을 처리했다. 참석 의원 224명 가운데 170명(75.9%)이 찬성했다. 반대는 50명, 기권 4명이다. 전체 대의원 249명 가운데 224명(91.1%)이 표결에 참여했다. 의협 정관에 따르면, 회장 불신임안은 제적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출석하고, 출석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하면 가결된다. 지난 3월 임 전 회장은 선거서 유효 투표수 3만3084표 중 2만1646표를 받아 당선됐다. 65.43%의 압도적인 지지다. 의협 회장 선거는 정부의 의대 정원 증원 발표로 의정 갈등 수위가 높아지고 있을 무렵에 치러졌다. 전공의가 병원을 떠났고 정부가 ‘2000명’을 강조하던 시기였다. 의협 회원들은 강성 중의 강성으로 분류되는 임 전 회장에게 힘을 실었다. 임 전 회장의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갔던 것일까? 임 전 회장의 언행은 사사건건 도마 위에 올랐다. SNS에 올린 글, 공식 석상서 했던 발언 등이 막말 논란으로 번졌고, 단식투쟁 등의 행보는 ‘쇼’라는 비판을 받았다. 무엇보다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이하 대전협) 비대위원장과 갈등을 빚으면서 의료계 내부 분열을 조장한다는 지적이 뼈아팠다. 임 전 회장이 8개월 동안 보여준 모습은 고스란히 탄핵 사유가 됐다. 의협 회원 사이에서는 임 전 회장이 SNS로 막말과 실언을 해 의사단체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또 ‘임 회장이 전공의 지원금을 빼돌렸다’는 허위 비방 글을 올린 시도의사회 임원에게 고소 취하 대가로 1억원을 요구한 사실이 녹취록을 통해 알려져 논란이 불거졌다. 특정 인물에 대한 수위 높은 비판은 여론의 역풍을 불렀다. 장상윤 대통령실 사회수석을 겨냥해 “정신분열증 환자 같은 개소리”라고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가 환자를 비하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임현택, 6개월 만에 탄핵당해 막말 논란·의대 증원 못 막아 또 2021년 한 의사가 80대 환자에게 ‘맥페란’ 주사제를 투여한 뒤 부작용이 나타나 기소된 재판에 대해서도 도 넘는 발언을 쏟아냈다. 이른바 ‘맥페란 재판’ 항소심서 판사가 1심의 금고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해당 의사의 항소를 기각하자 “이 여자 제정신입니까?”라는 글을 SNS에 올린 것이다. 임 전 회장의 발언에 법원은 이례적으로 “재판장의 인격에 대한 심각한 모욕일 뿐 아니라 국민의 신뢰를 크게 훼손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행동”이라고 공개적으로 유감을 표명했다. 의대 정원 증원 집행정지와 관련해 기각·각하 결정을 내린 재판장이 ‘회유’받았을 것이라는 주장으로도 입길에 올랐다. 서울고등법원 재판부가 결정을 내린 다음 날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재판장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지난 정권에서는 고법 판사들이 차후 승진으로 법원장으로 갈 수 있는 그런 길이 있었는데 제도가 바뀐 다음에는 그런 통로가 막혀서 이분이 아마 어느 정도 대법관에 대한 회유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있다” 말했다. 서울고법은 법원 명의로 입장문을 내고 “해당 단체장의 아무런 객관적 근거가 없는 추측성 발언은 재판장의 명예와 인격에 대한 심대한 모욕”이라면서 “사법부 독립에 관한 국민의 신뢰를 현저히 침해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언사다.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고 밝혔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정부의 2025학년도 의대 증원을 막지 못한 점, 간호법 제정을 저지하지 못한 점이 탄핵 사유로 꼽혔다. 임 전 회장은 총회를 앞두고 의사 회원들에게 사과하고 페이스북 계정을 삭제하는 등 재신임을 호소했지만 반전은 없었다. 회장을 탄핵한 의협은 비대위원회 체제로 전환하고 지난 13일 새로운 회장 선거 전까지 단체를 이끌 비대위원장을 뽑았다. 그 결과 박형욱 대한의학회 부회장이 1차 투표서 총 유효 투표수 233표 중 123표(52.8%)를 얻어 과반으로 당선이 확정됐다. 임기는 내년 1월 차기 회장이 선출될 때까지다. 뒤늦게 호소했지만…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정부는 의료 파탄이란 시한폭탄을 장착해놨다”며 “정말 대화를 원한다면 정부는 먼저 시한폭탄을 멈춰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비대위원들의 합의에 기초해 입장과 행동을 결정할 것”이라며 “비대위 운영서 소외돼왔던 전공의들과 의대생들의 견해가 충분히 반영될 수 있게 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임 전 회장이 물러나고 새로운 비대위원장이 등장하면서 의협의 투쟁 방향에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커졌다. 일각에서는 의협의 이번 행보를 의정 갈등의 중요한 변곡점으로 보고 있다. 강성 회장을 필두로 정부와 강하게 대립했던 이전 모습서 벗어나 대화에 참여할 것이라는 의견과 이전보다 더 수위 높은 대정부 투쟁이 예상된다는 의견으로 갈리는 중이다. 후자의 배경에는 대전협이 있다. 앞서 박단 비대위원장 등 전공의 70여명은 전날 의협 대의원들에게 “비대위원장으로 박형욱 교수를 추천한다”는 메시지를 보내 공개 지지 의사를 드러냈다. 대의원회서도 박단 비대위원장의 공개 지지에 대해 경고하는 등 잡음이 일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대전협의 지지를 등에 업은 박형욱 비대위원장이 당선되면서 전공의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의협과 대전협의 공조가 본격화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문제는 양측의 교류가 정부와의 대화로까지 이어질 수 있느냐는 점이다.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당선 소감부터 정부의 태도 변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또 윤석열 대통령의 변화도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의정 갈등서 줄곧 선봉에 선 전공의들은 ‘의대 정원 증원 백지화’라는 요구사항서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인 적이 없다. 전공의의 행보는 의대생, 의대 교수 등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영향력 커진 전공의 단체 의료계가 전공의 중심으로 굴러가고 있는 셈이다. 실제 대전협은 지난 11일 출범했던 여야의정협의체(이하 협의체)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협의체는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불참하고 의료계에서는 학술 단체인 대한의학회와 의대 학장 모임인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KAMC)만 참석하는 등 ‘반쪽 출범’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협의체의 운영 기한은 올해 말까지로, 다음 달 22~23일 전에 의미 있는 결과를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태도다. 하지만 박단 비대위원장은 협의체에 대해 ‘무의미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협의체가 첫발을 뗀 11일 SNS에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는 전공의와 의대생, 당사자 없이 대화나 하겠다는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다”며 “한 대표는 2025년 의대 모집 정지와 업무개시명령 폐지에 대한 입장부터 명확히 밝히시길 바란다”고 일갈했다. 이어 “눈치만 보며 뭐라도 하는 척만 하겠다면 한동훈의 ‘여야의정 협의체’ 역시 임현택 전 의협 회장의 ‘올바른 의료를 위한 특별위원회(올특위)’와 결국 같은 결말일 것”이라고 우려했다. 올특위는 의료계의 입장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의협 주도로 구성한 범의료계 특별위원회다. 전공의와 의대생이 해당 위원회에 불참하면서 파행 운영되다 지난 7월 해체됐다. 정부는 협의체서 의료계가 제안한 내용에 대해 “진정성 있게 검토하겠다”는 견해를 밝혔다. 지난 11일 협의체서 의료계는 한국의학교육평가원 자율성 보장, 추가 합격 제한 등을 통한 2025학년도 의대 선발 인원 축소 등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윤순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실장은 지난 14일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이하 중대본) 회의를 주재하면서 “마주 앉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만큼 활발한 대화와 소통을 통해 누적된 갈등을 해소하고 신뢰를 회복해 국민이 원하는 결과를 끌어낼 수 있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의협과 전공의 등 다른 의료계 단체의 참여를 호소했다. 박단 공개 지지 새 비대위원장 강경 투쟁이냐 VS 노선 변화냐 의료계 내부 상황은 크게 바뀌었지만 향후 상황은 여전히 ‘시계 제로(0)’ 상태다. 임 전 회장과 박단 비대위원장 간 갈등의 불씨도 여전히 살아있다.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공개적으로 요청하는 등 ‘(임 전 회장과)같이 갈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실제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요청하면서 “이해와 소통이 가능한 새로운 회장을 필두로 의협과 대전협 두 단체가 향후 상호 연대를 구축할 수 있길 기대한다”는 입장문까지 냈다. 임 전 회장의 탄핵안 가결 직후 박 비대위원장이 “결국 모든 길은 바른 길로”라는 내용의 SNS 글을 올리기도 했다. 문제는 임 전 회장이 박단 비대위원장을 상대로 반격을 진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임 전 회장은 탄핵 사흘 만에 닫았던 페이스북 계정을 다시 열고 “박단과 그 뒤에서 박단을 배후 조종해 왔던 자들이 무슨 일을 해왔는지 전 의사 회원들에게 아주 상세히 밝히겠다”며 박단 비대위원장을 저격하는 글을 올렸다. 그러면서 “의협 대의원회 비대위원장과 의협 회장 선거가 더 이상 왜 필요한가”라면서 “박단이 의협 회장 겸 비대위원장을 맡아 모든 권한과 책임하에 의료 농단을 해결하면 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지지해주셨던 모든 분에게 우선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며 “이유가 어떻든 회장 취임 전부터 탄핵하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자들에게 빌미를 주어 넘어간 것 자체가 제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또 의협의 근본적인 개혁의 첫걸음으로 의협 대의원회 폐지 등을 내용으로 하는 민법상의 사원총회를 개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원총회는 민법에 규정된 사단법인의 최고의사결정 기관이다. 의협 최고의결기구로 알려진 대의원총회보다 상위에 있고 정관의 규정으로 폐지할 수 없다. 사원총회는 이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나 총 사원 5분의 1 이상이 회의의 목적 사항을 제시해 청구하는 경우 소집될 수 있다. 반격 시작 내부 갈등? 올해 2월 시작된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이 10개월째로 접어들었다. 온갖 말이 오갔지만 되짚어보면 조금도 좁혀지지 않은 평행선 상황이 계속되는 모양새다. 정부와 의료계의 대치 상황이 길어질수록 ‘의료 붕괴’는 가시화되고 있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