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대한항공 성범죄 ‘입꾹닫’ 회장님, 왜?

상사에 당했고 회사가 버렸다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대한항공의 성범죄 사건 대처가 점입가경이다. 가해자에 대한 징계 절차도 밟지 않은 데 이어 사직서를 받아들여 논란이 됐다. 특히 최근에는 피해자와의 민사소송을 재판부가 조정하자 항소한 것으로 확인됐다. 법조계에서조차 이번 대한항공의 항소는 굉장히 이례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통상 사측이 성범죄 사건 1심 민형사 재판에서 패소하게 되면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항소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A씨가 피해를 본 것은 5년 전이다. 수치스러운 사건이라 공개되는 것은 원하지 않았고 조용히 처리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사실상 가해자 편에 서서 어떤 조치도 하지 않는 사측의 행태에 분노했다. 사건이 알려지자 동료들의 수군거림, 집단따돌림을 겪어야 했다. 실태조사에 나선다고 했던 대한항공은 오히려 A씨를 향한 2차 가해를 방관하거나 모르쇠로 일관했다.

지속된 피해
모르쇠 일관

2017년 여름 가해자는 업무 문제로 곤란한 상황에 처한 부하직원을 외부로 불러내 성폭행하려 했다. 그러나 피해자 A씨는 과거 성희롱 사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경험했기에 쉽사리 신고하지 못했다. 그는 가해자와 직원들로부터 지속적인 성희롱, 직장 내 괴롭힘과 인사상 불이익 등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실제 A씨는 회사에 해당 사건을 알린 후 갑자기 서비스 클리닉 입과자로 통보받았다. 서비스 클리닉은 서비스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는 직원을 대상으로 하는 자아비판 프로그램이다. 피해자 입장에서는 교육이라는 이름의 망신주기, 징벌적 조치라고 느낄 수 있다.

A씨는 사측에 가해자에 관한 철저한 조사와 추가 피해는 없는지 조사해야 한다고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에게 의견서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조 회장은 A씨의 의견서에 단 한 차례도 답변하지 않았다.


<일요시사> 취재 결과 당시 대한항공은 피해자의 첫 번째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실태조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피해자와 가해자가 누군지 노출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으로 보인다. A씨는 이후에도 수차례 조사를 요청했다.

그러나 대한항공은 “피해자 보호를 절대 원칙으로 이후 모든 처리 절차를 피해자 측과 상의해 결정했고, 피해자 변호인은 징계위원회 개최 시 가해자의 사직서를 조속히 접수해달라고 요청했다”며 “가해자가 추가 피해를 저지른 게 없는지에 대한 조사 요구는 접수된 바 없다”는 거짓된 입장을 밝힌 바 있다.

피해자 측이 위원회 구성원들과 피해 사건의 내용을 최소한만 공유했고, 여러 차례에 걸치게 되는 상벌위원회 기간 등을 고려해 별도의 징계 절차 없이 가해자에게 사직서 처리를 요구하도록 했다는 주장이다.

피해자 측 변호인은 사측과의 면담 당시 ‘가해자 징계’를 언급한 적이 없었다고 전했다. 대한항공이 먼저 징계위원회를 열면 피해 사실이 대외적으로 알려질 수 있기에 ‘가해자를 따로 불러 가해 사실을 인정하면 사직서를 받는 형식으로 사건 종결 처리가 가능하다’고 거론했다고 한다.

특히 가해자에 대한 징계 절차를 거치지 말아 달라고 전한 적 없다고 강조했다. 대한항공이 피해자에 대한 추가 조사 요구가 있었음에도 없다고 한 것은 거짓말이라는 지적이다.

성폭력 피해자 압박에 사건 축소 시도
가해자 징계 없이 퇴사 처리 속전속결

이 때문에 대한항공이 가해자에게 가해 사실을 재빠르게 인정하도록 압박해 사건을 축소하려 했다는 의혹이 제기된다. 처음이자 마지막 면담이 진행된 날 퇴사 처리가 일사천리로 진행된 것도 미심쩍은 부분이라는 게 피해자 측 주장이다.


통상 임직원이 파면 등의 중징계를 받으면 타 회사로의 이직이 힘들어진다. 대한항공이 가해자에게 사건이 사실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중징계를 면치 못할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사직서 제출이라는 해결책을 제시해줬다는 것이다.

이 같은 미온적인 대처로 일관한 대한항공의 행태에 분노한 A씨는 고용노동부에 ‘직장 내 성희롱(강간미수)·직장 내 괴롭힘 금지 및 사용자 조치 의무 위반’ 혐의로 진정을 넣었다. 고용 당국은 현장조사를 통해 A씨가 제기한 내용을 확인하고 사건 당사자 간의 면담을 진행했다.

당국은 대한항공이 가해자에 대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봤다. 다만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지연 조사, 피해자 보호 소홀, 신고자에 대한 불리한 처우나 비밀누설 금지 등은 혐의가 없으며 다만 대한항공 직장 내 괴롭힘은 있다고 봤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중부지방고용노동청 관련 자료에 따르면 대한항공 직원 B씨의 괴롭힘 행위는 2019년 1월로 법 시행일인 2019년 7월16일 이전이므로 처벌이 불가하다고 해석했다. 법 적용 대상이 아니기에 처벌하지 못할 뿐 비상식적 행위는 존재했다는 설명이다.

당시 중부지방고용노동청은 “대한항공 내 성희롱 재발방지 및 상호 존중하는 직장문화 정착을 위해 조직문화 점검, 맞춤 전문교육 실시, 고충상담 전담자 지정 등에 대해 개선 지도를 했다”고 설명했다.

방관한 회장
의견서 무시

대한항공의 방관으로 A씨는 수면장애와 우울증에 시달렸고, 정신과 치료까지 받아야 했다.

여성가족부가 2018년 배포한 ‘직장 내 성희롱·성폭력 사건 처리 매뉴얼’에 따르면 회사는 직장 내 성폭행·성희롱 발생 사실을 알게 되면 성희롱고충심의위원회나 조사위원회 등을 구성해 조사에 들어가야 한다. 조사 결과 사실로 드러나면 회사는 징계위원회나 인사위원회를 열어 가해자에 대한 징계 등 제재를 결정해야 한다.

가해자에 대한 조치 이전에 회사는 반드시 피해자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

서울중앙지법은 대한항공이 직장 내 성희롱, 성폭력 사건에 대한 실태를 전수조사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법원은 조정 결정사항을 통해 “피고 주식회사 대한항공은 외부 컨설팅업체에 위임해 회사 내 전 임직원들을 대상으로 직장 내 성희롱, 성폭력 사건에 대한 실태를 전주조사하고 그 조사에 따른 대응책을 마련하라”고 판시했다.

그러나 대한항공은 “피고 회사가 원고(피해자) 측과 협의를 통해 가해 직원을 사직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원고 또는 노동조합을 통해 사실과 다른 언론 보도가 지속적으로 나옴에 따라 피고 회사 내·외부의 오해가 심화되고 있다”며 법원의 판단에 불복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A씨가 제기한 민사소송은 상당한 의미가 있었다. 직장 내 성폭력에 기업 책임이 있다고 인정하는 판단이 나왔기 때문이다. 지난 7월 서울중앙지법 민사32단독(유영일 부장판사)은 A씨에게 지급해야 할 손해배상액을 5000만원으로 정하고 이 중 1500만원을 대한항공이 지급해야 한다고 선고했다.


이는 손해배상액 5000만원 중 가해자가 피해자와의 조정으로 지급한 3500만원을 제외한 나머지 금액이다.

재판부는 “성희롱 방지 교육 등 다수를 상대로 한 교육을 넘어서 실효성 있는 위험 발생 및 방지조치를 제대로 하지 못한 (대한항공의)감독상의 미비가 있었다”며 “강간미수 행위는 외형적, 객관적으로 피고(대한항공)의 피용자인 ○○○(가해자)의 사무집행에 관해 발생한 사고라고 봄이 타당하다”고 밝혔다.

이직 쉽게?
취업 돕기

앞서 2020년 7월 A씨는 가해자와 대한항공(대표이사 조원태·우기홍)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이후 지난해 1월 재판부의 강제조정을 가해자만 받아들이면서 피고는 대한항공만 남게 됐고, 2년간 진행된 1심 재판의 결과는 ‘대한항공의 1500만원 손해배상금 지급’이었다.

재판의 쟁점은 가해자의 성폭력이 ‘대한항공의 사무집행에 관해’ 발생했는지 여부였다. 민법 756조에는 ‘타인을 사용해 어느 사무에 종사하게 한 자(대한항공)는 피용자(가해자)가 그 사무집행에 관해 제3자(피해자)에게 가한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나와 있다.

쉽게 말해 가해자의 성폭력이 업무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인정돼야 대한항공의 손해배상 책임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특히 사건 당시 가해자가 휴가 중이었던 상황이라, 대한항공은 ‘가해자의 성폭력이 사무집행에 관한 것이 아니다’란 주장을 내세웠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강간미수 행위가 비록 휴가 중 행해진 것이긴 하나 (가해자는)원고에 대한 업무 감독과 평정 등의 권한을 행사하는 자리로 복귀할 예정이었다”며 “(업무 관련)설명을 빌미로 원고를 불러 (강간미수 행위가)감행된 것이어서 그 배경과 동기가 외관상 업무와 관련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높은 위험군에 속할 것으로 보이는 ○○○(가해자)에 대해 성희롱 방지 교육 등 다수를 상대로 한 교육을 넘어서 실효성 있는 위험 발생 및 방지조치를 제대로 하지 못한 (대한항공의)감독상 미비가 있었다”며 “민법 756조를 그 존재 이유 중 하나인 피해자의 보호 강화라는 취지와 함께 객관적으로 살피면 (가해자의)강간미수 행위는 외형적·객관적으로 피고(대한항공)의 피용자인 ○○○의 사무집행에 관해 발생한 사고라고 봄이 타당하다”고 밝혔다.

다만 재판부는 A씨 측이 지적한 가해자 사직 절차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해당 사건 판결문에 따르면 피해자 측은 “남녀고용평등법과 대한항공의 취업규칙에 따라 (성폭력 발생 후)대한항공이 가해자를 징계할 의무가 있었다”며 “더욱이 (대한항공은 사내)조사 과정에서 모순된 변명을 하며 도리어 피해자를 비난하는 직원(가해자)을 징계하지 않았고 그 입장을 원고에게 알려주지도 않은 채 사직 처리를 함으로써, (피해자는)형사고소 등 권리행사를 할 기회마저 상실하게 됐다”고 강조했다.

민사 조정…항소 후 회유
조사 요청 모르쇠로 일관

그러나 재판부는 “(가해자가)일부 세부 항목에 관해 이의를 제기하긴 했으나 결론적으로 (성폭력의 사실관계에)수긍했고, 나아가 사직서를 제출하지 않으면 고용관계의 종료로 결론지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징계 절차를 밟을 수밖에 없다는 피고(대한항공)의 입장에 면담 당일 사직서를 제출했다”며 “이는 징계 절차를 밟아서 도달하는 해고와 결과의 면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봤다.

대한항공은 이 같은 법원의 판단에 불복했다. 이는 성폭력 사건에 대한 도의적인 책임을 지는 타 기업들과는 대조적인 행보다. 법원 홈페이지 내 사건번호 조회 시스템으로 사건 진행 내용을 보면 대한항공은 지난 8일 소송대리인(법무법인 한결 담당 변호사 이경우)을 통해 항소장을 제출했다.

다음 날인 9일 대한항공 소송대리인 측은 보정명령 등본까지 받았다.

대한항공은 오히려 A씨에게 노조 활동을 중단하면 실태조사를 진행하고 재발방지에 나서겠다고는 조건을 제시하는 등 회유에 나섰다. 또 언론에 보도된 대한항공 성폭력 기사에 대한 정정보도를 피해자가 요청해야 한다고 조건을 내걸었다.

다른 기업은 어떨까? 대다수의 기업이 성폭력 피해자에게 이 같은 압력과 비상식적 행위로 사건을 축소시키려 하지만 도의적인 책임까지 외면하지는 않는다. 오너가 직접 공식 입장을 밝히거나 심각한 경우 기자회견을 통해 사과하는 경우도 있다.

최근 포스코는 최정우 회장이 침묵으로 일관했으나 쇄신 계획을 발표했다. ‘성 윤리 위반 제로 회사’를 만들겠다며 사내 문화를 개선하겠다고 했다. 사건 초기의 미온적인 태도와는 달라진 모습이다.

삼성, LG, 현대차 등 주요 대기업들은 모두 성 비위와 관련해서는 무관용 원칙을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일부 권위주의적 문화가 남아있는 업종을 중심으로 곳곳에서 성폭력 사건이 지속되고 있다. 호텔신라 성추행 사건이 대표적이다. 2016년 호텔신라 입사 2년 차인 20대 여성이 같은 팀 상사로부터 세 차례 강제추행을 당했다.

성추행 발생 직후 직속 상사에게 보고했으나 회사 정식 조사는 2년 뒤에야 진행됐고, 피해자와 가해자 분리가 이뤄지지 않다가 결국 피해자만 원치 않는 부서로 인사이동됐다. 고용노동부조차 가해자의 부서 이동이 불가능했다는 회사 쪽 주장을 합리적이라고 판단했다.

도의적 책임?
“우린 모른다”

익명을 요구한 한 대기업 간부는 “성추행 전력이 있는 사람이 임원을 달기도 했고, 성추행 장면이 찍힌 사진까지 나온 팀장급 직원은 보직해임을 당하고 좌천됐지만 여전히 근무 중”이라고 말했다. 금융권에서도 성폭력 사건이 꾸준히 발생하고 있다. 국민의힘 윤창현 의원실에 따르면, 2017년부터 지난 3월까지 국내 금융사의 사내 윤리강령 위반 총 220건 중 성희롱·성추행 관련 징계가 76건으로 가장 많았다.


<hounder@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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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구성원의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된 수장이 반년 만에 끌려 내려왔다. 막말에 가까운 강한 발언과 제멋대로인 행보가 탄핵을 불렀다. 강성 수장이 물러나면서 변화를 기대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대화의 문이 열릴 것인가, 더 높은 벽이 쌓일 것인가. 임현택 대한의사협회(이하 의협) 전 회장이 3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탄핵당했다. 지난 5월 취임 이후 6개월 만으로 의협 역사상 2번째, 최단기간 내 불명예 퇴진한 회장이 됐다. 첫 번째는 2014년 4월 임기 1년여를 앞두고 탄핵당한 노환규 전 회장이다. 두 번째 최단기간 의협은 지난 10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의협회관서 임시대의원총회를 열고 임 전 회장의 불신임안을 처리했다. 참석 의원 224명 가운데 170명(75.9%)이 찬성했다. 반대는 50명, 기권 4명이다. 전체 대의원 249명 가운데 224명(91.1%)이 표결에 참여했다. 의협 정관에 따르면, 회장 불신임안은 제적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출석하고, 출석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하면 가결된다. 지난 3월 임 전 회장은 선거서 유효 투표수 3만3084표 중 2만1646표를 받아 당선됐다. 65.43%의 압도적인 지지다. 의협 회장 선거는 정부의 의대 정원 증원 발표로 의정 갈등 수위가 높아지고 있을 무렵에 치러졌다. 전공의가 병원을 떠났고 정부가 ‘2000명’을 강조하던 시기였다. 의협 회원들은 강성 중의 강성으로 분류되는 임 전 회장에게 힘을 실었다. 임 전 회장의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갔던 것일까? 임 전 회장의 언행은 사사건건 도마 위에 올랐다. SNS에 올린 글, 공식 석상서 했던 발언 등이 막말 논란으로 번졌고, 단식투쟁 등의 행보는 ‘쇼’라는 비판을 받았다. 무엇보다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이하 대전협) 비대위원장과 갈등을 빚으면서 의료계 내부 분열을 조장한다는 지적이 뼈아팠다. 임 전 회장이 8개월 동안 보여준 모습은 고스란히 탄핵 사유가 됐다. 의협 회원 사이에서는 임 전 회장이 SNS로 막말과 실언을 해 의사단체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또 ‘임 회장이 전공의 지원금을 빼돌렸다’는 허위 비방 글을 올린 시도의사회 임원에게 고소 취하 대가로 1억원을 요구한 사실이 녹취록을 통해 알려져 논란이 불거졌다. 특정 인물에 대한 수위 높은 비판은 여론의 역풍을 불렀다. 장상윤 대통령실 사회수석을 겨냥해 “정신분열증 환자 같은 개소리”라고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가 환자를 비하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임현택, 6개월 만에 탄핵당해 막말 논란·의대 증원 못 막아 또 2021년 한 의사가 80대 환자에게 ‘맥페란’ 주사제를 투여한 뒤 부작용이 나타나 기소된 재판에 대해서도 도 넘는 발언을 쏟아냈다. 이른바 ‘맥페란 재판’ 항소심서 판사가 1심의 금고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해당 의사의 항소를 기각하자 “이 여자 제정신입니까?”라는 글을 SNS에 올린 것이다. 임 전 회장의 발언에 법원은 이례적으로 “재판장의 인격에 대한 심각한 모욕일 뿐 아니라 국민의 신뢰를 크게 훼손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행동”이라고 공개적으로 유감을 표명했다. 의대 정원 증원 집행정지와 관련해 기각·각하 결정을 내린 재판장이 ‘회유’받았을 것이라는 주장으로도 입길에 올랐다. 서울고등법원 재판부가 결정을 내린 다음 날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재판장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지난 정권에서는 고법 판사들이 차후 승진으로 법원장으로 갈 수 있는 그런 길이 있었는데 제도가 바뀐 다음에는 그런 통로가 막혀서 이분이 아마 어느 정도 대법관에 대한 회유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있다” 말했다. 서울고법은 법원 명의로 입장문을 내고 “해당 단체장의 아무런 객관적 근거가 없는 추측성 발언은 재판장의 명예와 인격에 대한 심대한 모욕”이라면서 “사법부 독립에 관한 국민의 신뢰를 현저히 침해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언사다.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고 밝혔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정부의 2025학년도 의대 증원을 막지 못한 점, 간호법 제정을 저지하지 못한 점이 탄핵 사유로 꼽혔다. 임 전 회장은 총회를 앞두고 의사 회원들에게 사과하고 페이스북 계정을 삭제하는 등 재신임을 호소했지만 반전은 없었다. 회장을 탄핵한 의협은 비대위원회 체제로 전환하고 지난 13일 새로운 회장 선거 전까지 단체를 이끌 비대위원장을 뽑았다. 그 결과 박형욱 대한의학회 부회장이 1차 투표서 총 유효 투표수 233표 중 123표(52.8%)를 얻어 과반으로 당선이 확정됐다. 임기는 내년 1월 차기 회장이 선출될 때까지다. 뒤늦게 호소했지만…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정부는 의료 파탄이란 시한폭탄을 장착해놨다”며 “정말 대화를 원한다면 정부는 먼저 시한폭탄을 멈춰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비대위원들의 합의에 기초해 입장과 행동을 결정할 것”이라며 “비대위 운영서 소외돼왔던 전공의들과 의대생들의 견해가 충분히 반영될 수 있게 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임 전 회장이 물러나고 새로운 비대위원장이 등장하면서 의협의 투쟁 방향에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커졌다. 일각에서는 의협의 이번 행보를 의정 갈등의 중요한 변곡점으로 보고 있다. 강성 회장을 필두로 정부와 강하게 대립했던 이전 모습서 벗어나 대화에 참여할 것이라는 의견과 이전보다 더 수위 높은 대정부 투쟁이 예상된다는 의견으로 갈리는 중이다. 후자의 배경에는 대전협이 있다. 앞서 박단 비대위원장 등 전공의 70여명은 전날 의협 대의원들에게 “비대위원장으로 박형욱 교수를 추천한다”는 메시지를 보내 공개 지지 의사를 드러냈다. 대의원회서도 박단 비대위원장의 공개 지지에 대해 경고하는 등 잡음이 일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대전협의 지지를 등에 업은 박형욱 비대위원장이 당선되면서 전공의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의협과 대전협의 공조가 본격화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문제는 양측의 교류가 정부와의 대화로까지 이어질 수 있느냐는 점이다.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당선 소감부터 정부의 태도 변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또 윤석열 대통령의 변화도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의정 갈등서 줄곧 선봉에 선 전공의들은 ‘의대 정원 증원 백지화’라는 요구사항서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인 적이 없다. 전공의의 행보는 의대생, 의대 교수 등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영향력 커진 전공의 단체 의료계가 전공의 중심으로 굴러가고 있는 셈이다. 실제 대전협은 지난 11일 출범했던 여야의정협의체(이하 협의체)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협의체는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불참하고 의료계에서는 학술 단체인 대한의학회와 의대 학장 모임인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KAMC)만 참석하는 등 ‘반쪽 출범’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협의체의 운영 기한은 올해 말까지로, 다음 달 22~23일 전에 의미 있는 결과를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태도다. 하지만 박단 비대위원장은 협의체에 대해 ‘무의미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협의체가 첫발을 뗀 11일 SNS에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는 전공의와 의대생, 당사자 없이 대화나 하겠다는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다”며 “한 대표는 2025년 의대 모집 정지와 업무개시명령 폐지에 대한 입장부터 명확히 밝히시길 바란다”고 일갈했다. 이어 “눈치만 보며 뭐라도 하는 척만 하겠다면 한동훈의 ‘여야의정 협의체’ 역시 임현택 전 의협 회장의 ‘올바른 의료를 위한 특별위원회(올특위)’와 결국 같은 결말일 것”이라고 우려했다. 올특위는 의료계의 입장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의협 주도로 구성한 범의료계 특별위원회다. 전공의와 의대생이 해당 위원회에 불참하면서 파행 운영되다 지난 7월 해체됐다. 정부는 협의체서 의료계가 제안한 내용에 대해 “진정성 있게 검토하겠다”는 견해를 밝혔다. 지난 11일 협의체서 의료계는 한국의학교육평가원 자율성 보장, 추가 합격 제한 등을 통한 2025학년도 의대 선발 인원 축소 등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윤순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실장은 지난 14일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이하 중대본) 회의를 주재하면서 “마주 앉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만큼 활발한 대화와 소통을 통해 누적된 갈등을 해소하고 신뢰를 회복해 국민이 원하는 결과를 끌어낼 수 있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의협과 전공의 등 다른 의료계 단체의 참여를 호소했다. 박단 공개 지지 새 비대위원장 강경 투쟁이냐 VS 노선 변화냐 의료계 내부 상황은 크게 바뀌었지만 향후 상황은 여전히 ‘시계 제로(0)’ 상태다. 임 전 회장과 박단 비대위원장 간 갈등의 불씨도 여전히 살아있다.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공개적으로 요청하는 등 ‘(임 전 회장과)같이 갈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실제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요청하면서 “이해와 소통이 가능한 새로운 회장을 필두로 의협과 대전협 두 단체가 향후 상호 연대를 구축할 수 있길 기대한다”는 입장문까지 냈다. 임 전 회장의 탄핵안 가결 직후 박 비대위원장이 “결국 모든 길은 바른 길로”라는 내용의 SNS 글을 올리기도 했다. 문제는 임 전 회장이 박단 비대위원장을 상대로 반격을 진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임 전 회장은 탄핵 사흘 만에 닫았던 페이스북 계정을 다시 열고 “박단과 그 뒤에서 박단을 배후 조종해 왔던 자들이 무슨 일을 해왔는지 전 의사 회원들에게 아주 상세히 밝히겠다”며 박단 비대위원장을 저격하는 글을 올렸다. 그러면서 “의협 대의원회 비대위원장과 의협 회장 선거가 더 이상 왜 필요한가”라면서 “박단이 의협 회장 겸 비대위원장을 맡아 모든 권한과 책임하에 의료 농단을 해결하면 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지지해주셨던 모든 분에게 우선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며 “이유가 어떻든 회장 취임 전부터 탄핵하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자들에게 빌미를 주어 넘어간 것 자체가 제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또 의협의 근본적인 개혁의 첫걸음으로 의협 대의원회 폐지 등을 내용으로 하는 민법상의 사원총회를 개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원총회는 민법에 규정된 사단법인의 최고의사결정 기관이다. 의협 최고의결기구로 알려진 대의원총회보다 상위에 있고 정관의 규정으로 폐지할 수 없다. 사원총회는 이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나 총 사원 5분의 1 이상이 회의의 목적 사항을 제시해 청구하는 경우 소집될 수 있다. 반격 시작 내부 갈등? 올해 2월 시작된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이 10개월째로 접어들었다. 온갖 말이 오갔지만 되짚어보면 조금도 좁혀지지 않은 평행선 상황이 계속되는 모양새다. 정부와 의료계의 대치 상황이 길어질수록 ‘의료 붕괴’는 가시화되고 있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