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행복은 어디에서 와서 또 어디로 가는가. 세밑 바람에 움츠렸던 몸이 따뜻해지고 안경에 하얀 김이 서렸다. 뿌옇던 시야가 환해지고 나니 그 앞에 행복한 얼굴이 있었다. “행복이 뭐 별 건가요? 이렇게 사는 게 행복이지!”
길가에 늘어선 가게 사이로 빨강·파랑·하양 3가지 색의 이용원 마크가 눈에 띄었다. 가게 앞에는 하얗게 타버린 연탄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염색 전문, 남성 컷트 전문, 신식 유행머리·투불머리’ 등 전문분야(?)를 붙여 놓은 종이에 조그맣게 ‘가위손’이라는 말도 보였다.
50년 경력
기온이 영하로 떨어져 추웠던 지난달 27일,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에 자리한 청운이용원을 찾았다. 이종복·박선옥 부부는 이 자리에서만 14년, 바로 옆 골목에서 14년 등 청량리에서만 30년 가까이 이용원을 운영했다. 이종복씨는 이발사, 박선옥씨는 면도사다.
37년 부부의 손발은 한 사람인 것처럼 잘 맞았다. 남편인 이씨가 이발을 마치면 아내 박씨가 면도해주고 손님의 머리를 감겨준다. 그 다음 이씨가 다시 머리를 다듬어 마무리한다. 말이 오가지 않아도 이미 서로의 동선을 다 알고 있는 부부의 호흡에 손님 역시 말없이 머리를 맡겼다. 손이 비는 사람이 바닥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먼저 끝난 손님은 박씨에게 커피를 청해 마셨다. 부부가 매일 쟁여두는 요구르트를 찾는 손님도 있었다. 손님은 머리가 마음에 드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미 10년 이상 이씨에게 머리를 맡긴 단골이었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손님은 ‘산’ 이야기를 꺼냈다. 이 손님 역시 10년 넘게 이용원을 찾은 단골.
한자리 30년 장사
손님 대부분 단골
이씨는 “손님의 80~90%가 단골손님”이라고 말했다. 한 달에 한 번, 두 달에 한 번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단골손님은 이용원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별다른 말이 필요 없다고 했다. 스타일에 변화를 주고 싶을 때만 이야기할 뿐, 머리에 대해서는 이씨에게 맡겨 버리는 것.
대신 그들은 시시콜콜한 일상,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씨가 서울 청량리에 이용원을 차릴 때부터 지금까지 30여년간 찾아온 손님도 있다. 이제 아흔살이 다 된 한 노인은 한 달에 한 번 충남 천안에서 청량리까지 지하철을 타고 온다고 했다. 최근에는 건강이 악화되면서 이용원을 찾는 주기가 늘었지만 얼마 전에는 택시를 타고 찾아왔다.
이씨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오전 6시40분이면 이용원 문을 열었다. 매주 수요일 딱 하루만 쉰다. 설·추석에는 명절 당일에만 문을 닫았다. 하루에 손님이 3~4명 올 때도, 10여명이 올 때도 이씨의 출근 시간은 같았다.
가게 안에 부부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은 없었다. 30년 세월이 이용원 곳곳에 묻어 있었다. 정수기를 고정시켜 놓은 앵글, 탁자 등은 모두 재료만 사서 이씨가 직접 만든 것이다. 이씨는 “가게에 외부 사람이 와서 일한 적이 없다. 전부 다 내 손으로 한 것”이라고 전했다.
부부는 이용원을 운영하면서 3남매를 길러냈다. 다섯살 터울의 3남매는 부모 속을 썩이는 일없이 장성했다. 박씨는 “이 일이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라며 “할머니가 아이들을 잘 돌봐주시고, 또 큰딸이 남동생들을 잘 챙겼다”고 뿌듯해했다.
1972년 선배의 권유로 이발 일을 배우기 시작한 이씨는 3년5개월 만에 정식 기술자가 됐다. 아내 박씨는 1986년 이씨와 결혼한 이후 1년여 동안 면도일을 배웠다고 했다. 이씨는 50년, 박씨는 30년이 넘는 경력을 갖고 있는 셈이다.
젊은 시절 일종의 파견직 개념의 ‘날일’을 해가면서 기술을 연마했다. 이용원 등에서 일손을 요청하면 그곳으로 가서 하루 일을 하고 일당을 받는 식이다. 이씨는 그때 선배를 잘 만나 기술이 크게 늘었다고 했다.
그는 “한 군데에서만 일하다보면 기술 습득이 힘들다. 다 경험이기 때문”이라며 “다양한 곳에서 일하면서 기술을 배웠고, 그걸 나만의 기술로 만드는 과정을 거쳤다”고 설명했다. 이후 경기도, 강원도 등을 거쳐 서울로 왔다.
천안서 택시 타고 오는 손님도
쉬는 날엔 함께 산으로 포구로
부부는 어느 손님에게든 깔끔하게, 꼼꼼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거울을 통해 손님의 표정을 살피면서 처음 온 손님은 단골손님이 될 수 있게, 단골손님은 실망하지 않도록 하는 게 그들의 과제다. 특히 이씨는 “손님은 다 안다. 이발사가 대충 하는지, 성심성의껏 하는지. 거울을 통해 다 보이기 때문에 어설프게 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발 기술에 대한 이씨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머리 스타일에 대해 물을 때마다 여러 종류의 가위를 보여주면서 설명했다. ‘기계를 대서 돌린다’ ‘카트 가위’ 등의 전문(?)용어를 말하면서 머리를 시원하게, 또 깔끔하게 깎고 다듬는 방법을 말하는 이씨는 오랜 시간 기술 하나로 생계를 이어온 ‘장인’이었다.
부부는 오래도록 반복한 일상에 온전히 녹아든 듯했다. 종일 가게에 함께 있다 보니 다툼이 있을법한데, 그마저도 드문 일이라고 했다. 박씨는 “다툼이 오래가면 일을 할 수 없다. 한 손님을 둘이 함께 챙겨야 하는데 다투면 일이 진행되질 않는다. 그렇다보니 다투더라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잘 지낸다”고 웃었다.
1주일에 하루 쉬는 날인 수요일에도 부부는 바쁘다. 함께 산에 가거나 인천 소래포구에서 회에 소주 한 잔을 곁들인다. 이씨는 “1년에 3~4번쯤 지하철을 타고 인천으로 가서 회를 먹고 바람도 쐬다 온다. 산에 갈 때는 컵라면을 싸들고 가서 막걸리 한 잔에 곁들여 먹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행복이 별 건가 싶다. 나와 애 엄마가 이 일을 해서 돈을 벌고, 그 돈을 또 우리에게 쓰면서 산다. 빚도 없어서 누구한테 아쉬운 소리 할 것도 싫은 소리 들을 일도 없다. 이게 행복이지, 뭐”라고 전했다.
가위손
딱 한 가지, 이씨는 코로나19로 매달 한 번씩 가던 이발 봉사를 못 가게 된 점이 아쉽다고 했다. 그는 10여년 전부터 한 장애인센터에서 10명의 동료 이발사들과 이발 봉사를 하고 있다. 그는 “매달 첫째, 둘째 수요일에 습관처럼 하던 일을 코로나19 때문에 2년째 못하고 있다. 이 병이 없어지길 바라고 있는 상황”이라며 “이왕 하기로 한 거 열심히 하고 싶다”고 말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