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방서 만나는 '칸의 여왕' 전도연

“배우로선 성공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에요”

[일요시사 취재2팀] 함상범 기자 = “전도연과 연기하는 것 자체가 영광이죠.” 배우 전도연과 연기 호흡을 맞춰본 배우들은 하나같이 전도연의 상대역이 되는 것에 큰 의미를 둔다. 연기에 정답이 없다고 하지만, 맡은 인물의 본질을 찾기 위해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 전도연은 글자로 적힌 인물의 내면을 오롯이 구현해내고야 만다. 깊고 풍부한 감정의 파편을 포착해내는 배우 전도연이 5년 만에 드라마로 복귀한다. 허진호 감독의 연출작 JTBC 토일드라마 <인간실격>이다. 

영화 <무뢰한>을 본 후 이동진 평론가는 한 줄 평을 이렇게 남겼다. “전도연이다. 전도연이다. 전도연이다.” 

그 누구보다도 냉철하게 작품을 진단하는 평론가로부터 이 같은 평가를 받는 배우가 또 누가 있을까. 이 평론가는 <무뢰한>에서 배우 전도연은 퇴물이 된 술집 여인 혜경을 연기하면서 새로운 사랑의 설렘을 느끼는 동시에 점점 나락으로 치닫는 한 여인의 절박함, 그리고 그 사이 빚어지는 갈등에서의 분노, 안으로 삭아 들어가는 참담함까지 표현했다고 했다. 

극한의
리얼리즘

한국을 대표하는 연기력은 평가마저도 예술적으로 바꿔내는 듯하다.

<무뢰한>에서 전도연이 연기한 술집 여자 혜경은 희망처럼 찾아온 한 남자가 사실은 경찰로 전 남자친구였던 살인범을 잡기 위한 도구로밖에 자신을 여기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절망하는 인물이다.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는 누군가는 평생 경험하기 힘든 삶을 몸소 체험하는 인물이다. 믿었던 사람의 배신으로 인해 온전히 정신을 가누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 당당했던 첫 장면부터 너무 안쓰러워 쳐다보기도 힘든 처지에 이른 마지막 장면까지, 전도연이 만든 혜경은 극한의 리얼리즘을 갖고 있다.

경험해보지 못한 인물을 추측으로 풀어내는 건 배우라면 누구나 겪는 일이지만, 전도연에게 주어진 배역은 언제나 상상하기 힘든 최악의 사건과 갈등이 즐비했다. 어떤 험난한 상황과 내면적 고통이 주어지더라도 전도연은 늘 마치 그 인물이 우리 옆에서 존재하는 것처럼 연기했다. 

전도연의 연기 인생은 한 잡지사의 상품을 받기 위해 간 자리에서 모델로 발탁되면서 시작한다. 애초에 연기자의 꿈이 그리 크지 않았던 10대 시절 전도연은 톡톡 튀는 외형과 밝은 에너지로 광고모델을 거쳐 연기자로서도 비교적 쉽게 데뷔한다. 

이름이 크게 알려지기도 전에 영화 <접속>에 캐스팅돼 한석규와 호흡을 맞춘 뒤 엄청난 흥행을 통해 자신의 이름 석 자를 대중에 각인시킨다.

할리우드나 홍콩영화에 밀려 한국영화는 불모지나 다름없던 시절 <접속>의 누적 관객 기록은 한국영화에도 희망이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전도연이 매우 뛰어난 연기를 하는 배우로 인식되기 시작한 작품은 <해피엔드>부터다. 남편 몰래 바람을 피우다 걸린 뒤, 결국 남편의 복수심으로 인해 상해를 당하는 내용의 이 작품에서 그가 보인 애정은 리얼리즘 그 자체였다.

다양한 애정신에서 그가 보인 얼굴은 이전에는 없었던 현실성이 담겨있었다. 이기적인 언행조차 공감되게 이끌었으며, 표현하기 어려운 쾌락의 영역 또한 온몸으로 구현했다.


JTBC 10주년 특집 <인간실격> 주인공
<굿와이프> 이후 5년 만 드라마 복귀

전도연은 <해피엔드>를 기점으로 배우라는 직업을 비로소 인식했다고 한다. 한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촬영 전에는 그가 연기한 보라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촬영 말미에서야 비로소 그의 마음을 알았다면서 처음으로 배우가 무엇인지 스스로 깨달은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이후 전도연의 작품 인생은 도전의 연속이었다. 전도연에게 ‘칸의 여왕’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준 영화 <밀양>에서는 결혼 전이었음에도, 한 아이의 엄마로 나와 극단적인 모성애를 표현했다. 

<밀양>의 신애는 신을 빌미로 장사하는 인간들이 만들어놓은 이상한 시스템 때문에 상처받고 점점 미쳐가는 인물이었다. 괴로움을 겪다 희망을 찾았다가 밀려오는 배신감으로 분노하고 급기야 광기로 이어지는 신애의 변천사를 단 한 순간도 흐트러지지 않고 완벽히 표현한다.

문화의 본고장인 유럽의 영화인조차 감동하게 한 연기력이었다. 

아시아권에서도 손에 꼽히는 업적을 남긴 후, 영화인 누구나 전도연이 대작을 택할 것이라는 예상 속에서 그가 향한 곳은 저예산 영화 <멋진 하루>였다. 헤어진 전 남자친구를 갑작스레 찾아와 다짜고짜 300만원 가까이 되는 빌린 돈을 갚으라고 땍땍거리는 희수를 연기했다. 

다소 비현실적인 이미지가 강하지만, 전도연에게는 그리 어려운 미션이 아니었다. 시나리오가 가진 비현실성이라는 여백을 전도연이 충분히 있을법한 인물로 채워낸다. 그 과정에서 배우 하정우와 함께 일으키는 연기적 시너지가 어마어마하다. 

임상수 감독의 <하녀>는 전도연의 또 다른 대표작이다. 고인이 된 김기영 감독의 <하녀>를 리메이크한 이 작품에서 그는 파출부였지만, 주인집의 가장 훈(이정재 분)과 애정을 통해 계급 상승을 노리는 은이를 연기했다. 

쉽게 이룰 수 없는 꿈을 현실화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 모든 것이 불가능한 욕망에 불과했던 것으로 점철되는 내용의 <하녀>에서 전도연은 또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다양한 감정선을 드러냈다. 전도연이 아니었다면 <하녀>가 이토록 회자되는 작품이 될 수 있었을까. 

도전의 연속
필모그래피

매 작품 인간의 깊은 곳에 있는 감정을 오롯이 끌어내는 그다 보니, 전도연에게는 점점 어둡고 무거운 작품만 밀려오게 된다.

10일 안에 목숨을 구해야 하는 남자와 손을 잡은 사기 전과범이었던 <카운트다운>, 프랑스로 가는 비행기에 순진하게 마약을 싣고 가다 10년 동안 가족과 생이별했던 <집으로 가는 길>, 말 그대로 전도연이 어떤 여배우인지 보여준 <무뢰한> , 우연히 알게 된 새로운 남자와 사랑에 빠진 뒤 저돌적으로 돌진한 <남과 여>, 우리에게 여전히 아픈 상처인 2014년 4월의 사건을 재구성한 <생일>까지, 전도연에게는 늘 어렵고 고된 삶을 사는 인물이 주어졌다.


연기하기 어렵고 힘든 작품을 피하고 싶었던 전도연은 영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과 <비상선언>으로 비교적 가벼운 톤의 상업 영화에 출연한다. 아무리 톤이 가볍다 해도, 전도연이 스크린에 등장하면 공기는 전도연의 내음으로 바뀌어버리지만, 그간 전도연이 걸어온 필모그래피와는 다소 결이 달랐다. 

그런 전도연이 다시 어렵고 힘든 상황에 놓인 인물을 연기한다. JTBC 드라마 <인간실격>에서다. JTBC 10주년 특집 <인간실격>은 다소 무거운 작품이다. 출판사의 작가에서 모든 걸 잃은 40대 여인과 20대임에도 미래가 보이지 않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무겁고 어려운 작품을 피해 계속 기다리다가 만난 작품”이었다고 밝힌 전도연은 “어둡지만, 빛을 찾아가는 이야기”라고 밝혔다. 

4회까지 공개된 이 작품에서 전도연은 다시 깊은 우울감을 그려낸다. 전도연이 연기하는 부정은 꽤 잘나가는 출판사의 작가였지만, 자신의 커리어를 통째로 빼앗긴 후 호텔에서 파출부 일을 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인물이다. 

자신의 삶을 앗아간 정아란 작가(박지영 분)에게 악성 댓글을 남기고 경찰 조사를 받기도 한다. 복수심과 분노가 지나치게 넘쳐 극도의 우울함에 빠져 있다. 자신을 아니꼽게 보는 시어머니(신신애 분)와 악을 쓰며 싸우기도 한다.

우울한
낙오자


고부간에 낀 남편은 어떻게든 중간다리 역할을 해보고자 하지만, 성실하고 부지런할 뿐 현명하지는 않다.

꽤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결과적으로는 남은 게 하나도 없는 인생이라 여기고, 목숨을 던지려 용기를 내보기도 하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게 어디 쉬운 일일까. 그나마 부정을 극진히 아끼는 아버지(박인환 분)가 있지만, 그저 미안한 존재일 뿐이다. 

숨은 붙어 있지만, 마음이 오롯이 작동하지 않는 아픈 인간을 공감되게 그려내고 있다. 이제 겨우 초반부임에도 전도연은 엄청난 열연으로 작품의 분위기를 제 것으로 만들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미 어린 나이부터 배우로서 기념비적인 업적을 쌓은 그가 사회의 낙오자인 부정을 연기하는 것 자체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평가가 있었다. 국내 수많은 여배우의 롤모델이자, 창작자라면 누구나 함께 작업하고 싶은 배우가 전도연 아닌가.

그런 그가 인생의 반을 살도록 아무것도 이루지 못해 괴로워하는 부정을 어떻게 공감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

“사람들이 제게 ‘너가 부정을 어떻게 이해하느냐’고 질문했어요. 부정은 꽉꽉 닫혀있는 인물이거든요. 그 인물의 마음을 어떻게 열어갈지 걱정이 너무 됐었어요. 부정을 알고 싶어서 부단히 노력하기도 했고요. 촬영하면서 조금씩 부정의 마음을 알아간 것 같아요.”

“저 스스로 명백하게 ‘인간 실격’이라고 규정지은 적은 없어요. 그럼에도 제게는 배우로서의 삶 외에 다른 삶도 존재해요. 다른 쪽의 삶을 생각해보면 완성되지 않고 부족한 부분이 많아요. 여전히 그 여백을 채워나가는 노력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요. 부족하지만 노력하는 삶을 살고 있어요.”

방영 전에 모든 촬영을 마친 <인간실격>은 공개되기 전부터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영화 위주로 작품활동을 해오던 전도연의 5년 만의 복귀작이기도 하고, 상대역이 청춘을 대표하는 류준열인데다가,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를 만든 허진호 감독이 연출하기 때문이다.

본질 찾아 늘 치열하게 싸우는 ‘연기 달인’
“나 역시 부족한 사람, 노력으로 채워가요”

특히 전도연의 복귀작이라는 데 대중의 기대감이 클 수밖에 없었다. 그 기대감이 만족감으로 채워지기에, 충분한 초반부다.

연기력에서 경지에 오른 전도연은 어떤 상황에서든 여유 있게 대처할 듯 보이지만, 그 뒤에는 인물의 본질을 찾기 위한 그의 치열한 싸움이 있다. 상대역인 류준열은 전도연 덕에 자신을 되돌아보게 됐다며, 전도연이 연기를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고 했다.

“전도연 선배님을 보면 연기 달인으로서 굉장히 여유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촬영하는 동안에 괴로워하고 어려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많이 놀랐어요. 제가 경력은 얼마 안 되지만, 촬영장에서 여유를 찾은 부분이 있거든요. 이런 부분을 점검하게 되고 초심을 되찾는 계기가 됐어요.”

현장에서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그의 모습은 뛰어난 연기력의 후배에게 귀감이 되는 듯하다. 전도연이라는 이름은 많은 남자배우의 캐스팅 이유가 되기도 한다. <멋진 하루>의 하정우나, <무뢰한>의 김남길, 이번 <인간실격>의 류준열조차도 전도연의 상대역이라는 것이 작품을 선택하게 된 이유가 됐다.

그저 전도연과 한 번 연기해보는 것이 목적이 된 셈이다. 빠른 호흡으로 자극적인 사건이 이어지는 이야기가 요즘 국내 드라마계에서 트렌드로 통용된다. 하지만 <인간실격>은 처음부터 느리며, 호흡도 길다. 장면이 빠르게 넘어가서 눈을 사로잡기보다는, 한 곳을 지긋이 바라보며 깊은 감정을 염탐하는 작품이다.

그러다 보니 전도연에게도 상대역에 대한 부담감이 있었던 듯 보인다.

“저는 준열씨가 이 작품 안 할 줄 알았어요. 남자 배우들은 대체로 크고 화려한 작품을 하고 싶어 하잖아요. 강재를 준열씨가 연기한다고 했을 때 의외였어요. 그래서 초반 촬영할 때 스태프들에게 ‘우리 잘 어울려?’라고 많이 물어봤던 것 같아요.”

이제 드라마는 서서히 속도를 낸다. 초반 던져진 갈등이 서서히 수면 위로 올라올 전망이다. 부정은 여러 고난에 정면으로 부딪힐 전망이다. 그 과정에서 전도연이 그려내는 희망이 무엇일지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설렘
희망

“이 작품에는 설렘이 있어요. 벼랑 끝에 서 있는 부정이 한 남자를 만나면서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보게 되거든요. 실격한 사람들의 이야기지만, 이 안에는 내가 있고 나를 돌아볼 수 있는 메시지가 있어요. 사건이 크고 미사여구가 화려하진 않지만, 인간이 느끼는 풍부한 감정이 오롯이 살아 있는 작품이에요. 역경 속에서도 힘을 내고 용기를 내는 부정을 시청자분들이 응원해주셨으면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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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 바뀐’ 이재명 이유 있는 대변신

‘확 바뀐’ 이재명 이유 있는 대변신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코로나19 종식과 비상계엄, 대통령 파면으로 인한 조기 대선을 치르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20대 대선과 21대 대선 모두 운명의 길목서 치러진 셈이다. 국민의 삶과 밀접하게 닿아 있는 정치권도 큰 영향을 받았다. 코로나19 정국과 내란 정국서 대선을 뛴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에게는 지난 3년간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3년 전, 20대 대선이 치러지던 2022년 당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선후보는 코로나19 시기였던 점을 감안해 소상공인 정책과 경제 재건에 초점을 맞췄다. 민주당의 1호 공약 역시 ‘코로나19 팬데믹 완전 극복’과 ‘피해 소상공인에 대한 완전한 지원’이었다. 경제 대통령 앞세웠지만… 이 외에도 ▲오미크론 등 변이종 확산 대응 강화 ▲백신 및 치료제 확보 ▲의료보건체제 구축에 대한 충분한 재정 투입 ▲필수예방접종의약품 자급화 실현을 위한 국가지원체제 구축 등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당시 이 후보 선거대책위원회(이하 선대위)는 ‘유능한 경제 대통령’에 초점을 맞춰 5대 비전으로 ▲신경제 ▲공정 성장 ▲민생 안정 ▲민주사회 ▲평화·안보 등을 제시했다. 10대 공약으로는 수출 1조달러를 비롯한 311만호 주택 공급, 문화 강국 실현 같은 경제 중심의 공약을 제시했다. 차기 정부의 큰 틀이 되는 10대 공약을 살펴보면 사회 전반에 걸친 문제가 두루 담겼지만, 가장 주목을 받는 건 이 후보의 상징과도 같은 ‘기본 시리즈’ 정책이었다. 기본소득부터 기본주택, 기본금융을 합친 것으로 이 후보의 숨은 1호 공약이란 평도 나왔다. 기본 시리즈는 전 국민에게 최소한의 소득을 보장하는 동시에 주거와 금융 면에서 보편적인 공공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한 공약이다. 가장 대표적인 공약으로는 ‘청년 125만원’ ‘전 국민 25만원’을 지급하는 기본소득을 꼽을 수 있었다. 기본소득은 이 후보가 경기도지사이던 때부터 추진하던 정책이다. 2021년 7월 경선 후보 2차 정책 발표 기자회견서 이 후보는 “대전환의 위기 시대에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대대적 정부 역할도 중요한 성장 수단이지만, 세계 최저 수준인 국가의 가계소득 지원과 가계소비를 늘리는 것도 경제 성장의 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차기 정부 임기 내에 청년에게는 연 200만원, 그 외 전 국민에게 100만원 기본소득을 지급하겠다”는 공약을 발표했다. 아울러 “지역 골목경제 활성화와 매출 양극화 해소를 위해 소멸성 지역화폐로 지급되는 기본소득은 현금과 달리 경제 활성화 효과가 극대화된다”며 “기본소득은 어렵지 않다. 작년 1차 재난지원금이 가구별 아닌 개인별로 균등하게 지급되고 연 1회든 월 1회든 정기 지급된다면 그게 바로 기본소득”이라고 설명했다. 코로나19·비상계엄 정신없이 도는 정치판 “전 국민 25만원 지원” 3년 사이 변화는? 당시 정치권에서는 이 후보의 기본소득 공약이 과거 보수 정당과 박근혜 전 대통령이 주장하던 ‘경제 민주화’와 닮았다고 봤다. 그러나 이 후보의 기본소득은 재원 확충 방안 등 실현 가능성이 작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이에 민주당은 재원 마련 방안으로 재정개혁을 추진하는 동시에 국토보유세와 탄소세 도입 등 다양한 방법을 제시했다. 그러나 당시 보수 진영에서는 “코로나19 지원금으로 나라 곳간이 텅 비었다”며 ‘포퓰리즘’이라는 꼬리표를 붙였다. 전 국민에게 25만원을 지원하는 방안은 20대 대선 이후에도 이 후보가 꾸준히 밀던 정책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차등 지원, 분배 방식 등에 변화가 생겼지만 이 후보는 지난해 윤 전 대통령과의 영수회담서 “민생회복 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며 거듭 당부하기도 했다. 포퓰리즘이라는 보수 진영의 비판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부분적 기본소득은 아이러니하게도 2012년 대선서 보수 정당 박근혜 후보가 주장했다. 65세 이상 노인 모두에게 월 20만원씩 지급한다는 공약은 박빙의 대선서 박 후보 승리 요인 중 하나였다”고 반박하기도 했다. 3년이 지난 지금 이 후보는 대선 정국이 시작됨과 동시에 1호 공약으로 “AI 인공지능 3강 도약”을 외쳤다. 경제 강국으로 거듭나기 위한 청사진을 제시하면서 AI 대전환 시대를 위한 산업 육성을 약속했다. 고성능 GPU(그래픽처리장치)를 5만개 이상 확보하고 한국형 챗GPT를 국민이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모두의 AI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것 등이 대표적인 사업이다. 국가 비전으로는 K-이니셔티브를 제시했다. 국내 AI 기술 등에 방점을 찍어 미래 먹거리를 선점하고 경제 성장 국가로 발돋움하겠다는 취지다. 이 후보는 K-이니셔티브를 지역별로 쪼개 맞춤형 공약을 제시하기도 했다. 경기 동탄서는 K-반도체를, 대전서는 K-과학기술을 중심으로 메시지를 냈고 전북 전주서는 K-컬처를 겨냥해 국악인과 간담회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처럼 이 후보의 21대 대선 공약은 ‘K’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지난 대선서 기본소득 같은 ‘이재명표 공약’을 앞세웠다면 이번에는 12·3 내란 사태로 무너진 민주주의를 다시 일으켜 세워 ‘진짜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방점을 찍은 것이다. 지원금 어디로? 공약 발굴 과정 역시 K-이니셔티브를 앞세웠다. 후보 직속인 K-문화강국위원회는 문화 강국 실현을 위한 공약을, K-경제성장위원회는 맞춤형 의제를 설정하는 데 주력할 전망이다. 선대위 산하에는 K-민주주의·평화위원회를 설치해 ‘빛의 혁명’에 참여한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조직을 꾸렸다. 서울·인천·경기를 겨냥한 K-수도권 비전을 발표하며 “서울을 뉴욕에 버금가는 글로벌 경제 수도로, 인천을 물류와 바이오산업 등 K-경제의 글로벌 관문으로, 반도체와 첨단기술, 평화·경제의 경기로 수도권 K-이니셔티브를 만들겠다”는 포부도 밝혔다. 기본 시리즈의 존재감은 희미하다. 지난 대선서 기본 시리즈를 앞세운 것과 달리 이번 대선에서는 ‘기본 사회’라는 단어로 묶어 포괄적인 복지 정책으로 탈바꿈했다. 이 후보는 “국민의 기본적인 삶을 국가 공동체가 책임지는 사회, 기본 사회로 나아가겠다”며 이를 실현하기 위한 국가전담기구인 ‘기본사회위원회’를 설치하겠다고 밝혔다. 이 후보는 양극화로 인한 분열과 갈등이 만연한 사회에 우려를 표하며 “기본 사회는 단편적 복지나 소득 분배에 머무르지 않고 국민의 주거·의료·돌봄·교육·공공서비스 전반에 대한 실질적 보장을 통해 지속 가능한 성장 기반을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기본사회위원회는 기본 사회 실현을 위한 비전과 정책 목표, 핵심 과제 수립 및 관련 정책 이행을 총괄·조정·평가하게 된다. 아동수당 확대나 청년미래적금, 고용보험 사각지대 해소 등 생애주기별 소득 보장 체계를 구축하고 농어촌 기본소득과 햇빛·바람 연금 같은 지역 맞춤형 소득 지원도 점차 확대해갈 예정이다. 개헌에는 다소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나 싶더니 선거 막판서 대통령 4년 연임제와 등을 골자로 한 구상을 밝혔다. 개헌 시기에 대해서는 “논의가 빠르게 진행된다면 2026년 지방선거서, 늦어져도 2028년 총선서 국민의 뜻을 물을 수 있을 것”이라며 “이를 위해 국민투표법을 개정해 개헌의 발판을 마련하고 국회 개헌특위를 만들어 하나씩 합의하며 순차적으로 개헌을 완성하자”고 말했다. 이후 최종 공약집서 “위기의 민주주의를 개헌으로 지키겠다”고 밝히면서 다시 한번 못을 박았다. 우클릭? 융통성! 가장 큰 차이점을 보인 건 경제, 그중에서도 부동산 정책이다. ‘민주당 우클릭’이라는 표현이 나올 만큼 민주당은 중도우파까지 껴안는 방법을 마련했다. 우선 민주당은 주택 공급은 늘리되 부동산시장에는 최소한으로 개입하겠다는 방침을 밝혀 왔다. 문재인정부 당시 과도한 세금 규제로 집값이 오르는 등 발생할 각종 부작용과 혼란을 막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앞서 이 후보는 ‘경제 유튜브 연합 토크쇼’에 출연해 “주거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을 많이 바꾼 편이다. 집은 주거용이지 투자·투기용은 아니어야 한다고 했는데 지금은 그게 불가능하더라”고 밝힌 바 있다. 부동산시장의 양극화가 갈수록 심화하는 만큼 규제를 완화하는 방법을 택해야지, 억눌러서는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한 민주당 관계자 역시 “우클릭, 태세 전환,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데 시장과 경제 상황에 따라 융통성 있게 정책을 수정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이 후보는 지난 대선서 “부동산 투기를 막으려면 거래세를 줄이고 보유세를 선진국 수준으로 올려야 한다. 저항을 줄이기 위해 국토보유세는 전 국민에게 고루 지급하는 기본소득형이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번 대선에서는 “세금으로 집값을 잡는 시대는 지났다”며 선을 그었다. 종합부동산세와 양도소득세 등 부동산의 핵심 세제 역시 큰 틀에서 손대지 않고 현행 체계를 유지할 전망이다. 다만 이 후보뿐만 아니라 모든 대선후보들이 이렇다 할 부동산 공약을 내놓지 않고 있어 비교 대상이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표가 떨어질 것을 우려해 후보 모두 부동산 정책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 공약을 구분하기 어렵다는 점도 비판의 대상이 됐다. 지난 3년간 일부 노선이 수정된 반면, 이 후보가 뚝심 있게 밀고 나간 공약도 있다. 앞서 이 후보는 지난 대선서 “여성가족부를 평등가족부나 성평등가족부로 바꾸고 일부 기능을 조정하는 방안을 제안한다”고 밝혔는데 이번 역시 “성평등가족부로 확대·개편하겠다”고 밝혔다. ‘기본 소득’ 내리고 ‘K-시리즈’ 올리고 갈라치기 대신 ‘중도 실용주의’ 노선으로 이 후보는 사전투표가 진행되기 하루 전날인 지난달 28일6 자신의 SNS에 ‘성평등가족부 확대 공약 메시지’를 내고 “여성들이 여전히 우리의 사회 많은 영역서 구조적 차별을 겪고 있음에도 윤석열정부는 성평등 정책을 후순위로 미뤘다”고 꼬집었다. 이어 “향후 내각 구성 시 성별과 연령별 균형을 고려해 인재를 고르게 기용하고 성평등 거버넌스 추진 체계도 강화하겠다. 중앙 부처와 지자체의 양성평등정책담당관제도를 확대해 성평등 정책 조정과 협력 기능을 강화하겠다”며 “지자체 내 전담부서를 늘려 성평등 정책의 실효성을 높이겠다”고도 약속했다. 대법관 구성과 다양성 및 전문성 강화를 위한 ‘대법관 증원’도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현재 대법관 한 명이 맡는 사건의 수가 많아 증원은 불가피하다는 게 민주당 관계자들의 공통된 설명이다. 이번 공약집에도 민주당은 상고심에 대한 국민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대법관 증원과 전원합의체 변론 공개 확대를 추진하겠다는 내용을 담았다. 다만 공약집에는 구체적인 증원 규모를 적시하지 않았다. 앞서 민주당은 대법원이 이 후보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가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되자 사법개혁을 예고했다. 이때 민주당이 대법관의 수를 100명으로 늘리는 법안을 발의했는데, 선대위가 해당 법안의 철회를 지시하면서 한때 논란이 되기도 했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흑묘백묘론’ 역시 20대 대선서도 주장했다. 앞서 이 후보는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필요한 정책을 취하고, 김대중·박정희 정책을 따지지 않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이번에도 이 후보는 국민 통합을 제시하며 좌우를 가리지 않고 오직 경제를 살리는 데 집중하겠다는 점을 강조했다. 비상계엄으로 치러진 조기 대선인 만큼 급진적인 변화와 이념 갈라치기보다는 대한민국을 안정 궤도에 되돌리는 ‘중도 실용주의’ 노선을 택한 것으로 풀이된다. 미리미리 착착척척 선대위 소속인 한 민주당 의원은 “조기 대선인 만큼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선거가 치러졌다. 그동안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를 만큼 바빴지만 국민 의견을 적극 수용해 좋은 공약이 나올 수 있었다”며 “대부분 이 후보 머릿속에 원래 있던 공약들이다. 여기에 지난 3년 동안 각종 위원회서 활동한 의원들의 시너지가 합쳐져 좋은 결과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hypak28@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이재명 공보물, 분위기도 바뀌었다? 대선서는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의 책자형 선거 공보물도 눈에 띈다. 지난 공보물은 ‘경제’ ‘일하는 대통령’ 등 유능함을 내세웠다면 이번에는 ‘내란 극복’ ‘빛의 혁명’을 반복적으로 강조해 희망에 초점을 맞추었다. 책자 한 면 전체를 응원봉 시위대 사진으로 채워 이번 조기 대선을 내란 세력 심판 성격임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대선 출마 영상도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는 평이다. 20대 대선 경선 당시 이 후보는 검은 배경의 스튜디오서 파란 넥타이와 정장을 갖춰 입은 채 출마를 선언했다. 반면 21대 대선 출마 영상서 이 후보는 밝은 분위기의 실내서 베이지색 니트를 입고 등장해 부드러운 면모를 강조했다. <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