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초대석> 22년간 쏟아낸 조우진의 건강한 투혼

“무게감·책임감이 늘 짓눌렀어요”

[일요시사 취재2팀] 함상범 기자 = 충무로에 ‘일찍 일어나는 새가 이경영’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다작’의 아이콘인 그는 너무 많은 작품에 출연한 탓에 ‘또경영’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지겨움이 느껴질 정도의 출연 횟수는 출중한 연기력이 있기에 가능하다. 김의성, 배성우를 거쳐 조우진도 ‘다작 배우’ 계보에 속했다. 그 역시 ‘또우진’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그런 조우진이 한 작품에만 몰두했다. 영화 포스터에 자신의 얼굴을 대문짝만하게 걸었다. 신작 <발신제한>을 통해서다.

1997년, 한 집 걸러 한 집이 파산했던 그 시절, 대구에 살던 한 가정의 가세도 기울었다. IMF 외환위기의 거센 풍랑에 휘말린 탓이다. 갑작스럽게 생존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 고등학생에게 대학교 입학은 언감생심으로 다가왔다. 대학에 가지 못할 정도로 학업 성적이 뒤떨어진 건 아니었다. 다만 입학금을 마련하지 못했을 뿐이다. 

‘피 끓는 청춘’
일생일대 결심

이 고등학생은 일생일대의 결심을 한다. 1999년 20세가 되던 해, 고향인 대구에서 단돈 50만원을 들고 상경하는 것. 가족의 만류를 뿌리치고다. ‘이왕 집안의 가세가 기울어 도움받지 못하는 거 내가 하고 싶은 걸 해보자’는 의지가 작동했다. 

20세 청년은 ‘나는 누구인가?’라고 자문했다. 그 답을 찾기 위해 선택한 직업이 연기자다. 직업적 특성상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이 평가받아서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개똥철학’으로 보이지만, 얼마나 치열한 고민 끝에 나온 답안이었을까.

연기를 택한 시점부터 ‘피 끓는 청춘’은 고생길로 접어든다. 그저 막연하기만 했던 꿈이 한 영화의 주인공으로 실현되는 데까지 걸린 기간은 무려 22년이다. 


연고도 없는 타지의 땅에서 연극과 입학을 목표로 삼았다. 고등학교 시절 방송반에서 비교적 정확한 발음과 발성을 했다는 것 말고는 연기에 관한 트레이닝이 전무했던 그에게 연극과의 벽은 높았다. 첫해 낙방하자마자 극단에 입단해 연기를 학습했다.

결국, 2000년 서울예대 연극과에 입학했다. 

1000년이 끝나고 1000년이 시작되는 불안의 시대에 그 역시 새로운 출발선에 섰다. 연극 <마지막 포옹>을 시작으로 막연한 꿈의 첫발을 내디뎠다. 어렵게 뗀 첫발 뒤엔 끝이 보이지 않는 천릿길이 있었다.

세상은 그에게 기회를 쉽게 주지 않았다. 어렵게 따낸 배역은 이름 없는 ‘범인2’이나 ‘행인5’였다. 캐스팅됐다는 말을 듣고 현장에 갔는데, 다른 사람이 자신의 역할을 꿰차고 자신이 외운 대사로 연기를 하고 있었던 적도 있었다.

이를 보고도 무명의 배우는 아무런 저항 없이 되돌아왔다. 소주 두 병으로 쓰라린 고통을 잊으려 했다. 

시간이 흘러 영화 <내부자들>에서 “여! 썰고, 여 하나 썰고… 거기 말고 여 썰으라고!”라는 대사로 스크린을 썰어버리며, 조우진이라는 세 글자를 알렸다. <마지막 포옹>을 시작으로 배우로서 이름을 찾기까지 15년을 버텼다.

국내 연기력 ‘원투펀치’로 불리는 이병헌마저 ‘영화의 성패와 상관없이 이 배우는 회자되겠구나’라는 직감이 들 정도로 강렬한 인상이었다. 영화의 흥행 덕에 그는 ‘여썰고좌’라는 기분 좋은 별명도 얻게 된다. 그로부터 조우진의 시계는 바삐 흘러간다. 


영화 <발신제한> 통해 첫 단독주연
“무게감·책임감, 늘 나를 짓눌렀다”

그에게 주어지는 역할엔 성역이 없었다. 누구보다 비열한 악의 화신이었다가, 타인을 배려하는 데 도가 튼 선한 사람도 됐다. 범죄자를 잡는 정의로운 인물에서 부조리의 극치로도 치달았다.

부유한 삶을 살다가도, 권력의 최약체가 되어 가족의 죽음에 뜬 눈으로 피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때로는 매우 지혜롭고 민첩한데, 어디에서는 무능하고 나태했으며, 그저 얕잡아보고 싶을 정도로 무식한 적도 있었다.

조우진의 필모그래피에는 레퍼런스가 없다. 

연기의 스펙트럼만 따지면 육각형의 스펙을 가진 배우라 해도 무방하다. 선과 악, 정의와 불의,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천재와 둔재를 오고 가는 중에 언제나 제작진의 기대를 넘는 연기력을 보였다. 너무 많이 작품에 참여해 ‘또우진’으로 불릴지언정, 연기력에서 흠결을 드러낸 적은 없었다.

주인공을 해도 충분히 능력을 발휘할 배우였지만, 충무로 관계자들은 그를 조연으로만 소모했다. 한국 영화계의 불찰이라 할 수도 있겠다. 그에게 첫 주연의 기회를 마련해준 <발신제한> 제작진의 혜안조차도 늦은 감이 있다.

조우진 역시 조연이 자신에게 맞는 옷이라고 생각했다. 주인공으로 하자는 말에 겁부터 냈다고 한다. 시나리오가 딱히 싫지 않았음에도 고사부터 했다. 소속사 대표의 “그래도 제작진 한 번 만나봤으면 좋겠다”는 권유마저 거부하지는 못해 <발신제한>의 김창주 감독을 만난 것이다. 

“시나리오를 읽고 겁부터 났던 건, 제가 잘 해낼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컸기 때문이에요. 만듦새나 역할이 마음에 드냐 안 드냐는 차후의 문제였어요. 제가 해내기 쉽지 않은 감정선으로 느꼈어요. 안 할 생각이었죠. 그러다 김 감독님을 만난 거죠. 눈을 봤는데 열정이 들끓고 있었어요. 손을 덥석 잡았어요. 그 뜨거운 눈빛에 감동했어요. 다른 관계자분들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날 ‘저 불구덩이 같이 뛰어듭시다’라고 했었어요.”

육각형
스펙트럼

스페인 영화 <레트리뷰션: 응징의 날>의 리메이크 버전인 <발신제한>은 국내 관객들에게는 익숙한 면이 있다. 영화 <폰 부스>나 <스피드>, 한국 영화로는 <더 테러 라이브>와 닮아있다. 거론된 영화들의 공통점은 주인공이 이름 모를 범죄자로부터 전화로 조종당한다는 것과 역할의 비중이 90% 이상에 다다른다는 데 있다. 

<폰 부스>의 콜린 파렐과 <스피드>의 키아누 리브스, <더 테러 라이브>의 하정우가 그랬듯, 조우진도 이야기의 90% 이상을 혼자 끌고 나가야 했다. 

“영화를 보니까 제일 먼저 든 생각이 ‘왜 이렇게 많이 나오나’였어요. 거의 모든 신에 제가 나오죠. 최대한 객관적으로 보려고 했는데, 역시나 실패했습니다. 감정이입을 하지 않고 자평을 제대로 해보려고 했는데, 잘 안 됐어요. 감독님께서 애 많이 쓰신 것 같아요. 제 연기에 대한 자평은 영화를 몇 번 더 봐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내공을 좀 더 키워야겠죠.”


영화에서 조우진이 맡은 성규는 VIP 고객만 관리하는 부산의 은행센터장이다. 출근길에 고등학생과 초등학생 아이를 태우고 출근하는 길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온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들려오는 이야기가 무시무시하다.

다짜고짜 차 안에 폭탄이 있으며 내리는 순간 폭파된다는 것. 전화를 건 남성은 이를 빌미로 수십억원을 요구한다. 

이 와중에 후배 직원(전석호 분)이 협박을 받았다고 전화를 건다. 꺼림칙한 기분은 점점 공포가 된다. 아내와 같이 있던 후배를 만나 대화를 시도하는 도중 후배의 아내가 급한 성격을 못 이기고 차에서 내린다. 그 즉시 후배의 차가 폭발한다.

예언이 현실이 된 순간부터 성규는 테러범의 조종에 따를 수밖에 없다. 

<발신제한>은 초반부터 속도를 낸다. 성규 가족이 차에 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가 걸려오면서부터 내달리기 시작한다. 첫 폭탄이 터진 뒤부터 불안과 공포가 급격히 솟구친다. 극한 상황에 몰린 성규는 질주한다. 정체 모를 테러범과의 줄다리기 중에 성규를 범인으로 인식한 경찰까지 더해지며 목줄은 점점 조여진다. 

극도의
스트레스


작품 속 조우진은 거의 모든 분량을 차 안에서 연기한다. 그가 활용할 수 있는 부위는 상체 뿐이다. 움직임이 제한돼있다. 표정과 눈빛, 팔의 제스처 정도로만 관객을 설득해야 한다. 대부분이 바스트샷이다. 카메라와 인물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 감정이 훤히 보인다.

인물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달된다는 건, 표정이나 감정이 상황과 조금만 어긋나도 몰입이 깨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배우에게 있어서는 최악의 조건이다. 이제껏 해본 적 없는 미션이 조우진에게 주어진 것.

조우진은 인터뷰 내내 밀도를 중시했다.

“정확한 감정표현보다도 중요했던 건 작품 내의 밀도였어요. 비슷한 감정이지만 세분화하면 다른 포인트가 있어요. 긴장감의 정도가 상황마다 다르죠. 과하지 않고, 또 약하지 않게 나오길 바랐어요. 관객들이 보기 어렵지 않게 연기하려고 했죠. 정확보다 적확하게 하려고 했어요.”

쉽지 않은 임무였다. 혈압약을 챙겨 먹어야 할 정도로 압박감이 심했다. 단독주연의 무게감은 이전 작품에서의 책임감과는 결이 달랐다. 극도의 스트레스가 그를 짓눌렀다.

“빠른 속도로 장면이 확확 바뀌는데 그 순간이 주는 서스펜스를 표현하고 싶었어요. 여러 상황이 변화하는 과정에서 찰나를 건져야 하는 작품이었어요. 기술로 메우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봤어요. 이 상황에 저를 빠뜨리려고 했어요. 거기서 전해진 느낌을 표현하고자 한 거죠. 살면서 이런 스트레스와 긴장감을 느끼면서 산 적이 없었어요. 인생 최대의 고비를 넘기면, 더 큰 고비가 찾아왔어요. 부담을 갖고 상황에 빠뜨리다 보니까 정신이 혼미해진 적도 있었어요.”

“고비 넘기면 찾아온 더 큰 고비”
“계속 꿈을 꾸며 살아도 되겠어요”

막중한 책임을 온전한 연기로 표현하고자 했던 그의 욕망이 스크린을 통해 고스란히 전달된다. 누구나 보편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은행센터장의 품격이 전해지면서도 전사에 담긴 성규 개인의 삶이 자연스럽게 표현된다.

가족들을 위해 일한다는 명분으로 가족을 소홀히 했던 아버지의 모습이나, 센터장으로 오기까지 꼭 옳지만은 않게 살아온 성규의 성격적 특성이 은연중에 드러난다. 이 같은 무의식적 감정선이 켜켜이 쌓이다가 후반부에는 적잖은 감동으로 밀려온다. 강력한 난제를 준수하게 풀어냈다. 

“한일전을 앞둔 스포츠 선수들의 마음이 어떨지 생각하게 됐어요. 성규라는 인물을 표현하기 위한 상황에서 매 테이크마다 질문이 쏟아졌어요. 연기하기 위해 뭘 연구하고 담아내야 할지에 많은 생각을 했죠. 제가 잘한 건 아닌 것 같아요. 그저 센 영화가 나온 것 같아요.”

촬영 현장에서 감독이 아버지라면, 주연배우는 엄마의 역할을 한다. 스태프들과 친밀하게 지내면서 힘든 점을 들어주고 분위기를 부드럽게 끄는 몫이 생긴다.

멀티캐스팅인 경우엔 이 몫이 줄어드는데 <발신제한>처럼 인물의 수가 적은 작품이면 현장 분위기를 편안하게 만드는 임무가 주연배우에게 집중된다. 연기자로서 맡은 소임을 수행하기도 벅찬 일인데, 단독주연을 처음 맡은 조우진에겐 무거운 짐이었다.

“모든 스태프가 저만 보고 있더라고요. 첫 단독주연일 뿐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를 책임지는 인물이잖아요. 스태프들에게 보람을 느낄 수 있게 하자는 마음으로 임했어요. 최대한 많이 소통하려고 했어요. 작품 외적으로 스태프들에게 침투하려고 했어요. 여러 선배가 소통하는 모습을 어깨너머로 배웠는데, 거기서 오는 행복감이 컸어요.”

비록 더디기는 했지만, 적지 않은 연기 경험을 가진 그는 인터뷰 현장에서조차 비장했다. 콘서트에서 노래를 부르는 가수처럼 한 마디 한 마디를 꼭꼭 씹어 말했다. 그의 대답에는 자신의 연기가 부족하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몸에 밴 겸손으로 느껴졌다. 연기에만큼은 스스로 가혹다는 것이 분명히 전달됐다. 

“좋은 배우가 되고 싶어서인가 봐요. 그렇게 거창하지는 않아요. 제게 잣대가 높은 건, 그렇게 높여놔야 그 잣대에 못 미치더라도 관객들을 설득하는 수준에 닿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에요. 정신병적인 수준은 아닌 거 같아요. 작품에 맞는, 그리고 인물에게 맞는 연기를 더도 덜도 아니게 하는 게 좋은 배우인 것 같아요. 분량이나 비중에 상관없이요.”

1999년 50만원을 들고 상경한 지 22년 만에 단독주연이라는 타이틀로 대중 앞에 섰다. 타인으로부터 평가받고 싶어했던 20세 청년의 꿈은 이뤄진 것일까. 앞서 그는 기적이라는 말로 속내를 전하기도 했었다.

꿈, 동경…
지금도 기적

“꿈, 동경이란 단어로 지금까지 버텨왔어요. 포스터 나온 걸 보면서 눈물이 많이 나왔어요. 갑자기 오열하듯 쏟아지더라고요. 홍보하는 지금도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조우진 기특해’ 이런 건 아니에요. ‘계속 꿈을 꾸며 살아도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드네요. 주어진 작품에 매진하면서 그렇게 살고 싶어요. 이제껏 그래왔든 건강하게 투혼을 발휘하면서요.”

<intellybeast@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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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캄보디아 주범 ‘리광호’ 정보기관 추적, 왜?

[단독] 캄보디아 주범 ‘리광호’ 정보기관 추적, 왜?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캄보디아를 향한 정부의 압박이 매섭다. 피해자이자 피의자인 한국인 수십명을 발 빠르게 송환한 데 이어 캄보디아에 대한 경제적 지원도 옥죌 계획이다. 정보·수사기관은 제일 먼저 대학생 피살 사건 핵심 인물인 리광호를 추적 중이다. <일요시사> 취재 결과, 리광호는 이미 캄보디아를 떠나 라오스로 밀입국한 것으로 파악됐다. “리광호는 지난주에 이미 떴어요.” 리광호에게 대포통장을 만들어준 보이스피싱 조직원 A씨가 <일요시사>와의 연락에서 한 말이다. 리광호는 캄보디아 대학생 박모씨 피살 사건 주범으로 지목된 인물이다. 이미 캄보디아 시아누크빌에서 라오스 밀입국했다. 정보·수사기관도 관련 첩보를 입수하고 추적 중이다. “지난주에 이미 떴다” 리광호의 신상은 이미 이달 중순부터 텔레그램과 SNS 등을 통해 공개됐다. 1991년생인 리광호는 중국 길림성 훈춘시 출신이다. 키는 160㎝로 단신이며 각진 턱과 짧은 머리가 특징이다. 최종 학력은 초등학교(소학교) 졸업인 것으로 알려졌다. 캄보디아 수사당국은 박씨를 살해한 혐의로 중국 국적 조직원 3명을 체포했다. 앞서 박씨는 지난 7월17일 “현지 박람회에 다녀오겠다”고 한 뒤 캄보디아로 출국한 뒤 연락이 두절됐다가 3주 뒤 깜폿 보코산 인근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캄보디아 캄폿지방검찰청은 지난 10일 박씨를 살해한 혐의 등으로 이들을 재판에 넘겼으나 핵심 인물은 따로 있다. 이들 조직원 3명은 박씨의 시신을 옮길 때 현장에 있었을 뿐이었다. A씨는 “캄보디아 경찰이 박씨를 살해한 혐의로 리광호를 잡기 위해 지난 8월 그의 은신처를 급습했었는데 리광호가 몇 시간 전에 미리 알고 도주했다”고 말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국내 인터폴, 경찰, 국정원 등 정보·수사기관도 캄보디아와의 공조를 통해 리광호를 추적 중이다. 그는 이달 초 캄보디아 시아누크빌에서 라오스로 밀입국한 것으로 전해졌다. A씨는 “라오스로 넘어갈 때 캄보디아 국경을 관리하는 공무원들에게 수천만원을 줬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넘어가기 직전에 대포 통장과 핸드폰을 급하게 만들어달라고 한 이후에 연락이 끊겼다. 지금은 미얀마로 넘어갈 준비라는 소문이 파다하다”고 주장했다. 수사기관 관계자도 “관련 첩보를 입수하고 추적 중인 건 맞다”며 “현지 경찰과도 공조 중이다. 자세한 내용은 확인해 줄 수 없다”고 말했다. 리광호는 5년 전 베트남 하노이에서 보이스피싱 조직의 중간 관리자였다고 한다. 조직 내 수익을 빼돌리려는 계획이 탄로나자 잠시 한국에 들어왔다가 지난해 7월 캄보디아 프놈펜으로 출국해 자신과 친분을 쌓은 이들을 모아 시아누크빌에 자리 잡았다. 리광호와 친분을 쌓은 인물 대부분은 조선족인 것으로 알려졌다. A씨는 “리광호는 조직에서 간부급은 아니었다. 납치 담당, 고문·협박 담당 등 맡는 일이 다 다른데 리광호는 가리지 않았다. 머리가 좋지 않아서 몸으로 하는 일을 주로 했다”고 설명했다. 라오스 북부 통해 미얀마 밀입국 준비 다른 주범 김, 강남 마약 음료 총책 이어 “조직 간부인 중국인들에게 무시당할 때마다 구금된 여자를 강간하거나 남자들에게 강제로 마약을 먹이고 폭행한다. 이건 리광호만 그런 게 아니다. 그러다가 구금된 이들이 죽으면 시신을 태운다”고 주장했다. 리광호는 현재 영등포경찰서와 인천지검의 수배 대상자다. 인터폴에서도 적색수배 상태로 확인됐다. 정보기관 관계자는 “중국에서도 마약 밀수 혐의로 수배에 오른 인물이다. 중국에 다시는 못 들어간다. 들어갔다가 걸리면 사형”이라고 말했다. 국내 정보·수사기관은 리광호 외에 김모씨도 추적 중이다. 김씨는 리광호와 함께 박씨 사건 주범으로 의심되는 인물이다. 특히 리광호와 김씨는 2년 전 강남 대치동에서 발생했던 마약 음료 사건의 유통책으로 확인됐다. 마약 음료 사건은 지난 2023년 이모씨 등이 필로폰과 우유를 섞어 만든 음료를 강남 대치동 학원가에서 미성년자에게 제공하고 마시게 했던 사건이다. 당시 이씨 일당은 마약 음료 수백병을 만든 뒤 2023년 4월 대치동 학원가에서 ‘집중력 강화 음료’ 시음 행사라며 미성년자 13명에게 제공하고 실제 9명이 마시게 했다. 이후 음료를 마신 학생의 부모에게 연락해 “당신 자녀가 마약 음료를 마셨으니,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협박해 금품을 뜯으려고 시도했다. 불특정 다수의 미성년자를 속여 급성 중독성 마약을 투약하고 부모까지 노린 신종 보이스피싱 범죄라는 점에서 사회적 파장을 불렀다. 중국에 있던 주범 이씨는 사건 발생 50여일 만인 2023년 5월 중국 지린성 내 은신처에서 중국 공안에 검거돼 강제로 송환됐다. 대법원은 지난 4월 이씨에게 징역 23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마약 음료 제조자 길모씨는 징역 18년, 마약 공급책 박모씨는 징역 7년이 확정됐다. 진짜 두목 따로 있다 당시 필로폰을 공급한 중국 국적 총책은 검거돼 캄보디아 법원에서 26년형을 선고받았다. 정보기관 관계자는 “리광호와 김씨는 수사를 통해 추적해 왔던 인물이다. 필로폰 4kg 이상을 밀반입하는 걸 주도했고 그걸 이씨와 박씨가 국내에 뿌렸던 사건으로 파악됐다”고 전했다. 리광호가 속한 캄보디아 보이스피싱·스캠 조직의 웹사이트 중 일부는 북한 IT 전문가들이 구축한다는 게 <일요시사>와 접촉한 이들의 설명이다. 또 다른 조직원 B씨는 “전부 다 북한 애들이 하진 않는다. 허술한 웹사이트는 북한 전문가들의 작품이 아니다. 한국인 범죄자들은 피싱으로 중국 조직에 1억원의 수익을 안겨주면 수수료로 7~10%의 수고비를 받는다. 북한과 조선족은 더욱 싸다. 3~5% 정도면 굉장히 열심히 한다”며 “중국 조직 입장에서는 한국인들보단 북한이나 조선족을 동원하는 경우를 선호한다”고 했다. 최근 정부는 김진아 외교부 2차관을 단장으로 정부 합동 대응팀을 캄보디아에 파견했는데 여기에는 경찰청, 국정원 등이 참여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캄보디아 스캠 범죄를 매우 심각하게 여기고 국정원에 “발본색원해 완전히 해결될 때까지 조직의 사활을 걸고 확실하게 해결해 국민 걱정을 덜어드려라”는 특별지시를 내렸을 정도로 정보기관 내부에서는 리광호와 김씨와 같은 조직원들 추적에 사활을 건 분위기다. 국정원은 캄보디아 스캠 범죄조직은 중국 등 다국적 범죄조직이 캄보디아로 침투해 만들어진 것으로서 프놈펜, 시아누크빌을 비롯해 총 50여곳에 약 20만명의 조직원이 있는 것으로 추산했다. 이들 조직들의 범죄수익은 2023년 기준 125억 달러(약 18조원)로 캄보디아의 국내 총 GDP의 절반 수준에 달했다. 다국적 범죄조직 이들 조직은 과거 카지노 자금 세탁 등을 했던 조직으로 코로나 팬데믹 이후 국경이 폐쇄되면서 캄보디아로 침투해 스캠 범죄로 범죄를 변경했다. 이들 조직은 자체적으로 무장경비원까지 배치하고 있다. 비정부 무장단체가 장악한 지역이나 경제특구 등 캄보디아의 다양한 지역에 분포돼있어서 캄보디아 정부도 단속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국정원은 한국인들의 현지 방문 인원과 스캠 단지(웬치) 인근 한식당 이용 현황 등을 통해 스캠 단지에 있는 한국인 범죄 가담자를 1000~2000명가량으로 추산했다. 국정원은 이들에 대해 “100%는 아니지만, 피해자라기보다는 범죄에 가담한 사람들이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할 것 같다”고 설명했다. 캄보디아 보이스피싱·스캠 조직의 자금을 관리하는 배후로는 프린스그룹과 후이원이라는 현지 기업이 언급된다. 이 두 기업은 웬치에서 감금, 사기 행각을 벌이거나 북한 해킹 조직의 자금을 세탁하는 등 전방위 범죄를 저지르며 천문학적 수익을 벌어들였다. 프린스그룹은 캄보디아 최대 범죄 거점으로 지목된 ‘태자 단지’를 운영하는 등 조직적 인신매매와 불법 감금, 사기 등의 배후로 알려졌다. 중국에서도 불법 도박이나 성매매 등으로 범죄 자금을 벌어들였다. 베트남 국경 지역에 있는 진베이 단지는 중국 9개 성의 법원에서 심리된 83건의 형사사건에 연루된 상황이다. 천즈 프린스그룹 회장이 기업을 성장시킬 수 있었던 배경에는 훈 센 전 총리 등 캄보디아 고위층과 긴밀한 유착 관계를 형성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천즈는 수많은 논란에도 훈 센 전 총리 정권에 막대한 자금을 바치며 캄보디아의 최고위층 귀족 칭호인 ‘옥냐’를 캄보디아 국왕으로부터 수여받았다. 국내 은행사가 이들의 범죄 자금을 유통·세탁하는 데 이용됐을 우려도 나온다. 금융당국은 국민은행·전북은행·우리은행·신한은행·IM뱅크 등 국내 금융사의 캄보디아 현지 법인 5곳은 프린스그룹과 총 52건의 거래를 진행했다. 거래액은 1970억4500만원에 달한다. 아직 900억원이 넘는 자금이 여전히 현지에 남아 있다. 보이스피싱·스캠 조직 웹사이트 서버 북한이? 국정원·정보사 해외 파트·대북팀 동원해 추적 후이원은 범죄조직의 자금을 세탁하며 회사의 규모를 키웠다. 후이원은 ‘캄보디아의 알리페이’라고 불리는 후이원페이를 가지고 있는 금융, 결제, 정보기술(IT) 서비스 복합 기업이다. 이들은 자사의 기술력을 활용해 국제 해킹 조직이 사이버 사기, 랜섬웨어 등으로 얻은 범죄수익을 세탁해 왔다. 후이원페이는 훈 센 전 총리의 조카인 훈 토가 주요 주주로 등록된 회사이기도 하다. 정보기관에 따르면 이 기업은 북한 정찰총국 산하 해킹 그룹 ‘라자루스’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후이원은 공개·비공개 텔레그램 등 채팅방을 이용해 사기 조직과 자금 세탁범을 연결하고 범죄수익을 해외로 유출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2021년 이후 700억~890억 달러 규모의 가상화폐 거래를 중개했고 일부는 라자루스로 흘러 들어갔다. A씨는 “북한 IT 전문가들이 피싱·스캠 관련 웹사이트를 제작하기 시작한 건 4~5년 전부터”라며 “북한이 제작한 사이트의 경우 퀄리티가 상당하다. 그 대가로 후이원이 스테이블코인을 만들어 북한 쪽에 수익을 전달하기도 한다”고 주장했다. 국정원 해외 파트인 해외정보국과 대북 업무 담당자 상당수는 이미 캄보디아를 포함한 동남아 곳곳에서 관련 첩보를 입수 중이다. 국정원은 1차장이 해외 파트, 2차장이 대북·대공 업무를 담당한다. 2차장은 특히 북한 정보수집·분석 등 국정원의 대북 분야 실무를 총괄하는 자리다. 이외에도 국군정보사령부 동남아팀 휴민트(HUMINT·인간정보)들도 현지서 국정원과 정보를 공유 중인 것으로 파악됐다. 정보사 출신 한 군 고위 관계자는 “캄보디아 수도권에 대남공작원들이 많긴 하지만 웬치에 북한 대사관 관계자나 공작원들이 있진 않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고, 단지 대가를 받고 캄보디아 범죄조직 사이트를 만들어주거나 불법적으로 벌어들인 자금으로 세탁해 주는 게 북한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김정은 배후? 북한 연루설 다른 정보기관 관계자도 “국정원을 비롯한 정보사가 이번 캄보디아 사건에서 할 수 있는 건 보이스피싱·스캠 조직으로 인해 우리 국민이 피해를 본 금액이 얼마나 많은지와 북한에도 그 금액이 흘러 들어갔는지, 북한과 관련된 인물들이 얼마나 있는지 등이다. 캄보디아에서의 대남 관련자들은 절대로 개인적으로 특정 행위를 하지 않는다. 예시로 캄보디아 무역 또는 사업가, 식당을 운영하는 인물 등이 대남공작원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