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연산군 11년(1505) 8월26일의 기록 중 일부를 인용한다.
『군신·왕세자 등이 책보를 받들어 존호와 축하 전문을 올리다 “천년의 큰 운수를 만나 큰 기업을 운전하시매, 만백성의 환심을 얻으시니 현책(顯冊)으로 존숭하여 마땅하옵기에…(중략)…외국이 복종하여 사신이 남북을 아울러 교통하고, 악당이 개심하여 간사가 그쳐 모조리 선량하게 변하니, 온갖 기강은 예대로 진작되고 온 나라 풍속은 새롭게 옮겨지도다.
끊임없음은 하늘의 운행을 본받으시고 무위(無爲)하심은 지극한 도리의 운용을 밝히시매, 오륜이 이미 펴지고 칠덕(七德)이 다 베풀어졌도다. 그러므로 문모(文謀, 문치)와 무열(武烈, 전장에서 공적)이 아울러 융성하여 그를 사업에 가하였으므로, 예도가 갖추어지고 음악이 골라지는 큰 아름다움에 이르렀으니, 우뚝하도다.
그 성공하심이여! 오직 대덕(大德)은 반드시 마땅한 이름을 얻는 것이거늘 하물며 백성에게 일찍이 없었던 성군(聖君)임에리까.”』
위 기록과 관련된 부연설명이다.
동 기록은 우리 역사 최고의 폭군이었던 연산군의 패악질이 극에 달했던, 즉 반정으로 쫓겨나기 바로 전 해에 연산군에게 올린 책보(冊寶, 왕이나 왕비의 존호를 올릴 때에 함께 올리던 문서)다.
기록 전체를 살피면 연산군을 일찍이 없었던 성군, 즉 성군 중 가장 으뜸 성군으로 치켜세우고 있다. 성군은 말 그대로 덕이 높은 임금을 지칭하는데, 천만번 양보해 생각해도 연산군을 성군이라 칭한 일에는 절대 찬동할 수 없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모든 신하와 왕족들이 그를 가리켜 으뜸 성군이라 했을까. 그의 패악질이 두려워서 그를 경계하려고 그랬는지, 혹은 이듬해 발생할 반정을 염두에 두고 그를 안심시키기 위함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이에 대한 판단은 독자들께 맡기고 최근 이와 유사한, 아니 한 치의 오차도 없어 보이는 해프닝에 시선을 돌려보자.
물론 유시민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이사장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관련한 발언 내용이다.
언론 보도를 살피면 그는 한 방송에 출연해 김정은이 해양수산부 공무원 피살 사건을 통지문으로 사과한 일에 대해 “이 사람이 정말 계몽군주고, 어떤 변화의 철학과 비전을 가진 사람이 맞는데 입지가 갖는 어려움 때문에 템포 조절을 하는 것 아니냐”고 발언했다.
말인즉 김정은은 뼛속까지 계몽군주로서 철학과 비전을 겸비한 사람인데, 북한 내에서 입지가 확고하지 않아 이를 전면적으로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로 읽힌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실로 난감하다.
계몽군주란 인간의 존엄성과 이성을 근간으로 합리적이며 개혁적인 정치를 추구하는 군주를 의미하는데, 북한의 김정은이 그렇다는 이야기다.
이는 연산군을 성군으로 지칭한 일보다 도를 넘어서고 있다.
이와 관련해 굳이 실례를 거론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그의 비인간성에 기인한 행동들은 많다.
게다가 지금도 여전히 절대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오히려 절대 군주라 지칭함이 백번 타당한데도 계몽군주라고 언급했다.
문득 지난 시절에 있었던 한 사건이 떠오른다.
근 20여년 전 미국의 한 저명한 대학교수가 폭군의 대명사인 네로 황제가 로마를 불태운 일을 도시건설의 일환으로 설명하며 그를 계몽군주로 추켜세웠었던 일 말이다.
※ 본 칼럼은 <일요시사>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